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머무는 삶을 꿈꾸며...
不二 / 2020. 4. 1. 11:14 / 세계여행/스리랑카

피두랑갈라, 장대한 시기리야 조망점

피두랑갈라(Pidurangala)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관광명소인 시기리야(Sigiriya)로부터 북쪽으로 직선거리 1km 떨어진 곳에 솟아오른 바위산이다. 이곳은 시기리야 성채(城砦) 가장 조망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시기리야의 모습도 훌륭하지만 사방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전경도 숨을 멎게 만든다. 또한 피두랑갈라 정상은 멋진 해돋이를 감상할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어 해가 뜨기 전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피두랑갈라   정상에서   바라본   시기리야의   모습 .
시기리야 북쪽 사자문과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정상에 오르면 흔들바위를 만난다. 피두랑갈라가 화산활동으로 200m를 솟아오를 때도 굴러 떨어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나 보다!
시기리야를 배경으로 다양한 모습을 연출한다.

이곳 정상에서 누릴 조망은 정말 뛰어나다. 이곳 정상에서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대자연을 바라보면 감동이 밀려온다. 아마도 시기리야에서 있는 전경보다 뛰어난 같다. 그래서일까? 시기리야처럼 화려하지 않아서인지 이곳을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었다고 하는데, 이제 입소문으로 알려져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파두랑갈라와   시기리야   주변   지도.

시기리야 남문 입구에서 왼쪽으로 해자를 따라 가다 시기리야 북쪽에서 북쪽으로 길로 접어들면 그리 오래지 않아 피두랑갈라 입구에 이르게 된다. 거리는 2.6km 다른 길보다는 짧지만 이곳의 경비원이 차량을 통과시켜 주지 않아서, 차량으로 이동할 경우 되돌아서야 가능성이 크다. 차량이나 툭툭으로 이동할 경우, 다른 길은 시기리야호수를 지나 하바라나(Habarana) 향하는 길에서 서쪽으로 길로 들어서면 피두랑갈라에 도착할 있다. 길은 길이가 3.5km 이르며, 정글 속으로 길을 따라가다 보면 구석구석에서 민박집과 게스트하우스를 만난다.

멀리서 보면, 피두랑갈라는 사방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벌판에 봉곳이 솟아오른 소녀의 젖가슴 같다. 피두랑갈라는 시기리야와 같이 화산폭발로 생성되어 주변 평지에서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바윗덩어리이다. 바위기둥이 솟아오른 모습의 시기리야보다는 피두랑갈라가 좀더 보인다. 반면에 피두랑갈라의 정상에 오르면 시기리야와 같이 거대한 바윗덩어리이지만 심하게 경사가 있다. 아마도 옛날 시기리야 정상에 왕성을 건설했던 사람들에게 피두랑갈라의 정상은 그들의 목적에 들어맞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기리야 북쪽 정상에서 바라본 피두랑갈라의 모습. 시기리야와 같이 화산활동으로 융기한 바윗덩어리이지만 외관은 봉곳이 솟아오른 산봉우리 모습이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배경으로 갑자기 솟아 있는 산봉우리 하나가 신비롭다.

피두랑갈라사원

피두랑갈라에 오르려면 입구에 있는 불교사원을 통과해야 한다. 길가에서 가까운 사원입구로 들어서면 스리랑카의 불교사원을 방문할 때면 언제나 그런 것처럼 신발을 벗어야 한다. 이곳에는 승려 기거 시설, 불상을 모신 법당, 강연실 등으로 갖춰져 있다. 사원을 지나면 다시 신발을 신고 산을 올라야 하므로 우리는 신발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실제론 기부금으로 1인당 500루피) 구입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맞은편에 외관이 하얀색인 석굴사원이 나타난다. 이곳은 불상을 모신 법당이다.

피두랑갈라 정상에 오르는 길.
피두랑갈라 정상에 오르려면 이 입구를 통과해서 사원을 지나야 한다.

석굴사원 암벽의 상단 부분에는 담불라 석굴사원(Dambulla Cave Temple) 경우와 마찬가지로 빗물이 석굴 내부로 흘러 들어가지 못하도록 처리되어 있었다. 부분에 새겨져 있는 브라미(Brahmi) 문자로 추정해보면 석굴사원에 불교사원이 조성된 것은 최소한 기원전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피두랑갈라 언덕 기슭에 자리잡은 석굴사원 가장 안쪽에는 중앙에 와불상이 길게 누워 있고 좌우 양쪽 끝에는 입상 또는 좌상의 불상들이 마주보고 있다.

양쪽 끝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불상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석굴사원의 안쪽, 불상이 모셔져 있는 부분을 제외하면 외부의 하얀색 건축물과 승려들 기거 시설 강연실 등은 모두 역사가 그리 오래지 않다. 최근의 보수작업으로 양쪽의 불상에 현대적 기법이 적용되긴 했지만 원래의 우아한 모습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내실의 벽에는 붓다의 생애에서 주요한 장면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내실 출입문 주변에는 실물 크기의 마리의 사자와 칼을 쥐고 있는 수호신들이 지키고 있다.

피두랑갈라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석굴사원의 외관 모습.
하얀색 석굴사원 건물로 들어서면 불상을 모신 내실 입구를 사자와 수호신들이 지키고 있다.
석굴사원 내부에 불상을 모신 내실의 모습. 중앙에 길게 와불상이 모셔져 있고 좌우 양쪽 끝에 입상 또는 좌상의 불상이 마주보고 있다.

사원의 이름은 피두랑갈라 시기리 라자마하 사원(Pidurangala Sigiri Rajamaha Viharaya)이다. 피두랑갈라의 역사는 기원전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부터 불교사원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시기리야에 성채와 도시를 건설했던 카샤파 1(Kashayapa I, 473-495 AD) 통치하던 시기였다.

