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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二 / 2020. 11. 2. 14:25 / 불교성지 여행/인도

오디샤주의 다이아몬드 삼각지대, (3) 랄리트기리

(3) 붉은 언덕, 랄리트기리

오리사(Orissa) 번성했던 불교 신앙과 교육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가운데에 다이아몬드 삼각지대(Diamond Triangle) 있었는데 인접한 개의 언덕에 위치한 우다야기리(Udayagiri), 라트나기리(Ratnagiri), 랄리트기리(Lalitgiri) 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금강승(金剛乘, Vajrayāna) 시작되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랄리트기리의 상징적인 장면이면서 이 인도 땅에서 처음 뿌리를 내렸지만 가르침이 사라져버린 인도의 불교 상황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장면인 것 같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라트나기리를 떠난 우리는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의 마지막 목적지인 랄리트기리로 향했다. 랄리트기리는 라트나기로부터 남서쪽으로 직선거리 10.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의 유적지 근처에는 식당 등의 편의시설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랄리트기리로 이동하는 중에 고속도로 근처의 낡은 호텔에서 간단한 인도식 식사를 마치고 랄리트기리에 도착했다. 벌써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의 위치와 라트나기리에서 랄리트기리로 오는 길.

우리는 아시아(Assia) 산맥에서 뻗어 나오긴 했지만 외따로 있는 란다(Landa) 언덕과 맞은편의 파라바디(Parabhadi) 언덕 사이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는 마을을 가로질러 랄리트기리의 승원 유적이 위치한 란다언덕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의 비포장 주차장에는 오후 늦은 시간이어서 인지 차가 대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서서 유적 사이를 걷는 동안에도 다른 방문객을 전혀 수가 없었으며 주변은 고요하고 평화로울 뿐이었다.

랄리트기리에서 찬드라디티야 사원(Chandraditya Vihar) 가장 중요한 시설들 하나로 기원전 2~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리사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규모가 시설이었다. 다울리 아소카 바위 담마칙령(Dhauli Ashokan Rock Edict) 랑구디(Langudi) 유적이 시기에 속한다. 란다언덕에 대한 발굴 작업에서 마하스투파(Mahastupa), 반원형 차이트야그리하(Chaityagriha, 사리탑실), 4개의 승원, 밖의 차이트야그리하 인근의 많은 작은 스투파들과 봉헌탑 등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랄리트기리의 발굴

랄리트기리에 대한 가장 이른 현대의 기록은 1870 자지푸르(Jajpur) 부행정관이었던 바부 찬드라세크하라 바누르지(Babu Chandrasekhara Banurji) 남겨 놓은 것이다. 그는 랄리트기리의 다른 이름인 날티기리(Naltigiri) 단지 아랍어 라나트(la’nat), 랄리트기리에 대한 예언자의 저주의 변형일 뿐이라고 언급했다.

바누르지는 낮은 언덕 정상 부분에서 크고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졌던 아주 오래된 개의 구조물이 발견됐으며 이곳의 쇠퇴에는 단순히 세월의 길이와는 다른 어떠한 힘이 작용되었다고 언급했다. 그는 또한 이러한 파괴가 무슬림 침공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구조물의 건축 재료를 사용하여 지어진 모스크가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언덕 사이의 고개길에 개의 구조물과 같은 배치를 가진 하나의 구조물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나은 보존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내부에는 1.5m 높이의 불상이 있었다.

가장 높은 언덕의 정상부에서는 원형 건물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언덕의 서쪽 경사지에는 코끼리 동굴이란 뜻의 하티칼(Hathi-khal)이란 곳이 있다. 바누르지는 이곳에서 줄로 서있는 같은 크기의 불상 여섯 개를 봤다고 기록했다. 불상에는 불교 경전 내용이 새겨져 있었고, 걸음 떨어진 곳에는 여신상이 서있었을 기단이 발견되었다. 지역민들은 바누르지에게 날티기리의 사원과 불상들은 바쇼칼파왕(Raja Bashokalpa) 건립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바누르지의 기록을 읽고 자극을 받은 쿠타크의 행정관이었던 빔스(John Beams) 1875 언덕을 방문했다. 그는 알티(Alti) 강들로 둘러싸여 있고 강들이 교차하는 곳이어서 접근이 매우 어려웠다고 기록했는데 날티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는 또한 바누르지의 무슬림 침공에 의한 파괴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예언자가 아니라 솔로몬왕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1928년에는 당시 캘커타대학(Calcutta University) 교수였던 차칼다르(H. C. Chakaldar) 자신의 현장 방문 보고서를 모던 리뷰지(Modern Review) 발표했다. 차칼다르는 랄리트기리에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Bhumisparsha Mudrā) 자세의 거대한 붓다 좌상이 가장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고 말한다. 랄리트기리의 보살상들은 보살상들과 비교할 근엄함과 장엄함이 특징적인 우다야기리(Udayagiri) 보살상들과는 확연히 차별화되는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랄리트기리의 불상들은 인도 지질학자들이 아트가르(Atgarh) 사암(沙巖)이라 명명하고 있는 지역의 돌로 주로 조각한 것이며, 언덕에 있는 채석장은 차칼다르의 방문 때에도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차칼다르는 또한 우다야기리 다른 곳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많은 불상들이 현장에서 반출되었다고 언급했다.

당시 캘커타 인도박물관(Indian Museum, Calcutta) 책임 고고학 담당자였던 프라사드 찬다(Ram Prasad Chanda) 1927~28 기간동안 박물관에 전시할 유물 수집을 위해 현장을 찾았다. 그는 이곳에 개의 언덕이 있으며 언덕이 함께 날라티기리(Nalatigiri) 알려져 있다고 했다. 언덕에는 유적이 없고, 란다언덕과 파라바디언덕에만 유적이 있다고도 했다.

찬다는 또한 대지주인 람고빈다 자그데브(Ramgovinda Jagdev) 이곳에서 4개의 불상을 케드라파다(Kedrapada) 있는 자신의 집으로 옮겨갔다고 언급했다. 후에 다른 대지주에 의해 개의 불상이 반출되었다고 했다. 찬다는 1870 바누르지가 보고했던 하티칼 인근의 여섯 개의 불상을 봤음도 기록했다.

랄리트기리에 대한 체계적 조사와 발굴 작업은 1977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1977 소규모 발굴 작업을 주도한 것은 우트칼대학의 K. S. 베헤라(K. S. Behera) 박사였다. 베헤라는 굽타 예술 전통이 서려 있는 랄리트기리의 조각품들이야 말로 오디샤 조각의 오랜 발전과정에서 잃어버렸던 연결고리를 제공해 준다고 설명한다. 그는 또한 랄리트기리의 지형적 환경이 현장이 묘사한 푸시파기리(Pushpagiri, 波祇釐) 지형과 여러 가지로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발굴작업에서 주목할 만한 발견은 굽타왕조의 찬드라굽타 2(Chandragupta II) 궁수 양식의 금화였다.

인도고고학위원회(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ASI) 실시한 대규모 발굴은 1985~1992년에 이루어졌다. 발굴 과정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4개의 승원, 반원형 차이트야그리하, 개의 스투파, 다양한 조각품과 많은 수의 봉헌탑 등이었다. 랄리트기리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은 다섯 시기로 분류된다: 1 (기원전 1~3세기마우리아왕조 이후 시기), 2 (기원전 1세기~기원후 3세기 쿠샨왕조 이후 시기), 3 (4세기~6세기굽타왕조), 4 (7세기~9세기 굽타 이후 바우마-까라왕조), 5 (10세기부터 이후까지 소마밤슈왕조 중세).

랄리트기리 박물관

주차장에서 출입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면 금방 오른쪽으로 새로 건립된 랄리트기리 고고학 현장박물관(Archaeological Site Museum, Lalitgiri) 만난다. 2018 1224일에 개장한 박물관은 6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곳 랄리트기리에 대한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다양한 불교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랄리트기리의 배치도.
2018년 신축된 랄리트기리의 현장박물관.
2015년 2월 당시 랄리리트기리의 입구 근처에서 박물관 신축을 위한 철근 기초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

박물관 내부에는 중앙홀에 전시된 항마촉지인 자세의 거대한 붓다 좌상을 비롯하여 문수보살, 다라보살, 5선나불, 반야바라밀다, 지세보살(持世菩薩, Vasudhāra) 5~11세기의 다양한 불상들과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지만 박물관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지는 소장품은 사람들이 붓다의 사리가 들어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황금 사리함일 것이다.

(), 동석(凍石), 콘돌라이트(khondolite) 용기에 겹겹이 싸여 가장 안쪽에 황금 사리함에 보존되어 있던 성스러운 뼈와 치아 유물이 랄리트기리의 난다언덕에 대한 ASI 발굴 과정에 발견되었다. 발견된 3개의 사리함 가운데 번째에서는 황금줄이 덮고 있는 또는 치아 유물이 담겨 있었고, 번째에는 금박에 싸여 황금줄에 단단히 매어져 있는 또는 치아 모양의 유물이 담겨 있었다. 번째 사리함에는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사리함에는 아무런 명문도 새겨져 있지 않지만, 전문가들은 금박에 싸여 황금줄로 매여 있는 사리가 붓다의 또는 치아 사리일 것으로 믿고 있다. 그리고 황금줄로만 매여 있는 또는 치아 사리는 아마도 붓다의 뛰어난 제자, 사리자(舍利子, Sāriputta) 또는 목건련(, Moggallāna) 사리일 것이라고 한다. 사리함은 발굴 직후 보안상의 이유로 부바네스와르의 ASI 사무소에 보관되어 오다가 이곳 현장박물관이 신축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랄리트기리의 마하스투파에서 발견된 사리함.
박물관에 전시된 사리함의 모습.

승원1

랄리트기리에서는 4개의 승원이 발견되었다. 모든 승원은 중앙에 개방된 정사각형의 중정(中庭) 또는 안뜰이 있고 중정을 돌기둥이 있는 베란다와 개별 수련실이 둘러싸고 있는 차투-살라(chatuh-sala) 양식으로 지어졌다. 벽의 개별 수련실들 가운데 하나가 주요 신을 모시는 성소 역할을 하고 있다.

승원1의 모습.
승원의 출입구에는 문설주 돌기둥만 양쪽에 서서 자리를 지키고 있고, 연꽃 모양의 돌계단이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박물관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승원1 오른쪽에 나타난다. 승원1 정사각형(36mx36m) 구조이며 동향으로 앉아 있다. 18개의 개별 수련실이 사면의 쪽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신전은 뒤쪽 벽에 위치한다. 다른 입구 하나가 남쪽 끝에 만들어져 있으며 저수지는 뒤쪽에 있다. 출입구, 기둥, 계단, 배수관을 제외한 승원 전체가 벽돌로 지어졌다. 신전 안에는 항마촉지인 자세의 거대한 불상이 있었으나, 현재는 현장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승원3

승원1에서 걸음 나가지 않아 남동향으로 앉아 있는 승원3 나타난다. 승원3 약간 직사각형(28mx27m) 구조를 띠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배치는 승원1 차이가 없는 모습이다. 사면의 승원 벽에 15개의 개별 수련실이 배치되어 있다. 뒤쪽 벽에 있는 신전의 남쪽 벽에 설치된 벽감에서 항마촉지인 자세의 붓다상이 발견되었다. 역시 벽돌로 건립된 승원도 그동안 승원의 벽돌을 사람들이 함부로 가져가버려 1~2m 높이의 벽만 남아 있다. 승원에서 발견된 유물을 승원은 5~6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4개의 승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승원3의 모습.

승원4

승원4 승원3에서 건너편에 서향으로 앉아 있으며, 정사각형(30mx30m) 구조이다. 다른 승원들처럼 차투-살라 양식의 구조이지만 승원4에는 모두 10개의 개별 수련실이 남쪽과 북쪽 벽에만 배치되어 있다. 뒤쪽 벽에 있는 신전에는 원래 있었던 자리에서 노출된 앉아 있는 항마촉지인 자세의 거대한 붓다상이 있으나 현재 머리 부분은 사라지고 없는 상태이다. 붓다상은 여러 개의 조각된 돌로 구성되었던 듯하다.

승원에서 Sri Chandraditya Vihara Samagra Arya Bhikshu Sangha라는 명문이 새겨진 테라코타 명패가 발견되면서 승원이 찬드라디티야 사원이라고 불렸음을 알려준다. 명패에는 위쪽에 바퀴 문양이 새겨져 있고 옆으로 사슴이 새겨져 있다. 새겨진 문자로 9~10세기 것으로 추정되었다. 굽타시대 브라미(Brahmi) 문자로 새겨진 개의 부러진 명패가 추가로 발견되었으며 여기에도 찬드라디티야 사원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승원은 4~5세기까지도 찬드라디티야 사원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승원4의 전경.
승원4의 모습.
뒤쪽 벽 중앙에 있는 신전에는 천장이 사라졌고 머리 부분이 없는 붓다상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반원형 차이트야그리하

반월형 차이트야그리하 1986~87년과 1987~88 발굴 시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구조물 역시 벽돌로 지어졌으며 동쪽을 향하고 있다. 차이트야그리하는 길이가 22m, 너비가 11.4m이며 끝에 있는 반원 부분에는 돌로 만들어진 원형 스투파가 있다. 차이트야그리하의 너비는 3.3m이다. 이러한 형태의 스투파실은 라트나기리나 랑구디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다.

스투파실에는 돌출된 출입문이 있었으며, 바깥 둘레에는 탑돌이를 위한 것인 바닥에 돌로 만들어진 보행로가 있다. 그리고 보행로의 바깥 가장자리를 따라 원래부터 자리에 있었는지 아니면 주변에서 옮겨 놓은 것인 지는 없으나 작은 봉헌탑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다. 스투파실 입구의 왼쪽으로 쿠샨시대와 굽타시대의 브라미 문자로 새겨진 석판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콘돌라이트로 조각된 붓다의 두상이 스투파의 중앙에서 누운 상태로 발견되었다.

반월형 차이트야그리하의 전경.
반월형 차이트야그리하는 동서로 자리 잡고 있으며 동쪽에 입구가, 서쪽 끝 반월 부분에 원형 스투파가 있다.
차이트야그리하의 바깥쪽에는 돌로 포장된 보행로가 있으며 바깥 경계에는 봉헌탑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랄리트기리에서는 반월형 차이트야그리하 주변에 특히 봉헌탑들이 많이 모여 있다.

차이트야그리하 통로 남쪽 측면의 받침대에 새겨진 명문으로 보아 구조물은 랄리트기리에서 가장 오래된 구조물로 보인다. 정사각형(1.42mx1.42m) 받침대에는 기원전 2~3세기 브라미 문자로 새겨진 프라크리트어(Prakrit) 줄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사리함이 나온 마하스투파와 함께 차이트야그리하는 랄리트기리가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불교 유적지임을 증명한다.

랄리트기리의 차이트야그리하 받침대 명문, 기원전 2세기

마하스투파

차이트야그리하에서 다시 조금 앞으로 나가면 기다란 1 건물 1동이 나타난다. 랄리트기리 입구에서 만났던 신축 박물관이 세워지기 전까지 랄리트기리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많은 유물과 조각품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어서 임시 박물관의 역할을 했었다. 때는 칸막이도 없이 뚫린 공간에 유물들을 대충 열을 지어 세워놓았지만 그나마 유물들이 비를 피할 있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었다.

입구의 신축 박물관이 건립될 때까지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던 임시 박물관.

임시 박물관 건물 뒤편에 있는 란다언덕의 가장 높은 지점에 대한 발굴 작업에서 심하게 파손된 원형(원둘레가 대략 36m) 스투파가 발견되었다. 스투파는 진흙 반죽에 돌더미를 아무렇게 쌓아 조성되었으며 겉면에는 얇은 마름돌을 쌓아 올렸다. 스투파 꼭대기에는 하르미카(harmika) 차트라(chattra) 있었으나, 발굴 당시 하르미카의 잔해만 발견되었다. 그리고 반원형 스투파 둘레에는 탑돌이를 위해 돌로 포장된 보행길이 만들어져 있다.

임시 박물관 뒤편 언덕에 마하스투파가 위치한다.
나지막한 계단 끝에 마하스투파가 보인다.
마하스투파의 모습.

스투파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발굴 과정에 스투파의 중심부에서 봉헌탑 모양의 콘돌라이트로 만들어진 개의 사리함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신축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바로 사리함이다. 사리함들은 스투파의 가장 중심부에서 각각 남쪽, 북쪽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산치(Sanchi)에서도 3개의 사리함이 발견되었으며 명문에 따르면 각각 붓다와 붓다의 제자인 사리자와 목건련의 사리함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랄리트기리에서도 같은 숫자의 사리함이 발견되면서 이들 사리함들을 붓다와 제자의 사리함으로 추정하는 듯하다. 제자의 사리함 가운데 하나의 내용물은 분실되었다는 것이다.

승원2

마하스투파에서 내려와 언덕을 내려오다가 입구의 신축 박물관 뒤로 길을 따라 가면 승원2 다다른다. 승원2 랄리트기리에서 발견된 가장 작은 승원이다. 승원은 동향으로 앉아 있으며 5개의 개별 수련실이 있다. 승원 역시 뒤쪽에 신전이 있다. 그러나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승원 전체가 심하게 도굴된 상태였으며 승원의 벽도 기단 부분까지 파손된 상태였다고 한다. 발굴 당시에는 북쪽과 서쪽 벽만이 발견되었으며, 후대 어느 시점엔 힌두사원으로도 사용되었었다.

랄리트기리야 말로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의 유적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아니라 오리사에서 불교의 출발점들 가운데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곳의 일부 유적과 유물은 마우리아(Maurya) 왕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4세기경에 사람들이 이곳을 완전히 버리고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는 줄곧 종교적 활동이 이루어졌다. 이곳이 당시에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붓다의 사리가 붓다가 가장 아끼던 제자의 사리와 함께 이곳에 모셔지게 것이 아니었을까?

오디샤주의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에 대한 발굴은 최근에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랄리트기리에 대한 체계적인 대규모 발굴만 보더라도 1992년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따라서 아직 그리 널리 알려지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오디샤주에서도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에 대한 자부심이 높으며 보드가야 사르나트와 같이 순례객과 관광객이 찾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매년 부바네스와르에서 국제불교회의(International Buddhist Conclave) 개최하고 있으며 붓다와 관련된 성지를 운행하는 특별관광열차 대열반특급(Mahanirvana Express) 많은 노력 끝에, 손님 부족으로 중단되긴 했지만, 오디샤에까지 연장 운행하도록 하기도 했었다. 언젠가는 지금 우다야기리, 라트나기리, 랄리트기리에 흩어져 있는 유적들 사이를 거닐며 만끽할 있는 고적함을 누릴 있는 시간도 다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랄라리트기리를 떠났다.

不二 / 2020. 10. 21. 01:26 / 불교성지 여행/인도

오디샤주의 다이아몬드 삼각지대, (2) 라트나기리

(2) 보석의 언덕, 라트나기리

오리사(Orissa) 번성했던 불교 신앙과 교육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가운데에 다이아몬드 삼각지대(Diamond Triangle) 있었는데 인접한 개의 언덕에 위치한 우다야기리(Udayagiri), 라트나기리(Ratnagiri), 랄리트기리(Lalitgiri) 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금강승(金剛乘, Vajrayāna) 시작되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라트나기리 승원1의 상징적인 푸른 빛을 띠고 있는 주 출입구 문틀.

우리는 번째 목적지 우다야기리를 떠나 다음 목적지인 라트나기리로 향했다. 라트나기리는 우다야기리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 7km 떨어져 있는데, 켈루오(Keluo) 강과 비루파(Birupa) 강의 합류 지점에서 가까운 켈루오 강변에 위치한다.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 도착한 라트나기리 승원 단지는 아시아(Assia) 산맥에서 뻗어 나오긴 했지만 외톨이로 있는 언덕의 평평한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라트나기리 언덕 아래에 당도해서도 도로 가의 작은 언덕 위에 이렇게 넓고 평평한 땅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렇게 대규모의 승원 단지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기 힘들었다. 잠깐 언덕을 오르면 언덕 정상부에 고요한 별세계의 평지가 나타난다. 아마 승려들의 수행생활에 필요한 이러한 호젓함과 고요함에 이끌려 라트나기리 승원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언덕 정상부에 도착했다.

오디샤주의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와 라트나기리의 위치

라트나기리의 발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지푸르(Jajpur) 지방행정 공무원이었던 라이 몬모한 차크라바르티(Rai Monmohan Chakravarti) 이곳을 처음으로 방문했으며, 그의 방문 보고서가 1906 쿠타크 디스트릭트 가제티어(Cuttack District Gazetteer) 게재되었다. 뒤에는 1927 오리사 역사학회(Orissa Historical Society) 간사였던 비렌드라 나트 레이(Birendra Nath Ray) 방문했으며, 그의 요청에 따라 1928년에는 당시 캘커타대학(Calcutta University) 교수였던 차칼다르(Haran Chandra Chakaldar) 현장을 방문했으며 자신의 보고서를 모던 리뷰지(Modern Review) 발표했다.

또한 당시 캘커타 인도박물관(Indian Museum, Calcutta) 책임 고고학 담당자였던 프라사드 찬다(Ram Prasad Chanda) 1927~28 기간동안 오리사의 여러 유적지를 방문하고 1930년에 발표한 자신의 조사보고서에서 라트나기리에서 발견된 조각품들이 언급되었다. 데바프라사드 고쉬(Devaprasad Ghosh) 모던 리뷰지에 발표한 글에서 라트나기리에서 발견된 거대한 붓다 두상(頭像)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Bhumisparsha Mudrā) 자세의 붓다像이 자바섬 보로부두르(Borobudur) 5선나불(Dbyani-Buddha) 像과 서로 연관성이 있음을 주장했다.

라트나기리가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면서 인도고고학위원회(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관리 대상이 되었으며, 마침내 최초의 체계적 발굴 작업이 1958~1961 기간동안 위원회의 동부분원(Eastern Circle) 의해 이루어졌다. 발굴 책임자는 분원장이었던 데발라 미트라(Debala Mitra)였다. 발굴 작업으로 라트나기리 마하비하라(Ratnagiri Mahavihara) 확인된 중요한 불교 시설 유적이 확인되었다.

라트나기리가 발굴되기 전의 모습.
라트나기리 발굴이 진행되던 당시의 모습.

라트나기리에서는 거대한 스투파(스투파1), 개의 거대한 사각형 승원(승원1 2), 하나의 부속棟이 있는 승원, 많은 수의 소규모 스투파들, 여덟 개의 사원, 주로 돌로 또는 일부 청동으로 제작된 많은 조각품들이 발굴되었다. 미트라는 라트나기리의 핵심적인 시설들의 건립 연대를 5세기로 추정했으며, 추가적인 건축은 12세기까지 지속되었다 했다. 13세기 무슬림 침공과 함께 라트나기리도 쇠퇴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라트나기리에서의 종교적 활동은 16세기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라트나기리와 관련된 권위있는 연구는 1987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낸시 호크(Nancy Hock) 버클리대(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호크는 소작(所作) 탄트라(kriyā-tantra) 문구들, 특히 문수보살진언이 조각품들과 관련하여 라트나기리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많은 불공견색관음(不空索觀音, Amoghapāśa) 像이 발견되었는데 라트나기리에서 보살이 숭배되었을 보여준다. 호크에 의하면, 탄트라란 용어가 라트나기리에서 숭배되었던 불교의 모습을 가장 설명해준다.

탄트라불교 학문 중심지

인도의 탄트라불교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대부분 티베트, 중국, 일본 등지의 불경 기록에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지역의 불경과 기록은 인도의 이전 시대 산스크리트어 불경과 기록을 번역한 것이다. 티베트 기록에 의하면, 라트나기리는 요가와 탄트라의 학문 중심지로 높은 명성을 얻었던 것으로 보이며 많은 저명한 탄트라 스승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고 다른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었다.

라트나기리의 발굴 과정에서는 수많은 불교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으로는 입상 또는 좌상의 다양한 붓다像, 결발보관(Jata-mukuta) 로케슈바라(Lokeśvara), 미륵(Maitreya, 彌勒), 문수(文殊, Manjušri) 보살, 관음보살(觀音菩薩, Avalokitesvara), 잠발라(Jambhala), 야마리(Yamari), 삼바라(Sambara), 대흑천(大黑天, Mahakala), 다라보살(多羅菩薩, Tara), 귀자모신(鬼子母神, Hārītī), 아파라지타(Aparājita), 바슈다라(Vasudhârâ), 아리아사라스와띠(Aryasaraswati) 등이 있는데 8~9세기경부터 꽃피우고 있던 금강승의 시륜승(時輪乘, Kālacakrayāna) 절정기에 있던 시대의 것들이다.

라트나기리에서 수많은 희귀 불교 유적 유물이 발견되었지만 모든 것이 탄트라 또는 금강승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라트나기리는 처음에 대승불교를 받아들인 승가람이었으나 나중에 금강승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라트나기리 언덕 위의 배치도

승원1

도로가에서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울타리 안에 줄을 맞추어 있는 많은 수의 봉헌탑이다. 사실 라트나기리에는 곳곳에 수백 개의 작은 봉헌탑들이 산재해 있다는 점에서 다른 많은 불교 유적지와 차이가 난다. 봉헌탑은 신자들과 순례객의 신심의 표현이라고 , 라트나기리는 많은 신자들과 순례객이 찾던 믿음의 중심이었음을 증명한다고 있을 같다. 많은 수의 봉헌탑이 라트나기리를 찾는 사람들이 있도록 이곳으로 옮겨져 철조망 울타리 안에 일렬로 전시되고 있다.

언덕을 오르다 보면 한 무리의 봉헌탑이 철조망 울타리 안에 일렬로 정렬하고 있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신자들과 순례객들이 자신들이 믿는 신에 대한 신심을 나타내려 했던 듯 봉헌탑 표면에는 다양한 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울타리로 보호되고 있는 봉헌탑 무리에서 왼쪽으로 계속 발걸음을 옮기면 금방 넓은 공지가 나타난다. 공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이곳을 찾는 순례객과 관광객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으며 인도 불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불교 유적인 개의 사각형 벽돌 승원이 나타난다. 전통적인 차투-살라(chatuh-sala) 양식으로 건립된 승원1 승원2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이웃해 나란히 있다.

승원1 라트나기리에서 가장 규모의 승원이며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승원은 정사각형(55mx55m) 구조이며, 중앙에 바닥이 돌로 포장된 중정(中庭) 또는 안뜰이 있고 이를 기둥이 있는 베란다가 둘러싸고 있으며 이를 다시 24개의 개별 수련실이 둘러싸고 있다. 승원의 서남쪽 구석에 있는 개의 계단은 승원이 최소한 이층 구조의 건물이었음을 보여준다.

미트라는 승원의 건립이 시기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한다. 1 구조물은 기둥, 붙임기둥, 문틀, 탑문의 외장을 제외하고는 주로 벽돌로 지어졌다. 시기의 연대를 특정할 있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부바네스와르(Bhubaneswar) 바이탈(Vaital) 사원과 시시레슈바라(Sisireshvara) 사원의 조각품 장식과의 유사성으로 1기는 8세기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일부 돌에 새겨진 명문(銘文)으로 2기는 11세기 이전이 수는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3기에는 갑작스러운 추가 또는 변경이 경솔하게 이루어진 부분이 있었다. 3기는 13세기보다는 훨씬 이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승원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쇠퇴와 마모를 겪었으며 대규모의 복원 작업이 뒤따랐다. 복원 작업으로 승원은 좀더 인상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다. 깎아 다듬은 돌을 사용해 전면부 벽에 외장으로 둘렀다. 아래층의 개별 수련실은 버려졌고 잔해더미로 메워졌다. 그리고 이층에는 개별 수련실이 만들어졌다. 북쪽 뒷벽에 있는 신전 공간을 넓혀서 입구의 현관이 마련되었다.

승원1과 2의 전경. 오른쪽의 승원1과 왼쪽의 조금 작은 규모의 승원2가 중간에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이웃해 서 있다.
발굴 당시 작성된 승원1과 승원2의 내부 배치도.

승원은 전면부를 제외하고 삼면이 3 양식을 띄고 있다. 남향을 하고 있는 전면부는 5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운데에 입구 현관이 위치한다. 남쪽에서 계단을 올라 승원1 입구로 접근하면 가장 먼저 방문객의 눈길을 붙잡는 주목할 것이 정교하게 조각된 푸른 빛의 녹니석(綠泥石, Chlorite) 문틀이다. 푸른 빛깔로 인해 녹니석 문틀은 표면을 가지고 있는 전체적 승원 구조에서 도드라져 보인다.

푸른 빛의 녹니석 문틀 부분 상인방 중앙에는 코끼리로부터 목욕을 받고 있는 힌두 여신 락슈미(Gajalaxmi)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문틀 양쪽의 문설주 아래 부분에는 다른 수행인들과 함께 수호신 드바라팔라(Dvārapāla) 멋진 모습로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양쪽의 드바라팔라 바로 옆에 있는 인물은 시종이 양산을 받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왕족인 것으로 추정된다. 미트라는 인물이 왕족일 경우 승원이 왕가의 후원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승원1의 전경. 정면에서 계단을 올라서면 출입구 현관에 들어서게 된다.
승원1의 5단 양식 전면부 출입구 주변의 모습.
푸른 빛의 녹니석 문틀 위 상인방 중앙에는 코끼리로부터 목욕을 받고 있는 힌두 여신 락슈미(Gajalaxmi)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어 힌두교의 영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엘로라석굴(Ellora Caves)의 16번 동굴인 힌두교사원 카일라사사원(Kailasa Temple)에서 만날 수 있는 락슈미(Lakshmi)의 모습. 연꽃 연못의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략슈미를 코끼리들이 목욕을 시켜주고 있다 (Gajalaxmi).
문틀 양쪽의 문설주 아래 부분에는 여러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다. 수호신 드바라팔라가 멋진 모습을 취하고 서 있고 그 옆에는 시종이 받치고 있는 양산을 쓰고 있는 왕족이 서 있다.

