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리트기리에대한체계적조사와발굴작업은1977년이되어서야이루어졌다. 1977년소규모발굴작업을주도한것은우트칼대학의 K. S. 베헤라(K. S. Behera) 박사였다. 베헤라는굽타예술전통이서려있는랄리트기리의조각품들이야말로오디샤조각의오랜발전과정에서잃어버렸던연결고리를제공해준다고설명한다. 그는또한랄리트기리의지형적환경이현장이묘사한푸시파기리(Pushpagiri, 補歰波祇釐)의지형과여러가지로유사하다고주장한다. 이발굴작업에서주목할만한발견은굽타왕조의찬드라굽타2세(Chandragupta II)의궁수양식의금화였다.
주차장에서출입문을통과해안으로들어와길을따라걷기시작하면금방오른쪽으로새로건립된랄리트기리고고학현장박물관(Archaeological Site Museum, Lalitgiri)을만난다. 2018년12월24일에개장한박물관은6개의전시관으로구성되어있으며이곳랄리트기리에대한발굴과정에서발견된다양한불교유물을전시하고있다.
랄리트기리의 배치도.2018년 신축된 랄리트기리의 현장박물관.2015년 2월 당시 랄리리트기리의 입구 근처에서 박물관 신축을 위한 철근 기초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
반월형 차이트야그리하의 전경.반월형 차이트야그리하는 동서로 자리 잡고 있으며 동쪽에 입구가, 서쪽 끝 반월 부분에 원형 스투파가 있다.차이트야그리하의 바깥쪽에는 돌로 포장된 보행로가 있으며 바깥 경계에는 봉헌탑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랄리트기리에서는 반월형 차이트야그리하 주변에 특히 봉헌탑들이 많이 모여 있다.
승원1의 전경. 정면에서 계단을 올라서면 출입구 현관에 들어서게 된다.승원1의 5단 양식 전면부 출입구 주변의 모습.푸른 빛의 녹니석 문틀 위 상인방 중앙에는 코끼리로부터 목욕을 받고 있는 힌두 여신 락슈미(Gajalaxmi)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어 힌두교의 영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엘로라석굴(Ellora Caves)의 16번 동굴인 힌두교사원 카일라사사원(Kailasa Temple)에서 만날 수 있는 락슈미(Lakshmi)의 모습. 연꽃 연못의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략슈미를 코끼리들이 목욕을 시켜주고 있다 (Gajalaxmi).문틀 양쪽의 문설주 아래 부분에는 여러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다. 수호신 드바라팔라가 멋진 모습을 취하고 서 있고 그 옆에는 시종이 받치고 있는 양산을 쓰고 있는 왕족이 서 있다.
앞쪽과뒤쪽의입구현관사이에는좁은통로가있다. 뒤쪽입구현관에도동쪽과서쪽벽에벽감이설치되어있다. 이곳에는귀자모신(鬼子母神, Hārītī)과그녀의배우자인판치카(Pañcika, 般闍迦)가 각각 모셔져 있다. 이 당시 인도의 승원에 왜 팔로아이를안고있거나무릎주변에여러명의아이를데리고있는모습의귀자모신像이모든인도승원의현관이나식당구석에서발견되는지에대한당나라의유학승의정(義淨)의설명은앞서‘(1) 떠오르는태양의언덕, 우다야기리’에서했었다.
승원1의 신전. 뒤쪽(북쪽) 벽 중앙에 있으며 입구에는 문틀도 사라지고 없으며 문설주만 남이 있다.문설주에 남아 있는 조각에서는 여전히 정교함을 느낄 수 있다.문설주 아래 부분에는 오른쪽부터 수호신인 드바라팔라, 보살, 카마라다라니, 뱀신 나가의 모습이 각각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몇세기가흐른후, 우다야기리가다시사람들의주목을받게된것은1870년당시자지푸르의부행정관이었던바부찬드라세크하라바누르지(Babu Chandrasekhara Banurji)가야생동물들이출몰하는깊은정글속에위치한이언덕을찾아이에대한짧은보고서를캘커타벵갈아시아학회지(Journal of the Asiatic Society of Bengal)에발표하면서부터시작되었다. 그는언덕밑에서큰불상을만났으며, 그곳에서부터계단식우물이있는곳사이에많은유물들이널려있었다고기록했다.