입구 현관의 안쪽에는 푸른 빛의 문틀 양측으로 7 돌출부가 있다. 중에서 서쪽 돌출부에는 거북을 딛고 있는 야무나(Yamuna) 여신의 조각이 있으나, 동측 돌출부에는 아무 것도 없이 비어 있는 상태이다. 앞쪽 현관에는 다른 개의 조각이 있다. 미트라는 앞쪽 전면부 입구 현관과 같은 곳이 있는 유적은 날란다 여러 곳이 있지만 뒷벽 표면까지 이렇게 다양한 조각으로 생동감 있게 처리되어 있는 곳은 드물다고 했다.

입구 현관 안쪽 서측 7단 돌출부에 조각되어 있는 거북 등을 딛고 서 있는 야무나 여신상 (왼쪽); 거북의 등을 발로 딛고 서서 물병을 들고 시동을 거느린 테라코타 야무나 여신상. 5세기 굽타시대. 뉴델리 국립박물관 (오른쪽)

입구 현관의 바깥쪽 측면에는 벽감(壁龕) 설치되어 있는데, 서측 벽감은 비어 있는 반면에 동측 벽감에는 여신상이 모셔져 있다 미트라는 여신상이 강의 여신이라고 추정한 있다. 입구에는 앞쪽과 뒤쪽으로 개의 현관이 있는데 뒤쪽 현관은 승원의 내부 베란다로 이어진다. 앞쪽 현관의 안쪽의 양측 벽돌 벽면에도 각각 하나씩 개의 벽감이 설치되어 있다.

개의 벽감 서쪽 벽면의 벽감 내에는 연화수보살(蓮花手菩薩, Bodhisattva Padmapani), 동쪽 벽면의 벽감 내에는 금강수보살(金剛手菩薩, Vajrapāi) 모셔져 있다. 금강수보살의 후광 양측면에서는 5선나불이 자리잡고 있는데, 오른쪽에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Bhumisparsha Mudrā) 자세의 아축(, Akshobhya)여래가 그리고 왼쪽에는 보생(寶生, Ratnasambhava)여래가 위치하고 있다.

승원 전면부 입구 현관 동측 벽의 벽감에 모셔진 여신상(강의 여신) (왼쪽); 연화수보살 (중앙); 금강수보살 (오른쪽)

앞쪽과 뒤쪽의 입구 현관 사이에는 좁은 통로가 있다. 뒤쪽 입구 현관에도 동쪽과 서쪽 벽에 벽감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는 귀자모신(鬼子母神, Hārītī) 그녀의 배우자인 판치카(Pañcika, )가 각각 모셔져 있다. 이 당시 인도의 승원에 왜 팔로 아이를 안고 있거나 무릎 주변에 여러 명의 아이를 데리고 있는 모습의 귀자모신像이 모든 인도 승원의 현관이나 식당 구석에서 발견되는지에 대한 당나라의 유학승 의정(義淨) 설명은 앞서 ‘(1) 떠오르는 태양의 언덕, 우다야기리에서 했었다.

귀자모신(왼쪽)과 판치카(오른쪽)

승원의 북쪽 끝에는 뒷벽의 중앙에 신전이 있다. 신전 앞에는 베란다로 연결되는 좁은 입구가 있다. 신전의 문틀이 사라진 자리에는 문설주만 있으며, 양측 문설주 아래 부분에는 각각 개의 벽감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는 드바라팔라, 보살, 카마라다라니(Chamara-dharani), 뱀신 나가(Naga) 모습이 각각 새겨져 있다. 드바라팔라 부분에 남아 있는 문설주 부분에는 오리사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다양한 곡예 자세의 인물상 조각을 지금도 있다.

승원1의 신전. 뒤쪽(북쪽) 벽 중앙에 있으며 입구에는 문틀도 사라지고 없으며 문설주만 남이 있다.
문설주에 남아 있는 조각에서는 여전히 정교함을 느낄 수 있다.
문설주 아래 부분에는 오른쪽부터 수호신인 드바라팔라, 보살, 카마라다라니, 뱀신 나가의 모습이 각각 조각되어 있다.

신전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삼단 기단 중앙에 항마촉지인 자세의 붓다 좌상을 마주한다. 붓다 좌상은 여섯 개의 서로 다른 돌로 만들어져 있으며 죔쇠와 장부촉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불상의 모든 부위들은 신전 안에서 해체된 발견되었지만 원래 상태로 복원된 것이다. 붓다의 뒤편 서쪽에는 연화수보살이, 동쪽에는 금강수보살이 붓다를 보좌하고 있다. 보살은 오른 손에 벌레를 쫓는 채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붓다 길에 벌레가 밟혀 죽는 일이 없도록 쫓으려는 모양이다.

신전 안에는 중앙에 여섯 개의 돌로 이루어진 항마촉지인 자세의 붓다상이 있고, 붓다의 뒤편 서쪽에는 연화수보살이, 동쪽에는 금강수보살이 붓다를 보좌하고 있다.

승원 건립 2기에 신전에 대한 다양한 변경이 이루어졌다. 가장 안쪽 성소에는 아무런 변경도 없었지만, 입구가 넓혀지면서 남쪽으로 돌출되어 나왔다. 성소와 입구를 연결하는 좁은 통로도 1기의 문틀만 원래 상태로 남겨두고 측면 벽을 포함하게 되면서 길게 늘어나게 되었다. 신전의 전면부가 확장되면서 입구 현관 또는 대기실도 역시 같은 비율로 늘어났다. 입구 현관의 확장은 뒤쪽 개별 수련실을 벽돌로 막아 가능해진 것이다.

동서의 측면 벽에는 벽감이 설치되어 있다. 서쪽 벽에는 6개의 벽감이 있는데 3개는 비어 있고 3개에만 신상들이 남아 있다. 미트라의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발굴 당시에는 벽감들 가운데 5개에 신상들이 남아 있었다. 위에 있는 개의 벽감에는 각각 항마촉지인 자세와 전법륜인(轉法輪印, Dharmachakra Pravartana Mudrā) 자세로 앉아 있던 붓다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지금은 비어 있다.

서쪽 아래에 있는 개의 벽감에는 불상이 모두 채워져 있는데, 가운데 개가 아축(, Akshobhya)여래 상이다. 서쪽 벽에서 남쪽과 북쪽으로 이어지는 벽에도 개의 벽감이 있다. 남쪽 벽의 벽감에는 지세보살(持世菩薩, Vasudhāra), 북쪽 벽에는 항마촉지인 자세의 붓다가 각기 모셔져 있다. 미트라는 지세보살 벽감 근처에 홀로 있는 붓다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현재 자리에는 이상 수가 없다.

확장된 입구 현관의 서쪽 벽.

2기에 추가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전면부를 구성했던 조각된 많은 돌들이 잔해더미 여기저기에서 발견되었다. 조각들이 모두 조립되어 앞쪽 입구 한쪽에 놓이게 되었다. 2 전면부는 중앙 출입구 틀이었으며 한쪽에 3개씩 모두 6개의 깊은 벽감이 설치되어 있다. 중앙 출입구 틀은 1기에 설치되었던 문틀과 일렬로 세워졌었다.

중앙 출입구 틀의 가운데 문틀 부분 상인방 중앙에는 항마촉지인 자세의 붓다像이 있다. 그리고 양측에 깊게 파인 벽감의 상인방 중앙에는 각기 다라보살을 있다. 또한 출입구 틀의 동서 측면에도 인물상을 조각해 놓은 벽감이 보인다. 동쪽 측면에는 무릎을 끓고 있는 여인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여인은 남자에게 그러지 말라고 사정하고 있는 듯하다.

서쪽 측면의 벽감에는 서로 사랑하는 남녀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것을 , 동쪽 측면의 남녀의 모습도 성교행위의 주제와 관련이 있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데방가나 데사이(Devangana Desai) 그런 주장을 하고 있으며 성교 중에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는 유사한 개의 사례를 들고 있다: 마이소르 바갈리 소재 사원의 조각, 부바네스와르 소재 링가라자(Lingaraja) 사원의 조각, 그리고 코나라크(Konark) 태양신사원(Sun Temple) 조각.

제2기에 추가되었던 전면부로 제1기에 설치되었던 출입구 문틀과 일렬로 세워졌었다.

승원의 중정을 둘러싼 베란다는 현재 거의 대부분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에 마치 회랑과 같은 느낌을 준다. 중정에 들어서면 여기저기에 많은 불상들이 벽에 기대어 서있는 모습에 감탄사가 나온다. 특히 이곳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다양한 크기의 붓다 두상(頭像)인데, 중에도 거대한 크기의 두상은 원래 두상으로 제작되었는지 아니면 몸체 부분이 사라진 것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라트나기리의 조각은 자바, 수마트라, 발리 등의 조각에도 영향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승원1의 내부 모습.
승원1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불상 및 조각품들이 승원 내부 벽에 기대어 전시되고 있다.

승원2

라트나기리의 승원2 승원1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작은 규모의 사원이다. 승원2 정사각형(28.95mx28.95m) 1 구조이며, 베란다를 둘러싸고 반원형 아치 지붕을 가진 18개의 개별 수련실이 배치되어 있다. 남향의 승원2 문틀, 창문, 베란다, 경계석 바닥포장 등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벽돌로 지어졌다.

승원2의 출입구에서 뒤쪽 벽에 있는 신전을 바라본 모습.
승원1의 이층에서 내려다 본 승원2의 내부 모습. 신전, 중정, 개별 수련실 등이 눈에 들어온다.

북측 벽에 위치하여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신전에는 여원인(與願印, Varada Mudrā) 자세로 있는 붓다像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붓다의 측면에는 각각 아주 작은 형상의 브라흐마와 인드라가 호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산카샤의 기적 또는 도솔천으로부터 붓다의 강림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팔의 인드라는 왕관을 쓰고 연꽃 위에 서서 양산을 들고 있다. 반면에 개의 머리를 가지고 턱수염을 기른 팔의 인물은 브라흐마인 듯하다.

미트라는 승원이 3단계에 걸쳐 건립되었다고 주장한다. 1기는 늦어도 굽타시대까지는 건립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1기에 건립되었던 부분은 퇴락을 겪었고 위에 2기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2기에 건립된 것들 가운데에서는 부서진 벽과 벽돌 기반만이 발견되었다. 부바네스와르에 있는 파라수라메슈바라 사원과 비교하면 2기는 7세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승원의 현재 구조물은 3기에 해당하며 늦어도 11세기까지는 건립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마하스투파

승원2 출입구에서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마자 많은 봉헌탑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곳을 지난다. 계속 발걸음을 이어가면 승원2 출입구에서 100m 되는 곳에 마하스투파(Mahastupa) 매우 규모의 벽돌 스투파 유적이 나타난다. 스투파의 기초는 정교하고 대칭적인 배치를 보여준다. 스투파는 정사각형(14.3mx14.3m)이며 변이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다.

승원1의 이층에서 저 멀리 마하스투파를 바라본 모습. 승원2의 앞쪽에는 작은 봉헌탑들을 볼 수 있다.

스투파의 기초 위에는 둥그런 벽돌 원통형 층만이 겨우 남아 있다. 스투파의 기초는 이전 스투파의 기초 위에 건립된 것이다. 근처의 작은 스투파에서 발견된 여러 개의 석판으로 이전 스투파는 굽타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판에는 5~6세기 문자로 연기경(緣起經)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이전 스투파에서 남아 있는 것은 주추석뿐이다. 위에 다음 스투파가 건립될 때에는 원래의 다각형에서 원형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스투파의 기초는 3 양식인데 단은 2개의 부분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면에는 여섯 개의 둘출부를 위아래로 있다. 돌출부는 우묵 들어간 부분으로 분리되어 있다. 스투파 기초 위의 원통형 벽돌 층은 바퀴 모양을 하고 있다. 바퀴에는 가장자리 테두리가 있고 12개의 바퀴살이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이다. 마하스투파와 둘레에는 겹으로 원형의 벽이 건립되었으며, 사이의 공간은 주변을 있는 보행로 역할을 했다.

마하스투파.

마하스투파의 주변 지역에는 크고 작은 다양한 형태의 봉헌탑들이 산재해 있다. 봉헌탑들이 그야말로 총총히 박혀 있는 모습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봉헌탑에는 벽돌 또는 돌로 쌓아 올린 것과 돌을 조각해 만든 것으로 나뉜다. 돌을 조각해 만든 봉헌탑이 훨씬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벽돌 또는 돌로 쌓아 올린 봉헌탑의 수도 상당하다. 형태도 다양하며, 내부에 사리나 경전을 새겨 넣은 경우도 있고, 또는 아무 것도 넣지 않은 경우도 있다.

라트나기리에는 수많은 봉헌탑을 만날 수 있으며, 이 봉헌탑의 대부분이 마하스투파 주변에 몰려 있다.

마하스투파의 동쪽으로 바로 이웃하여 전통적인 3 양식의 웅장한 벽돌 스투파2 있던 곳이 있으나 지금은 기단만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스투파의 높이는 2.3m이다. 마하스투파와 스투파2 있는 구역은 주변에 작은 봉헌탑들이 총총히 박혀 있어 하늘에서 보면 마치 벌집처럼 보일 같다.

마하스투파에서 서쪽으로 60m 거리에는 대흑천(大黑天, Mahakala) 주신으로 모시는 오래된 마하칼라사원이 있다. 처음에는 불교신으로 모시기 시작했던 배가 불룩한 팔의 인물이 이제는 힌두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사원의 현관에 있는 벽감에는 항마촉지인 자세의 붓다, 연꽃을 들고 있는 다라보살, 금강살타보살(金剛薩菩薩, Vajrasattva) 모셔져 있다.

하나의 부속棟이 있는 승원

언덕을 내려오면서 봉헌탑이 줄을 맞추어 울타리 안에 있는 곳에 도달하면 우측으로 돌아 계속 언덕을 내려오는 대신 북서쪽으로 박물관까지 계속 걸어가면 작은 승원 유적이 나타난다. 승원은 하나의 부속동이 있는 승원이라 불린다. 승원은 베란다를 전면에 두고 개의 개별 수련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가운데 방은 예배실로 사용되었고, 다른 개의 방은 거주용이었다. 승원도 동일한 배열의 이전 구조물 위에 건립되었다.

현장에서는 소마밤슈(Somavamshi) 왕조의 마하시바굽타 5(Mahasivagupta V, 1100-1110) 동판 선포문이 발견되었다. 선포문에는 아마도 라트나기리에서 은퇴 삶을 살았던 라니 카르푸라스리(Rani Karpurasri) 사람에게 우타라 토살리(Uttara-Tosali) 코나마을을 하사한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라트나기리 박물관

라트나기리에는 라트나기리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유물을 현장에 전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현장박물관이 있다. 언덕의 경사를 활용해 3단으로 세워진 박물관에는 4개의 전시실이 있다. 3개의 전시실에는 주로 조각품이 전시되고 있으며, 번째 전시실에는 () 상아(象牙) 조각품, 테라코타, 진흙 인장, 동명판(銅銘板) 등이 전시되고 있는 중이다.

박물관의 외관.
박물관에 전시된 거대한 붓다 두상.
박물관에 전시된 작은 봉헌탑.

 

不二 / 2020. 8. 31. 14:46 / 불교성지 여행/인도

오디샤주의 다이아몬드 삼각지대, (1) 우다야기리

(1) 떠오르는 태양의 언덕, 우다야기리

오리사(Orissa) 번성했던 불교 신앙과 교육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가운데에 다이아몬드 삼각지대(Diamond Triangle) 있었는데 인접한 개의 언덕에 위치한 우다야기리(Udayagiri), 라트나기리(Ratnagiri), 랄리트기리(Lalitgiri) 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금강승(金剛乘, Vajrayāna) 시작되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우다야기리의 상징적인 불전(佛殿)의 모습. 승원2의 천장이 없는 신전 안에 노출된 불상이 보인다.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를 포함해 대부분의 오디샤주 관광지와 유적지를 찾을 경우 오디샤주의 주도인 부바네스와르(Bhubaneswar) 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는 하루 내에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를 모두 둘러보기 위해 아침 일찍 부바네스와르의 호텔을 나섰다. 자지푸르(Jajpur) 지구에 속하는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는 부바네스와르에서 북동쪽으로 직선거리 60km가량 떨어져 있다. 부바네스와르를 벗어나 1958년까지 주도였던 쿠타크(Cuttack) 지나면서 교통량이 많이 늘어났지만 한적해졌다. 16 고속도로에서 파라딥(Paradip) 방향으로 53 고속도로로 바꿔 탔다가 왼쪽으로 벗어나 우리의 번째 목적지인 우다야기리에 도착했다.

부바네스와르에서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에 이르는 길.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를 구성하는 우다야기리, 라트나기리, 랄리트기리의 위치.

오리사의 불교

오리사는 불교와 오랜 관계를 맺어왔다. 불교 전승에 의하면,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대각을 이룬 49일동안 7일씩 7 자리를 옮겨가며 선정(禪定) 들었다고 하는데 선정을 마칠 때쯤 길을 찾아와 붓다에게 떡과 꿀을 올리고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귀의하여 () () 이보(二寶) 귀의한 최초의 재가신도가 되었다는 따뿟사(Tapussa, 提謂) 발리까(Bhallika, 波利)라는 상인이 바로 이곳 오리사 출신이었다.

또한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Maurya) 왕조 3 왕인 아소카(Aśoka, 산스크리트 Ashoka) 왕이 칼링가(Kalinga) 정복하면서 참혹한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정법(正法, Dharma)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轉輪聖王, chakravarti-rāja) 되면서 불교의 흥성과 전파에 크게 기여하게 계기가 되었던 칼링가가 바로 이곳 오리사였다.

붓다가 살아 있을 오리사 땅에 발을 디딘 적은 없지만 불교는 시작과 함께 이곳 오리사에서 뿌리를 내리고 번성하여 15~16세기까지는 명백을 유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7세기 초에 북인도를 지배했고 날란다(Nalanda) 승원을 중건ž확장하며 날란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바르다나(Vardhana) 왕조의 하르샤(Harsha, 戒日王, 606~647) 왕이 오르사의 일부 지역을 정복하고 우트칼라(Utkala) 캉고다(Kangoda)지역에 대한 통치를 위해 소마다타(Somadatta) 총독으로 파견했을 당시에 오리사의 불교는 상당히 번영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의 유학승 현장() 639년경 오리사 땅을 밟았던 것도 바로 때쯤이었다. 현장은 이곳을 오차국(烏茶國)이라 불렀는데 오리사의 이름 가운데 하나였던 Odra 한자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현장에 의하면, 오차국 사람들의 용모는 우람하고 얼굴색은 누렇고 가무잡잡한데 언어와 억양은 중인도와는 달랐다. 게으름이 없고 학예를 즐겨하여 대부분 불교를 믿고 있었다. 가람은 1백여 군데로, 승도는 1만여 명인데 모두 대승의 가르침을 학습하고 있었다. 천사는 50군데이며, 이도인들이 잡거하고 있었다. 스투파는 10 군데로 모두 여래가 설법했던 곳이며 아소카왕이 세웠던 것들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리사에서 불교는 8~10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시기에 현재의 오디샤 일부를 포함하여 인도 동부를 지배했던 바우마-까라(Bhauma-Kara) 왕조(736~910 AD) 통치 아래에서 불교는 국교가 되었다. 그들의 비호 하에 많은 가람들이 번영을 누렸다. 시기에는 또한 밀교(密敎, Tantricism) 많은 발전을 보였다. 랄리트기리, 라트나기리, 우다야기리에서 발굴된 다양한 대승불교의 신들도 바우마-까라 시대의 것들이다.

11~12세기 이후 인도 각지에 무슬림 침략이 증가하고 오리사에도 힌두 왕국들이 연이어 들어서면서 오리사의 여러 곳에서도 불교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이후로는 오리사에서 이상 불교가 존속하지 못하게 된다. 잦은 무슬림의 공격으로 승려들과 불교도들은 티벳과 히말라야 지역으로 탈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명맥이 끊긴 오리사 땅의 불교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갔다.

우다야기리의 발굴

그리고 세기가 흐른 , 우다야기리가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것은 1870 당시 자지푸르의 부행정관이었던 바부 찬드라세크하라 바누르지(Babu Chandrasekhara Banurji) 야생동물들이 출몰하는 깊은 정글 속에 위치한 언덕을 찾아 이에 대한 짧은 보고서를 캘커타 벵갈 아시아학회지(Journal of the Asiatic Society of Bengal)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언덕 밑에서 불상을 만났으며, 곳에서부터 계단식 우물이 있는 사이에 많은 유물들이 널려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우물에서 15m 위쪽으로 많은 유물이 산재해 있는 하나의 유적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으로 문설주와 경내에 안치되어 있던 불상을 꼽았다. 불상은 서로 다른 덩어리의 돌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명상을 하고 있는 듯한 좌상이었다고 기록했다. 그에 의하면, 상처를 받지 않은 온전한 불상은 거의 찾아볼 없었다고 했다.

바누르지의 보고서를 읽고 여기에 자극을 받은 당시 쿠타크의 행정관이었던 빔스(John Beams) 1875 현장을 방문하고 자신의 방문 보고서를 벵갈 아시아학회지 발표했다. 강들로 둘러싸여 있고 강들이 교차하는 곳이어서 접근이 매우 어려웠다고 그는 기록했다. 그는 또한 승인을 받아 쿠타크시의 공공정원에 설치하기 위해 바누르지가 언급했던 문설주를 반출했음도 언급했다.

1928년에는 당시 캘커타대학(Calcutta University) 교수였던 차칼다르(H. C. Chakaldar) 자신의 현장 방문 보고서를 모던 리뷰지(Modern Review) 발표했다. 그는 언덕 밑에 있던 연화수보살(蓮花手菩薩, Bodhisattva Padmapani) () 언급하며 불교교리 문구와 케사바 굽타(Kesava Gupta) 기부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고 했다. 바누르지가 방문했을 당시 많은 고대 유물들이 널리 산재해 있었다고 했던 보살상과 계단식 우물 사이의 공간은 다른 종파 사람들이 그들의 성전을 조성하기 위해 유물들을 무단 반출하면서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우물 위쪽에서 거대한 붓다 좌상을 발견했으며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을 시켜 땅에서 파내도록 했다. 빔스가 문설주를 반출한 남겨져 있던 구덩이를 여전히 있었다고도 기록했다.

1930년에는 당시 캘커타 인도박물관(Indian Museum, Calcutta) 책임 고고학 담당자였던 프라사드 찬다(Ram Prasad Chanda) 1927~28 기간동안 현장 방문 자신의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찬다는 박물관에 전시할 유물 수집을 위해 현장을 찾았던 것이다. 그는 지역 주민들을 통해 빔스가 문설주만 반출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조각품도 여러 점을 함께 반출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운데 점의 조각품이 쿠타크 소재 사원으로 옮겨졌으며, 가운데 열두 팔의 프라쥬나파라미타像과 강가여신像 이렇게 점은 함께 반출됐던 문설주와 함께 현재 파트나박물관(Patna Museum) 있다.

우다야기리의 불교 유적은 1870년부터 알려져 있었고 1937년부터는 인도고고학위원회(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로부터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실제 대규모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985년이 되어서였다. 대규모 발굴조사는 2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1 발굴은 1985~1989 기간에 진행되었으며 계곡의 북쪽 절반 지역에 국한되어 이루어졌다. 2 발굴은 1997~2003 기간에 진행되었으며 계곡의 남쪽 절반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차례에 걸친 대규모 발굴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낸 유물들은 우다야기리 불교 유적에 강한 금강승 전통의 영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라보살(多羅菩薩, Tara), 지세보살(持世菩薩, Vasudhāra), 아파라지타(Aparājitā), 귀자모신(鬼子母神, Hārītī), 준제보살(準提菩薩), 프라쥬나파라미타, 작명불모(作明佛母, Kurukullā), 양우리동녀(梨童女, Janguli) 이곳에서 발견된 다양한 여신상들은 금강승불교의 다양한 가르침을 나타내며 금강승이 숭배되고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우다야기리뿐만 아니라 라트나기리와 랄리트기리의 발굴로 수많은 조각품, 불상, 파편들, 석판, 도기류, 동전, 진흙판, 스투파 엄청난 양의 유물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발굴로 사람들은 현장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묘사했으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없었던 푸시파기리(Pushpagiri, 波祇釐) 승가람이 발견된 것으로 생각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를 이루는 곳의 유적군이 바로 푸시파기리라는 가설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1996~2006년의 기간 동안 진행된 랑구디(Langudi) 언덕에 대한 고고학 발굴 과정에서 pupa sabhar giriya라는 명문(銘文) 발견되면서 날란다, 탁사실라(Takshashila), 비크람실라(Vikramshila) 등과 비견되는 고대 불교대학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우다야기리의 입구

우리의 번째 목적지 우다야기리가 위치한 아시아(Assia) 산맥의 가장 동쪽 끝자락에 도착한 우리 일행의 앞에는 푸른 초원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초원을 나지막한 언덕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었는데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언덕은 U 모양으로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동쪽을 향해 열려 있어 해가 때면 U 계곡 곳곳에 따스한 햇살이 비친다. 그래서인지 언덕의 이름이 떠오르는 태양의 언덕, 우다야기리가 되었나 보다.

U자형 우다야기리 계곡 내에 펼쳐져 있는 승원1과 승원2 구역.

U자형 계곡은 남과 북으로 이등분된다. 부분 가운데 북쪽에는 우다야기리 승원1(Udayagiri Monastery No. 1) 마하스투파(Mahastupa) 위치한다. 그리고 남쪽 부분에는 우다야기리 승원2(Udayagiri Monastery No. 2) 차이트야그리하(Chaityagrha, 사리탑실) 있다. 우다야기리의 대부분의 봉헌탑들은 차이트야그리하 주변에 산재해 있다.

나무가 늘어선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금방 이곳의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불상들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곳에 도달한다. 라트나기리와 랄리트기리와는 달리 이곳에는 현장 박물관이 없다. 아직 추가로 발굴이 필요한 지역이 많아 남아서인지 아니면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조각품들은 작품성이 떨어져서 인지는 수가 없었다. 전시되어 있는 조각들을 하나씩 둘러보던 가운데 하나가 발길을 붙잡았다.

이 관음보살상의 양손은 모두 떨어져 나가고 없지만, 남아 있는 부분과 우다야기리의 다른 구역에서 발견된 유사한 관음보살상을 봤을 때 여원인(與願印, Varada mudra)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오른팔을 길게 아래로 늘어뜨리고 손가락을 펴서 바깥으로 향하도록 하고 있으며 왼손은 어깨 높이로 올리고 연꽃 줄기를 잡고 있는 모습으로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고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주겠다는 표시이다.

이 구역의 입구에 세워져 있던 관음보살(觀音菩薩, Avalokiteśvara) 상이다. 밀교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왼손에 들고 있는 연꽃은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불성(佛性) 갖추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어, 像을 지나 승원으로 들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번뇌망상에 물들지 않고 장차 피어날 불성을 갖추고 있음을 상기시키려는 듯했다. 발견 당시 가슴 부위에서 동강이 상태였으나 지금은 흔적은 남아있으나 하나로 이어져 있다.

야외에 불상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뒤에 현장 관리사무소 같은 건물이 있고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상주하고 있다.
우다야기리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불상들이 이곳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

계곡의 북쪽 지역, 승원1 구역

이곳에서 서쪽 방향으로 나무가 늘어선 길을 계속 따라가면 1 발굴 작업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우다야기리 승원1 구역이 나타난다. 승원1 구역에 도착하여 반달 또는 연꽃 문양의 계단을 올라서면 제일 먼저 우뚝 솟은 마하스투파를 마주한다. 스투파는 바닥이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변이 10m 된다. 바닥은 기초에서 연장되어 사람들이 탑돌이를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스투파의 높이는 원래 9m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뒤에 우다야기리 정상을 배경으로 서있는 현재 4.8m 높이의 벽돌 스투파는 방향으로 깊게 감실(龕室) 만들어져 있으며 인도 밀교의 5선나불(Dbyani-Buddha) 상들이 모셔져 있어 만다라(Mandala) 위에 구현된 듯했다: 중앙에 대일여래, 동쪽에 아축(, Akshobhya)여래, 남쪽에 보생(寶生, Ratnasambhava)여래, 서쪽에 아미타(Amitabha)여래, 북쪽에 불공성취(不空成就, Amoghasidhi)여래. 스투파의 부분은 훼손되어 있었으며 수미산 정상의 천계(천계) 상징하는 하르미카(harmika) 차트라(chhatri) 발견되지 않았다.

연꽃 또는 반달 문양의 계단 위로 우다야기리 언덕을 배경으로 마하스투파가 서 있다.
마하스투파의 네 방향으로 감실이 깊게 설치되어 있고 주변에는 탑돌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마하스투파를 지나치면 우다야기리 정상을 항해 느리게 오르막으로 공지가 나타난다. 공지 여기저기에는 아직도 유물들이 널브러져 있다. 아마도 발굴 당시 가치를 크게 인정받지 못한 것들인가 보다. 그리고 공지를 지나 가장 자리로 올라가면 정사각형(35mx35m) 벽돌 승원1 동향으로 앉아 있다. 승원의 실제 이름이 새겨진 문장(紋章) 발굴 과정에서 여러 차례 발견되었다. 승원의 이름은 마드하바푸라 마하비하라(Madhavapura Mahavihara)였다.