이 관음보살상의 양손은 모두 떨어져 나가고 없지만, 남아 있는 부분과 우다야기리의 다른 구역에서 발견된 유사한 관음보살상을 봤을 때 여원인(與願印, Varada mudra)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오른팔을 길게 아래로 늘어뜨리고 손가락을 펴서 바깥으로 향하도록 하고 있으며 왼손은 어깨 높이로 올리고 연꽃 줄기를 잡고 있는 모습으로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고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주겠다는 표시이다.
이 구역의입구에세워져있던관음보살(觀音菩薩, Avalokiteśvara) 상이다. 밀교의영향때문이었는지여성의모습을하고있다. 왼손에들고있는연꽃은모든중생이본래부터불성(佛性)을갖추고있음을나타내고있어, 이像을지나승원으로들어서는모든사람들에게번뇌망상에물들지않고장차피어날불성을갖추고있음을상기시키려는듯했다. 발견당시가슴부위에서두동강이난상태였으나지금은그흔적은남아있으나하나로이어져있다.
야외에 불상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뒤에 현장 관리사무소 같은 건물이 있고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상주하고 있다.우다야기리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불상들이 이곳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
마하스투파와 승원1 사이의 공지에는 여전히 유물들이 널려 있었다. 훼손이 심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아마도 가치가 많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된 모양이었다.공지 가장자리에 서 있는 네 팔의 관음보살상의 모습. 아래로 떨어뜨린 오른손 하나는 활짝 펴서 앞으로 향하고 있고 다른 오른손 하나는 염주를 쥐고 있다. 떨어져 나간 왼손에는 활짝 핀 연꽃이 쥐어져 있었을테고 다른 왼손 하나는 물병을 쥐고 있다.
차이트야그리하 근처에는 다양한 사리탑과 봉헌탑들이 몰려 있다.승원2 구역 여기저기에도 유물들이 발굴된 곳에서 방치되고 있었다.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유물들이 박물관 등지로 옮겨 보관되든지 아니면 원래 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체계적인 복개수로가 사용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아마도 하수가 처리된 수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차이트야그리하 인근의 봉헌탑. (왼쪽); 계단식 우물. 계단을 내려가면 지금도 물이 있지만 현재는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물은 더러웠다. (오른쪽)
붓다가 최고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강변의 조용한 숲 속에 있는 한 그루의 큰 나무 아래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는 점을 기억하면 전체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역사적인붓다가신격화되면서길상초를깔고붓다가앉았던자리가금강보좌(金剛寶座, vajrasana)로표현되기시작한것으로보인다. 붓다가대각을이룬자리를표시하기위해이자리에실제로석재평판(石材平板)을설치한사람은약200년후이곳을찾은것으로추정되는아소카(Aśoka, 산스크리트 Ashoka) 왕이었다. 아소카왕이설치했던것으로추정되는금강보좌는19세기말알렉산더컨닝햄(Alexander Cunningham)에의해발굴되었다.
보리수 나무와 대탑 사이가 금강보좌가 위치한 자리이다. 현재는 아소카왕의 금강보좌 위에서 발견된 굽타(Gupta) 시대에 설치된 금강보좌의 일부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보리수 나무와 금강보좌의 안전을 위해 높은 울타리가 세워져 있다.보리수 나무 아래에 앉아 쉬고 있는데 마침 발 아래로 보리수 나뭇잎이 떨어져 내렸다. 나뭇잎을 몇 개 주워 책 속에 넣어 두고 잊어버렸는데 자료를 뒤척이다 바삭 마른 잎을 발견했다.
현재 점점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실재 무찰린다 연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모짜림 마을의 연못. 현장은 검은 기가 도는 아름다운 빛깔이었으며 그 물 맛도 좋다고 했는데, 자금의 모습은 전혀 그렇게 보이질 않았다.모짜림 연못 건너편 물가에는 붓다와 붓다를 보호하고 있는 뱀의 왕 무찰린다 모습의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태국 불교도들이 설치했다.