마하스투파와 승원1 사이의 공지에는 여전히 유물들이 널려 있었다. 훼손이 심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아마도 가치가 많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된 모양이었다.
공지 가장자리에 서 있는 네 팔의 관음보살상의 모습. 아래로 떨어뜨린 오른손 하나는 활짝 펴서 앞으로 향하고 있고 다른 오른손 하나는 염주를 쥐고 있다. 떨어져 나간 왼손에는 활짝 핀 연꽃이 쥐어져 있었을테고 다른 왼손 하나는 물병을 쥐고 있다.

승원1 중앙에 개방된 정사각형의 중정(中庭) 또는 안뜰이 있고 이를 21개의 개별 수련실이 둘러싸고 있는 차투-살라(chatuh-sala) 양식으로 지어졌다. 그리고 승원의 출입구는 동쪽으로 있으나 출입문과 문틀은 빔스가 다른 문설주를 반출했던 것처럼 누군가가 가져간 것인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훼손된 것인지 수는 없으나 사라지고 없었다. 승원은 1 일부가 아직도 남아 있다.

우다야기리 승원1의 전경.
승원의 가장자리에는 개별 수련실이 배치되어 있다. 개별 수련실을 배정 받은 승려들은 각 방에서 기거를 하며 득도를 향한 정진에 매진했을 것이다.

승원의 안쪽 벽에는 미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출입구가 설치된 신전이 있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문설주의 쪽에 9개의 미려한 불상과 불교 신상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었다고 했으나 현재는 자리에 이들 불상과 신상들이 없었다. 문설주 위부분에는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고, 좌우로는 칼을 들고 날아 다니는 지명행자(持明行者, Vidhyadhara)들이 보위하고 있다. 그리고 문설주의 아래 부분에는 수호신 드바라팔라(Dvārapāla) 뱀신 나가(Naga) 신전을 지키고 있다.

승원의 서쪽 벽에는 신전(불전)이 위치하고 있으며,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문설주가 눈길을 끌었다.
문설주 위부분의 조각 모습. 아래 부분 중앙에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고, 그 좌우로는 칼을 들고 날아 다니는 지명행자들이 보위하고 있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신전 내부에서 붓다, 지세보살 8개의 신상들이 발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신전 내부에는 다섯 개의 신상만이 남아 있다. 신전의 중심 불상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Bhumisparsha Mudrā) 자세로 금강보좌에 앉아 있는 붓다像으로 개의 서로 다른 석재로 만들어져 있다. 붓다의 뒤편 왼쪽에는 보관(寶冠) 지권인(智拳印, Bodhyangi Mudrā) 자세의 대일여래(大日如來, Mahāvairocanna Tathāgata)像이 있고 오른쪽에는 잠발라(Jambhala)像이 있다.

신전 내부의 모습. 중앙에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는 순간 붓다의 모습이 있고, 그 뒤 좌우에는 각각 대일여래와 잠발라가 배치되어 있다. 중앙의 붓다像은 세 개의 서로 다른 돌로 만들어진 모습이 선명히 보인다.

그리고 붓다상의 앞쪽으로 양편에는 각각 금강저(金剛杵, vajra) 오른손으로 잡고 가슴에 대고 있는 금강살타보살(金剛薩菩薩, Vajrasattva) 머리 부분이 훼손되고 전법륜인(轉法輪印, Dharmachakra Pravartana Mudrā) 자세를 하고 있는 다른 대일여래像이 배치되어 있다. 대일여래像이 앉아 있는 기단에는 전법륜인과 어울리게 초전법륜이 있었던 사르나트의 녹야원을 상징하는 법륜과 사슴이 조각되어 있다.

마하스투파와 승원1 7세기경에 건립되었으며, 승원은 7~12세기에 4차례에 걸쳐 건립ž증축이 진행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승원1 구역이 버려진 뒤에는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인도의 많은 고대 건축물들이 겪었던 운명처럼 지역민들이 건축물로부터 벽돌과 돌을 가져갔으며, 결과로 남아 있는 건축물의 높이도 각각이다. 군데군데 전체가 사라진 곳들도 있다.

승원 너머 북서쪽으로 정상 부근의 언덕이 돌출된 곳에 관음불, 작명불모(作明佛母, Kurukullā) 등의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고 근처에는 동굴도 하나 있다고 하는데 현재 그곳에 접근할 있는 길이 여의치 않아 눈앞에 두고 보질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계곡의 남쪽 지역, 승원2 구역

승원1 구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2 발굴로 모습을 드러낸 우다야기리 승원2 구역이 있다. 남동쪽 방향으로 직선거리 250m 떨어져 있다. 여기에는 심하프라스타 마하비하라(Simhaprastha Mahavihara)라는 이름을 가진 승원2 있다. 불상들이 야외에 전시된 곳까지 가지 않고 바로 승원2 있도록 중간에 다른 오솔길이 나무들 사이로 있다.

승원1과 승원2 사이의 오솔길.

심하프라스타 마하비하라는 원래 2 구조의 벽돌 건물이었으며 개별 수련실로 둘러싸인 중앙의 정사각형 중정(中庭) 또는 안뜰이 있는 차투-살라 양식으로 지어졌다. 13개의 개별 수련실이 4면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남쪽에 4 그리고 나머지 3 면에는 각각 3개의 수련실이 있었다. 수련실에는 개의 벽감(壁龕) 있었는데, 하나는 램프를 놓는 곳이었고 다른 곳은 개인이 숭배하는 신상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벽감의 크기에 맞는 신상들이 발견되어 같은 견해를 뒷받침한다.

승원2 출입구는 북쪽으로 있으며, 거대한 출입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출입구의 측면 벽에는 수호신들을 모시는 벽감이 설치되어 있었다. 동측 벽감 안에는 원래 자리에서 발견된 귀자모신이 여전히 모셔져 있다. 서측 벽감은 상당 부분 파괴되었으며 신상도 없는 상태이다. 찬다가 캘커타 인도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수집해 유물 가운데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 Vaiśravaa) 벽감의 주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 그는 신상이 비사문천왕이 아니라 잠발라라고 확인하고 있다.

위 부분에 검게 그을린 듯한 유적이 아래의 차이트야그리하 구역에서 바라본 승원2의 모습이다.
승원2의 내부 모습.

유아보호를 상징하는 귀자모신이 승원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당나라의 유학승 의정(義淨)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원래 사악한 야차녀(夜叉女) 왕사성(王舍城) 와서 아이를 잡아먹곤 하였다. 붓다가 그를 제도하기 위하여 그의 500명의 자식들 가운데 아들을 숨겨 놓자, 야차녀는 비탄에 빠져 슬피 울었다. 이때 다른 부모의 슬픔을 상기시켜 주는 붓다의 설법을 듣고 불교 귀의하여 안산(安産) 유아보호의 서원(誓願) 하였다고 한다. 앞으로 자신의 아이들을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하느냐는 질문에 붓다는 비구들이 머무는 모든 승원에서 그의 자식들은 충분한 음식을 제공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이유로 팔로 아이를 안고 있거나 무릎 주변에 여러 명의 아이를 데리고 있는 모습의 귀자모신像이 모든 인도 승원의 현관이나 식당 구석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승원2의 신전은 특이하게도 벽에서 돌출되어 있고 신전 주변을 돌 수 있도록 보행로가 설치되어 있다.

승원의 중심 신전은 남쪽 중앙에 위치한다. 신전 둘레에는 신전 둘레를 있는 보행로가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은 오리사의 다른 승원에서는 없는 것으로 이곳에서만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신전의 문설주는 빔스가 반출했으며 현재 파트나박물관에 설치되어 있다. 신전 내부에는 항마촉지인 자세로 2.6m 높이의 붓다像이 앉아 있다. 불상은 여러 개의 석재 덩어리로 만들어졌다.

신전의 천장이 훼손되고 남아 있지 않아 고요한 산속에서 문설주 틀을 통해 만나는 붓다의 모습은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신전 너머로 보이는 2층도 신전(불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전 뒤의 남쪽 위에는 2층에 하나의 방이 있다. 방에는 돌로 만든 받침대가 하나 있으나 위에 모셔져 있던 신상은 사라지고 없다. 승원2 황금기는 대부분 바우마-까라 왕조의 지배하에 있던 8~10세기였다. 바우마-까라 왕조가 지나고 10세기의 마지막 2~30년동안 승원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12세기 초가 되면 모두 떠나고 승원은 완전히 버려진 곳이 되었다. 승원의 남쪽 담장에서 가까운 곳에서 넓은 저수지가 발굴되기도 했다.

승원2 북서쪽에는 신전단지(Shrine Complex) 위치한다. 한가운데에서 땅에 서있는 상당히 규모의 관음보살像이 눈에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신전단지의 출입구는 동쪽으로 있으며, 동쪽을 제외한 방향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단지 내에는 신상을 모시기 위한 여러 개의 돌출된 방들이 발견되었다. 남쪽과 북쪽 구석에 방이 각각 하나씩 있고, 북쪽 벽에 다른 개의 방이 위치한다.

신전단지 한 가운데 서서 한 몸에 주목을 끌고 있는 네 팔의 관음보상像.

머리에 보관은 팔의 관음보살은 또한 로케슈바라(Lokeśvara) 확인되었는데 무릎, 허리, 어깨에서 세번 굽히기(tri-bhanga)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른손 하나는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으며, 하나의 오른손은 염주를 쥐고 있다. 왼손은 각각 활짝 연꽃과 물병을 잡고 있다. 머리 보관에는 작은 아미타불이 새겨져 있다. 뒤의 석판 가장 부분에는 과거칠불이 차례로 앉아 있고, 관음보살 머리 부분 양쪽의 동굴에는 각각 선재동자(善財童子, Sudhana Kumāra) 브리쿠티(Bhkuī)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석판의 아래 부분에는 좌우에 다라보살과 마두관음(馬頭觀音, Hayagrīva) 자리하고 있다.

관음보살像 뒷면에는 사리가 들어있는 스투파 건립을 언급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스투파는 아마도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 蓮花生) 사리가 들어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신전단지의 서측에서 발굴된 바로 스투파인 것으로 보인다.

승원2 구역. 왼쪽으로 차이트야그리하가 위치하고 똑바로 앞으로 나아가면 승원2가 있다.

승원2 북동쪽에는 차이트야그리하가 있다. 차이트야그리하가 있는 구역으로 들어서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많은 사리탑과 봉헙탑들이다. 우다야기리에서는 어느 곳보다 많은 다양한 돌과 벽돌 스투파들이 차이트야그리하 근처에 몰려 있다. 차이트야그리하는 동쪽을 향하여 자리 잡고 있으며, 차이트야그리하 자체보다 오래된 석대(石臺) 위에 건립되었다. 석대는 명문이 새겨진 사리함을 보면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차이트야그리하는 3세기경에 건립되었다.

차이트야그리하 근처에는 다양한 사리탑과 봉헌탑들이 몰려 있다.
승원2 구역 여기저기에도 유물들이 발굴된 곳에서 방치되고 있었다.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유물들이 박물관 등지로 옮겨 보관되든지 아니면 원래 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체계적인 복개수로가 사용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아마도 하수가 처리된 수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차이트야그리하 인근의 봉헌탑. (왼쪽); 계단식 우물. 계단을 내려가면 지금도 물이 있지만 현재는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물은 더러웠다. (오른쪽)

승원2에서 일정을 마치고 우다야기리의 출입구를 향해 언덕을 내려오다 보면 불상들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곳에 도달하기 조금 전에 돌을 깎아 만든 계단형 우물을 만난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암반에 이르게 된다. 이곳 승원에 머물던 승려들이 이곳에서 물을 길어다 사용했을 것이다. 우물 주변으로는 축대가 둘러져 있고, 입구 앞에는 기둥 개가 있다. 입구의 오른쪽 벽과 가장 아래 계단에 있는 아치에 우물이 라나카 바즈라나가(Ranaka Vajranaga) 봉헌물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은 아니어서 고요한 분위기에서 차분하게 살펴볼 있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과 순례객이 아직 그리 많지 않고, 부바네스와르에서 당일 여행이 가능해서인지 관광시설 등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라트나기리를 향해서 다시 출발했다.

不二 / 2020. 8. 3. 01:19 / 불교성지 여행/인도

보드가야 대보리사의 7선처(七禪處), 대각을 이룬 붓다가 49일간 선정에 들었던

대보리사 경내 7선처 찾아가기

보드가야의 대보리사(大菩提寺, Mahabodhi Temple) 있던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2600 붓다는 깨달음(正覺) 얻어 깨어난 (覺者)’ 되었다. 지금의 대보리사 경내에는 붓다가 성도(成道) 49일동안 7일씩 7 자리를 옮겨가며 선정(禪定) 들었었다는 7선처(七禪處) 있어 특히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다. 순례객들도 이들 7선처를 찾아 붓다를 쫓아 선정에 들려는지 묵상을 하는 이들도 있고 경을 암송하는 이들로 넘쳐난다.

대보리사 경내에 표시된 7선처의 위치

불교 전승에 의하면, 붓다는 보리수 나무 아래에 인근의 농부가 건넨 길상초(吉祥草, Kusa) 묶음으로 자리를 만들고 앉아 정신을 집중하고 대각(大覺) 이루게 된다. 이제까지 품어왔던 모든 의혹이 걷히고 최고의 깨달음을 얻게 붓다는 대각의 기쁨을 누리며 같은 자리에 앉아 번째 7 동안 선정에 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7 동안 선정에 들었던 곳은 보리수 나무 바로 아래에 길상초를 깔고 보리수 나무를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며 앉아 대각을 이룬 자리이다. 대보리사 대탑 서편의 보리수 나무 아래에 있는 금강보좌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순례객들로 붐빈다.

붓다가 최고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강변의 조용한 숲 속에 있는 한 그루의 큰 나무 아래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는 점을 기억하면 전체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역사적인 붓다가 신격화되면서 길상초를 깔고 붓다가 앉았던 자리가 금강보좌(金剛寶座, vajrasana) 표현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붓다가 대각을 이룬 자리를 표시하기 위해 자리에 실제로 석재평판(石材平板) 설치한 사람은 200 이곳을 찾은 것으로 추정되는 아소카(Aśoka, 산스크리트 Ashoka) 왕이었다. 아소카왕이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금강보좌는 19세기 알렉산더 컨닝햄(Alexander Cunningham) 의해 발굴되었다.

보리수 나무와 대탑 사이가 금강보좌가 위치한 자리이다. 현재는 아소카왕의 금강보좌 위에서 발견된 굽타(Gupta) 시대에 설치된 금강보좌의 일부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보리수 나무와 금강보좌의 안전을 위해 높은 울타리가 세워져 있다.
보리수 나무 아래에 앉아 쉬고 있는데 마침 발 아래로 보리수 나뭇잎이 떨어져 내렸다. 나뭇잎을 몇 개 주워 책 속에 넣어 두고 잊어버렸는데 자료를 뒤척이다 바삭 마른 잎을 발견했다.

붓다는 금강보좌에서 북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번째 7일을 보냈다. 이곳에서 붓다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보리수를 응시했다고 전한다. 후에 이곳에 이를 기념하여 스투파가 세워졌으며 정안탑(靜眼塔, Animesa Locana Stupa)이라 불리고 있는데 눈을 깜빡이지 않으며 보리수를 응시하고 있는 붓다상이 안치되어 있다.

붓다가 눈을 깜빡이지 않고 보리수를 응시했음을 기념하여 세워진 정안탑. (왼쪽); 정안탑 아래에는 티벳 출신인 듯한 승려들이 앉아 독경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오른쪽)

그리고 붓다는 번째 7일을 보리수와 정안탑 사이에서 걷기 명상을 하며 보냈다. 붓다의 발이 땅을 디딘 곳마다 연꽃이 솟아올랐다고 전한다. 후에 이곳은 경행처(輕行處, Ratnachankrama) 불리고 있으며, 이곳에 일렬로 설치된 연꽃 조각은 붓다의 발이 디딘 곳을 상징한다.

대탑 북쪽 면에서 만나는 경행처. 이 근처도 조용히 묵상 또는 독경하는 승려와 순례객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보리수 나무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라트나그라하사원(Ratnaghar Chaitya) 자리에서 붓다는 연기법(緣起法) ()으로 그리고 ()으로 ()하며 번째 7 동안 선정에 들었다. 선정에 들어 있던 붓다의 몸에서 파란색, 노랑색, 빨간색, 하얀색, 오렌지색의 다섯 가지 밝은 빛이 나와 하늘을 밝게 비쳤다고 한다. 다섯 가지 색은 현재 불교 깃발을 구성하는 색깔로 사용되고 있다.

동남아 순례객들이 많이 찾는 듯 입구에 금박이 입혀져 있는 라트나그라하사원.

이어서 붓다는 보리수 나무의 동쪽으로 대보리사 대탑을 향해 계단을 내려오면 만나는 지점에 있던 아자팔라니그로다(Ajapala Nigrodha, 반얀) 나무 아래에서 다섯 번째 7 동안 선정에 들었다. 붓다는 이곳에서 오만한 바라문을 만나 어떻게 해야 바라문이 됩니까?”라는 질문에 출생(出生) 아니라 선업(善業)으로 바라문이 되는 것이라고 설했다. 지금은 나무는 없어졌지만 기둥이 세워져 자리를 표시하고 있다.

오랜 세월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아자팔라니그로다 나무는 자리를 지키지 못했고 대신 이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섯 번째 7 동안에는 보리수 나무로부터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호수가에서 붓다는 다시 선정에 들었다. 이때 비바람이 몰려왔으며, 이에 뱀의 (naga, 한역경전에서는 용왕으로 번역됨) 무찰린다(Mucalinda) 붓다를 일곱 감고 머리를 펴서 보호했다고 전한다. 장면이 호수 중앙에 조형물로 조성되어 있다.

무찰린다 연못 한가운데에는 이곳과 관련하여 전설처럼 내려오는 뱀의 왕 무찰린다가 붓다를 보호하고 있는 모습의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무찰린다 연못은 마치 인공호수인양 직사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붓다는 마지막 일곱 번째 7 동안 보리수 나무에서 남동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던 라자야타나(Rajayatana) 나무 아래에서 선정에 들었다. 그때 따뿟사(Tapussa, 提謂) 발리까(Bhallika, 波利)라는 상인이 붓다에게 떡과 꿀로 공양을 올리고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귀의했다. 이때는 아직 다섯 도반에게 법을 설하기 전이었고 상가가 형성되기 전으로 상인은 () () 이보(二寶) 귀의한 최초의 재가신자가 되었다.

마지막 7일간 선정에 들었던 라자야타나 나무가 있었던 자리임을 알리는 안내판.

대보리사를 찾는 순례객들은 7선처를 차례로 참배하며 원하는 곳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명상을 하거나 경을 읽으며 오래 머무르는 모습을 있다. 그렇지만 대보리사에서 순례객들에게 1 참배 대상은 언제나 보리수 나무와 아래에 있는 금강보좌이다.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순례객들이 참배를 하거나 보리수 나무와 대탑의 그늘에서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중요한 행사들도 이곳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7선처의 유래

이러한 7선처는 언제부터 유래한 것일까? 7선처는 정말 붓다가 대각을 이룬 선정에 들었던 장소들일까? 역사적 붓다의 발자취를 쫓아가는 입장에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붓다는 실제로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실존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붓다에 관한 기록에는 사실에 근거하지만 기술에는 다소 상상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가미되곤 한다. 이것은 아마도 위대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의 깊이가 더해 갈수록 그에 따라 사실적인 내용을 인상적이고 풍부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이것은 또한 유구한 세월동안 불교라는 종교적 체험의 일부를 구성하는 요소로 작용해왔다.

초기 팔리어 경전에서 붓다의 출가 수행과 깨달음의 성취와 관련하여 자전적인 설명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가운데에서 학자들이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성구경(聖求經, Ariyapariyesana Sutta)에서 그려지고 있는 붓다의 대각 순간은 소박하기 그지없다. 49일간의 선정 또는 7선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비구들이여! 이곳에서 나는 스스로 태어나는 존재이면서 태어남의 허물을 알아, 태어나지 않는 더없이 완전한 안락함(열반) 얻었고, 스스로 늙는 존재이면서 늙음의 허물을 알아, 늙지 않는 위없는 완전한 안락함을 얻었고, 스스로 병든 존재이면서 병듦의 허물을 알아, 병들지 않는 더없는 완전한 안락함을 얻었느니라. 스스로 죽는 존재이면서 죽음의 허물을 알아, 죽지 않는 더없는 완전한 안락함을 얻었고, 스스로 더러운 존재이면서 더러움의 허물을 알아, 더럽지 않는 더없는 완전한 안락함을 얻었느니라.

나에게는 " 마음의 해탈은 부동(不動)하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라. 이제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리라" 것을 있는 해탈지견을 얻었느니라. 성구경

성구경과 함께 마지히마 니카야(Majjhima Nikaya, 中部) 등장하는 보리왕자경(菩提王子經 Bodhirajakumara Sutta) 팔리어 경전에서 붓다가 최고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과정을 가장 풍부하게 묘사하고 있는 경에 속한다. 붓다가 보리수 나무에 당도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단계별로 훨씬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경에도 49일간의 선정과 7선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초기 경전의 기술은 불전(佛傳) 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붓다의 중요한 설법과 교단 규칙의 제정 등이 주목적이었다. 이에 따라 붓다의 행적에 관하여서는 단편적으로 그리고 매우 드물게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 붓다의 생애를 모두 그대로 되살려내는 것은 어려울 있으나, 여기에도 신화적(神話的전설적(傳說的)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초기 경전에서 보여주는 붓다의 모습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 있다는 점은 짐작할 있다.

그러나 후대에 쓰여진 붓다의 전기들은 붓다 입멸 수백 년이 지난 뒤부터 성립된 것이고, 더구나 붓다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입장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여러가지 창작과 가탁이 첨가되고 신화적ž전설적인 요소가 대단히 많아진다. 붓다를 직접 친견하고 붓다로부터 설법을 직접 들었던 성문(聲聞)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서 종교적인 목적 또는 필요에 의해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붓다가 신격화되고 덕을 크게 찬양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붓다의 육체적 탄생과 영적 탄생은 중요한 찬양의 대상이 되었다.

중요한 산스크리트어 불전에서는 붓다의 대각 순간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부파불교의 대중부(大衆部, Mahāsaghika) 가운데 설출세부(說出世部, Lokottaravādin) 율장(律藏) 자료를 집대성한 마하바스투(Mahavastu, 大事), 불교시인 아슈바고샤(Aśvaghoa, 馬鳴) 의해 카비야(Kāvya) 체라는 아름다운 미문(美文)으로 쓰여진 붓다짜리따(Buddhacharita, 佛所行讚), 붓다의 생애를 서사시적으로 묘사한 일련의 대승 원시경전인 랄리타비스타라경(Lalitavistara Sūtra, 普曜經), 자타카(Jātaka, 本生譚) 서문에 해당되는 니다나카타(Nidānakathā, 因緣品) 등에서 묘사된 붓다의 대각 직후 49일간의 선정과 7선처를 아래의 표에 정리해보았다.

49 선정

마하바스투(Mahāvastu) 기원전 2세기-기원후 4세기

붓다짜리따(Buddhacharita, 佛所行讚) 2세기

랄리타비스타라경(Lalitavistara Sūtra, 方廣大莊嚴經) 3세기

니다나카타(Nidāna Kathā, 因緣品)

5세기

1-7

보리수 아래

보리수 아래 (漢譯 동일)

보리수 아래 (漢譯 동일)

금강보좌

2-7

보리수 응시 (장소/방향 미언급)

미언급

삼천대천세계를 돌며 끝까지 거닐음. (漢譯 동일)

금강보좌에서 북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리도량을 응시. 장소는 나중에 정안탑으로 알려짐.

3-7

먼거리를 위아래로 걷기 (장소/방향 미언급)

미언급

보리도량을 응시 (漢譯 동일)

동서로 펼쳐진 보석장식의 회랑을 위아래로 거닐음. 장소는 나중에 보석장식 회랑으로 알려짐.

4-7

뱀의 칼라(Kāla) (장소/방향 미언급)

미언급

멀지 않은 동쪽 바다에서 서쪽 바다까지 거닐음 (漢譯 근처의 바다 끝까지를 거닐음)

보리수 나무의 북서쪽에 지어진 보석의 .

5-7

뱀의 무칠린다(Mucilinda) , 비바람이 몰려와 붓다를 일곱 감고 머리를 펴서 보호, 뱀의 비니파타(Vinipāta) 붓다의 몸을 감고 보호. (장소/방향 미언급)

미언급

뱀의 무칠린다(Mucilinda) 사는 , 찬바람이 일어 붓다를 일곱 감고 머리를 펴서 보호. 동쪽에서 다른 뱀의 왕들이 도착해 붓다를 보호. (漢譯 목진린다[目眞隣陀]용왕이 살고 있는 )

목동의 니그로다 나무 아래.

6-7

염소지기의 반얀나무 아래

미언급

염소지기의 반얀나무 (漢譯 니구타[尼俱陀樹] 나무)

무찰린다(Mucalinda) 나무 아래. 비바람이 몰려오자, 뱀의 무찰린다가 붓다를 일곱 감고 머리를 펴서 보호함.

7-7

크시리카나무 숲의 여러 신의 사당 (장소/방향 미언급)

미언급

보리수 나무의 몸통 (漢譯 다연림[多演林] 안의 나무 아래)

라자야타나(Rājāyatana) 나무 아래

현재 보드가야의 대보리사 7선처에 표시된 안내판과 보드가야가 속한 비하르(Bihar) 관광부의 자료는 니다나카타에 기록된 49일간의 선정 7선처 관련 내용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니다나카타는 5세기 전반에 활약한 부다고사(Buddhaghosa, 佛音) 의해 성립된 문헌이며, 팔리어 불교 문헌 중에서 가장 체계적인 불전의 시초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때까지 여기저기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단편적인 붓다와 관련된 행적을 시기별로 일관되게 정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초의 체계적 불전으로 수도 있을 같다. 7선처 관련 내용도 그때까지 다양한 출처의 내용들을 일관되고 구체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붓다짜리따에서는 번째 7일동안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선정에 들었다는 점은 기술되고 있지만 나머지 여섯 번의 7일간 선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붓다짜리따가 성립된 2세기 초만 해도 49일간의 선정 7선처에 대한 생각이 아직 전혀 정립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하바스투와 랄리타비스타라경을 보면, 세월이 흐르면서 붓다의 영적 탄생의 순간을 신격화하고 찬양하려는 경향이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7선처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논란

위치에 대한 언급이 없거나 추상적이던 대부분의 7선처들이 많은 세월이 흘러 구체적인 위치나 방향 등에 대한 기술이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은 점차 7선처의 구체적 장소에 대해 기대감과 확신을 갖게 듯하다. 5세기 초에 보드가야를 찾았던 동진(東晋) 유학승 법현(法顯) 7선처의 위치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없이 열거하고 있는데 그친 반면, 7세기에 이곳을 찾았던 () 유학승 현장() 7선처뿐만 아니라 기타 많은 장소들에 대한 구체적 위치를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대보리사 경내에 표시되어 있는 7선처 가운데 일부는 현재의 위치가 잘못된 것으로 사람들의 공감을 받고 있는 것들이 있다. 가운데 대보리사 대탑 남쪽에 있는 무찰린다 연못은 붓다가 대각을 이룬 여섯 번째 7일동안 선정에 들었던 장소가 아니며, 대탑 남쪽의 연못에서 남쪽 방향으로 직선거리 1.5km 떨어져 있는 모짜림(Mocharim) 마을에 있는 연못이 실재의 무찰린다 연못이라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분홍색은 7선처와 관련하여 컨닝햄이 주장한 곳들이며, 파란색은 기타의 주장들이다.

모짜림 연못이 실재의 무찰린다 연못이란 제안은 新날란다대승원(Nava Nalanda Mahavihara) 출신의 팀이 많은 자료와 유적을 조사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그들이 이용했던 자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료는 역시 현장이 무찰린다 연못과 주변 지역에 대해 남긴 기록이었다.

보리수 남문 밖에 커다란 연못이 있다. 둘레는 7백여 된다. 맑은 물은 거울과 같은데 용과 고기가 살고 있다. 바라문 형제가 대자대천의 말을 듣고서 것이다. 이어 남쪽에 있는 연못은 옛날 여래가 처음 깨달음을 얻고 세탁하려 했을 제석천이 부처님을 위해 만든 것이다. 연못 서쪽에 돌이 있다. 부처님이 옷을 세탁하고 말리려 했을 제석천이 대설산에서 가져온 것이다. 수토파는 여래가 그곳에서 낡은 옷을 입었던 곳이다. 이어 남쪽 속에 있는 수토파는 여래가 가난한 노파의 낡은 옷을 보시받았던 곳이다.

제석천이 만든 연못 동쪽 속에 무칠란다 용왕 못이 있다. 물은 검은 기가 도는 아름다운 빛깔인데 맛이 좋다. 서쪽 기슭에 자그마한 정사가 있는데 안에 불상이 만들어져 있다. 옛날 여래가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었을 이곳에서 좌선하여 7 동안 선정에 들었다. 그때 용왕은 여래를 경호하여 몸으로 부처님을 둘러싸서 일곱 바퀴를 돌고 여러 머리를 내밀어 엎드려서는 우산을 만들었다. 연못 동쪽 기슭에 여래가 좌선했던 집이 있다. –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현장이 말하는 보리수 남문 밖에 있는 둘레 7백여 보의 연못은 현재 대보리사 경내에 있는 무찰린다 연못이다. ‘이어 남쪽에 있는 연못으로 제석천이 붓다를 위해 만들었다는 연못은, 팀의 주장에 의하면, 현재 꼬또라와(Kotorawa) 마을에 있는 연못이라고 한다. 그리고 현장이 제석천이 만든 연못 동쪽 속에있다고 실재의 무찰린다 연못이 현재 모짜림 마을의 연못이라는 것이다. 빠른 태국의 불교도들은 벌써 연못가에 뱀의 무찰린다가 붓다를 일곱 감고 머리를 펴서 보호하고 있는 모습의 조각상을 설치해 놓았다.

현재 점점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실재 무찰린다 연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모짜림 마을의 연못. 현장은 검은 기가 도는 아름다운 빛깔이었으며 그 물 맛도 좋다고 했는데, 자금의 모습은 전혀 그렇게 보이질 않았다.
모짜림 연못 건너편 물가에는 붓다와 붓다를 보호하고 있는 뱀의 왕 무찰린다 모습의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태국 불교도들이 설치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이전에 현장의 기록을 활용하여 실재의 무찰린다 연못을 확인했던 사람이 있었다. 19세기에 보드가야 대보리사의 발굴과 복원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컨닝햄이 장본인이다. 1892년에 발간된 그의 보드가야 대보리사 발굴 기록에 의하면, 보리수 남문 밖에 있는 둘레 7백여 보의 †연못은 바라문 형제가 연못이며 붓다연못(Buddhokar 또는 Buddha Pokhar)”이라고 불린다고 했다. 연못은 현장이 방문했을 때의 크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도 했다.

연못에서 남쪽으로 붓다가 대각을 이룬 목욕하려 했을 제석천이 붓다를 위해 만들었다는 연못이 있으며, “목욕연못(Ghosal Chak)”이라 불린다고 했다. 컨닝햄은 붓다연못에서 남서쪽으로 300피트(91m) 떨어진 곳에 있다고 했는데, 연못의 크기가 줄어서인지 아니면 당시에는 지금처럼 쉽고 정확하게 거리 측정을 없어서였는지 수는 없으나 현재의 거리는 160m 되었다. 그리고 제석천 연못에서 동쪽으로 속에 뱀의 무찰린다 †연못이 있다고 했다. 또한 연못의 동쪽 방향으로 우렐(Urel) 또는 우루빌와(Uruvilwa) 마을이 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컨닝햄이 목격했던 †무찰린다 연못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진 상태이다.

컨닝햄이 주장한 7선처 관련 장소들. 컨닝햄이 실재 무찰린다 연못이라고 주장한 우렐 마을의 †연못은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新날란다대승원 팀은 컨닝햄이 확인한 곳이 기본적으로 추측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고고학적 또는 명문의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장이 자주 사용하는 근처에’, ‘~ 곁에’, ‘~에서 멀지 않은 곳에등의 표현으로 컨닝햄이 모든 장소들이 대보리사 근처의 매우 좁은 지역 내에 위치한 것으로 믿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7선처의 일부는 넓은 지역으로 흩어져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의견을 개진하며 바라문이 팠다는 연못에서 2.2km 떨어진 꼬또라와 마을 연못과 1.5km 떨어진 모짜림 마을 연못을 각각 제석천 연못과 실재의 무찰린다 연못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팀이 주장하는 꼬또라와 마을 연못과 모짜림 마을 연못 역시 팀이 비판적 견해를 보이는 컨닝햄의 목욕연못과 무찰린다 연못만큼이나 근거가 매우 약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자연스러움으로 말한다면 오히려 컨닝행의 제안이 그럴 듯하다는 느낌을 준다. 여기서 중요한 고려 사항이 하나 있다. 경우 모두 당시의 지형지물을 기준으로 사건 현장을 추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컨닝햄이 실재의 무찰린다 연못으로 특정했던 우렐 마을 연못은 컨닝햄이 방문했던 때로부터 불과 140년이 흐른 현재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없다. 잦은 홍수 등으로 강물 길이 순식간에 킬로미터씩 이동하는 일이 드물지 않은 현지의 상황을 고려하면 2,500~600년의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연못들이 사라지거나 새로 생겨났을 짐작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붓다가 대각을 이룬 다섯 번째 7 동안 선정에 들었던 아자팔라니그로다(반얀) 나무의 위치에 대해서 니다나카타에서는 목동의 니그로다 나무라고 칭한 이외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나 마하바스투에서는 나이란자나(Nairanjana, 尼連禪河) 강변에서 고행 생활을 하고 있던 붓다와 마주치곤 하던 염소지기가 붓다를 위해 강변에 반얀나무를 심었다고 기록했다. 선견지명이 있었던지 염소지기는 반얀나무가 완전히 자랄 때가 되면 붓다가 목표로 바를 성취할 것이라고 믿었다. 염소지기는 후에 삼십삼천왕 가운데 하나로 다시 태어났으며 니그로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랄리타비스타라경에서도 붓다는 대각 여섯 번째 주에 나이란자나강 변에 있는 염소지기의 반얀나무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현재 대탑의 동쪽 30m 앞에 표시되어 있는 아자팔라니그로다 나무의 위치는 훨씬 동쪽의 나이란자나 강가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붓다가 대각 후 다섯 번째 7일간 선정에 들었다고 전해지는 아자팔라니그로다 나무는 나이란자나 강변일 가능성이 높으나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현재 경내에 표시된 위치에서 동쪽으로 연장해 강변으로 오면 담벼락 넘어 시끌벅적한 시장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밭이 있는 곳에 도착한다. 이곳은 현재 지역의 힌두 마한트(Mahant) 소유의 땅이다.
마한트 소유의 밭 가장자리에 대보리사 대탑과 일직선 상에 있는 지점에 미얀마 왕이 세운 오래된 스투파가 있었다. 19세기에 미얀마 측에서 대보리사 발굴 등의 작업을 했으므로 그 당시의 작업을 기념하는 스투파인지, 아니면 아자팔라니그로다 나무와 관련된 스투파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붓다가 대각을 이룬 마지막 일곱 번째 7 동안 선정에 들었던 라자야타나 나무 아래에서 마지막 지금의 오리사주 출신의 따뿟사(Tapussa, 提謂) 발리까(Bhallika, 波利)라는 상인이 붓다에게 떡과 꿀로 공양을 올리고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귀의했다. 니다나카타에서는 나무의 위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지만, 커닝햄은 그의 기록에서 상인이 붓다에게 공양을 올린 ‡장소를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장소를 특정한 근거에 대해서는 명확한 증거가 제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붓다가 보리수 나무 바로 아래에 길상초를 깔고 보리수 나무를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며 앉아 대각을 이룬 자리는 현재 대보리사 대탑 서편에 있는 보리수 나무 밑이 아니라 대탑의 법당 안에 모셔져 있는 붓다상이 앉아 있는 자리가 2,500~600 붓다가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하면서 앉았던 바로 자리이며 아소카왕이 금강보좌를 설치했던 자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붓다상의 바로 , 금강보좌의 바로 서편에 원래 보리수가 서있던 자리가 있다.

컨닝햄의 대보리사 발굴 기록 가운데 대탑 주변을 도면으로 기록한 자료이다. 파란색의 내용은 아소카왕이 조성했던 보리수 사원의 유적에 대해 컨닝햄이 별도로 기록한 도면으로 이를 겹쳐보면 아소카왕의 금강보좌는 현재 대보리사 대탑의 법당 내에 붓다상의 좌대와 일치한다. 즉 현재 붓다상은 정확히 붓다가 대각을 위해 보리수 나무 아래 앉았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금강보좌의 바로 서편에 원래 보리수 나무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기원전 250년경 아소카왕이 보드가야의 보리수 나무를 배경으로 설치한 대보리사 사원과 금강보좌의 모습. 코끼리 기둥머리가 얹혀진 아소카왕의 석주가 세워졌었음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이 석주가 사라지고 없다. 바르후트(Bhārhut), 기원전 100년 (왼쪽); 1892년 컨닝햄의 기록에 나타난 발굴 당시의 아소카왕의 금강보좌, 대보리사 대탑 내부 불상 좌대로 사용되고 있다. (오른쪽)

붓다가 대각을 이룬 실재 49일간 자리를 옮기며 선정에 들었는지 확인하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붓다의 영적 탄생의 순간을 찬양하고 축복하는 종교적 장치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어쩌면 대보리사 주변의 물리적 장소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보다는 붓다의 영적 탄생의 의미와 뜻을 되새기며 이를 축복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지 않을까? 7선처의 장소를 찾아 나이란자나 강변을 헤매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간다.

不二 / 2020. 6. 25. 21:12 / 불교성지 여행/인도

전정각산, 붓다가 6년의 고행 기간 머물렀던 동굴

보드가야 대보리사(Mahabodhi Mahavihara)에서 북동쪽으로 7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온통 바위로 뒤덮인 나지막한 산이 하나 있다. 지금은 둥게스와리(Dungeswari)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코끼리 형상이라 하여 상두산(象頭山)이라고도 하지만,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수행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흔히 전정각산(前正覺山, Pragbodhi)이라고 불렸다. 붓다 당시에는 바위산 아래에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버리는 시타림(尸陀林, 공동묘지) 있었으며 근처에 불가촉천민 마을이 있었다고 전한다.

전정각산과 보드가야에서 전정각산에 이르는 길 . 자동차로 이동하는 길(파란 점선)과 걸어서 갈 수 있는 길(노란 점선).
전정각산굴의 전경. 입구가 하얀색 회벽으로 처리된 왼쪽 첫 번째 굴이 붓다가 머물렀다고 알려진 전정각산굴이다.

전정각산의 모습

차량으로 보드가야 대보리사를 출발한 우리 일행은 보드가야路를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120 고속도로를 만나자 차량 흐름이 많아졌지만, 70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다시 차량 흐름도 적어지고 앞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70 고속도로를 벗어나자, 길은 먼지가 폴폴 일어나는 진흙길로 비가 오면 차량 통행도 어려울 같은 상태였다. 길이 맞을까 싶은 마음이 즈음에 전정각산 아래에 도착했다.

전정각산 주변 지도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건물 위의 전정각사라는 한글 간판이었다. 바로 옆에는 우리나라의 미디어에서도 적이 있는 JTS 수자타아카데미의 간판이 역시 굳게 닫힌 철문 높은 곳에서 눈길을 끌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마오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던 지역이었으며 밤이면 총을 들고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높은 담장을 이해할 있었다. JTS에서도 초기에 목숨을 잃은 분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서 꾸준히 활동을 하고 있는 분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정각산을 오르기 전 산기슭에서 만나는 전정각사.
전정각사와 이웃하여 JTS 수자타아카데미가 위치하고 있다.

전정각사 앞에서 시작하여 전정각산굴이 있는 산중턱까지 생각지도 않았던 콘크리트길이 있었다. 라오스 사람들의 지원으로 놓인 길이라고 한다. 순례객들이 몰려올 때면 어디서 나타나는지 어린이와 아기를 안은 아낙네들이 콘크리트길을 따라 자리를 잡고 앉아 구걸을 한다. 옛날 이곳은 불가촉천민들의 거주지였다고 했는데, 콘크리트길에 자리 잡고 있는 이들이나 이곳까지 오면서 길가에서 지나쳤던 집들을 보면 이들의 사정이 그리 크게 변하지 않은 듯했다.

전정각사에서 바라본 전정각산에 오르는 길. 그리 어려운 길은 아니지만 입구에 원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돈을 받고 산중턱까지 실어다 주기 위해 오토바이들이 서 있다.
전정각산을 오르는 길가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기를 안은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늘어서서 동냥을 한다.

바위산 꼭대기에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절벽 아래에 있는 전정각산굴은 현재 티베트 출신의 스님들이 관리하고 있으며 이분들이 운영하는 둥게스와리 석굴사원(Dungeswari Cave Temple) 경내에 위치한다. 이곳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순례객들이 찾는 곳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6 고행 기간 중에 머물렀다고 알려진 전정각산의 작은 자연동굴이다. 동굴 안은 그리 넓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들어갈 없어서인지 순례객들이 몰릴 때면 동굴 앞에는 길게 줄이 만들어진다. 다행이랄까, 전정각산굴에 들어서는 순례객들은 안에서 그리 오래 머무르지 않는 듯했다.

산중턱에서 바라본 전정각산의 모습. 하얀색 건물이 있는 곳이 둥게스와리 석굴사원이며, 건물 뒤쪽에 전정각산굴이 위치한다.
둥게스와리 석굴사원 내의 모습. 전정각산굴을 찾은 순례객들이 쉬고 있다.
왼쪽 굴 입구가 전정각산굴로 들어가는 입구이며, 오른쪽은 절벽 아래를 벽을 세워 예배실로 만든 곳이다. 주변의 장식이 티베트 사원의 느낌을 준다.
순례객들이 붓다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진 전정각산굴에 들어가려고 줄을 서 있다. 굴 입구의 벽에는 순례객들이 금박으로 붓다를 경배한 자국이 남아 있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순간 아무 것도 없었다. 동굴 안은 너무 어두웠다. 금방 동굴 안쪽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고행 중인 붓다상이었다. 바로 동굴에 머물 당시 붓다의 모습이 그러했을 것이다. 나는 입구 가까운 곳에 동굴 안쪽을 바라보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샨텀도 말없이 옆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앉아 있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 온몸으로 사투를 벌이던 곳에 자신이 앉아 있다는 생각에 온몸에 감동이 밀려왔다.

동굴 안의 어두움에 시각이 조금 익숙해지자 내부의 모습이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순례객들은 들어와 붓다의 고행상에 예를 표하고 불전함에 지폐를 넣고는 금방 나가버렸다. 그러고 보니 어두운 동굴 안에 고행하는 붓다상만큼이나 큼지막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영어로 적혀 있는 불전함이었다. 그리고 쿠시나가르(Kuśinagar) 열반당(涅槃堂, Nibbāna Temple)에서 보았던 것처럼, 붓다의 고행지를 지키려고 있는지 아니면 불전함을 지키려고 있는지 없는 티베트인 또는 인도인 승려가 한쪽 구석에서 서성이는 모습도 보였다.

전정각산굴의 정면 모습.
전정각산굴에 들어서면 마주하게 되는 고행 중인 붓다상.
붓다의 고행상 중 가장 유명한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행하는 붓다상 (Fasting Buddha). 청흑색의 각섬편암으로 만들어진 이 불상은 싯다르타가 해탈하기 전 단식 고행을 하던 시기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 높이 80cm 의 좌상으로 간다라 예술의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 왼쪽 ); 라호르 고행상은 많은 모사품이 만들어졌는데 , 우리가 흔히 접하는 고행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행상이 철로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갖게 한 것 같다 . ( 오른쪽 )

동굴을 나오면 바로 남쪽으로 절벽 아래를 하얀색 벽으로 막아 붓다를 모셔 놓은 방을 만들어 놓았으나 순례객들의 발길을 잡지는 못하는 모습이었다. 사원의 북쪽으로 돌아 정상으로 오를 있다. 멀리까지 전경을 감상할 있고, 고대 스투파들도 살펴볼 있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순례객들은 전정각산굴만 염두에 두고 이곳을 찾기 때문에 그리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찾는 것이 아니어서인지 정상까지 오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전정각산의 유래와 유영굴의 전설

이곳 전정각산굴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6년간의 고행 기간 내내 기거하며 수행정진하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고행 기간 일정 기간 동안에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는 6년의 고행 기간을 마칠 무렵 아사 직전 우루벨라(Uruvela) 마을의 숲이 울창한 네란자라강(Nerañjarā, 산스크리트어 Nairanjana, 尼連禪河) 강변에서 수자타(Sujātā)로부터 유미죽(乳味粥) 얻어 먹고 기운을 차린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기 직전 잠시 전정각산에 올라 찾았던 곳이 전정각산굴이라는 이야기까지 다양한 전정각산굴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가운데 어떤 이야기가 역사적 붓다와 지금은 전정각산굴로 알려진 동굴과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전정각산굴이 역사적 붓다와 관련이 있기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러한 혼란은 붓다의 전기(傳記) 형성되어온 과정을 이해한다면 어느 정도 수긍이 수도 있다.

불교 전통에서는 붓다가 살아 있던 때부터 그의 깨달음과 가르침이 중요시되었으며, 그의 일생에 일어났던 일들이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일어났었는지에 대해 기록하는 일에는 무관심하거나 중요도를 구태여 무시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는 가장 초기 팔리어 경전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유지되고 있는 것을 있으며 이때부터 계속해서 전해져 내려오는 붓다의 전기는 없다. 이들 초기 경전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중요한 주제를 다루면서 이에 도움이 경우 단편적으로 시간 또는 지리적 정보가 주어져서 붓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구체적으로 알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초기 팔리어 경전에서 붓다의 출가 수행과 깨달음의 성취와 관련하여 자전적 설명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일부 학자들은 성스러운 구함이란 의미의 성구경(聖求經, Ariyapariyesana Sutta)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여기에서 출가 구도자, 사문(沙門, śramaa) 붓다는 자신의 영적 성취를 도와줄 있는 스승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무소유처(無所有處) 경지로 인도한 알라라 칼라마āra Kālāma)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경지로 인도한 우다카 라마푸타(Uddaka Rāmaputta) 찾아가 지도를 받았으나 그들의 가르침이 진정한 깨달음으로 인도할 없음을 깨닫고 붓다는 그들을 떠난다.

그런 나는 유익한 [] 구하고 위없는 평화로운 경지를 찾아 마가다 지방에서 차례로 유행하다가 우루벨라(Uruvelā) 근처의 세나니가마(Senānigāma) 이르렀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땅과 고요한 숲과 유유히 흐르는 깨끗한 강과 아름다운 강기슭과 근처에 탁발할 있는 마을을 보았다.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땅은 풍요롭고 숲은 고요하고 상쾌하다. 유유히 흐르는 강은 맑고, 강기슭은 아름답다. 근처에는 탁발할 있는 마을이 있다. 참으로 이곳은 열정적인 노력을 원하는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용맹정진하기에 적당한 곳이다.’ – 성구경

성구경을 비롯하여, 마지히마 니카야(Majjhima Nikaya, 中部)에서 붓다의 출가 수행, 고행 깨달음의 성취를 다루고 있는 사자후대경(師子吼大經 Mahasihanada Sutta), 살차가대경(薩遮迦大經 Maha Saccaka Sutta), 보리왕자경(菩提王子經 Bodhirajakumara Sutta) 등에서 스승을 떠난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하기까지 구체적인 발자취를 남긴 곳을 언급한 것은 이것이 유일한다. 붓다가 스스로 밝힌 것처럼 그는 우루벨라 근처의 세나니가마에 당도했다. 전정각산 또는 전정각산굴에 대한 언급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

세나니가마는 현재 바끄라우르(Bakrour) 마을로 추정되고 있다. 바끄라우르 마을에서 가을 추수하는 장면. 우리의 옛 시골 풍경 같다. 저명한 팔리어 학자였던 부다고사(Buddhaghoṣa, 佛音)와 담마팔라(Dhammapāla)는 우루벨라(Uruvelā)가 드넓은 모래사장 또는 홍수로 모래가 쌓인 강둑을 가리킨다고 했다. 따라서 특정 마을이 아니라 그러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으며, 현재 일부 학자들은 우루벨라에는 여러 개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바끄라우르는 여전히 가난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이 마을 또는 바로 인근 지역이 붓다 당시 세나니가마였다고 하는데 우루벨라의 마을들 중 하나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후대 대승불교 불전에서 나타나는 세나파티(Senāpatigrāma)와 일치한다. 부다고사에 의하면, 당시에 군사 주둔지였다고 한다.

붓다의 바람과는 달리 고대로부터 붓다의 일생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들을 둘러싼 전기를 쓰려는 시도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렇게 후대에 쓰여진 붓다의 전기들은 붓다 입멸 수백 년이 지난 뒤부터 성립된 것이고, 더구나 붓다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입장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여러가지 창작과 가탁이 첨가되고 신화적ž전설적인 요소가 대단히 많다. 불교경전 중에서 붓다의 생애를 주제로 것을 일반적으로 ‘불전(佛傳)’, ‘불전경전(佛傳經典)’, 또는 ‘불전문학(佛傳文學)’이라고 하며,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한역(漢譯), 티베트어 역본(譯本) 등으로 다양하게 존재한다.

중요한 불전으로는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것으로 부파불교의 대중부(大衆部, Mahāsaghika) 가운데 설출세부(說出世部, Lokottaravādin) 율장(律藏) 자료를 집대성한 마하바스투(Mahavastu, 大事), 붓다의 생애를 서사시적으로 묘사한 일련의 대승 원시경전인 랄리타비스타라경(Lalitavistara Sūtra, 普曜經), 불교시인 아슈바고샤(Aśvaghoa, 馬鳴) 의해 카비야(Kāvya) 체라는 아름다운 미문(美文)으로 쓰여진 붓다짜리따(Buddhacharita, 佛所行讚), 자타카(Jātaka, 本生譚) 서문에 해당되는 니다나카타(Nidānakathā, 因緣品) 등이 있고, 한역으로는 보요경(普曜經),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Abhiniskramana Sutra) 등이 있다.

이들 대승불교 불전에서는 붓다가 우루벨라에 이르기 전에 가야산(伽倻山, Gayāsirśa)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붓다가 고행한 장소가 우루벨라 마을의 동쪽의 네란자라강 강변이었다는 초기 팔리어 경전에서 보다는 자세한 붓다의 행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정각산 또는 전정각산굴에 대한 언급은 여전히 찾을 없다. 전정각산굴에 대해 언급한 사람은 5세기 이곳을 찾았던 동진(東晋) 유학승 법현(法顯) 7세기에 역시 이곳을 찾았던 () 유학승 현장()이었다.

법현은 그의 여행기록인 불국기(佛國記)에서 우루벨라에서 북동쪽으로 0.5 요자나(yojana), 6~7.5km 거리에 바위에 조그만 동굴이 있고 그곳에서 붓다가 서쪽을 향해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고 기록했다. 그에 의하면, 바위 벽에 붓다의 그림자가 나타났었으며, 자신이 찾았을 때까지 자리가 밝게 빛났다고 했다. 범천(梵天) 나타나 붓다에게 이곳은 과거ž미래의 제불이 완전한 지혜를 얻게 되는 곳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0.5 요자나도 되지 않는 거리에 보리수가 있으며 그곳에서 과거ž미래의 제불이 완전한 지혜를 얻게 것이라고 알려주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한역 불전 기록에서는 수자타에게서 유미죽은 받아 드시고 기운을 차린 붓다는 바로 서쪽으로 네란자라강을 건너 보리수로 향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보리수로 향하기 전에 북동쪽에 있는 바위 동굴로 향했다는 이야기나 붓다의 그림자 이야기 등은 법현이 접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 기록에 나타나는 것인지, 법현 자신의 창작인지는 수는 없으나 법현이 접했을 현재 전하는 한역 불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법현이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 현지인 가운데 누군가가 현지에서 전해져 오는 전설을 들려주고 안내하지 않았다면 짧은 방문기간동안 법현이 이곳을 찾아내기도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399 60세가 넘어 인도로 구도여행을 시작한 법현은 683년에 당나라의 지바하라(地婆河羅) 번역한 방광대장엄경과 6세기 ()나라의 사나굴다() 번역한 불본행집경을 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412-421년에 북량(北凉) 담무참(曇無讖)또는 5세기 초에 ()나라 보운(寶雲) 번역한 불소행찬도 그의 여행기간을 고려하면 접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방광대장엄경의 이역경으로 알려진 보요경은 4세기 서진(西晉) 출신의 축법호(竺法護)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법현도 접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7세기에 인도 구도여행을 떠난 현장의 경우, 모든 한역 불전기록을 접했을 가능성이 높고 법현의 여행기록까지도 모두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정각산굴에 대한 현장의 기록은 법현의 기록을 좀더 발전시킨 느낌이 든다. 전정각산이란 이름도 현장이 붙인 것인지 수는 없으나, 현장은 자신의 여행기록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붓다가 정각(正覺) 얻으려 하면서 먼저 산에 올랐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현장의 기록에 의하면, 수자타의 유미죽을 받아먹고 기운을 차린 붓다는 동북쪽으로 산을 보자 유적(幽寂) 느낌이 들어 여기서 깨달음을 열고자 했으나, 정상에 이르자 대지가 진동하고 산이 흔들렸으며 놀란 산신이 붓다에게 산은 깨달음을 여는 좋은 곳이 된다고 설득했다. 서남쪽으로 산을 내려오던 붓다는 산허리에서 동굴의 석실을 발견하고 들어가 발을 괴고 앉았으나 다시 대지가 움직이고 흔들리며 산도 기울었다고 한다. 그때 정거천(淨居天) 하늘에서 소리 높여 이곳은 붓다가 깨달음을 곳이 되며 여기에서 서남쪽으로 14~5 되는 곳에 보리수가 있고 아래에 금강좌가 있으며 과거ž미래의 제불이 모두 자리에서 깨달음을 열게 되는 곳이니 그곳에서 깨달음을 열라고 알려 주었다.

그러나 동굴에 살고 있던 용이 붓다에게 동굴에 남아 깨달음을 열어 달라는 소망을 뿌리치지 자신의 그림자를 남겨 놓고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굴은 유영굴(留影屈)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현장은 또한 아소카왕이 붓다가 산을 오르면서 오르내린 자국에는 모두 기념하는 표지를 하고 스투파를 세웠다고 기록했다.

이곳에 오를 때마다 인도고고학조사위원회(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에서는 이곳을 방치하고 안내판 하나 세우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고고학 측면에서 고증하고 검증하는 일은 어려울 것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이곳을 찾는 순례객들의 마음에는, 옛날 법현이나 현장이 그랬을 것처럼, 변함없이 붓다의 고행의 현장에 함께 한다는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킬 같다.

不二 / 2020. 5. 20. 14:27 / 불교성지 여행/인도

칼링가전투 현장, 아쇼카왕의 불교 귀의

칼링가(Kalinga) 인도 중동부 해안지방의 옛이름이다. 지배자마다 영토가 변하면서 경계선도 따라 변경되긴 했지만, 일반적으로 마하나디(Mahanadi) 강과 고다바리(Godavari) 강을 경계로 하는 지역이다. 넓었을 때에는 지금의 오디샤(Odisha) 전체와 안드라프라데시(Andhra Pradesh) 주의 북동부 지역, 텔랑가나(Telangana) , 차티스가르(Chhattisgarh) 등의 일부가 포함되는 넓은 지역이었다.

칼링가가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Maurya) 왕조 3 왕인 아소카(Aśoka, 산스크리트 Ashoka) 왕이 지방을 정복했을 때였다. 칼링가전쟁은 매우 치열했으며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불교 전승에 의하면, 참혹한 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아소카왕은 번민하게 되었고 결국 불교에 귀의하여 정법(正法, Dharma)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轉輪聖王, chakravarti-rāja) 되었다고 전한다.

인도 안드라프라데시주의 작은 마을 아마라티(Amarāvati)에 있었으나 지금은 다 허물어져 버린 큰 스투파의 아름다운 부조에 묘사된 전륜성왕의 모습으로 아소카왕을 묘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1세기, 파리 국립기메동양박물관(Guimet Museum)

전쟁을 통해 통일제국의 통치권을 확립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우리아왕조를 찬드라굽타(Chandragupta, 322-297 BCE) 이래로 세력을 확대하여 왕의 통치권을 제약하고 있던 브라만 세력을 극복하고 다양한 계급 계층을 포용해야 필요성을 가지고 있던 아소카왕으로서는 사회통합을 위해 계급을 부정하고 모든 계층의 평등을 주장하는 불교를 받아들일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평온하기만 전쟁터

아소카왕이 기원전 261 칼링가를 정복하면서 참혹한 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 오디샤(Odisha) 주도인 부바네스와르(Bhubaneswar)에서 남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울리(Dhauli) 지역이다. 316 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다야(Daya) 강을 건너자 마자 오른쪽으로 빠져나와 다울리路를 따라가면 이곳을 유유히 흘러가는 다야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다다른다. 언덕이 다울리기리(Dhauligiri)이다.

아소카왕의 군대와 칼링가왕국의 군대가 일전을 벌였던 다야강과 다울리기리 지역

다울리路를 따라 다울리기리로 향하는 길가에서 먼저 바위에서 코끼리가 나오려는 듯한 모습으로 코끼리 머리와 앞다리가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는 곳을 만난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칼링가 정복 무자비하게 살육된 시체들을 바라보며 정복과 살육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아소카왕은 물리적 정복을 포기하고 대신 문화정복 정책으로 전환했다고 한다. 코끼리 조각상이 바로 아소카왕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던 장소를 표시한다고 전해지기도 하는데 믿어야 지는 모르겠다.

다울리기리 주변 지역 지도.
다울리기리로 향하는 길가에서 만나는 코끼리상으로 유명한 다울리기리 아소카 바위 담마칙령. 관리인이 깨끗이 정비하고 있는 내부와는 달리 외부는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다울리기리 아소카 바위 담마칙령에 새겨져 있는 칙령 내용들. 특이하게도 칼링가전쟁 내용이 포함된 칙령 13호와 칙령 11호, 12호가 빠져 있고 그 대신 별도의 칙령 2개가 새겨져 있다.