붓다가 대각 후 다섯 번째 7일간 선정에 들었다고 전해지는 아자팔라니그로다 나무는 나이란자나 강변일 가능성이 높으나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현재 경내에 표시된 위치에서 동쪽으로 연장해 강변으로 오면 담벼락 넘어 시끌벅적한 시장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밭이 있는 곳에 도착한다. 이곳은 현재 지역의 힌두 마한트(Mahant) 소유의 땅이다.마한트 소유의 밭 가장자리에 대보리사 대탑과 일직선 상에 있는 지점에 미얀마 왕이 세운 오래된 스투파가 있었다. 19세기에 미얀마 측에서 대보리사 발굴 등의 작업을 했으므로 그 당시의 작업을 기념하는 스투파인지, 아니면 아자팔라니그로다 나무와 관련된 스투파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컨닝햄의 대보리사 발굴 기록 가운데 대탑 주변을 도면으로 기록한 자료이다. 파란색의 내용은 아소카왕이 조성했던 보리수 사원의 유적에 대해 컨닝햄이 별도로 기록한 도면으로 이를 겹쳐보면 아소카왕의 금강보좌는 현재 대보리사 대탑의 법당 내에 붓다상의 좌대와 일치한다. 즉 현재 붓다상은 정확히 붓다가 대각을 위해 보리수 나무 아래 앉았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금강보좌의 바로 서편에 원래 보리수 나무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기원전 250년경 아소카왕이 보드가야의 보리수 나무를 배경으로 설치한 대보리사 사원과 금강보좌의 모습. 코끼리 기둥머리가 얹혀진 아소카왕의 석주가 세워졌었음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이 석주가 사라지고 없다. 바르후트(Bhārhut), 기원전 100년 (왼쪽); 1892년 컨닝햄의 기록에 나타난 발굴 당시의 아소카왕의 금강보좌, 대보리사 대탑 내부 불상 좌대로 사용되고 있다. (오른쪽)
산중턱에서 바라본 전정각산의 모습. 하얀색 건물이 있는 곳이 둥게스와리 석굴사원이며, 건물 뒤쪽에 전정각산굴이 위치한다.둥게스와리 석굴사원 내의 모습. 전정각산굴을 찾은 순례객들이 쉬고 있다.왼쪽 굴 입구가 전정각산굴로 들어가는 입구이며, 오른쪽은 절벽 아래를 벽을 세워 예배실로 만든 곳이다. 주변의 장식이 티베트 사원의 느낌을 준다.순례객들이 붓다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진 전정각산굴에 들어가려고 줄을 서 있다. 굴 입구의 벽에는 순례객들이 금박으로 붓다를 경배한 자국이 남아 있다.
전정각산굴의 정면 모습.전정각산굴에 들어서면 마주하게 되는 고행 중인 붓다상.붓다의 고행상 중 가장 유명한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행하는 붓다상 (Fasting Buddha). 청흑색의 각섬편암으로 만들어진 이 불상은 싯다르타가 해탈하기 전 단식 고행을 하던 시기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 높이 80cm 의 좌상으로 간다라 예술의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 왼쪽 ); 라호르 고행상은 많은 모사품이 만들어졌는데 , 우리가 흔히 접하는 고행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행상이 철로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갖게 한 것 같다 . ( 오른쪽 )
세나니가마는 현재 바끄라우르(Bakrour) 마을로 추정되고 있다. 바끄라우르 마을에서 가을 추수하는 장면. 우리의 옛 시골 풍경 같다. 저명한 팔리어 학자였던 부다고사(Buddhaghoṣa, 佛音)와 담마팔라(Dhammapāla)는 우루벨라(Uruvelā)가 드넓은 모래사장 또는 홍수로 모래가 쌓인 강둑을 가리킨다고 했다. 따라서 특정 마을이 아니라 그러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으며, 현재 일부 학자들은 우루벨라에는 여러 개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바끄라우르는 여전히 가난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이 마을 또는 바로 인근 지역이 붓다 당시 세나니가마였다고 하는데 우루벨라의 마을들 중 하나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후대 대승불교 불전에서 나타나는 세나파티(Senāpatigrāma)와 일치한다. 부다고사에 의하면, 당시에 군사 주둔지였다고 한다.
붓다의바람과는달리고대로부터붓다의일생에있었던중요한사건들을둘러싼전기를쓰려는시도들이있어왔다. 그러나이렇게후대에쓰여진붓다의전기들은붓다입멸후수백년이지난뒤부터성립된것이고, 더구나붓다의위대함을찬양하는입장에서쓰여졌기때문에여러가지창작과가탁이첨가되고신화적전설적인요소가대단히많다. 불교경전중에서붓다의생애를주제로한것을일반적으로‘불전(佛傳)’, ‘불전경전(佛傳經典)’, 또는 ‘불전문학(佛傳文學)’이라고 하며,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한역(漢譯), 티베트어 역본(譯本) 등으로 다양하게 존재한다.
다울리기리 주변 지역 지도.다울리기리로 향하는 길가에서 만나는 코끼리상으로 유명한 다울리기리 아소카 바위 담마칙령. 관리인이 깨끗이 정비하고 있는 내부와는 달리 외부는 어수선한 모습이었다.다울리기리 아소카 바위 담마칙령에 새겨져 있는 칙령 내용들. 특이하게도 칼링가전쟁 내용이 포함된 칙령 13호와 칙령 11호, 12호가 빠져 있고 그 대신 별도의 칙령 2개가 새겨져 있다.
다울리기리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다야강과 주변 평야의 모습 .그 옛날 참혹했던 전쟁터의 흔적은 하나도 찾을 수 없다.오디샤주는 다울리기리를 세계적인 불교유적지로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앞으로 몰려올 관광객을 위해 다울리 수공예품시장을 조성했으나 제대로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수공예품시장은 인도의 다른 곳에서도 보아오던 것처럼 동선계획이나 시설의 수준이 낮은 것도 문제이지만, 시장 수요에 대한 고려 없이 이렇게 큰 투자를 해 놓았는데 텅 빈 곳으로 남아 있어 마음이 아팠다.수공예품시장 인근에 다울리 예술공예대학이란 교육시설이 위치하고 있었다. 입구 정원에는 이곳에서 교수 및 학생들이 제작한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예술공예대학의 존재도 수공예품시장이 이곳에 유치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술공예대학의 복도에서 작품을 만들고 있는 모습.
구자라(Gujarra) 본 작은 바위 담마칙령 1호에 새겨진 아소카대왕의 정식 칭호, 데바남피야 피야다시 아소카라자(Devanampiya Piyadasi Asokaraja). 칙령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명칭인 신의 총애를 받는 자 피야다시 (Devanampiya Piyadasi) 또는 쁘리야다르시(Priyadaarsi)왕이 아소카왕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찬드라굽타는 기원전 321년 같은 마가다국 출신의 난다왕조를 멸망시키고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인도 침공과 퇴각 과정에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을 틈타 인도 서북부의 지배권을 확립하였고, 그 뒤를 이은 빈두사라왕에 이르러 칼링가와 인도 남부지역 일부를 제외한 인도대륙 대부분을 통합했다. (왼쪽); 마우리아제국의 3대 아소카왕에 이르러 칼링가를 합병하여 남부 일부를 제외한 인도 전체를 통일하여 마침내 세계제국을 완성했다. (오른쪽)
전륜성왕에 대한 내용을 전하는 『아육왕전(阿育王傳)』이 해인사 고려대장경에 전한다. 서진(西晉) 안식삼장(安息三藏) 안법흠(安法欽)의 한역. 고려대장경연구소.해인사 고려대장경에 전하는 전륜성왕에 대한 또 다른 번역으로 『아육왕경(阿育王經)』이 있다. 양(梁) 부남(扶南) 승가바라(僧伽婆羅)의 한역. 고려대장경연구소.
피두랑갈라 정상에서 바라본 시기리야의 모습 .시기리야 북쪽 사자문과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정상에 오르면 흔들바위를 만난다. 피두랑갈라가 화산활동으로 200m를 솟아오를 때도 굴러 떨어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나 보다!시기리야를 배경으로 다양한 모습을 연출한다.
피두랑갈라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석굴사원의 외관 모습.하얀색 석굴사원 건물로 들어서면 불상을 모신 내실 입구를 사자와 수호신들이 지키고 있다.석굴사원 내부에 불상을 모신 내실의 모습. 중앙에 길게 와불상이 모셔져 있고 좌우 양쪽 끝에 입상 또는 좌상의 불상이 마주보고 있다.
이사원의이름은피두랑갈라시기리라자마하사원(Pidurangala Sigiri Rajamaha Viharaya)이다. 피두랑갈라의역사는기원전1~2세기로거슬러올라간다. 그당시부터불교사원이자리하고있었다고하지만사람들에게알려진것은시기리야에성채와도시를건설했던카샤파1세(Kashayapa I, 473-495 AD)가통치하던시기였다.