코끼리상은 기원전 3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오디샤주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조각상이면서 매우 희귀한 마우리아시대의 예술품이기도 하다. 코끼리 조각상은 붓다의 탄생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아소카왕이 폭력을 버리고 불법에 귀의하여 이룬 정신적 탄생과 연관하여 이곳에서 아소카왕이 심경의 변화를 맞았다는 이야기로 발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들었다. 코끼리 전체의 모습이 아니라 상반신이 바위에서 나오려는 모습이라 인상적이었다.

바위의 윗부분에 코끼리의 상반신이 조각되어 있다. 아소카왕 시대의 조각상이며, 이 바위 아래 부분에 바위 담마칙령이 새겨져 있다.
코끼리상은 2300년 동안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여전히 보호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코끼리상에서 돌아 아래로 내려오면 같은 바위의 벽면에 다울리 바위 담마칙령(Dhauli Rock Edict)으로 알려진 아소카 칙령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는 칙령 1~10, 14 별도의 2개의 칙령이 새겨져 있다. 바위 담마칙령은 마우리아왕조의 전통적 거점이었던 비하르(Bihar) 지역이 아닌 아소카왕에 의해 통치되던 지방 변경지역에 주로 설치되었다. 칙령의 내용도 본질적으로 도덕적이고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붓다 혹은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정법(담마)이라는 일반적인 개념 아래 질서 있고 적절한 행동 그리고 비폭력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아마도 당시 급격히 팽창한 광대한 영토를 멀리 떨어진 파탈리푸트라에서 감당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변경의 모든 국민들을 포용하고 교화할 있는 방법이 필요했었을 듯하다.

코끼리상이 조각된 바위의 측면 아래쪽에 새겨진 바위 담마칙령을 보존하기 위해 보호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바위 위에 새겨진 다울리 바위 담마칙령.
다울리 담마칙령의 별도 칙령 1호 탁본.

다울리 바위 담마칙령 주변은 아름다운 정원처럼 꾸며져 있다. 특별히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꾸며진 정원인가 보다 하고 지나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일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아 한산한 편이었다. 특히 이곳을 찾는 인도인 방문객들은 대부분 이곳을 그냥 지나쳐 정상으로 항했다. 우리도 아쉬운 마음을 접고 이곳을 나와 언덕을 향했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 다다르자 주차장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인도의 여느 사원이나 관광지에서처럼 주자장을 둘러싸고 가장자리를 따라 열을 지어 기념품점들이 들어서 있고 가운데 공간과 길을 따라 사람들을 싣고 차량과 버스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었다. 여기서 정상을 향해 조금만 걸어가면 가장 높은 곳에 세계평화탑으로도 불리는 하얀색의 비슈와 샨티 스투파(Vishwa Shanti Stupa) 나타난다.

다울리기리 정상의 주자장 모습.
다울리기리 정상에 자리 잡은 세계평화탑(샨티스투파).

다야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있는 언덕 위에 위치한 샨티스투파는 일본불교에서 「법화경」을 소의로 하는 법화계열의 신생종파인 일본산 묘법사에서 세계 도처에 건립한 80개의 세계평화탑 가운데 하나로 1972년에 건립되었다. 불상이나 사자상을 포함하여 스투파의 여기저기를 살펴보면 시멘트로 조악하게 처리되어 있어 마을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평화탑이 다울리기리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세계평화탑에 올라서면 칼링가전쟁 당시 전장의 무자비한 살육으로 핏물이 온통 빨갛게 흘러 넘쳤다고 했던 다야강과 주변의 전장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지금 아래에 흘러가고 있는 다야강의 강물은 여느 강과 같이 푸르스름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강이 넓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기대와는 다르게 강폭이 상당히 좁았다. 그리고 강의 양안으로는 드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논밭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사람들이 거주하는 마을도 드문드문 눈에 띈다.

다울리기리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다야강과 주변 평야의 모습 .
그 옛날 참혹했던 전쟁터의 흔적은 하나도 찾을 수 없다.
오디샤주는 다울리기리를 세계적인 불교유적지로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앞으로 몰려올 관광객을 위해 다울리 수공예품시장을 조성했으나 제대로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수공예품시장은 인도의 다른 곳에서도 보아오던 것처럼 동선계획이나 시설의 수준이 낮은 것도 문제이지만, 시장 수요에 대한 고려 없이 이렇게 큰 투자를 해 놓았는데 텅 빈 곳으로 남아 있어 마음이 아팠다.
수공예품시장 인근에 다울리 예술공예대학이란 교육시설이 위치하고 있었다. 입구 정원에는 이곳에서 교수 및 학생들이 제작한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예술공예대학의 존재도 수공예품시장이 이곳에 유치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공예대학의 복도에서 작품을 만들고 있는 모습.

칼링가왕국의 상황

칼링가국은 아소카왕의 담마칙령에 크게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대해 알려진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 수도는 토살리(Tosali) 지금의 오디샤주 주도인 부바네스와르 인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곳에서는 불교와 자이나교가 모두 성행했었다. 칼링가국은 아소카왕에게 정복당할 당시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강력한 왕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아소카왕의 군대가 침공해오기 훨씬 이전부터 칼링가국은 버마 땅에도 식민지를 건설했었던 것으로 전한다.

칼링가국 국력의 근간은 무역에 있었다. 대부분의 벵골만(Bay of Bengal) 장악하고 있어 칼링가의 항구들은 자바, 말레이, 발리 등의 동남아 섬들과의 무역에서 우위에 서있었으며 동남아시아와 인도를 연결하는 해로(海路) 장악하고 있었다. 무역만 왕성했던 것은 아니었다. 칼링가의 토지는 강들을 끼고 있어 비옥했으며 주민들에게 번영을 가져왔다.

따라서 칼링가국의 왕에게는 이러한 부를 배경을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대가 있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us Siculus) 의하면, 특히 칼링가군에는 거대한 규모의 코끼리부대가 있었다. 주변의 많은 나라들이 코끼리부대의 규모와 힘에 압도당하여 두려움을 느꼈으며, 어느 나라에게도 정복된 적이 없다고 했다.

고대에는 코끼리부대가 전쟁에서 가공할 만한 위협적인 존재였다 .

셀레우코스 왕조(Seleucid Empire)에서 대사로 파견되어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궁정에서 머물렀던 메가스테네스(Megasthenes) 칼링가의 군사력에 대해 간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있다. 그에 의하면, 찬드라굽타 시절에 칼링가국의 왕은 근위대로만 6만명의 보병, 1 명의 기병, 700마리의 코끼리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왕의 근위부대 규모가 정도였다면 칼링가국 전체의 군사 규모는 훨씬 컸을 것이다.

칼링가의 진정한 힘을 느낄 있는 것은 찬드라굽타가 인도의 넓은 영토를 정복해 나갔으며 알렉산드로스왕의 동방 정벌에 참가하여 알렉산드로스 사후 광대한 그리스계 왕국을 건설했던 셀레우코스(Seleucus) 왕을 격퇴하면서도 자신의 제국의 수도 파탈리푸트라(Pāaliputra)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했던 칼링가를 정복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한 그의 아들이자 아소카왕의 부왕인 빈두사라(Bindusara) 강력한 군주였으며적들의 살육자(Amitraghata)’라고 알려진 인물이지만 칼링가국을 침공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같다.

칼링가의 역사와 관련하여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 가운데 하나는 칼링가전쟁 당시 칼링가국의 왕은 누구였는가 또는 달리 표현하자면 칼링가국은 왕국이었는가 아니면 다른 형태의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역사 기록의 부재로 혼란이 있지만, 많은 학자들이 칼링가전쟁 당시 칼링가는 군주제 국가가 아니라 밧지연합(Vajjian Confederacy, 跋祇國) 또는 말라(Malla, 末羅) 같은 고대 인도의 공화제 국가였을 거라고 주장한다.

놀랍게도 아소카왕은 잔혹한 전쟁에서 자신이 무찌른 칼링가국의 이름을 칙령에 새겨 넣지 않았다. 당시에는 관행적으로 승리한 정복자가 자신이 굴복시킨 상대방 왕의 이름을 기록으로 남겼다. 아소카는 어떤 이유에서 인지 이러한 관행을 따르지 않았다. 이후의 마애칙령에서는 자신이 특사를 파견했던 외국 궁정의 이름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아소카는 자신의 인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온 칼링가전쟁에서 승리한 칼링가국 왕의 이름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는지는 정확히 수는 없다.

그러나 아소카는 칼링가전쟁을 기록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칼링가국의 또는 국민을 지칭하며 칼링가라는 용어만 사용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칼링가가 사람의 뚜렷한 군주를 갖지 못한 과두정치 또는 공화정 체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추정하기도 한다. 아마도 여기에서 칼링가국이 공화제 국가일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 듯하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의견에 의문이 들었다.

고대 공화제 국가들은 대부분 작은 국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대부분 하나의 중심도시를 중심으로 주변의 마을들을 통합하고 있는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규모였던 밧지연합의 경우에도 밧지(Vajji)족과 릿차비(Licchavi) , 8개의 종족이 각자의 지배 영토를 가지고 연합하여 세운 공화국으로 비교적 넓은 영토와 체계적 지배 체제를 갖추고 있었지만 남쪽으로 고다바리강에서 북으로 갠지스강 유역에 이르고 동으로는 칼링가 해안에서 서쪽으로 빈디아산맥(Vindhya Range)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던 칼링가국과 비교할 있을 정도의 규모는 아니었다.

칼링가와 같은 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통치시스템과 조직적인 행정시스템을 갖추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각지의 반란 등으로 사회는 혼란스럽고 안정적인 통상을 확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영토를 넓혀가던 찬드라굽타 빈두사라의 마우리아왕국에 맞서 오랫동안 경쟁관계를 유지하고 영토를 보존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전쟁의 배경

아소카는 왕의 자리에 즉위한 8년이 되는 (기원전 261, 혹은 262년으로 추정)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달성하지 못했던 업적을 달성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칼링가 땅으로 쳐들어갔다. 칼링가전쟁은 인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처참했던 전쟁 하나로 꼽힌다. 처절한 전쟁 끝에 칼링가는 마우리아제국에 병합되었다. 아소카왕은 전쟁의 참상이 극심했었음을 자신의 마애칙령 13호에 기록했다.

칼시(Kalsi) 마애칙령의 앞면(동쪽, 왼쪽)과 그 탁본(오른쪽). 우타라칸트(Uttarakhand) 칼시의 바위 앞면에 아소카왕의 칙령 1~12호와 13호의 앞부분이 새겨져 있다.
코끼리가 새겨진 칼시 마애칙령의 북면(왼쪽 위)과 칙령 13호의 나머지와 14호 새겨진 남면(왼쪽 아래)의 탁본과 그 내용(오른쪽).

왕위에 오른 8년이 지나 이제 신의 총애를 받는 쁘리야다르시(Priyadaarsi) 칼링가를 정복했노라. 15 명이 포로가 되었고, 10 명이 전사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유들로) 죽었다. 이제 칼링가는 합병되었고, 이후로는 신의 총애를 받는 자는 충실히 정법을 실행하고, 정법을 갈망하고, 정법을 가르쳤노라. 칼링가를 정복하고 , 신의 총애를 받는 자는 깊은 회한에 잠겼다.” – 아소카, 마애칙령 13 중에서

구자라(Gujarra) 본 작은 바위 담마칙령 1호에 새겨진 아소카대왕의 정식 칭호, 데바남피야 피야다시 아소카라자(Devanampiya Piyadasi Asokaraja). 칙령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명칭인 신의 총애를 받는 자 피야다시 (Devanampiya Piyadasi) 또는 쁘리야다르시(Priyadaarsi)왕이 아소카왕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아소카왕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추구해 영토확장정책을 계속 추진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피해왔거나 또는 실행했으나 실패했을 칼링가 정복을 단행했다. 그러나 칼링가 정벌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전쟁에서 칼링가 측에는 10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아소카왕의 군대에도 비슷한 규모의 피해가 발행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다른 전설에 따르면 아소카 군대는 칼링가 군의 절반의 피해를 입었다고도 한다. 아소카왕이 입은 피해 규모를 정확히 확인하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을 테지만, 피해 규모가 막대했음은 사실인 듯하다.

이렇듯 엄청난 피해를 무릅쓰고 아소카왕이 칼링가를 침공해 병합한 이유는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명확해 보인다. 칼링가 정벌은 찬드라굽타와 빈두사라가 추진해 인도대륙의 영토 통합과 인도대륙의 정치적 통합을 완결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칼링가 영토는 마우리아제국의 북부, 특히 제국의 중심인 수도 파탈리푸트라 지역을 남부지역과 분리시켜 통치, 상업활동, 군사 여러 면에서 짐이 되었을 것이다.

찬드라굽타는 기원전 321년 같은 마가다국 출신의 난다왕조를 멸망시키고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인도 침공과 퇴각 과정에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을 틈타 인도 서북부의 지배권을 확립하였고, 그 뒤를 이은 빈두사라왕에 이르러 칼링가와 인도 남부지역 일부를 제외한 인도대륙 대부분을 통합했다. (왼쪽); 마우리아제국의 3대 아소카왕에 이르러 칼링가를 합병하여 남부 일부를 제외한 인도 전체를 통일하여 마침내 세계제국을 완성했다. (오른쪽)

마우리아왕국은 제국의 수도 바로 남쪽에서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듯한 칼링가의 존재에 마음이 편치 못했을 것이다. 바로 이웃한 마우리아왕국의 강력한 경쟁자이면서 부유한 재정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칼링가가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점이 작지 않은 위협이었을 것이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칼링가는 인도양을 지배하며 해양무역을 독점했다. 칼링가가 동부해안에서 누리고 있던 패권으로 사실상 마우리아왕국의 상인들에게는 해로가 봉쇄되었던 것이다. 갠지스강 유역에서 남부 데칸(Deccan) 지역를 연결하는 육로통상도 칼링가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칼링가에 의해 통상이 봉쇄되면서 거대한 영토를 통치하는데 소요되는 막대한 재원 마련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란 점을 쉽게 짐작할 있다.

마우리아왕국은 찬드라굽타로부터 빈두사라를 거쳐 아소카왕에 이르기까지 급속하게 영토를 확장해왔다. 따라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운용해야 하는 군대 유지비와 드넓은 제국의 통치를 위한 비용이 급속히 늘어났을 것이다. 찬드라굽타 시대에 마우리아왕국의 군대 규모는 보병 60 , 기병 3 , 코끼리부대 9 마리와 전차 8 대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소카왕에 이르면, 마우리아의 군대 규모는 훨씬 커졌을 가능성이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아소카왕의 군대에는 인도 서북부 중앙아사아의 그리스계 왕국과 박트리아 출신의 용병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티베트불교 조낭파(Jonang School) 대학승이었으며 「인도불교사」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따라나타(Taranatha) 이야기로 인해 일부 학자들은 칼링가의 뱃사람들이 아소카왕에게 바치기 위해 값비싼 보물을 싣고 오던 배들을 약탈했다고 믿고 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면, 마가다 출신의 뱃사람들이 인도양을 항해했다면 방해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전의 어느 기록에도 없는 것을 이야기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확신할 없을 같다.

오디샤주 해안의 어촌마을에 널리 떠도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다. 이에 따르면, 아소카는 어부의 딸이면서 칼링가국 왕세자의 약혼녀였던 카루바키(Karuvaki) 미모에 반해 칼링가를 침공했다고 한다. 일견 터무니없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야기지만, 왕비 칙령에 아소카왕에게는 카루바키란 이름의 왕비가 있었음을 전한다. 그녀는 아소카왕의 번째 왕비이며 티발라(Tivala) 왕자의 친모였다. 아소카에게는 많은 왕비들이 있었지만 남아있는 아소카왕의 칙령에 이름이 새겨져 전해오는 유일한 왕비이며, 티발라 역시 이름이 새겨져 전해오는 유일한 왕자이다.

전쟁의 영향, 아소카왕과 불교

아소카왕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칼링가 지역을 정벌했다. 그는 인도 또는 세계 역사상 최고의 제왕으로까지 불리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아소카왕이 인도대륙에서 최초로 가장 넓은 판도를 가진 마우리아 통일제국을 건설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그후 그의 통치이념과 불교옹호정책이 역할을 덕분이었을 것이다. 칼링가전쟁은 아소카왕 자신뿐만 아니라 인류가 오늘까지 느낄 있는 영향을 남겼다고 있다.

칼링가전쟁의 참상으로 심경의 변화를 경험한 아소카왕은 바위 담마칙령 13호에서칼링가를 정복하고 , 신의 총애를 받는 자는 독립국이 정복당할 발생한 살육과 부상과 포로로 극도의 고통과 슬픔으로 마음이 무거웠다라고 적었다. 깊은 고뇌와 참회 끝에 아소카는 무력 정복(bherighosa) 포기하고 법의 정복(dhammaghosa)으로 전환했다.

적어도 외적으로는 또는 직접적으로는 칼링가전쟁의 참상으로 인한 고뇌와 참회로 아소카왕은 불교에 귀의 또는 불교 교리에 대한 옹호에 이르게 것으로 보인다. 북방불교와 남방불교의 전승에 따라, 아소카왕을 불교로 인도한 사람이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 스리랑카에서 내려오는 팔리어 전승에 의하면, 아소카왕은 즉위 3 동안은 자신의 부왕 빈두사라왕의 브라만 후원에 따라 6 명의 브라만을 보살폈다. 빈두사라왕과 왕비는 사명외도(邪命外道) 하나였던 아지비카(Ajivika)였으며, 따라서 아소카도 틀림없이 아지비카로 자라났을 것이다.

그러나 아소카왕은 자신이 후원하던 브라만의 행동에 점점 실망하게 되고 다른 종교에서 대안을 찾으려고 하던 차에 어느 창가 아래를 지나가던 동자승 니그로다(Nigrodha) 고요한 몸가짐에 이끌렸다. 그는 동자승을 데려오게 했다고 한다. 어린 동자승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이 제거했던 빈두사라왕의 왕세자이자 이복형이었던 수시마(Susima) 왕자의 아들이었다. 아소카왕은 니그로다를 좋아하게 되었고 불방일(不放逸, appamāda) 관한 설교를 듣게 된다. 이에 감동한 아소카왕은 삼보(三寶) 귀의하여 재가신도가 되었다고 한다.

아소카왕에 대한 전설로 가장 오래된 산스크리트어본은 불교설화를 집대성한 『디비야바다나(Divyāvadāna)』라는 책에 실린 것으로 통상 『아소카바다나(Aśokāvadāna)』라 불리는데 서진(西晉)에서 306년에 안법흠(安法欽) 의해 『아육왕전(阿育王傳) 7권으로 번역되고, 양나라 때인 512년에 건강(建康, 남경)에서 승가바라(僧伽婆羅) 의해 『아육왕경(阿育王經) 10권으로 다시 번역되었다.

전륜성왕에 대한 내용을 전하는 『아육왕전(阿育王傳)』이 해인사 고려대장경에 전한다. 서진(西晉) 안식삼장(安息三藏) 안법흠(安法欽)의 한역. 고려대장경연구소.
해인사 고려대장경에 전하는 전륜성왕에 대한 또 다른 번역으로 『아육왕경(阿育王經)』이 있다. 양(梁) 부남(扶南) 승가바라(僧伽婆羅)의 한역. 고려대장경연구소.

『아소카바다나』에 의하면, 아소카왕의 불교 귀의는 사무드라(Samudra)라는 승려가 행한 이적(異跡)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많은 불교학자들이 팔리어 전승이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아소카왕은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달리 불교에 귀의했으며 불교를 후원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리고 아소카왕의 불교 귀의는 그의 왕위 즉위 번째에 해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후 그는 파탈리푸트라에 있는 굴굴타아람마(Kukkuārāma, 屈屈阿濫摩)라는 사원을 자주 찾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불교 3차결집을 주관하게 되는 목갈리풋타팃사(Moggaliputta-Tissa)라는 고승을 만나게 된다. 또한 즉위 6 차에는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진 아소카왕의 자식들, 마힌다(Mahinda) 왕자와 상가미타(Saghamittā) 공주가 승려가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어느 불교 기록에도 칼링가전쟁이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그의 불교 귀의가 전쟁으로 인해 이루어진 일이라는 기록도 없다. 칼링가전쟁에 대한 기록은 아소카왕이 자신의 정복지에 건립한 마애칙령에만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소카왕은 전쟁으로 인해 불교에 귀의했다고 언급한 적이 없다. 전쟁 법의 실행과 전파에 열정을 쏟고 있다는 언급이 있어 그의 불교 귀의에 대한 언급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으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고 좀더 포용적인 정책을 펼치기 위해 불교의 가르침을 더욱 후원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 또한 충분히 있어 보인다.

아소카왕은 북인도에 머물고 있던 불교를 인도대륙을 통합하여 이룩한 거대한 제국 곳곳으로 퍼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 미얀마,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 그리스, 북아프리카 세계 각지로 불교 포교단을 파견하여 전파했다. 특히 스리랑카에는 자신의 왕자와 공주를 파견하여 포교에 성공하였고, 이로 인해 스리랑카는 남방불교(소승불교) 근거지가 되어 미얀마, 태국 수마트라, 자바 등의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불교가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不二 / 2020. 4. 1. 11:14 / 세계여행/스리랑카

피두랑갈라, 장대한 시기리야 조망점

피두랑갈라(Pidurangala)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관광명소인 시기리야(Sigiriya)로부터 북쪽으로 직선거리 1km 떨어진 곳에 솟아오른 바위산이다. 이곳은 시기리야 성채(城砦) 가장 조망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시기리야의 모습도 훌륭하지만 사방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전경도 숨을 멎게 만든다. 또한 피두랑갈라 정상은 멋진 해돋이를 감상할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어 해가 뜨기 전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피두랑갈라   정상에서   바라본   시기리야의   모습 .
시기리야 북쪽 사자문과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정상에 오르면 흔들바위를 만난다. 피두랑갈라가 화산활동으로 200m를 솟아오를 때도 굴러 떨어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나 보다!
시기리야를 배경으로 다양한 모습을 연출한다.

이곳 정상에서 누릴 조망은 정말 뛰어나다. 이곳 정상에서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대자연을 바라보면 감동이 밀려온다. 아마도 시기리야에서 있는 전경보다 뛰어난 같다. 그래서일까? 시기리야처럼 화려하지 않아서인지 이곳을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었다고 하는데, 이제 입소문으로 알려져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파두랑갈라와   시기리야   주변   지도.

시기리야 남문 입구에서 왼쪽으로 해자를 따라 가다 시기리야 북쪽에서 북쪽으로 길로 접어들면 그리 오래지 않아 피두랑갈라 입구에 이르게 된다. 거리는 2.6km 다른 길보다는 짧지만 이곳의 경비원이 차량을 통과시켜 주지 않아서, 차량으로 이동할 경우 되돌아서야 가능성이 크다. 차량이나 툭툭으로 이동할 경우, 다른 길은 시기리야호수를 지나 하바라나(Habarana) 향하는 길에서 서쪽으로 길로 들어서면 피두랑갈라에 도착할 있다. 길은 길이가 3.5km 이르며, 정글 속으로 길을 따라가다 보면 구석구석에서 민박집과 게스트하우스를 만난다.

멀리서 보면, 피두랑갈라는 사방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벌판에 봉곳이 솟아오른 소녀의 젖가슴 같다. 피두랑갈라는 시기리야와 같이 화산폭발로 생성되어 주변 평지에서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바윗덩어리이다. 바위기둥이 솟아오른 모습의 시기리야보다는 피두랑갈라가 좀더 보인다. 반면에 피두랑갈라의 정상에 오르면 시기리야와 같이 거대한 바윗덩어리이지만 심하게 경사가 있다. 아마도 옛날 시기리야 정상에 왕성을 건설했던 사람들에게 피두랑갈라의 정상은 그들의 목적에 들어맞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기리야 북쪽 정상에서 바라본 피두랑갈라의 모습. 시기리야와 같이 화산활동으로 융기한 바윗덩어리이지만 외관은 봉곳이 솟아오른 산봉우리 모습이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배경으로 갑자기 솟아 있는 산봉우리 하나가 신비롭다.

피두랑갈라사원

피두랑갈라에 오르려면 입구에 있는 불교사원을 통과해야 한다. 길가에서 가까운 사원입구로 들어서면 스리랑카의 불교사원을 방문할 때면 언제나 그런 것처럼 신발을 벗어야 한다. 이곳에는 승려 기거 시설, 불상을 모신 법당, 강연실 등으로 갖춰져 있다. 사원을 지나면 다시 신발을 신고 산을 올라야 하므로 우리는 신발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실제론 기부금으로 1인당 500루피) 구입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맞은편에 외관이 하얀색인 석굴사원이 나타난다. 이곳은 불상을 모신 법당이다.

피두랑갈라 정상에 오르는 길.
피두랑갈라 정상에 오르려면 이 입구를 통과해서 사원을 지나야 한다.

석굴사원 암벽의 상단 부분에는 담불라 석굴사원(Dambulla Cave Temple) 경우와 마찬가지로 빗물이 석굴 내부로 흘러 들어가지 못하도록 처리되어 있었다. 부분에 새겨져 있는 브라미(Brahmi) 문자로 추정해보면 석굴사원에 불교사원이 조성된 것은 최소한 기원전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피두랑갈라 언덕 기슭에 자리잡은 석굴사원 가장 안쪽에는 중앙에 와불상이 길게 누워 있고 좌우 양쪽 끝에는 입상 또는 좌상의 불상들이 마주보고 있다.

양쪽 끝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불상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석굴사원의 안쪽, 불상이 모셔져 있는 부분을 제외하면 외부의 하얀색 건축물과 승려들 기거 시설 강연실 등은 모두 역사가 그리 오래지 않다. 최근의 보수작업으로 양쪽의 불상에 현대적 기법이 적용되긴 했지만 원래의 우아한 모습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내실의 벽에는 붓다의 생애에서 주요한 장면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내실 출입문 주변에는 실물 크기의 마리의 사자와 칼을 쥐고 있는 수호신들이 지키고 있다.

피두랑갈라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석굴사원의 외관 모습.
하얀색 석굴사원 건물로 들어서면 불상을 모신 내실 입구를 사자와 수호신들이 지키고 있다.
석굴사원 내부에 불상을 모신 내실의 모습. 중앙에 길게 와불상이 모셔져 있고 좌우 양쪽 끝에 입상 또는 좌상의 불상이 마주보고 있다.

사원의 이름은 피두랑갈라 시기리 라자마하 사원(Pidurangala Sigiri Rajamaha Viharaya)이다. 피두랑갈라의 역사는 기원전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부터 불교사원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시기리야에 성채와 도시를 건설했던 카샤파 1(Kashayapa I, 473-495 AD) 통치하던 시기였다.

그는 당시 적자였던 목갈라나(Moggallana) 왕자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을 염려하여 아버지인 다투세나(Dhatusena, 455–473 AD)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 남인도로 피신한 목갈라나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를 버리고 이곳의 깎아지른 바위산 시기리야에 궁전과 난공불락의 요새를 건설했다고 전한다. 그는 시기리야에서 수행하던 승려들을 피두랑갈라로 옮기도록 하고 새로이 사원을 건립하도록 많은 기부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피두랑갈라라는 말도 싱할라어로 무더기를 기부한이란 의미라고 한다.

피두랑갈라 주변의 고고학 발굴현장 배치도.
피두랑갈라사원 길 건너편 북쪽에 있는 이 고대 스투파는 카샤파왕의 다비식이 이루어졌던 곳으로 전해져 온다. 스투파 위쪽 구조물은 사라지고 없다.

당시 카샤파왕이 건립했다는 우팔라바나 카샤파 기리 사원(Uppalavanna Kashyapa Giri Viharaya) 피두랑갈라에 위치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재의 피두랑갈라 시기리 라자마하 사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피두랑갈라 주변 일대에 넓게 자리잡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현재의 피두랑갈라사원으로부터 길을 건너 북쪽으로 200m 되는 곳에 퍼져 있는 피두랑갈라 고고학 발굴현장이 일부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엔 유적 잔해들이 여전히 곳곳에 남아있다.

석굴사원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피두랑갈라로 오르는 돌계단이 시작된다. 돌계단을 오르기 전에 신발을 다시 신을 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그리 힘들지 않을 정도이며 천천히 올라가도 30분이 걸릴까 말까 정도였다. 대부분의 길은 전혀 복잡하지 않아 따라갈 있을 정도였으며, 평지도 나타나지만 그리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진다.

석굴사원에서 시작되는 돌계단 입구.
정상으로 가는 돌계단은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었다.
돌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도달하면 오른쪽으로 거대한 피드랑갈라 바윗덩어리를 두고 산을 오르게 된다. 왼쪽으로는 숲이어서 멀리서 보면 하나의 산봉우리처럼 보인다.

벽돌 와불상

한동안 길을 따라 올라가면 만한 거리에 평지가 나타난다. 운동장처럼 넓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규모의 공간이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절벽 아래 부분에는 움푹 파인 공간이 길게 자리하고 있어 예전엔 석굴사원이 자리하고 있었던 같다. 석굴은 벽돌 벽으로 구분되어 여러 개의 방을 이루고 있는데 한가운데 가장 방에 13.7m 길이의 아름다운 벽돌 와불상(臥佛像) 누워있다. 벽돌로 불상을 조성하는 것은 폴론나루와(Polonnaruwa) 시대 불상의 특징이며, 불상의 의상 스타일도 폴론나루와 시대 불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벽돌 와불상 앞의 평지의 모습. 와불상 앞뒤로 여러 개의 방들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벽돌 와불상에는 외관을 장식했던 회반죽의 원래 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다.
와불상의 상반신은 오랜 세파를 겪으며 훼손되었다가 복원되었다.