테르메즈 공항의 대합실 창문 너머로 낡은 트럭이 수하물을 실어와 컨베이어 벨트에 수하물을 부리고 있다. 같은 세기를 살고 있는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개도국을 여행하다 보면 흔히 보는 광경이기도 하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의정벌과헬레니즘문명의확립
길목에위치한땅이어서외래문명을빨리접할수있었던장점도있었지만, 외세의침략에시달려온땅이기도했다. 기원전 6세기에이미옛이란의아케메네스(Achaemenes) 왕조의침입이있었다. 그로부터 200년이지나기원전 4세기에는마케도니아(Macedonia)의알렉산드로스대왕이이곳테르메즈를점령했었다. 알렉산드로스제국의점령은이곳에동양의문화에그리스문화가더해져새롭게탄생한헬레니즘문화가뿌리를내리는계기가됐다. 고대자료에알렉산드로스대왕이건설했다는 ‘옥수스의알렉산드리아(Alexandria on the Oxus)’라는도시가바로테르메즈였다.
사실마케도니아는그리스내에서도아테네와스파르타처럼선진적인도시국가로발전하지못한변방의작은왕국이었다. 그리스자체도거대한이웃페르시아제국의침략과괴롭힘을당하는처지였다. 이러한처지에도마케도니아의필리포스 2세(Philippos II)는군사력을키워그리스전체를수중에넣고페르시아제국자체를멸망시키고그땅을차지하겠다는원대한꿈을품고있었다. 필리포스는아들알렉산드로스의눈부신활약으로마침내숙원이었던그리스도시국가들의공수동맹인코린트동맹(League of Corinth)의맹주자리에오르고, 이어페르시아정벌에나섰다. 그러나그는자신의경호원중한명에게불의의죽임을당하고말았다.
기원전 500 년경 아케메네스왕조 시대의 페르시아제국 영토 . 페르시아제국은 속주의 종교와 관습을 최대한 인정하면서 주변 문명을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로 녹여낸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 박트리아는 거대한 페르시아제국의 동쪽 끝에 위치했다 . 위키피디아 .
메난드로스 1 세 시대에 발행되었던 은화에 나타난 메난드로스왕의 모습 . ‘ 구세주 메난드로스왕 ’ 이라 새겨져 있다 . 대영박물관 ( 왼쪽 ); 메난드로스 1 세 시대의 기본 동전으로 왼쪽의 전면에는 중앙에 법륜 ( 法輪 ) 과 함께 ‘ 구세주 메난드로스왕 ’ 이란 글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가 새겨져 있다 . 대영박물관 ( 오른쪽 )
메난드로스 2 세 때의 주화로 제우스신이 법륜 위로 승리의 화환을 건네는 승리의 여신 니케를 잡고 있는 모습이 주조되어 있다 . ( 왼쪽 ); 그리스식의 망토와 모자를 쓰고 법륜을 굴리고 있는 신의 모습이 주도되어 있다 . ‘ 법륜을 굴리는 사람 ’ 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 오른쪽 )
기원전 3세기의아소카(Aśoka, 阿育王) 치세때개최되었던불교제3차결집이후붓다의가르침을전하기위해각지로전법사들이파견되었다. 박트리아도이때불교가전파된곳들가운데하나라는주장도있다. 그러나학자들의고고학적연구결과로뒷받침되는사실은기원전2세기에전법사들이박트리아에파견되어불법을전하기시작했을수는있으나, 박트리아북부에불교건축물들이널리세워지고불법이널리전파된것은기껏해야기원후1세기후반이되어서야이루어진일이라고한다.
동전의 전면에 덥수룩한 수염의 카니슈카 1 세가 두꺼운 외투와 긴 장화를 신고 있는 모습 . ‘ 왕중 왕 , 쿠샨의 카니슈카왕 ’ 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 ( 왼쪽 ); 후면에는 시무외인 ( 施無畏印 , abhaya mudra) 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헬레니즘 양식의 붓다 상 . 붓다의 모습 왼쪽에 붓다 (Boddo), 오른쪽에는 카니슈카의 문장 ( 紋章 ) 이 새겨져 있다 . ( 오른쪽 )
1908~1909 년 페샤와르의 고대도시에 위치한 카니슈카대탑의 발굴 과정에서 대탑 아래 부분의 안치실에서 발견된 붓다 사리함 . 위 부분에는 좌우로 브라마신과 인드라신의 경배를 받고 있는 붓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 ( 왼쪽 ); 사리함 몸체의 아래 부분에는 카니슈카왕으로 보이는 쿠산의 왕이 좌우에 이란의 해와 달 신들과 함께 조각되어 있다 . ( 오른쪽 ) 페샤와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사라함 안에는 붓다의 뼈조각 3 과가 들어 있었으나 영국이 미얀마의 만달라이 (Mandalay) 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2 세기 간다라 지역에서 최초로 출현했던 불상들 가운데 하나로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왼쪽); 2세기에 간다라에서 출현했던 불상이며 오른쪽에서 붓다를 보호하고 있는 금강수보살(金剛手菩薩)이 헤라클레스로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
간다라불상에서특이한것은머리카락이고수머리가아니고물결모양의장발이라는점과용모는눈언저리가깊고콧대가우뚝한것이마치서양사람과같다는점이다. 또얼굴의생김새가인간적이고개성이있다는점, 입고있는옷의주름이깊게새겨졌고그모양이자연스러워형식화된것이아니라는점등을그특징으로들수있다. 즉, 간다라불상의표현은그리스풍의자연주의ㆍ현실주의에바탕을두고있다는점이독특했다.
이렇게오늘날파키스탄의북부지방인간다라에서꽃피웠던그리스-불교예술은인도로퍼져나가마투라의예술, 그리고이후에는굽타(Gupta) 왕국의예술에크게영향을미쳤으며, 이는다시동남아시아전역으로파급되었다. 간다라의불교문화는또한북쪽으로도퍼져나갔는데한갈래가중앙아시아로퍼져나갔으며, 다른한갈래는타림분지를거쳐중국, 한국, 일본까지큰영향을끼쳤다.
테르메즈의불교유적
고고학발굴로수세기에걸쳐고대테르메즈는중앙아시아에서중요한불교중심지였음이밝혀졌다. 포교사들이이곳을출발하여북서쪽으로는철문관을넘어소그디아나로불교를전달하였고, 북동쪽으로는파미르고원과알라이산맥을넘어東투르케스탄(East Turkestan)으로그리고그너머중국, 한국, 일본에까지불법(佛法)을전했다. 옛문서에는산스크리트어(Sanskrit) 불교경전을한역(漢譯)한사람들의이름을포함하여중국에서불교포교활동을벌였던박트리아인들의이름이남아있다.
7세기초옛테르메즈를통과해인도로향했던현장은「대당서역기」에서 테르메즈를 달밀국(呾蜜國)이라 칭했으며, 10여개의 사원이 있고 스님들도 1000여명이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도 불교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장이 보았던 옛 테르메즈는 동서로 600여리, 남북으로 400여리였고, 도성의 둘레는 20여리에 달하며, 동서로는 길고 남북으로는 좁은 모양이었다.
이곳파야즈테파에서고고학자들이발견한조각상들과토기들도그우아함과기교로예술적가치를높이인정받았다. 특히양편에두스님이서있는가운데성스러운보리수나무아래에가부좌자세로앉아있는붓다상이주목을끌었는데비나야삼존불이라불리는이불상은이곳파야즈테파에서발견된불교예술품들중최고의작품으로꼽힌다. 이불상은아치모양의테두리안에앉아있는모습인데아치는그리스의코린트식기둥위에얹혀져있다. 붓다상자체도그리스풍예술의영향을받은흔적이뚜렷이남아있다. 이조각품은석회석에새겨졌으며금박장식이되어있다. 현재이조작품은타쉬켄트소재의우즈베키스탄역사박물관(State Museum of History of Uzbekistan)에전시되어있다.