와불상의 발치 아래로 6-7세기 싱할라어로 바위 위에 새겨진 명문(銘文) 있으나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닳아서 해독에 어려움이 있다. 어느 역사기록에도 피두랑갈라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곳의 여기저기에 새겨진 명문들이 피두랑갈라의 역사에 대한 해답을 제공할 있었을테지만, 이렇게 마모로 해독이 어렵거나 브라미어 명문처럼 너무 간단해서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미래에 신기술이 나와 완전한 해독의 실마리를 풀게 날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발걸음을 옮겼다.

피두랑갈라 정상

벽돌 와불상을 지나면, 정상까지 남은 구간이 아주 어렵지는 않지만 거의 암벽등반에 가까운 코스이다. 바위를 기어올라 가기도 해야 하고, 좁아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기다렸다가 다시 오를 있기도 하다. 활동이 자유로운 젊은이들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은 오르기 힘든 길이다. 그리고 마지막 걸음은 등반의 화룡점정이라도 되듯이 크게 뛰어올라야 하는데 거대한 바위에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마침내 정상에 올라서면 모든 수고로움이 하나도 아깝게 느껴지지 않을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피두랑갈라에서 바라보는 시기리야의 모습에서 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인생샷하나 만들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경치였다. 그래서인지 시기리야를 바라볼 있는 흔들바위 주위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다.

피두랑갈라에서 바라본 남쪽 전경.
피두랑갈라에서 바라본 남쪽 전경.
시기리야 조망점에 바라본 시가리야의 북면 모습.

그러나 흔들바위를 지나 정상의 넓게 열린 공간으로 나오면 사방 킬로까지 시야를 가리는 것이 전혀 없다. 거대한 바윗덩어리 위에 신기하게도 무리의 나무가 있다. 나무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좁고 비교적 평평한 반면, 서쪽으로는 넓고 크게 경사가 있다. 주변 경치를 휴대폰에 담는 사람들도 있고, 여기저기 홀로 앉아 명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해돋이 조망점에 바라본 피두랑갈라 정상의 모습.
피두랑갈라 정상에서 만나는 한 무리의 나무들.
해돋이 조망점에 바라본 북쪽 전경.

내려가는 길은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간다. 오래 머물고 싶고, 다시 찾고 싶은 곳이었다. 영감을 받고 싶을 찾고 싶은 곳이었다. 고대로부터 진리를 찾아 정진하기 위해 불교 승려들이 밀림 한가운데 불쑥 솟아 있던 이곳에 자리 잡았던 것도 그런 이유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우리는 하산을 시작했다.

不二 / 2020. 3. 9. 10:24 / 세계여행/우즈베키스탄

테르메즈, 고대 서역 불교의 중심지

이른 아침 테르메즈(Termez) 국내선 항공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테르메즈가 주도로있는 수르한다리야(Surxondaryo) 지역을 둘러볼 참이었다. 옛날 구법승들이 지역에서 아무다리야강(Amu Darya River, 고대 그리스 Oxus) 건너서 발흐(Balkh, 고대 그리스 Bactra), 바미안(Bamyan), 카불(Kabul) 지나 카이버고개(Khyber Pass) 넘고 페샤와르(Peshawar) 카슈미르(Kashmir) 거쳐 인도를 오갔었다. 길은 또한 아득한 옛날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인도 평원을 공략하기 위한 침입로로도 사용되어 왔었다.

사마르칸트(Samarkand)에서 테르메즈에 이르는 좁은 고갯길로, 7세기에 이곳을 지나갔던 현장() 자신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묘사했던 철문관(鐵門關, Iron Gate) 보고 싶어 차로 이동하고 싶었으나 모두 걱정하는 소리를 했다. 도로 사정으로 하루 종일 차를 타야 거라고 했다. 파미르-알라이(Pamir-Alay) 산맥에서 뻗어 나온 기사르산맥(Gissar Range) 서쪽 끝이 수르한다리야의 북쪽 경계를 감싸고 지나가면서 수르한다리야를 우즈베키스탄의 다른 지역과 분리시켜 독특한 문화와 식생을 발전시켰다. 우즈베키스탄 지역의 기사르산맥에서 가장 높은 곳은 4,634m 이른다.

수르한다리야로 향하는 비행기 기내에서 내려다 본 기사르산맥의 모습. 러시아 항공기여서 깨름직한 마음으로 이륙을 했지만 금새 바깥 정경에 마음이 빼았꼈다. 저 너머에 파미르고원이 펼쳐진다.

아무다리야강 북안에 자리잡고 있는 테르메즈는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더운 곳이다. 남쪽으로는 아무다리야강을 사이에 두고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이웃한 접경지로 군사도시이기도 하다. 도시의 이름은 이란어 tara-maiθa 연원을 소그드어 Tarmiδ에서 것으로건너는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에도 이곳은 아무다리야강을 건너던 곳이었던 모양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어로따뜻한이란 의미의 thermos에서 왔다고 주장하는데, 알렉산더대왕과 연결하기도 한다. 밖에도강둑 위에 있는이란 의미의 산스크리트어 taramato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다. 고대도시 테르메즈가 언제 정확히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없지만, 2002 도시 건립 250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식이 있었다.

나를 태운 비행기는 높은 산맥도 발밑 아래에 두고 가뿐히 넘어 테르메즈 공항에 내렸다. 호텔에 체크인부터 했는데도 여전히 오전 이른 시간이었다. 우리는 테르메즈의 고대 불교 유적지를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테르메즈는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간다라(Gandhara, 陀羅) 지방(현재 파키스탄 페쌰와르 지역) 거쳐 카이버고개를 넘고 바미안 지방을 거쳐 사마르칸트 쪽으로 올라가는 경유지여서 부근에서는 불교 관련 유적지와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실크로드의 중간에 위치한 지리적인 이점이 불교 중심지가 되는데 크게 작용했던 같다.

테르메즈 공항의 대합실 창문 너머로 낡은 트럭이 수하물을 실어와 컨베이어 벨트에 수하물을 부리고 있다. 같은 세기를 살고 있는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개도국을 여행하다 보면 흔히 보는 광경이기도 하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정벌과 헬레니즘 문명의 확립

길목에 위치한 땅이어서 외래 문명을 빨리 접할 있었던 장점도 있었지만,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땅이기도 했다. 기원전 6세기에 이미 이란의 아케메네스(Achaemenes) 왕조의 침입이 있었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나 기원전 4세기에는 마케도니아(Macedonia)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이곳 테르메즈를 점령했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점령은 이곳에 동양의 문화에 그리스 문화가 더해져 새롭게 탄생한 헬레니즘 문화가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됐다. 고대 자료에 알렉산드로스대왕이 건설했다는옥수스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on the Oxus)’라는 도시가 바로 테르메즈였다.

사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내에서도 아테네와 스파르타처럼 선진적인 도시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변방의 작은 왕국이었다. 그리스 자체도 거대한 이웃 페르시아제국의 침략과 괴롭힘을 당하는 처지였다. 이러한 처지에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Philippos II) 군사력을 키워 그리스 전체를 수중에 넣고 페르시아제국 자체를 멸망시키고 땅을 차지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 필리포스는 아들 알렉산드로스의 눈부신 활약으로 마침내 숙원이었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공수동맹인 코린트동맹(League of Corinth) 맹주 자리에 오르고, 이어 페르시아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경호원 명에게 불의의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기원전  500 년경   아케메네스왕조   시대의   페르시아제국   영토 .  페르시아제국은   속주의   종교와   관습을   최대한   인정하면서   주변   문명을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로   녹여낸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  박트리아는   거대한   페르시아제국의   동쪽   끝에   위치했다 .  위키피디아 .

필리포스가 갑작스럽게 죽고 , 알렉산드로스는 불과 20세의 나이에 순식간에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제거하고 필리포스의 후계자로 마케도니아의 왕위와 코린트동맹의 맹주 지위를 차지했다. 그런 다음 그는 아버지의 원대한 꿈인 페르시아 정벌을 단행했다. 기원전 334 코린트동맹의 총사령관으로 메케도니아-그리스 동맹군을 소집한 알렉산드로스는 47천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의 문호라는 뜻의 헬레스폰트(Hellespont, 현재 다르다넬스해협) 건넜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대군도 당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Darius III) 군대와 비교하면 골리앗을 상대하는 다윗 정도밖에는 여겨지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의 흉상.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알렉산드로스와 다리우스는 이수스(Issus) 가우가멜라(Gaugamela)에서 2차례에 걸쳐 결전을 치렀다. 알렉산드로스가 불가능이라 여겨지는 어려움을 불굴의 의지와 창의적 전법으로 이겨낸 반면, 다리우스는 이해할 없는 전투 지휘관의 도주로 페르시아군의 전열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말았다. 번의 전투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세계제국을 잃고 것이다.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추격을 피해 페르시아제국의 가장 동쪽 끝에 있는 박트리아(Bactria) 도주했지만, 그곳의 총독(satrap) 베수스(Bessus)에게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이것으로 아케메네스제국은 패망했다. 베수스는 스스로를 다리우스의 계승자라 선언하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Artaxerxes V) 칭했다.

알렌산드로스의   대제국과   그의   정벌   여정 .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차지했다 .

알렉산드로스의 원정군은 다리우스의 죽음으로 원정은 이제 끝났다는 생각에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왕위 찬탈자인 베수스를 용서할 없었다. 분노한 그는 베수스를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힌두쿠시를 넘고 죽음의 북부 아프가니스탄 사막을 건너 마침내 옥수스강(현대 아무다리야강) 당도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박트리아에 도착하기 전에 베수스는 소그디아나(Sogdiana) 이미 도주한 상태였다. 당시 그리스인들에게는 마라칸다(Maracanda) 알려져 있던 사마르칸트가 소그디아나의 수도였다. 그를 쫓기 위해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아무다리야강을 건너 테르메즈 땅에 발을 디뎠다. 베수스를 잡아 벌을 주기 위한 여정은 결국 광범위한 중앙아시아와 인도 서북부 정벌로 이어졌다. 소그디아나로 도주했던 베수스도 그곳에서 배신을 당하고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져 페르시아식 극형을 언도받고 끔찍한 형벌을 받았다.

알렉산드로스가 군대를 이끌고 소그디니아로 가기 위해 아무다리야강 건넌 곳으로 여겨지는 장소는 현재의 테르메즈에서 북서쪽으로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슈랍(Shurob) 마을이다. 고대 건널목을 지키기 위해 알렉산드로스는 이곳에 요새를 건설했다. 이곳의 캄피르테파(Kampyr-Tepa) 유적이 오랫동안 역사학자들이 찾아 헤매던 옥수스의 알렉산드리아, 옥시아나(Oxiana)라는 방향으로 학자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같다. 이곳에서는 기원전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성벽과 성문 등의 강력한 방어 시스템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곳은 박트리아의 중심지인 박트라(Bactra, 현재 발흐)에서 사마르칸트로 넘어가는 철문관과의 일직선 상에 위치한다.

박트리아 지역 지도. 수르한다리야 남부 지역의 평야지대에는 구소련 시대부터 대규모 면화재배를 위해 아무다리야강으로부터 물을 끌어오기 위한 방대한 운하망이 보인다. 그로 인해 강물의 수위가 낮아져 그 옛날처럼 강물이 범람하지는 않는다.

 캄피르테파 유적에서는 마케도니아, 그레코-박트리아(Greco-Bactria), 쿠샨(Kushan) 왕조의 유적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특히 기원후 1~2세기의 카니슈카(Kanishka) 대왕 시대에 황금기를 맞이했었음을 보여준다. 옥수스강의 범람으로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렸고 후에는 버려졌기 때문에 초기 도시계획이 그대로 남아있다. 캄피르테파는 그리스 양식의 요새, 주거지역, 교역지대, 항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0년이 유적지가 그래도 보존될 있었던 하나의 요인은 곳이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에 인접하고 있어 오랫동안 출입금지 구역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출입이 금지되어야만 보존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처럼 느껴졌다.

캄피르테파 유적 전경

알렉산더대왕의 사망 , 테르메즈를 포함한 박트리아 지방의 지배자는 셀레우코스왕조(Seleucid Empire) 거쳐 그레코-박트리아왕국과 인도-그리스왕국(Indo-Greek Kingdom)으로 바뀌면서 기원 직전까지 잔존했던 그리스계 헬레니즘 국가였다. 전성기 때의 영역은 동쪽으로는 타림 분지, 서쪽으로는 페르시아, 북쪽으로는 소그디아나, 남쪽으로는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이었다. 기원전 2세기 전반부터 간다라 지방에 진출해 그리스 문화를 전파함으로써 헬레니즘 문화와 인도 불교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간다라 예술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서쪽으로부터는 파르티아(Parthia) 침입을 받았고, 특히 북쪽으로 유입된 대월지(大月氏) 정복되어 멸망하였다.

박트리아의 불교 전파

대월지는 전국시대 말기에 서몽골로부터 간쑤(甘肅) 서부, 황허강(黃河) 상류, 동투르키스탄, 중가리아, 서투르키스탄의 일부까지 영향력을 펼치고 있던 대세력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 흉노(匈奴) 갑자기 일어나 압박해오자 기원전 2세기에 쫓겨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무다리야강 북안에 중심을 두고 세력을 키워나갔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는 박트리아까지 밀고 내려와 영역을 확장했으며, 기원 전후 대월지의 다섯 제후들 가운데 하나였던 쿠샨(Kushan, 貴霜) 가문의 쿠줄라 카드피세스(Kujula Kadphises) 다른 제후를 제거하고 쿠샨왕조를 열었으며 힌두쿠시 이남으로 진출하여 간다라까지 지배했다.

쿠샨왕조를 연 쿠줄라 카드피세스의 흉상.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박트리아의 초기 불교 전파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인물이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인도-그리스왕국의 왕이었던 메난드로스 1(Menandros I)이다. 그는 북부 펀자브의 부유한 도시였던 사갈라(Sagala, 舍竭城: 현재의 시아르코트[Sialkot]라는 설이 유력) 수도로 삼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도 서북부에 이르는 영토를 지배했다. 불교도들에게는 미란다(Milinda, 彌蘭陀) 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나가제나(Nagasena, 那先) 비구에 의해 교화되어 불교로 귀의했다고 전해진다. 사람의 대화가 팔리어 불전 미란다판하(Milinda Pañha: 미란다왕의 질문) 한역불전의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 수록되어 있다.

메난드로스  1 세   시대에   발행되었던   은화에   나타난   메난드로스왕의   모습 . ‘ 구세주   메난드로스왕 ’ 이라   새겨져   있다 .  대영박물관  ( 왼쪽 );  메난드로스  1 세   시대의   기본   동전으로   왼쪽의   전면에는   중앙에   법륜 ( 法輪 ) 과   함께  ‘ 구세주   메난드로스왕 ’ 이란   글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가   새겨져   있다 .  대영박물관  ( 오른쪽 )

알렉산드로스의 사망 , 박트리아에 뿌리를 내린 그리스계 헬레니즘 왕국들은 끊임없는 내부분열과 왕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빠르게 약화되어 갔다. 이들 왕국의 주화들이 박트리아의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후기의 고립된 소수의 그리스계 지배층은 토착 피지배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전통적인 그리스 양식의 주화를 포기하고 토착민의 호응을 이끌어 있는 양식의 주화를 발행한 것으로 보인다. 메난드로스왕의 불교 귀의는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징기스칸이 중앙아시아를 정벌한 , 그곳에 몽골계 국가들을 건설했던 징기스칸의 후예들도 세대를 거치면서 같은 문제에 봉착해 피지배층과의 동화를 위해 피지배층의 종교였던 이슬람교로 전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과 비슷한 현상 같았다.

메난드로스  2 세   때의   주화로   제우스신이   법륜   위로   승리의   화환을   건네는   승리의   여신   니케를   잡고   있는   모습이   주조되어   있다 . ( 왼쪽 );  그리스식의   망토와   모자를   쓰고   법륜을   굴리고   있는   신의   모습이   주도되어   있다 . ‘ 법륜을   굴리는   사람 ’ 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 오른쪽 )

기원전 3세기의 아소카(Aśoka, 阿育王) 치세 개최되었던 불교 3 결집 이후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각지로 전법사들이 파견되었다. 박트리아도 불교가 전파된 곳들 가운데 하나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학자들의 고고학적 연구 결과로 뒷받침되는 사실은 기원전 2세기에 전법사들이 박트리아에 파견되어 불법을 전하기 시작했을 수는 있으나, 박트리아 북부에 불교 건축물들이 널리 세워지고 불법이 널리 전파된 것은 기껏해야 기원 1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이루어진 일이라고 한다.

때가 유명한 쿠샨왕조 3 왕인 카니슈카(Kanishka, 色迦) 대왕의 치세에 해당한다. 그의 통치기간이 1세기 후반에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 않으며, 대체로 2세기에 생존했던 것은 분명한 같다. 그는 간다라지방의 푸루샤푸라(Puruapura, 현재 Peshawar) 수도로 삼고, 북서쪽으로는 아무다리야강 이북의 남부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으로부터 카슈미르를 포함한 인도 서북부와 남동쪽으로 마투라(Mathura)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동전의   전면에   덥수룩한   수염의   카니슈카  1 세가   두꺼운   외투와   긴   장화를   신고   있는   모습 . ‘ 왕중   왕 ,  쿠샨의   카니슈카왕 ’ 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 ( 왼쪽 );  후면에는   시무외인 ( 施無畏印 , abhaya mudra) 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헬레니즘   양식의   붓다   상 .  붓다의   모습   왼쪽에   붓다 (Boddo),  오른쪽에는   카니슈카의   문장 ( 紋章 ) 이   새겨져   있다 . ( 오른쪽 )

불교 전승에서 카니슈카대왕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대승불교의 후원과 전파에서 보여준 카니슈카왕의 역할은 상좌부 불교에 대한 후원과 전파에서 보여준 아소카대왕의 역할에 비견된다. 카니슈카왕 시대에 불교의 4 결집이 이루어졌다. 4 결집은 기원후 100년경에 파르슈와(Pārśva) 존자의 건의에 따라 카니슈카왕의 후원으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 삼장(三藏) 대한 논서(論書)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삼장에 정통한 500명의 비구들을 소집하여 바수미트라(Vasumitra) 비구의 주재로 행해졌다.

집대성된 문헌이 30 () 660 () 달하는 대주석서 『아비달마대비바사론(毗達磨大毘婆沙論, Abhidharma Mahāvibhāā Śāstra)』이다. 현장이 번역한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의 「발 跋」에 의하면, 4 결집은 붓다의 입멸 이후 400년경에 카슈미르의 환림사(環林寺, Monastery of Kundalavan)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붓다의 입멸 시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가장 유력한 설인 기원전 483년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실제 4 결집은 불멸 이후 600년경에 이루어진 것이 된다.

카니슈카왕은 수많은 탑을 건립하고 동전에 붓다의 모습을 새겨 넣은 불교 보호와 전파에 힘썼다. 시대의 화폐에 새겨진 신상이나 유적을 보면 왕과 일족은 이란계 신이나 힌두교의 시바신 등도 함께 신봉했던 것을 있으나, 후에 열성적인 불교신자가 되어 불교의 후원과 전파에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수도인 푸루샤푸라에 카니슈카대탑을 건립했는데, 1908~1909년의 고고학 조사에서 지름이 87m 이르는 것으로 확인된 불탑의 기단이 발견되었다. 현장은 탑의 높이가 180~210m 달했으며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었다고 기록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엄청난 규모의 고대 건축물이었을 것이다.

1908~1909 년   페샤와르의   고대도시에   위치한   카니슈카대탑의   발굴   과정에서   대탑   아래   부분의   안치실에서   발견된   붓다   사리함 .  위   부분에는   좌우로   브라마신과   인드라신의   경배를   받고   있는   붓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 ( 왼쪽 );  사리함   몸체의   아래   부분에는   카니슈카왕으로   보이는   쿠산의   왕이   좌우에   이란의   해와   달   신들과   함께   조각되어   있다 . ( 오른쪽 )  페샤와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사라함   안에는   붓다의   뼈조각  3 과가   들어   있었으나   영국이   미얀마의   만달라이 (Mandalay) 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불상의 출현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대왕이 박트리아를 정벌한 동서간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기원 전후 수세기에 걸쳐 독특한 불교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이렇게 형성된 간다라문화가 카니슈카왕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우리의 주목을 끌게 되는 데에는 가지 이유가 있었다. 기원전 5세기부터 불교의 가르침이 전해져 왔지만 예배의 대상인 불상이 만들어진 것은 그로부터 5~600백년이 지난 기원후 1세기 무렵 쿠샨왕조 시대에 이르러서였기 때문이다.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예배의 대상은 붓다의 사리를 모신 스투파, 불탑(佛塔)이었다. 또한 그때까지 붓다는 오직 보리수(菩提樹), 법륜(法輪), 보좌(寶座) 등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었을 뿐이었다. 시기를 흔히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까지 불상이 조성되지 않았던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있지만, 전통적인 동양적 가치관 아래에서는 지고의 대상을 공백이나 상징물로 대신하는 경우는 많았다. 서울의 청계천에 왕실의궤 그림을 180m 길이의 벽화로 옮겨놓은 정조대왕 능행차도 봐도 감히 왕의 얼굴을 그림으로 표현할 없었는지 정조대왕은 어가(御駕) 표현되어 있다.

사실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불교계에서는 혁신적인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때까지의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는 스스로의 수행에 의한 깨우침을 통해 해탈을 목표로 해왔던 반면, 새롭게 일어나고 있던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는 모든 중생의 구원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대승불교의 성립과 관련하여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이와 같은 변화는 불교가 인도를 뛰어 넘어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피할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달바르진테파에서 발굴된 2~3세기 보살상의 복제품 (왼쪽); 파야즈테파에서 발굴된 1~2세기 보살상 (중앙); 옛테르메즈 지역에서 별견된 2~3세기 2층 구조의 불상 (오른쪽).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이러한 대승불교의 발달로 석가모니는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로 변했으며, 미륵불도 때를 기다리는 미래의 붓다가 아니라 현실 세계를 구제하는 적극적인 존재로 변모했다. 또한 붓다의 이상 세계인 정토신앙이 성행하여 수행을 통한 자아실현의 노력보다는 절대적 존재에 의지해 구원을 얻으려는 종교적 색채가 짙어졌다. 불교가 보편적 종교의 모습으로 변모해가자 인간의 모습을 예배 대상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토착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던 박트리아 지방에서 그들의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상을 조각해 숭배하던 사람들이 새로운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불상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시작된 곳이 당시 박트리아와 간다라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쿠샨왕국의 수도 페샤와르 지역으로 간다라라 불리던 곳이었다.

카니슈카왕 시대의 동전에 나타나는 붓다의 모습은 이미 상당히 정형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오른쪽 손바닥에는 법륜이 새겨져 있고, 미간에는 오른쪽으로 감기어 빛을 발하는 (白毛) 있으며, 몸에서는 신광(身光) 내뿜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전의 붓다가 입고 있는 겉옷은 양쪽 어깨를 모두 덮고 있어 간다라 불상들과 괘를 같이 한다.

1~2 세기 간다라 지역에서 최초로 출현했던 불상들 가운데 하나로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왼쪽); 2세기에 간다라에서 출현했던 불상이며 오른쪽에서 붓다를 보호하고 있는 금강수보살(金剛手菩薩)이 헤라클레스로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

간다라 불상에서 특이한 것은 머리카락이 고수머리가 아니고 물결 모양의 장발이라는 점과 용모는 눈언저리가 깊고 콧대가 우뚝한 것이 마치 서양 사람과 같다는 점이다. 얼굴의 생김새가 인간적이고 개성이 있다는 , 입고 있는 옷의 주름이 깊게 새겨졌고 모양이 자연스러워 형식화된 것이 아니라는 등을 특징으로 있다. , 간다라 불상의 표현은 그리스풍의 자연주의현실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 독특했다.

이렇게 오늘날 파키스탄의 북부지방인 간다라에서 꽃피웠던 그리스-불교 예술은 인도로 퍼져 나가 마투라의 예술, 그리고 이후에는 굽타(Gupta) 왕국의 예술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다시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간다라의 불교문화는 또한 북쪽으로도 퍼져 나갔는데 갈래가 중앙아시아로 퍼져 나갔으며, 다른 갈래는 타림분지를 거쳐 중국, 한국, 일본까지 영향을 끼쳤다.

테르메즈의 불교 유적

고고학 발굴로 세기에 걸쳐 고대 테르메즈는 중앙아시아에서 중요한 불교 중심지였음이 밝혀졌다. 포교사들이 이곳을 출발하여 북서쪽으로는 철문관을 넘어 소그디아나로 불교를 전달하였고, 북동쪽으로는 파미르고원과 알라이산맥을 넘어 東투르케스탄(East Turkestan)으로 그리고 너머 중국, 한국, 일본에까지 불법(佛法) 전했다. 문서에는 산스크리트어(Sanskrit) 불교경전을 한역(漢譯) 사람들의 이름을 포함하여 중국에서 불교 포교활동을 벌였던 박트리아인들의 이름이 남아 있다.

부파불교 시대를 거치며 철학적 깊이를 더한 불교는 이곳 간다라와 박트리아에서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만나며 보살사상과 불상 조성 대승불교의 특징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쿠샨왕국을 통해 꽃을 피운 대승불교는 카니슈카왕 전성기를 맞이하고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을 거쳐 한반도, 그리고 일본까지 전해지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동북아시아에서 더욱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정작 쿠샨제국은 일찍 종말을 맞이했다. 쿠샨제국은 230년경 사산왕조 페르시아(Sassanian Persia)에게 정복됐으며, 이후 땅은 5세기에 에프탈(Hephthalites), 6세기에 투르크, 7세기에 우마이야왕조(Umayyad Dynasty), 8세기에 아랍의 아바스왕조(Abbasids) 의해 차례로 지배를 받으면서 이슬람 문화가 곳곳에 스며들었다. 쿠샨인들이 5세기 중엽까지 잔존하긴 했지만 테르메즈 땅에서 번성했던 불교사원은 이교도들의 파괴행위와 주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파괴되고 쇠락해갔다.

7세기 테르메즈를 통과해 인도로 향했던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테르메즈를 달밀국(蜜國)이라 칭했으며, 10여개의 사원이 있고 스님들도 1000여명이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도 불교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장이 보았던 옛 테르메즈는 동서로 600여리, 남북으로 400여리였고, 도성의 둘레는 20여리에 달하며, 동서로는 길고 남북으로는 좁은 모양이었다.

고대 테르메즈의 불교 유적들

그러나 아마도 테르메즈 땅에 건립되었던 불교사원들의 운명에 결정적인 사건은 13세기 전반기에 이곳에 들이닥쳤던 칭기즈칸의 몽골군대였을 것이다. 몽골군대에 이틀 동안 포위됐던 테르메즈의 주민들은 격렬히 저항했고, 이에 분노한 칭기즈칸은 도시 전체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살육했다. 13세기 후반기에 새로운 테르메즈가 테르메즈의 동쪽에 다시 세워졌다. 그리고 이보다 남쪽으로 아무다리야강에 가깝게 위치한 현재의 테르메즈는 19세기에 들어서 건설된 것이다. 흙벽돌로 쌓아 올려진 거대한 고대 불교사원들은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모습을 잃어갔고 거센 모래바람이 만들어 놓은 언덕 아래에 파묻혀 흔적조차 찾을 없게 것이다.

동안 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모습을 드러낸 곳은 파야즈테파(Fayaz Tepa), 카라테파(Kara Tepa), 달베르진테파(Dalverzin Tepa), 주르말라대탑(Zurmala Stupa) 되지 않지만, 500헥타르의 광대한 고대 테르메즈 땅에서 몽골군대의 파괴와 혹독한 기후를 견디고 년을 버텨온 되는 테르메즈의 대표적인 불교 유적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아직은 그리 많지 않은 방문객들에게 매우 흥미롭기 그지없다. 그리고 위대한 불교 유적들이 건립되었던 쿠샨왕조 시대가 땅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이 꽃피웠던 시기이기도 했다.

파야즈테파

황무지와 같은 고대 테르메즈 지역에서 살아남은 가장 유명한 불교 유적들 가운데 하나인 파야즈테파는 옛테르메즈(Old Termez) 부근 카라테파 언덕의 불교사원 근처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하던 러시아의 고고학자 L. 알바움(L. Albaum) 의해 1963년에 발견되었다. 불교사원에서는 많은 벽화와 보존된 조각품들이 발굴되었다. 사원은 U자형의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고, 통로를 따라 수도실과 성소가 배치되어 있는 구조였다. 또한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개의 불사리탑이 발견되었다.

파야즈테파 전경
파야즈테파 입구의 출입구가 유일하게 조그마한 그늘을 제공해 관리인이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관리인은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수르한다리야 황무지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 하루하루를 저 조그만 그늘에서 버티고 있었나 보다.

벌판을 가로질러 멀리에서부터 완전한 모양의 반구를 머리에 이고 있는 탑이 차량으로 파야즈테파에 접근하고 있는 우리의 시야에 들어왔다. 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 빛을 보게 진흙벽돌탑이라고는 믿기지 않아 복원을 너무 번듯하게 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현장에 당도했다. 우리가 도착하자 어디에서 나왔는지 허둥지둥 달려 나온 남루한 모습의 관리인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황무지 외딴 곳에 나타난 사람들이 그저 반가웠는지 그는 우리 일행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의 젊은 직원이 나를 동행해 현장을 안내했다. 통역관이 타쉬켄트로부터 이곳까지 따라왔지만 젊은 박물관 직원이 유창하지는 않으나 직접 영어로 설명하려고 노력하자 없이 뒤에서 어슬렁거리며 따라왔다.