파야즈테파에서 발견된 비나야삼존불 . 1~2 세기 추정 . 우즈베키스탄 역사박물관 ( 왼쪽 ); 궁정신하들을 묘사한 벽화로 파야즈테피에서 발굴되었다 . 1~3 세기 추정 . 우즈베키스탄 역사박물관
2000 년 세월을 견뎌 온 진흙탑을 보기 위해서는 반구형 보호 지붕에 나 있는 이 출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평소에는 자물쇠로 잠겨져 있다.발굴 당시 탑의 모습 (왼쪽); 반구형 보호 지붕 안에 있는 현재의 탑의 모습 (오른쪽)반구형 보호 지붕 안에 있는 현재의 탑의 모습
13세기초사마르칸트를포함한중앙아시아와이란지역의지배자는투르크계열의무슬림술탄인샤알라아딘무하마드(Shah Ala ad Din Muhammad)였다. 그의왕국은호라즘제국(Khwarezmid Empire)이라불렸다. 당시몽골고원에서급격히성장하던칭기스칸(Chingiz Khan, 成吉思汗)은금나라를정벌중이었으며, 중앙아시아의정벌은전혀고려하고있지않았다. 그는호라즘과의교역을열기위해대상(隊商)과사절단을보냈지만, 술탄은대상과사절단을죽이거나모욕적인대우를함으로써칭기스탄의분노를불러일으켰다.
울루그베그 마드라사가 건립된 후 200년이 지나 그 맞은편에 건립된 셰르도르 마드라사.피슈타크의 윗부분에 떠오르는 태양을 등에 지고 하얀 사슴을 뒤쫓고 있는 호랑이 모자이크는 고대 페르시아의 미트라교 신앙 모티브를 표현하고 있는 바 종교적 건축물에 살아있는 생물의 묘사를 금지하는 이슬람 율법을 무시하고 있어 이슬람교도들의 반감을 샀으나 신기하게도 건물은 살아 남았다.동행했던 마이클도 호랑이 모자이크가 신기했던지 카메라에 담고 있다.
마드라사의 안뜰로 들어가는 입구. (왼쪽); 기숙사동이나 강의동으로 둘러싸인 마드라사의 안뜰 모습. (오른쪽)마드라사 안뜰의 건물들은 지역의 수공예 상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품질을 확인할 수 없으며 시장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 마드라사 본래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특유의 푸른색 도자기를 파는 판매대.다양한 무늬의 옷감을 파는 판매대.양탄자를 판매하고 있는 판매대.
티무르의 영묘 건물이며, 돔 바로 아래 안쪽에 티무르가 누워 있다.이슬람 건축에서 내부 천장 부분을 장식하는 기법으로 사마르칸트의 건축물에서도 두루 나타나고 있는 무하르나스(Muqarnas).다른 무덤들과는 색깔이 다른 가운데 흑옥석관이 티무르의 무덤이며, 울루그베그가 설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거대한 흑옥은 1420년대 모굴리스탄 정벌에서 울루그베그가 획득한 전리품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구르아미르의 무덤 배치도
부분적으로 파괴된 채로 19세기에 촬영된 구르아미르의 모습 (왼쪽); 20세기에 복원된 구르아미르의 모습 (오른쪽) RadioFreeEurope/RadioLiberty 사진갤러리.1941년 구(舊) 소련의 게라시모프가 티무르의 두개골에서 복원한 티무르의 얼굴 모습. 몽골초원의 몽골인에 가까운 모습이다. (왼쪽); 구르아미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티무르의 초상화. 좀더 서구화 혹은 페르시아화 된 모습을 보인다. (오른쪽)
시압바자르 입구에서 바라본 비비하눔 모스크.비비하눔 모스크 입구의 거대한 이완과 피슈타크의 규모는 티무르가 이 모스크 건립에 들인 의지와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모스크 내부 저 멀리 보이는 본당 건물의 이완과 피슈타크 역시 매우 큰 규모여서 중심 돔을 가리고 있어 볼 수가 없다.
티무르는이거대한건축물에자신이사랑했던왕비의이름을붙여비비하눔모스크라명명했다. 그녀의이름은사라이물크하눔(Saray Mulk Khanum)이었다. 사마르칸트의많은건축물이그런것처럼, 이모스크에도처음모스크의건축이이루어질당시의아름답지만슬픈전설이전하고있다. 전하는전설은조금씩다른버전이있어내용이조금씩은다르긴하지만기본적인내용은비슷하다.