파야즈테파의 건물은 부분으로 나뉜다. 부분은 숙소와 부속 건물이고, 번째는 식당과 부엌이며, 번째는 종교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파야즈테파는 자체가 중앙아시아의 기념비적인 불교 건축물이기도 하지만, 건물 벽을 장식하고 있던 불교 예술품을 품고 있던 되는 사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파야즈테파의 모습
파야즈테파의 모습

사원의 벽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된 붓다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성소의 벽에도 다양한 붓다의 모습과 붓다 관련 이야기들이 묘사되어 있었으며, 사실 파야즈테파에서 발견된 붓다상은 현재까지 존재하는 고대 불상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하며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곳에서 발견된 벽화와 조각상들은 주로 1~3세기에 속하는 것들이었으며, 일부 4세기에 속하는 것도 있어 그때까지도 사원이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엿보게 해준다.

이곳 파야즈테파에서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조각상들과 토기들도 우아함과 기교로 예술적 가치를 높이 인정받았다. 특히 양편에 스님이 서있는 가운데 성스러운 보리수나무 아래에 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는 붓다상이 주목을 끌었는데 비나야 삼존불이라 불리는 불상은 이곳 파야즈테파에서 발견된 불교 예술품들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불상은 아치 모양의 테두리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인데 아치는 그리스의 코린트식 기둥 위에 얹혀져 있다. 붓다상 자체도 그리스풍 예술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조각품은 석회석에 새겨졌으며 금박장식이 되어 있다. 현재 조작품은 타쉬켄트 소재의 우즈베키스탄 역사박물관(State Museum of History of Uzbekistan) 전시되어 있다.

파야즈테파에서   발견된   비나야삼존불 . 1~2 세기   추정 .  우즈베키스탄   역사박물관  ( 왼쪽 );  궁정신하들을   묘사한   벽화로   파야즈테피에서   발굴되었다 . 1~3 세기   추정 .  우즈베키스탄   역사박물관

사원에 인접하여 10m 높이의 탑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내부에는 3m 높이의 작은 탑이 하나 들어 있는 구조이다. 탑의 건립연도는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멀리서부터 시야에 들어왔던 완전한 모양의 반구는 탑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일종의 반구형 지붕이었던 것이다. 우리 뒤를 따라다니던 관리인은 재빨리 내가 반구형 보호 지붕 안으로 들어가 있도록 잠겨 있던 자물쇠를 열어주었다. 열린 작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어두운 공간에 2000년의 세월을 버텨왔을 진흙 벽돌탑이 있었다. 허리춤에서 바라본 탑의 모습은 비바람에 마모되고 가는 금들이 있어 연약해 보였으나 속에는 2000년의 세월을 견딘 내공이 감춰져 있어 손을 대면 같이 단단함이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차마 손을 대어 수는 없었다.

2000 년 세월을 견뎌 온 진흙탑을 보기 위해서는 반구형 보호 지붕에 나 있는 이 출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평소에는 자물쇠로 잠겨져 있다.
발굴 당시 탑의 모습 (왼쪽); 반구형 보호 지붕 안에 있는 현재의 탑의 모습 (오른쪽)
반구형 보호 지붕 안에 있는 현재의 탑의 모습

혼자 탑을 감상하도록 모두 자리를 비켜주어서 잠시 밖으로 나오자 관리인만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내오면 문을 잠그려고 기다리는 듯했다. 그런데 그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며 갑자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냈다. 정확히 그의 말을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이곳 현장에서 발견한 유물들인데 돈을 주면 팔겠다는 의미 같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대자 자신이 발견했다는 유물들을 들어 보이며 포즈까지 취해 주었다. 그런 그를 보며 화가 나기보다는 측은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일반 공무원의 급여도 낮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고 들은 같은데 관리인은 급여로 가족을 먹이고 수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가 가짜 유물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우리를   따라   다니던   관리인의   모습  ( 왼쪽 );  관리인을   보면 , 1900 년   그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아   흙모래에   묻혀   있던   돈황석굴을   보고   이를   관리해오던   호북성   출신의   도사   왕원록 ( 王圓 籙 ) 의   모습이   겹쳐왔다 . ( 오른쪽 )

3세기에 사산조 페르시아(Sassanian Persia) 침공으로 불교사원들이 파괴되었으며, 이때 파야즈테파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종교적 활동은 후에도 어느 정도는 이어졌지만 쇠망의 길을 피할 없었던 모양이었다. 발굴 당시 사원은 두꺼운 모래와 층으로 덮여 있었으며, 발굴 과정에서 건물들이 크게 해를 입었다. 그리고 유적지 인근에 현장 박물관이 있다.

파야즈테파 인근에 있는 현장 박물관.

카라테파

카라테파도 불교사원으로 옛테르메즈(Old Termez)에서 북서 방향으로 400m, 파야즈테파에서 남서 방향으로 비슷한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카라테파는 파야즈테파와는 서로 시야에 들어오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파야즈테파가 오래된 사원으로 사원 옆에 거대한 탑이 있어 지역의 구심점이 되는 사원이었던 반면에, 카라테파는 무리의 승방들과 여러 개의 작은 탑들을 갖춘 사원으로 개의 작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무리들 가운데 남쪽 언덕 위에 있는 사원은 인공 굴과 소박한 진흙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승방들이었다. 장식이라고 해야 일부 회반죽 벽에서 발견된 벽화 정도였다. 서쪽 언덕 위의 경우는 남쪽 언덕과 비슷하나 궁정과 탑이 있었다. 북쪽 언덕은 규모의 궁정과 여러 개의 탑들이 있었으며 스님들의 거주 공간은 없었다. 서쪽과 북쪽 언덕의 궁정에는 그리스 양식의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카라테파 전경

2세기 초에 건립된 카라테파는 특히 2세기 말과 3세기 초에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4~5세기에는 상당 부분의 사원 기능이 멈춘 것으로 보이며, 기간에는 승방들이 묘지로 사용되었으며 승방의 입구들이 벽돌로 봉해졌었다. 그러나 사원의 일부, 특히 지상 부분에서는 6세기까지 불교의 종교적 집회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역의 불교사원들이 모두 아랍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랍인들은 중앙아시아의 이교도 사원들을 없애기 위해 비이슬람 종교 대상물에 대해 특별 과세를 부과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방식이 테르메즈와 인근 지역의 불교사원이 문을 닫게 되는 실질적인 계기가 되었다. 테르메즈 지역의 불교사원에 있던 승려들은 아직 불교가 성행하고 있던 캬슈미르(Kashmir) 지역으로 옮겨갔다. 카라테파는 이후 9~10세기에 수피교의 이슬람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다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이곳은 아프카니스탄과의 접경 지역으로 군사지역 내에 위치하고 있다. 국경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며, 얼마 전까지 아프가니스탄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격전지였다. 다행이도 현재는 전쟁도 막을 내리고 사전에 허가를 받으면 방문이 가능하다.

주르말라대탑

주르말라대탑으로 가는 길가에는 집들도 보이지 않았고, 우리가 타고 가는 4륜자동차가 마른 진흙길에서 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며 달릴 뿐이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속도를 내는 것도 아니었건만 출렁이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있는 느낌이었다. 더운 곳에도 누군가가 온실농업을 시도하려는 대규모의 온실을 설치하고 있었다. 한가운데 높게 쌓아 올린 진흙더미 같은 주르말라대탑이 눈에 들어왔다.

2000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갑자기 밭 한가운데 솟아오른 듯한 주르말라대탑.
주르말라대탑은 여전히 아무런 보호장치가 없이 뜨거운 햇볕에 노출되어 있어 앞으로 얼마나 이 모습을 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지금은 폐허가 고대 테르메즈의 동쪽에 위치한 주르말라대탑은 12m 높이의 불교 유적이다. 유적은 불교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번성하던 시기인 기원전 1~2세기, 쿠샨왕조 시대에 건립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을 맞으면서 원래의 모습은 잃어버린 불교 유적이었음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된 모습이었다.

지름이 14m 이상이었을 원통형 탑으로 원래 토대 위에 세워졌었으며 전체 높이는 16m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탑은 진흙 벽돌로 건립되었으며 돔형의 지붕이 있었다. 탑의 부분에는 성물(聖物) 보관하는 공간이 있어 불경과 불상 등이 보관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탑의 외관은 진홍색으로 칠해져 있었다고 한다.

주르말라대탑 이곳 저곳의 모습들

주르말라대탑은 20세기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된 최초의 불교 건축물이었다. 지역에 남아있는 가장 규모의 불교사탑이기도 탐은 아마도 우즈베키스탄 전체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축물일 있다. 탑이 불교 숭배와 관련된 건축물임을 처음 확인한 사람은 1927년경부터 러시아 동양문화박물관의 과학탐험대의 일원이었던 A. 스트렐코프(A. Strelkov)였다.

주르말라대탐에서 발굴된 1~2세기 남녀상.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이날 우리를 안내하던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Termez Archaeological Museum) 직원과의 마지막 일정으로 우리는 바로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으로 향했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박물관을 우리에게 보여주게 되어서인지 신이 듯했다. 박물관 건물은 무슬림 양식의 거대한 덩이의 건물로 외관에선 박물관인지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정면 높은 곳에 우즈벡어로 고고학 박물관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건물.

테르메즈에서는 그레코-박트리아와 쿠샨왕조 시대의 많은 고고학 유물들이 발굴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우즈베키스탄 역사박물관과 이곳 테르메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 또는 보관되어 있다. 고고학박물관은 2002 42 테르메즈의 도시 건립 2500주년을 기념하며 문을 열었다. 역사박물관과 비교하면, 박물관은 분야에만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이곳에 전시 중인 것은 대부분 고고학 유물이거나 고고학과 관련된 전시물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중앙홀에 석기시대부터 중세 칸제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대표적 유물들이 시대별로 배치되어 방문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박물관에서 전시 또는 수장 중인 유물이 27,000 점이 넘는다고 한다. 많은 가정용 도구, 고대 중세시대 무기류, 지배자들의 동전과 인장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많은 수량의 고대 벽화와 조각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조각품에는 그레코-박트리아 시대의 조각품과 지금은 폐허가 쿠샨시대의 수도원들에서 발견된 불상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달바르진테파에서 발굴된 쿠샨왕조 왕자의 상. 1~3세기로 추정.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소장품에는 지배자들의 편지와 경제 관련 서류 각종 문서들도 포함되어 있다. 16,000 점에 이르는 책과 문서들이 박물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 문서들은 대부분의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되어 있다.

박물관에서 제일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쿠샨시대의 유물들이었다. 대월지에서 출발해 쿠샨왕조로 발전하면서 2000여년 대승불교의 발전과 동아시아로의 불교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그들의 숨소리와 발자취가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시된 유물과 자료는 풍부했다. 감동이 가시지 않아서인지 박물관을 떠나는 발걸음이 아직 구름 속에 있는 듯했다.

不二 / 2019. 9. 11. 22:29 / 세계여행/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

우즈베키스탄에서 24일간의 체류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 이번에 사마르칸트(Samarkand) 가보지 못하고 귀국하는가 보다며 체념하고 있는데 귀국까지 이틀을 앞두고 갑자기 사마르칸트에 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마이클과 둘이서 가게 되었는데, 바로 다음날 이른 시간의 고속열차에 좌석이 없어서 예약을 없었다. 없이, 동안 나의 손발이 되어주었던 바딤의 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고려인 3세인 바딤은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충분히 가능하고, 우즈베크어와 러시아어가 유창해서 여러 곳을 다니면서 여간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말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을 미리 읽고 배려해주는 세심한 사람이었다. 나중에는 둘이서만 비바람을 뚫고 어둠 속에서 산속을 헤맬 때도 크게 걱정되거나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고 의지가 되었다.

약속대로 새벽 5시가 되자 바딤이 호텔에 도착했다. 아직 어둑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우리는 서둘러 출발했다. 시간대와는 다르게 차량이 많지 않은 타슈켄트(Tashkent) 시내를 비교적 빠르게 벗어나면서 마이클과 나는 뒷좌석에 앉아 비몽사몽 간을 헤맸다. 고속도로 중간에서 잠시 식당에 들러 휴식을 포함해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는 얼마 마침내 고대 실크로드의 중심도시 사마르칸트의 심장인 레기스탄(Registan) 도착했다. 시간을 보니 호텔을 출발한 4시간이 지났다.

사마르칸트를 대표하는 레기스탄 광장

중세 사마르칸트의 파괴

7세기 초에 불전 원본을 구하기 위해 불교 발상지인 천축(天竺, 인도)으로 향하던 당나라의 구법승(求法僧) 현장() 630년경 이곳 사마르칸트를 찾았었다. 당시 ()에서는 강국(康國)이라 부르던 사마르칸트를 현장은 삽말건국(建國)이라 칭했으며, 둘레가 1 6~7백리에 이르고 동서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고도 했다. 현장은 자신의 여행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사마르칸트의 대도성은 둘레가 20리에 이르고, 주민이 많으며 땅의 형세가 험하고 수비가 견고하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현재 실크로트 또는 사마르칸트를 상징하는 이곳 레기스탄의 모습을 현장은 보지 못했다. 현장이 묘사했던 물산이 풍부하고 주변 오랑캐국들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고 사마르칸트의 대도성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1km 조금 넘는 곳에 있는 아프로시압(Afrosiab) 언덕 위에 완전히 파괴된 묻혀 있다. 사마르칸트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어 asmara(, 바위) 소그드어 gand(요새, 도시)에서 유래했으며, 바위요새 또는 바위도시라는 의미이다.

사마르칸트의 주요 유적지

13세기 사마르칸트를 포함한 중앙아시아와 이란 지역의 지배자는 투르크 계열의 무슬림 술탄인 알라아딘 무하마드(Shah Ala ad Din Muhammad)였다. 그의 왕국은 호라즘제국(Khwarezmid Empire)이라 불렸다. 당시 몽골고원에서 급격히 성장하던 칭기스칸(Chingiz Khan, 成吉思汗) 금나라를 정벌 중이었으며, 중앙아시아의 정벌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호라즘과의 교역을 열기 위해 대상(隊商) 사절단을 보냈지만, 술탄은 대상과 사절단을 죽이거나 모욕적인 대우를 함으로써 칭기스탄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술탄이 천산산맥 너머 몽골고원에서 일어나고 있던 변화를 알지 못한 것인지, 칭기스칸의 교역 제안에 의심을 품은 것인지는 없으나, 이것은 자신과 자신의 제국뿐만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멀리 유럽까지 이어지는 드넓은 땅의 운명을 바꿔놓게 되었다. 분노한 칭기스칸은 군대를 이끌고 먼저 부하라(Bukhara) 순식간에 파괴하고, 1220 3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에 도착했다. 현장이 땅의 형세가 험하고 수비가 견고하다 묘사했던 성은 순식간에 함락되고 철저히 파괴되었다. 몽골군의 호라즘 정벌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던 지리학자 야쿠트 하마위(Yāqūt al-amawī al-Rūmī) 몽골군의 파괴를 아름답고 화려한 궁들을 종이에서 글을 지워버리듯이 땅에서 지워버렸다 묘사했다.

실크로드의 주역들 가운데 하나인 소그드인들이 아프로시압 언덕 위에 세웠던 중세의 사마르칸트성이 너무나도 철저히 파괴되었기 때문인지 후대들은 차마 자리에 다시 삶을 일으켜 세울 용기를 가질 없었나 보다. 사마르칸트는 지금 내가 서있는 이곳 레기스탄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아프로시압을 둘러싸고 다시 재건되었다. 지금의 사마르칸트를 상징하는 코발트블루의 커다란 돔들과 이슬람 고유의 첨탑들로 장식된 건축물들은 대부분 14세기에 시작된 티무르제국(Timurid Empire, 帖木兒帝國) 시대에 지어진 것들이다.

사마르칸트의 심장, 레기스탄

레기스탄 입구에서는 이미 많은 우즈베크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부심인 거대하고 화려한 레기스탄의 건축물들을 배경으로 각자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레기스탄은 원래 티무르제국의 수도였으며 지금은 우즈베키스탄에 위치하고 있는 중세도시 사마르칸트의 심장으로 대중광장이었다. 레기스탄은 모래땅이란 의미라고 한다. 아마도 처음에 이곳은 모래밖에 없는 사막이었던 모양이다.

레기스탄 광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방문객들.

레기스탄 광장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것은 중앙아시아 건축의 기념비적 상징물이 위대한 건축물들 때문이었다. 레기스탄은 동쪽, 서쪽, 북쪽으로 광장의 중심을 향하여 마드라사(madrasah)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어 ㄷ자 모양으로 남쪽으로는 열려 있는 모습이었다. 언뜻 보아 대부분의 기념비적인 이슬람 건축물들이 그런 것처럼 좌우대칭인 알았으나, 모두 서로 다른 구조와 장식을 가지고 있었다.

레기스탄의 마드라사와 비비하눔 모스크.

그러나 정작 도시를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부활시킨 티무르(Timur, 帖木兒) 이들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을 보지 못했다. 레기스탄 광장은 티무르가 위대한 도시를 건설한 이래 상업활동의 중심지로 대규모 시장이 있었으나, 15세기 전반 울루그베그(Ulūgh Beg) 이곳에 마스지드(masjid, 이슬람교 사원) 마드라사(이슬람교 신학교), 공중목욕탕, 기숙사시설 등을 건설함으로써 시장의 성격에서 벗어나 좀더 신성한 이슬람교 연구 교육의 장소로 변모했다.

레기스탄 광장의 마드라사 건물들 가운데 처음 광장에 들어선 건물은 서쪽에 있는 울루그베그 마드라사(Ulugh Beg Madrasah)였다. 티무르의 손자인 울루그베그는 티무르제국의 4 술탄이었다. 수학자, 천문학자였던 그는 특별히 천문학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티무르제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409년부터 사마르칸트의 지배자가 그는 1417년부터 1420년에 걸쳐 마드라사를 건설했다. 마드라사는 직사각형 형태로 내부에 정사각형 모양의 안뜰이 있으며, 안에는 모스크와 강의실들이 있고 학생들의 기숙사 방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원래 울루그베그 마드라사는 2 건물로 귀퉁이에 형태로 개의 강의실이 있었다고 한다.

레기스탄의 마드라사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된 울루그베그 마드라사.

2개의 미나레트가 양쪽 끝에 있는 마드라사의 전면부는 광장을 향하고 있다. 이슬람 건축에서 표현되는 거대한 아치 형태의 출입구인 이완(Iwan) 이완을 둘러싸고 있는 직육면체 형태의 구조물인 피슈타크(Pishtaq) 육중한 규모는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위엄을 나타내기에 모자람이 없는 듯이 보였다. 이곳의 피슈타크 부분에는 울루그베그가 관심을 가졌던 하늘과 천문학을 표현한 듯이 별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후에 이곳 레기스탄의 마드라사와 비비하눔 모스크(Bibi Khanum Mosque) 사마르칸트의 건축물로부터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무굴제국의 타지마할과 비교하면 표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방법에도 변화가 있었던 하다. 이곳 건축물들의 이완과 피슈타크는 전체가 화려한 색감과 문양의 타일로 빼곡히 장식되어 있는 반면, 타지마할의 경우에는 흰색 대리석 벽에 주변으로 п 형태로 코란에서 따온 문구를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기법으로 상감장식하거나 대리석 가장자리에 다양한 문양을 흑백 또는 화려한 색상으로 상감장식해 전체적으로 흰색 대리석 건축물처럼 보였다.

울루그베그 마드라사에서는 처음에 이슬람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곧이어 천문학, 철학, 수학, 과학 여러 분야의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마드라사는 울루그베그 당시에 사마르칸트에서 교육의 중심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15세기에 중앙아시아 이슬람세계 최고의 신학대학 가운데 하나였다.

울루그베그 사후 티무르제국은 급격히 기울었고, 16세기 초에는 사마르칸트가 유목 우즈베크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곧이어 수도가 부하라로 옮겨가자 사마르칸트는 더욱 쇠퇴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사마르칸트의 총독으로 부임한 우즈베크족 야한그도슈 바하도르(Yalangtush Bakhodur) 울루그베그 마드라사 맞은편에 똑같은 하나의 마드라사를 건축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울루그베그 마드라사가 건립된 200 맞은편에 세워지게 것이 셰르도르 마드라사(Sher-Dor Madrasah, 1619-1636)이다.

울루그베그 마드라사가 건립된 후 200년이 지나 그 맞은편에 건립된 셰르도르 마드라사.
피슈타크의 윗부분에 떠오르는 태양을 등에 지고 하얀 사슴을 뒤쫓고 있는 호랑이 모자이크는 고대 페르시아의 미트라교 신앙 모티브를 표현하고 있는 바 종교적 건축물에 살아있는 생물의 묘사를 금지하는 이슬람 율법을 무시하고 있어 이슬람교도들의 반감을 샀으나 신기하게도 건물은 살아 남았다.
동행했던 마이클도 호랑이 모자이크가 신기했던지 카메라에 담고 있다.

피슈타크의 윗부분에는 떠오르는 태양을 등에 지고 있는 호랑이 마리가 하얀 사슴을 뒤쫓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호랑이 모자이크는 고대 페르시아의 미트라교 신앙 모티브를 표현하면서 종교적 건축물에 살아있는 생물의 묘사를 금지하는 이슬람 율법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건축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일정 부분 녹아 있다. 셰르(Sher) 호랑이(또는 사자) 나타내며, 셰르도르란호랑이 장식의 의미이다.

야한그도슈 바하도르는 티무르제국의 황금기를 이룩했던 울루그베그를 많이 의식했던 모양이다. 규모와 화려함에서 울루그베그 마드라사에 뒤지지 않는 완전히 닮음 꼴의 건축물을 울루그베그 마드라사 맞은편에 대칭으로 구현하고자 하였으나, 실제 지어진 마드라사에는 가지 차이가 생기고 말았다. 2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울루그베그 마드라사는 건축물 자체의 무게로 인해 땅속으로 가라앉아 광장 자체의 높이가 2미터 가량 융기한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났다. 결과, 새로 건축된 마드라사는 높이가 높아지고 말았다.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실제 셰르도르 마드라사는 어른 키보다 높은 위에 지어져 있었다. 그러나 마드라사들의 규모가 너무 커서였는지 눈으로는 이러한 차이들을 쉽게 인지할 없었다.

셰르도르 마드라사가 완공되고 10년이 지난 , 야한그도슈 바하도르는 카라반사라이(caravanserai) 있던 레기스탄 광장의 북쪽에 하나의 마드라사를 건립했다. 열성적인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셰르도르 마드라사에 대한 반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틸랴카리 마드라사(Tilya-Kori Madrasah, 1646-1660) 이름의 새로운 마드라사는 단순히 기숙 교육기관이 아니라 마스지드(이슬람교 사원) 역할도 수행했다. 이층 구조로 이루어진 전면부는 개의 마드라사가 ㄷ자로 닫힌 공간을 구성하도록 설계되었다.

광장의 북쪽에 가장 늦게 건립된 틸랴카리 마드라사.
세 마드라사는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지만 광장이 마치 세 마드라사가 둘러싸고 있는 안뜰처럼 느껴진다.

전면부의 끝에는 키가 낮은 미나레트가 있고, 안쪽에는 회랑과 함께 기숙사 방들로 둘러싸인 넓은 안뜰이 있다. 안뜰의 왼쪽에 마스지드의 코발트블루 형태의 타워가 보인다. 번째 건축물은 서로 위엄을 자랑하며 뽐내고 있는 앞의 마드라사를 안정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주고 있는 했다.

틸랴카리 마드라사의 돔 천장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금도금 장식. 틸랴카리란 말 자체가 “금박으로 된”이란 뜻이다.
방문객들이 화려한 금박 장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직접 카메라에 담고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금색의 화려하고 호화로운 내부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황금으로 도금된 천장과 기도실 미흐라브(mihrab)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뒤로 젖힌 화려함에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거나 모습을 담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틸랴카리란 이름도금박으로 이란 뜻으로 금박의 화려한 내부장식에서 이름이었다.

이들 마드라사의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일부분은 갤러리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많은 부분이 수공예 작업실 판매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자기그릇, 옷감, 양탄자 다양한 물건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판매되고 있었지만, 이들 마드라사의 안뜰은 마치 어느 바자르의 구석처럼 느껴졌다. 마드라사들이 한창 역할을 하고 있을 때의 분위기를 느낄 있는 것은 정작 많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았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곳 레기스탄에서 남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대한 정복자 티무르가 영면하고 있는 구르아미르(Gur-e Amir) 향했다.

마드라사의 안뜰로 들어가는 입구. (왼쪽); 기숙사동이나 강의동으로 둘러싸인 마드라사의 안뜰 모습. (오른쪽)
마드라사 안뜰의 건물들은 지역의 수공예 상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품질을 확인할 수 없으며 시장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 마드라사 본래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유의 푸른색 도자기를 파는 판매대.
다양한 무늬의 옷감을 파는 판매대.
양탄자를 판매하고 있는 판매대.

위대한 정복자 티무르가 영면하고 있는 , 구르아미르

구르(Gur) , 아미르(Amir) 또는 지배자를 뜻한다. 구르아미르는 왕의 묘란 뜻이다. 역사적으로는 흔히 아미르 티무르(Amir Timur) 알려져 있으며, 유럽에서는 보통 태멀린(Tamerlane)이라 불리던 그를 동시대인들은 신의 재앙또는 세계의 정복자 불렀다. 방금 레기스탄 광장에서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들에게 압도당하다 와서인지 위대한 정복자의 영묘에 대한 첫인상은 조금은 소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서니 영묘 치고는 웅장한 편이었으며 티무르의 자존심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르아미르 단지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은 14세기 무하마드 술탄(Muhammad Sultan) 의해 건설되었다.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부분은 마드라사와 호나코(khanaka) 기단, 단지의 정문, 개의 미나레트 가운데 하나의 일부분뿐이다. 영묘 자체는 티무르의 왕위 계승자로 정해져 있던 가장 사랑하는 손자, 무하마드 술탄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티무르가 1403년에 건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티무르 자신은 영묘가 완성되는 것을 살아서 보지 못하고, 그의 다른 손자 울루그베그가 완성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차양시설이 된 한쪽 공간에 보존되어 있다.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자 건물터인 듯 한 곳이 남이 있다.
구르아미르 경내의 모습.

티무르는 자신을 위해서는 샤흐리삽스(Shahrisabz) 아크사라이 궁전(Ak-Saray Palace) 좀더 작은 무덤을 만들어놨었다. 그러나 1405 ()나라를 정벌하려고 떠났다가 오트라르(Otrar)에서 병사하면서 그의 시신은 이곳으로 돌아와 묻혔다. 샤흐리삽스로 가는 고개가 눈에 파묻혔기 때문이었다. 사랑했던 손자를 위해 자신이 마련했던 무덤에 자신이 묻힌 것만이 아니라 티무르 왕조의 왕들이 대대로 이곳에 묻혔다. 그의 곁에는 아들 로흐(Shāh Rokh) 미란 (Miran Shah), 손자 울루그베그와 무하마드 술탄, 그리고 티무르의 스승인 사이드 바라카(Sayyid Baraka) 함께 묻혀 있다.

구르아미르 입구 정면의 모습. 짙은 청색 타일로 장식된 이완과 피슈타크가 인상적이다.
구르아미르의 전경. 세로로 줄이 깊게 난 멜론 모양의 돔 지붕 건물이 티무르가 영면하고 있는 영묘 건물이다.

정문의 출입구 이완을 통과해 들어오면 레기스탄의 셰르도르 마드라사에서 봤던 세로로 줄이 멜론 모양의 돔이 지붕 가운데 있는 단일 건물과 마주한다. 세로 줄의 홈이 깊고 촘촘하면서 단아한 모양이 이곳의 엄숙한 분위기에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건물 전면부에는 푸른색의 타일 위에 하얀색으로 기하학적 문양과 함께 코란 문구들이 새겨져 있다. 바로 아래에 티무르의 능묘가 있는 독립된 방이 위치한다.

내부에 들어서자 천장이 높고 금색의 다양한 문양으로 장식된 벽들로 둘러싸인 커다란 방이 나왔다. 실내에는 약간의 간접 조명이 있어 벽을 장식하고 있는 각종 문양을 자세히 감상할 있도록 배려하고 있지만, 채광이 되어 비교적 밝아서 내부는 맨눈으로 있을 정도였다. 아래 가운데 자리에 티무르의 흑옥석관이 자리하고 있고 주변에 그의 아들과 손자들의 관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후 무굴제굴의 타지마할(Taj Mahal)에서도 있는 것처럼 사실 관들은 진짜가 아니다. 실제 관들은 이와 비슷한 크기로 좀더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4m 아래 지하에 같은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티무르의 영묘 건물이며, 돔 바로 아래 안쪽에 티무르가 누워 있다.
이슬람 건축에서 내부 천장 부분을 장식하는 기법으로 사마르칸트의 건축물에서도 두루 나타나고 있는 무하르나스(Muqarnas).
다른 무덤들과는 색깔이 다른 가운데 흑옥석관이 티무르의 무덤이며, 울루그베그가 설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거대한 흑옥은 1420년대 모굴리스탄 정벌에서 울루그베그가 획득한 전리품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구르아미르의 무덤 배치도

17세기 말부터 사마르칸트는 오랜 기간에 걸쳐 쇠퇴기를 겪게 됐다. 수도는 부하라로 옮겨간 지가 이미 상당 기간이 흘렀고 실크로드도 위대했던 도시를 비켜가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1941 () 소련의 고고학위원회에서 발굴하여 새롭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당시 한번 티무르의 관이 개봉되었다. 당시 발굴 책임자였던 소련의 고고학 인류학자였던 게라시모프 (Mikhail Mikhaylovich Gerasimov) 티무르의 두개골로부터 그의 얼굴 모습을 재현해냈다. 또한 발굴로 172cm 티무르가 다리를 다쳐 부자유스런 장애를 안고 살았다는 것과 그의 손자 울루그베그가 머리가 잘려 죽었다는 설이 사실로 밝혀졌다.