모스크 외부의 남쪽에서 볼 수 있는 모스크의 양 측면에 설치된 두 개의 돔. 남쪽으로 이어지는 상가의 첫 가게에서 잠시 차와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가졌다.비비하눔 모스크에서 레기스탄으로 이어지는 길은 이렇게 인도로 조성되어 있고 길 양 편에는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매력적인 상가로 만들어졌다기 보다 관광객들에게 사마르칸트 또는 우즈베키스탄도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처럼 보였다.1905 년과 1915 년 사이에 세르게이 프로쿠딘 - 고르스키 (Sergei Mikhailovich Prokudin-Gorskii) 가 촬영한 사진으로 1897 년 지진으로 무너진 비비하눔 모스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지금은 사라진 회랑의 모습도 볼 수 있다 .
러시아제국이 중앙아시아를 점령하고 이 지역을 투르케스탄(Turkestan)이라 불렀으며, 첫 투르케스탄 총독으로 부임했던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Konstantin P. von Kaufman) 장군에 의해 1871~72년에 걸쳐 지역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6권의 사진첩이 제작되었다. 이 가운데 고고학 분야에 들어 있던 비비하눔묘의 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스.시압바자르 출입구의 모습. 모스크에서 나오면 북쪽으로 연이어 시압바자르가 위치하고 있다.
울루그베그천문대
아직해가지지는않았지만해가질때까지시간이그렇게많이남지는않았음을느낄수있었다. 우리는해가지기전에서둘러울루그베그천문대(Ulugh Beg Observatory)까지둘러보기로하고서두르기로했다. 천문대는우리가다시타슈켄트로돌아가는길가에있는추반아타(Chupanata) 언덕에자리잡고있었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을 천문대가 있는 추반아타 언덕을 지키고 있는 울루그베그의 상(像).인도 무굴제국을 세운 바부르(Babur)가 보았다고 묘사한 3층 높이의 울루그베그 천문대 모습. 그는 천문대 건물이 지름 46m, 높이 30m의 둥근 건물로 바깥에 광택이 나는 타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했다.천문대 내부를 보여주는 그림. 바부르가 중앙홀에 거대한 관측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 것이 현재는 지하 부분의 흔적만 남아 있는 거대한 규모의 육분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원정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간판이 많이 눈이 띄었다. 수행정진보다는 기부금을 노리는 사이비 종교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했다. 인도의 여러 불교 순례 유적지가 힌두교 신자가 차지하고 손쉽게 많은 기부금 수입을 확보하는 수단이 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갖게 된 의심하는 마음인 듯싶었다. 정사를 관리하는 현지 인도스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었으나 여름 안거를 위해 자리를 비운 스님을 뵐 수는 없었다.현재의 동원정사 한 가운데 시바신의 링감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 기괴한 느낌을 주었으나 부러진 아쇼카왕의 석주가 맞아 보였다. 이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가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사위성에 세워졌던 아쇼카왕의 석주들이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는 듯했다. 이 링감은 아직도 마을사람들이 숭배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순례자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물을 뿌려 지웠거나, 지난 번 비에 지워진 듯 하지만 링감과 바닥에 붉은 색깔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결혼생활은순탄하지않았다. 미가라장자와그의가족들은나체로 수행하는 외도(外道) 자이나교의 열렬한 신도였다. 탁발하는 불가의 스님들을 냉대하고 오직 자신들이 따르는 자이나교 수행자들에게만 후하게 대할 뿐이었다.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데 대한 인색함으로 결국 비사카는 미가라 장자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미가라 장자가 비시카를 내쫓으려 하자, 그녀의 후원자가 된 여덟 바라문이 나서서 양쪽의 말을 듣고 긴 토론 끝에 비사카에게 잘못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댁에 남는 것뿐만 아니라 스님들께 공양도 올릴 수 있게 된 비사카는 붓다와 스님들을 초대했다. 붓다가 집안에 들어서자 다른 가족들은 모두 집안 깊이 몸을 숨기고 비사카 홀로 붓다를 맞이했다. 공양을 마친 붓다가 설법을 시작하자 이를 몰래 듣고 있던 미가라 장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설법에 빠져들어 마침내 지혜의 눈이 열렸다. 그는 기쁨에 넘쳐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붓다에게 예를 올리고 귀의했다. 붓다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미가라 장자는 자신을 붓다의 가르침으로 인도해준 비사카에게 고마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무지했던 자신을 진리의 길로 인도해 준 비사카를 가리켜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고 했으며, 집안 살림에 대한 모든 권한을 맡겼다. 그 후 비사카는 ‘미가라의 어머니(Migāramāta)’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한자로 의역하여 ‘녹자모(鹿子母)’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