부분적으로 파괴된 채로 19세기에 촬영된 구르아미르의 모습 (왼쪽); 20세기에 복원된 구르아미르의 모습 (오른쪽) RadioFreeEurope/RadioLiberty 사진갤러리.
1941년 구(舊) 소련의 게라시모프가 티무르의 두개골에서 복원한 티무르의 얼굴 모습. 몽골초원의 몽골인에 가까운 모습이다. (왼쪽); 구르아미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티무르의 초상화. 좀더 서구화 혹은 페르시아화 된 모습을 보인다. (오른쪽)

티무르는 1336 사마르칸트에서 남쪽으로 80km 떨어진 케쉬(Kesh, 현재 샤흐리삽스)에서 이슬람화된 몽골 씨족의 하나인 바를라스(Barlas) () 일원으로 태어났다. 티무르의 집안은 예전엔 명문가였으나 그가 태어날 즈음엔 이미 몰락한 유목민 일가에 불과했다. 양과 말을 약탈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던 그는 마침내 중앙아시아의 가장 비옥한 지역을 기반으로 30년에 걸친 정복사업을 통해 북쪽으로는 러시아로부터 남쪽으로 인도, 동쪽은 중국 변경으로부터 서쪽으로는 소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지역을 정복했다. 30년의 정복활동 수도 사마르칸트에 머문 것은 2~3년에 불과했다.

티무르의 영토와 티무르의 정복활동을 설명하는 지도

티무르는 가혹한 정복자였다고 한다. 그의 치세에 중앙아시아, 특히 사마르칸트는 번영을 누렸지만,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델리 밖의 아랍, 페르시아와 인도의 다른 도시들은 철저히 유린되고 파괴되었다. 이들 많은 정복지의 주민들이 처참하게 학살되어 그의 정복전쟁으로 당시 세계 인구의 5% 이르는 17백만 명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신의 행위로 인해 자신이 영면하고 있는 잠자리가 편치 않았는지, 티무르의 무덤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전한다. “내가 죽음에서 일어설 때면 세상은 두려움에 떨게 것이다.”

비비하눔 모스크

다음으로 우리는 사마르칸트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며, 15세기에 이슬람세계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모스크였던 비비하눔 모스크(Bibi Khanum Mosque) 향했다. 레기스탄에서 북동쪽으로 700m 떨어져 있으며 아프로시압으로 가는 길가에 있다. 걸어서 이동할 수도 있는 거리였지만 바딤의 차량으로 이동하던 우리는 시압바자르(Siab Bazaar) 북쪽의 길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서 이동했다.

시압바자르 북쪽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비비하눔 모스크를 향해 가는 마이클과 바딤. 왼쪽 도로 건너편이 아프로시압이다. 공중 다리를 건너가면 하즈라트 히즈르 모스크(Hazrat Hyzr Mosque)를 만날 수 있다.

비비하눔 모스크와 시압바자르 앞길은 넓고 포장된 인도로만 이루어진 길이었다. 아프로시압 방향에서 시압바자르 입구를 지나면 바로 비비하눔 모스크에 이르게 되는데, 인도의 포장 상태와 관리 상태가 상당히 좋은 것으로 보아 지역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느낄 있었다. 입구에는 이완과 피슈타크로 구성된 거대한 규모의 출입구가 위압감을 주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시압바자르 입구에서 바라본 비비하눔 모스크.
비비하눔 모스크 입구의 거대한 이완과 피슈타크의 규모는 티무르가 이 모스크 건립에 들인 의지와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모스크 내부 저 멀리 보이는 본당 건물의 이완과 피슈타크 역시 매우 큰 규모여서 중심 돔을 가리고 있어 볼 수가 없다.

티무르는 거대한 건축물에 자신이 사랑했던 왕비의 이름을 붙여 비비하눔 모스크라 명명했다. 그녀의 이름은 사라이 물크 하눔(Saray Mulk Khanum)이었다. 사마르칸트의 많은 건축물이 그런 것처럼, 모스크에도 처음 모스크의 건축이 이루어질 당시의 아름답지만 슬픈 전설이 전하고 있다. 전하는 전설은 조금씩 다른 버전이 있어 내용이 조금씩은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인 내용은 비슷하다.

티무르가 사랑했던 비비하눔이란 왕비가 인도 원정을 마치고 돌아올 티무르를 깜짝 놀래키려고 거대한 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티무르가 돌아오기 전에 완공시켜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던 차에 왕비를 몰래 사랑하던 건축가가 왕비에게 자신에게 입맞춤을 준다면 완공시켜주겠다고 했다. 망설이던 왕비는 이를 허락하고 건축가와 입맞춤을 하게 되었는데 왕비의 볼에 건축가의 입맞춤 자국이 남게 되었다. 돌아온 티무르는 거대한 모스크를 보고 기뻤지만, 왕비의 얼굴에 남은 입맞춤 자국을 발견하고 분노한 티무르는 건축가를 사형시키고 왕비에게는 차도르를 쓰도록 했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왕비가 모스크의 미나레트에서 뛰어 내려 죽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슬픈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티무르가 인도 원정을 마친 것은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였고, 사라이 물크 하눔도 오십 중반을 넘기고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는데 젊은 건축가가 사랑에 빠져 그런 모험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그러나 더욱 결정적인 것은 사실 거대한 모스크의 건축을 지시한 사람은 다름 아닌 티무르 자신이었다. 인도 원정을 마친 1399 티무르는 이슬람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사원을 짓겠다는 결심을 세우고 정복지 곳곳에서 수백 명의 건축가, 장인 등을 동원해 모스크를 짓게 했으며, 1404 다른 원정을 마치고 티무르가 사마르칸트에 돌아왔을 모스크의 건축은 거의 끝나가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티무르는 완성되어 가던 모스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같다. 즉시 많은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수정 작업은 중심 돔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건축 초기부터 구조적 문제점이 드러나 여러 차례의 재건축 또는 보강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불과 미흐라브 위의 돔에서 벽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모스크의 거대한 규모는 당시의 건축 기술로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이러한 기술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건축을 서두르면서 결정적 문제에 봉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가로 167m, 세로 109m 직사각형의 담장 안에 비스듬히 앉은 대형 마스지드가 지어졌다. 주변을 압도하며 35m 높이로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는 입구를 들어서면 중세 이슬람 건축의 특징적인 안뜰을 마주하게 된다. 안뜰 건너 맞은편에 정사각형의 기초 위에 40m 높이의 중심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돔은 모스크의 돔으로는 가장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거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건물의 전면이 깊이 파인 이완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피슈타크로 가려져 있어 돔은 안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비비하눔묘에서 바라 본 비비하눔 모스크의 모습.
본당 건물의 중심 돔이 거대한 피슈타크의 등 뒤에 숨어 있다.

상대적으로 좀더 작은 규모의 돔을 머리에 이고 있는 나머지 개의 돔은 좀더 아담한 규모의 이완이 전면부를 장식하고 있으며 남쪽과 북쪽에서 안뜰의 중앙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원래 안뜰 내부에는 400개의 대리석 기둥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 7.2m 높이의 개방된 회랑이 있었으나 지금은 수가 없다. 바깥 담장의 구석에 있는 미나레트는 복원이 되어 있으나, 입구의 피슈타크와 중앙 건물의 피슈타크에 있었다는 개의 미나레트는 아직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모스크 외부의 남쪽에서 볼 수 있는 모스크의 양 측면에 설치된 두 개의 돔. 남쪽으로 이어지는 상가의 첫 가게에서 잠시 차와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가졌다.
비비하눔 모스크에서 레기스탄으로 이어지는 길은 이렇게 인도로 조성되어 있고 길 양 편에는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매력적인 상가로 만들어졌다기 보다 관광객들에게 사마르칸트 또는 우즈베키스탄도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처럼 보였다.
1905 년과 1915 년 사이에 세르게이 프로쿠딘 - 고르스키 (Sergei Mikhailovich Prokudin-Gorskii) 가 촬영한 사진으로 1897 년 지진으로 무너진 비비하눔 모스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지금은 사라진 회랑의 모습도 볼 수 있다 .

그리고 안뜰의 중앙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대리석 덩어리들로 만들어진 거대한 코란 받침대가 놓여 있다. 이것은 14세기 티무르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다. 혹은 할아버지 티무르에 대한 존경의 표현으로 손자 울루그베그가 설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티무르가 현재의 이라크 땅에 있는 쿠파(Kufa) 정복하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코란 필사본을 손에 넣어 사마르칸트로 가지고 왔으며 코란 받침대에 놓아 두었다고 전한다.

티무르가 사마르칸트로 가져온 코란은 우스만 으로 알려진 최종판으로 651 3 칼리프 우스만 이븐 아판(Uthmān ibn ‘Affān) 의해 메디나에서 만들어졌으며, 지방마다 다르게 읽혀 오던 것을 대체하는 표준 정본으로 선포되었다. 모두 6본만이 편찬되었으며, 티무르가 가져온 코란은 바로 우스만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필사본이었으며, 현재는 타슈켄트 ()시가지에 있는 하즈라티 이맘 광장(Hazrati Imam Complex) 내의 바라크칸 마드라사(Barak-Khan Madrasah) 보관 중이다.

모스크 안뜰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코란 받침대.

사라이 물크 하눔은 티무르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그녀의 남편은 투글루크의 점령에 저항하기 위해 티무르와 손을 잡았으나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대립하게 발흐(Balkh) 지방호족 아미르 후사인(Amir Husayn)이었다. 1370 티무르는 발흐를 점령한 , 후사인을 처형하고 그의 부인들을 모두 차지했으며 사라이 물크 하눔도 이들 가운데 명이었던 것이다. 사라이는 티무르보다 5~7살가량 젊었으며 매우 아름다웠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녀가 티무르의 1부인이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가 (Khan) 딸이자 징기스칸의 직계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라이는 칭기스탄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Chagatai) 중앙아시아에 건립한 몽골왕국 차가타이칸국(Chagatai Khanate) 마지막 칸이었던 카잔 이븐 야사우르(Qazan Khan ibn Yasaur) 딸로 태어났다. 따라서 사라이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눔(Khanum, 칸의 )이란 명칭으로 불렸다. Bibi 귀부인 또는 어머니를 뜻한다. 징기스칸 몽골제국의 부활을 꿈꾸었으며 스스로를 징기스칸의 계승자로 생각했으나 징기스칸의 직계후손이 아니었기에 스스로를 칸이라 칭할 없어 아미르라 칭하는 것으로 만족할 밖에 없었던 티무르는 징기스칸의 후손인 사라이 물크 하눔과 결혼함으로써 구레겐(Guregen, 부마, 駙馬) 칭호를 주장할 있었다. 그렇게 원하던 징기스칸 가문의 일원이 있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외관은 복원되었지만 건물들 내부는 고증의 어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재원부족 문제인지 수는 없으나 전혀 복원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뭔가가 아직은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며 비비하눔 모스크의 출구를 나와 건너편으로 향했다. 울타리에 둘러싸인 오각형의 빈터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광장이라고 해야 공간이 있고, 제일 안쪽에 자그마한 건물 하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복원이 진행되기 전에 심하게 훼손된 상태로 촬영된 비비하눔 모스크의 모습인 것으로 보인다.
모스크의 본당 건물 내부는 벽만 서 있는 상태였다.

18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규모의 마드라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대한 고고학 발굴에서 전통적인 안뜰을 갖춘 중세 마드라사의 배치가 확인되었었다. 마드라사는 10~12세기의 기념비적인 건물이 있었던 곳에 건축되었으며, 입구는 폭이 60m, 아치의 폭도 20m 달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마드라사는 사라이 물크 하눔이 지었으며, 원래의 입구는 건너편의 비비하눔 모스크의 입구보다 높아 티무르를 화나게 했다고 한다. 티무르의 명령으로 결국 입구는 낮게 다시 지어졌다. 입구의 양편에는 지름이 6m 이르는 미나레트가 있었으며, 미나레트에는 부분적으로 10~12세기 벽돌이 사용되었었다. 마드라사는 1740 이란 나디르 (Nādir Shāh) 왕의 군대가 침공했을 파괴되었다

그리고 이곳의 동쪽에는, 입구에서 제일 안쪽에 있는 건물은 비비하눔묘(Bibi Khanum Mausoleum) 사라이 물크 하눔의 가족 공동묘지이다. 묘지에는 사라이 자신만 묻혔던 것이 아니라, 당시 왕가의 다른 여인들도 묻혔다. 다른 설에 의하면, 묘지는 사라이 물크 하눔의 어머니와 왕가의 다른 여인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비비하눔 영묘 건물. 전면의 이완과 피슈타크에 푸른색의 타일로 아무런 정식이 되어 있지 않은 점이 특이했다.
영묘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의 단순한 모습과는 달리 문과 벽들이 여러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지하 묘실의 모습

코란 문구로 장식된 원통형 구조물 위에 코발트블루의 돔이 얹혀져 있는 자그마한 건물의 지하로 내려가면 대리석의 묘실이 있다. 그리고 묘실에는 석관에 담긴 3기의 여성 무덤이 있다. 건물 내부의 벽과 천장에는 다양한 장식의 문양과 함께 모자이크 패널과 그림으로 꾸며져 있으며, 그림들은 사후 깨끗한 사람들이 가게 된다는 천국의 정원이 양식화된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다. 비비하눔 모스크의 건물들처럼, 영묘 건물도 대지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제국이 중앙아시아를 점령하고 이 지역을 투르케스탄(Turkestan)이라 불렀으며, 첫 투르케스탄 총독으로 부임했던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Konstantin P. von Kaufman) 장군에 의해 1871~72년에 걸쳐 지역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6권의 사진첩이 제작되었다. 이 가운데 고고학 분야에 들어 있던 비비하눔묘의 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스.
시압바자르 출입구의 모습. 모스크에서 나오면 북쪽으로 연이어 시압바자르가 위치하고 있다.

울루그베그 천문대

 

아직 해가 지지는 않았지만 해가 때까지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는 않았음을 느낄 있었다.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울루그베그 천문대(Ulugh Beg Observatory)까지 둘러보기로 하고 서두르기로 했다. 천문대는 우리가 다시 타슈켄트로 돌아가는 길가에 있는 추반아타(Chupanata)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천문대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가장 먼저 별이 빛나는 우주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울루그베그의 () 만나게 된다. 울루그베그는 1420년대에 지름 48m, 3 높이의 원형 건물에 육분의, 상한의, 해시계 등이 갖춰진 세계 최고의 천문대를 건설했다. 그는 이곳에서의 관측한 것을 바탕으로 1437 992 별의 위치를 밝힌 지디이 술타니(Zīj-i Sultānī)라는 당대 최고의 천문도를 발간했고,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eos) 이래 12세기 동안 바뀌지 않았던 천문 상식들을 수정했다. 그는 1년이 365 6시간 10 8초라고 계산해 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관측 결과와 1분의 차이도 나지 않는 정확한 계산이었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을 천문대가 있는 추반아타 언덕을 지키고 있는 울루그베그의 상(像).
인도 무굴제국을 세운 바부르(Babur)가 보았다고 묘사한 3층 높이의 울루그베그 천문대 모습. 그는 천문대 건물이 지름 46m, 높이 30m의 둥근 건물로 바깥에 광택이 나는 타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했다.
천문대 내부를 보여주는 그림. 바부르가 중앙홀에 거대한 관측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 것이 현재는 지하 부분의 흔적만 남아 있는 거대한 규모의 육분의였던 것으로 보인다.

1405 티무르의 사망으로 중국 정벌도 취소되었지만 타무르가 자신의 후계자를 명확히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티무르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내부 투쟁이 발발했다. 어린 울루그베그도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울루그베그의 아버지, 로흐가 마침내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으나, 자신의 아버지인 티무르와는 달리 제국의 수도를 자신이 총독으로 있던 헤라트(Herāt) 옮겼다. 그리고 사마르칸트는 자신의 장남인 울루그베그에게 주어 다스리게 했으며, 울루그베그는 트란스옥시아나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420년대 중반까지도 울루그베그의 군대는 모굴리스탄 일부 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했지만, 그는 점차 학문적 연구와 예술 후원에 몰두해갔다. 1420년에 레기스탄에 마드라사를 건립한 , 그는 뛰어난 학자들이 이곳에서 연구할 있도록 초빙했다. 한창일 이곳에는 60~70명의 천문학자들이 연구 활동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마드라사에서의 천문학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천문대 건립에 착수하여, 1429년에 완공했던 것이다.

1447 아버지 로흐가 죽자, 그는 왕위를 이어받았다. 왕좌에 오른 겨우 2년이 지났을 무렵, 이웃 경쟁국과의 전투에서 차례 패한 그는 자신의 아들 압둘라티프(Abdal-Latif Mirza) 의해 재판에 넘겨졌다. 울루그베그는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처벌로 메카 순례를 판결 받고 길을 떠났으나, 사마르칸트 외곽에서 아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참수당했다.

울루그베그가 죽은 , 천문대는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과학자들은 모두 쫓겨났다. 수세기 동안 이곳은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져 갔고 천문대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908 () 소련의 고고학자 바실리 비야트킨(Vassily Vyatkin) 의해 발견된 육분의를 지탱했던 지하 부분과 천문대의 기초뿐이다. 언덕의 정상에 육분의의 흔적과 작은 박물관이 있는데, 박물관에 전시된 관측기구 모형과 그림으로 당시를 추측해 있을 뿐이다.

지금 남아있는 육분의의 흔적.
1970년에 건립된 울루그베그 천문대 박물관. 울루그베그의 「지디이 술타니」 아랍어 원고 복제품을 비롯한 각종 저작물과 관측기구, 천문대 축소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내부의 모습. 각종 관측기구와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다.

울루그베그는 티무르제국의 4 황제로 많은 일들을 했지만 자신의 과학적 업적으로 가장 기억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세운 마드라사는 이슬람 세계에서 학문의 중심이 되었고 그가 죽은 후에도 영향력은 널리 퍼져나갔다. 그의 역작들이 유럽에도 마침내 소개되었지만 그것은 17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하지만 울루그베그의 저작들이 알려질 때까지 유럽의 천문 연구에도 진전이 오면서 유럽의 천문학에 미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가 이슬람세계와 인도 무굴제국에 미친 영향력이 훨씬 중요했다고 있다.

고대와 중세를 거쳐 동서 무역로의 가운데에 위치하여 실크로드의 중심 도시로서의 부침을 겪어 왔을 사마르칸트는 도시가 누렸을 최전성기여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14~15세기의 티무르제국 영광 속에 박제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소리까지 느끼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음에 아쉬움을 느껴졌다. 어느덧 해도 지기 시작하고 석양이 물들어 가고 있었다. 길이 우리는 다시 서둘러 길을 떠나기 위해 바담의 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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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라바스티의 동원정사, 코살라국 불교 전파의 중요한 근거지

코살라(Kosala, 拘薩羅) 국의 거부였던 수다타(Sudatta, 須達多) 장자(長者) 불교에 귀의하고 막대한 재산을 기부해 사위성(舍衛城, Śāvatthī, 산스크리트 Śrāvastī) 인근에 기원정사(祇園精舍, Jetavana Vihāra) 건립하여 붓다에게 기부하면서 기원정사는 교단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붓다 당시 기원정사와 더불어 코살라국에 불교를 전파하는 중요한 근거지가 곳이 있었다. 녹자모(鹿子母, Migāramāta) 별명으로 알려진 비사카(Visākhā, 毘舍) 기증한 동원정사(東園精舍, Pubbārāma, 또는 Purvarām, Vihāra)였다.

붓다의 가장 든든한 여성후원자였던 비사카가 붓다의 성도 31번째 해에 기원정사의 동쪽에 위치한 속에 건립하여 기증한 가람은 녹자모강당(鹿子母講堂, Migāramātupāsāda)이라고도 불렸다. 전승에 의하면, 층에 500실을 갖춘 2 건물이었고, 사위성에서 기원정사 다음으로 붓다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중요한 설법들이 행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붓다는 슈라바스티에서 보낸 25번의 안거 가운데 기원정사에서 19, 동원정사에서 6번을 각각 보낸 것으로 전한다. 저명한 팔리어학자였던 우드워드(Frank Lee Woodward) 의하면, 니까야(Nikāya, 阿含) 경장(經藏) 가운데 모두 871개의 경이 슈라바스티에서 설해졌으며, 가운데 844개가 기원정사에서, 23개가 동원정사에서, 그리고 4개가 슈라바스티 교외에서 설해졌다고 한다.

슈라바스티의 동원정사 위치도

5세기 슈라바스티를 방문했던 동진(東晋) 출신의 법현(法顯) 기원정사에서 북동쪽으로 6~7 거리에 비사카가 세운 동원정사가 여전히 건재했다고 기록했다. 그로부터 2백년이 지난 7세기 초에 당나라의 현장()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는 이미 사위성에 주민은 있었으나 황폐해져 있었으며 기원정사도 옛날에는 가람이었으나 이젠 황폐해져 있었다라고 묘사했다. 이때 이미 동원정사가 흔적조차 없어진 상태였는지는 없으나 현장은 동원정사에 대해서는 글자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현대의 동원정사

동원정사 유적 발굴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것으로 보이지만, 학자들의 의견은 대체로 현대의 칸드바리(Kandhbhari) 마을이 원래 동원정사가 있었던 장소로 보고 있다. 현재 마을 어귀에 비사카 동원정사(Visakha Purvaram Mahavihar)” 있다. 사원이 2008 문을 열기 전까지 이곳에는 마을사람들이 시바(Shiva) 신의 링감(Lingam; 시바신을 상징하는 남근상)으로 숭배하던 부러진 아쇼카왕의 석주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동원정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간판이 많이 눈이 띄었다. 수행정진보다는 기부금을 노리는 사이비 종교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했다. 인도의 여러 불교 순례 유적지가 힌두교 신자가 차지하고 손쉽게 많은 기부금 수입을 확보하는 수단이 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갖게 된 의심하는 마음인 듯싶었다. 정사를 관리하는 현지 인도스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었으나 여름 안거를 위해 자리를 비운 스님을 뵐 수는 없었다.
현재의 동원정사 한 가운데 시바신의 링감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 기괴한 느낌을 주었으나 부러진 아쇼카왕의 석주가 맞아 보였다. 이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가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사위성에 세워졌던 아쇼카왕의 석주들이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는 듯했다. 이 링감은 아직도 마을사람들이 숭배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순례자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물을 뿌려 지웠거나, 지난 번 비에 지워진 듯 하지만 링감과 바닥에 붉은 색깔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현재 가람은 스리랑카에서 출가한 반테 비말(Bhante Vimal)이란 이름의 인도 스님 분이 운영하고 있으며, 내가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 그는 여름 안거에 들어간 상태로 이곳에 없었다. 스님을 여러 만난 적이 있는 샨텀이 매년 여름 이맘때쯤이면 스님이 안거를 보내기 위해 자리를 비운다고 알려 주었다. 대신 심부름꾼인 듯한 현지인 명이 숙소는 없지만 30 가량을 수용할 있는 명상실을 갖춘 가람을 관리하고 있었다. 스님을 뵙지 못해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그런대로 불가의 스님이 가람을 관리하고 있다는 점에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동원정사의 입구. 큰 나무들로 둘러싸여서인지 산속 같은 느낌이었다. 관리인이 우리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입구에 서서 우리를 보고 있다.
정사 내 한쪽 구석에 양철로 지어진 명상실의 모습.
아마도 주변에서 그 동안 찾아낸 듯한 유물들이 한 쪽에 모아져 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차량을 이용해서 칸드바리 마을을 통해 동원정사에 접근한다. 마을 한가운데에서 정사까지는 200m가량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이다. 대부분의 인도 시골마을이 그런 것처럼 더럽고 지저분한 마을과 골목길에 마음이 편치 않을 있지만 금방 마을에서 벗어나 나무들이 울창하게 덮고 있는 마을어귀에 다다른다. 이른 시간이었는데 많은 수의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있어야 시간이었는데 하는 의아한 생각에 샨텀에게 물어보니, 학교 교사들이 무단으로 나타나지 않아 이런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사실이지만, 인도에서는 높은 교사 결근률이 교육의 질을 떨어뜨리는 이유가 되고 있었다.

동원정사에 접근하는 하나의 길은 기원정사에서 출발하여 차가르 반다르 고안 마을을 통과해 오솔길을 따라 가는 길이다. 거리는 1.5km이며, 가는 동안 논을 지나게 되고 시골 경치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작은 마을을 벗어나면 금방 버드나무 가지가 드리워진 자그마한 연못을 만난다. 옛날 이곳 들판을 가로질러 다녔을 붓다가 잠시 쉬었다 갔을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샨텀에게 이야기했더니 작은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기원정사에서 동원정사로 가는 오솔길의 모습.
운이 좋게도 논에서 먹이활동 중인 황새를 만났다. 황새가 놀라지 않도록 숨도 죽이고 지켜보았다.

동원정사의 유래

비사카는 당시 마가다(Magadha, 摩揭陀) 국의 속국이었던 앙가(Anga, 鴦伽) 국의 수도 밧디야(Bhaddiya, 婆提) 출신의 대부호였던 멘다카(Mendaka) 손녀였다. 비사카의 아버지 다난자야(Dhanañjaya) 사업감각이 뛰어났고 이내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며 무역가로 성장했다. 멘다카와 다난자야는 모두 수시로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며 후하게 대접했다. 멘다카가 붓다와 스님들을 초대하여 공양을 올리고 설법을 들을 때면 일곱 살의 어린 손녀 비사카도 함께 자리를 하곤 했다. 법문을 들을 때마다 크게 감동하던 비사카는 가족들과 함께 붓다에게 귀의했다.

멘다카를 따라 새로운 제국의 수도 왕사성(王舍城, Rājagaha)으로 이주해 자리를 잡고 있던 다난자야는 갑작스럽게 코살라국의 무역도시 사케타(Saketa) 이주하게 되었다. 이는 코살라국의 파세나디(Pasenadi, 波斯匿) 왕이 마가다국의 빔비사라(Bimbisāra, 頻婆娑羅) 왕에게 직접 요청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무역으로 성장한 사케타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도시였으며, 다난자야는 사케타를 거점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사케타에서 다난자야의 대성공은 수도 사위성까지 널리 퍼졌다. 사위성의 재력가였던 미가라(Migara, 鹿子) 다난자야와 연줄을 맺고 싶어하던 차에, 마침 16세로 혼기를 맞은 비사카를 며느리로 맞기 위한 혼담을 추진했다. 엄청난 지참금을 가지고 미가라 집안으로 시집온 비사카는 사위성에 정착했다. 사랑하는 딸을 멀리 떠나 보내게 다난자야는 사위성에서 존경 받는 여덟 명의 바라문에게 집과 연금을 제공하면서 비사카의 후견인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미가라 장자와 그의 가족들은 나체로 수행하는 외도(外道) 자이나교의 열렬한 신도였다. 탁발하는 불가의 스님들을 냉대하고 오직 자신들이 따르는 자이나교 수행자들에게만 후하게 대할 뿐이었다.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데 대한 인색함으로 결국 비사카는 미가라 장자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미가라 장자가 비시카를 내쫓으려 하자, 그녀의 후원자가 된 여덟 바라문이 나서서 양쪽의 말을 듣고 긴 토론 끝에 비사카에게 잘못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댁에 남는 것뿐만 아니라 스님들께 공양도 올릴 수 있게 된 비사카는 붓다와 스님들을 초대했다. 붓다가 집안에 들어서자 다른 가족들은 모두 집안 깊이 몸을 숨기고 비사카 홀로 붓다를 맞이했다. 공양을 마친 붓다가 설법을 시작하자 이를 몰래 듣고 있던 미가라 장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설법에 빠져들어 마침내 지혜의 눈이 열렸다. 그는 기쁨에 넘쳐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붓다에게 예를 올리고 귀의했다. 붓다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미가라 장자는 자신을 붓다의 가르침으로 인도해준 비사카에게 고마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무지했던 자신을 진리의 길로 인도해 준 비사카를 가리켜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고 했으며, 집안 살림에 대한 모든 권한을 맡겼다. 그 후 비사카는 미가라의 어머니(Migāramāta)’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한자로 의역하여 녹자모(鹿子母)’라고도 한다.

그날 이후 시아버지 미가라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비시카는 기원정사 동쪽에 있는 넓은 땅을 구입하여 1000 이상 수용 가능한 쾌적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지어 붓다와 교단에 기증하였다. 건물은 기원정사의 동쪽에 있다 하여동원정사라고 불렸고 혹은녹자모강당이라고도 알려지게 되었다.

비사카는 동원정사 외에도 다섯 가지 보시를 하겠다고 발원하였다. 다섯 가지 보시란 비구에게는 비옷을, 비구니에게는 목욕 입을 옷을, 병든 사람에게는 죽을, 병든 이를 간호하는 사람에게는 밥을, 곳에서 비구와 비구니에게는 죽을 공양하겠다는 발원이었다. 비사카는 자신의 발원을 평생 하루도 어기지 않고 지켜나갔다. 그녀의 보시는 무엇과도 비할 없는 보시라 하여무비(無比) 보시라고 불린다.

© 2015 不二 in 경계에 머무는 삶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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