그는 당시 적자였던 목갈라나(Moggallana) 왕자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을 염려하여 아버지인 다투세나(Dhatusena, 455–473 AD)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 남인도로 피신한 목갈라나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를 버리고 이곳의 깎아지른 바위산 시기리야에 궁전과 난공불락의 요새를 건설했다고 전한다. 그는 시기리야에서 수행하던 승려들을 피두랑갈라로 옮기도록 하고 새로이 사원을 건립하도록 많은 기부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피두랑갈라라는 말도 싱할라어로 무더기를 기부한이란 의미라고 한다.

피두랑갈라 주변의 고고학 발굴현장 배치도.
피두랑갈라사원 길 건너편 북쪽에 있는 이 고대 스투파는 카샤파왕의 다비식이 이루어졌던 곳으로 전해져 온다. 스투파 위쪽 구조물은 사라지고 없다.

당시 카샤파왕이 건립했다는 우팔라바나 카샤파 기리 사원(Uppalavanna Kashyapa Giri Viharaya) 피두랑갈라에 위치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재의 피두랑갈라 시기리 라자마하 사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피두랑갈라 주변 일대에 넓게 자리잡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현재의 피두랑갈라사원으로부터 길을 건너 북쪽으로 200m 되는 곳에 퍼져 있는 피두랑갈라 고고학 발굴현장이 일부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엔 유적 잔해들이 여전히 곳곳에 남아있다.

석굴사원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피두랑갈라로 오르는 돌계단이 시작된다. 돌계단을 오르기 전에 신발을 다시 신을 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그리 힘들지 않을 정도이며 천천히 올라가도 30분이 걸릴까 말까 정도였다. 대부분의 길은 전혀 복잡하지 않아 따라갈 있을 정도였으며, 평지도 나타나지만 그리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진다.

석굴사원에서 시작되는 돌계단 입구.
정상으로 가는 돌계단은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었다.
돌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도달하면 오른쪽으로 거대한 피드랑갈라 바윗덩어리를 두고 산을 오르게 된다. 왼쪽으로는 숲이어서 멀리서 보면 하나의 산봉우리처럼 보인다.

벽돌 와불상

한동안 길을 따라 올라가면 만한 거리에 평지가 나타난다. 운동장처럼 넓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규모의 공간이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절벽 아래 부분에는 움푹 파인 공간이 길게 자리하고 있어 예전엔 석굴사원이 자리하고 있었던 같다. 석굴은 벽돌 벽으로 구분되어 여러 개의 방을 이루고 있는데 한가운데 가장 방에 13.7m 길이의 아름다운 벽돌 와불상(臥佛像) 누워있다. 벽돌로 불상을 조성하는 것은 폴론나루와(Polonnaruwa) 시대 불상의 특징이며, 불상의 의상 스타일도 폴론나루와 시대 불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벽돌 와불상 앞의 평지의 모습. 와불상 앞뒤로 여러 개의 방들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벽돌 와불상에는 외관을 장식했던 회반죽의 원래 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다.
와불상의 상반신은 오랜 세파를 겪으며 훼손되었다가 복원되었다.

와불상의 발치 아래로 6-7세기 싱할라어로 바위 위에 새겨진 명문(銘文) 있으나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닳아서 해독에 어려움이 있다. 어느 역사기록에도 피두랑갈라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곳의 여기저기에 새겨진 명문들이 피두랑갈라의 역사에 대한 해답을 제공할 있었을테지만, 이렇게 마모로 해독이 어렵거나 브라미어 명문처럼 너무 간단해서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미래에 신기술이 나와 완전한 해독의 실마리를 풀게 날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발걸음을 옮겼다.

피두랑갈라 정상

벽돌 와불상을 지나면, 정상까지 남은 구간이 아주 어렵지는 않지만 거의 암벽등반에 가까운 코스이다. 바위를 기어올라 가기도 해야 하고, 좁아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기다렸다가 다시 오를 있기도 하다. 활동이 자유로운 젊은이들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은 오르기 힘든 길이다. 그리고 마지막 걸음은 등반의 화룡점정이라도 되듯이 크게 뛰어올라야 하는데 거대한 바위에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마침내 정상에 올라서면 모든 수고로움이 하나도 아깝게 느껴지지 않을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피두랑갈라에서 바라보는 시기리야의 모습에서 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인생샷하나 만들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경치였다. 그래서인지 시기리야를 바라볼 있는 흔들바위 주위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다.

피두랑갈라에서 바라본 남쪽 전경.
피두랑갈라에서 바라본 남쪽 전경.
시기리야 조망점에 바라본 시가리야의 북면 모습.

그러나 흔들바위를 지나 정상의 넓게 열린 공간으로 나오면 사방 킬로까지 시야를 가리는 것이 전혀 없다. 거대한 바윗덩어리 위에 신기하게도 무리의 나무가 있다. 나무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좁고 비교적 평평한 반면, 서쪽으로는 넓고 크게 경사가 있다. 주변 경치를 휴대폰에 담는 사람들도 있고, 여기저기 홀로 앉아 명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해돋이 조망점에 바라본 피두랑갈라 정상의 모습.
피두랑갈라 정상에서 만나는 한 무리의 나무들.
해돋이 조망점에 바라본 북쪽 전경.

내려가는 길은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간다. 오래 머물고 싶고, 다시 찾고 싶은 곳이었다. 영감을 받고 싶을 찾고 싶은 곳이었다. 고대로부터 진리를 찾아 정진하기 위해 불교 승려들이 밀림 한가운데 불쑥 솟아 있던 이곳에 자리 잡았던 것도 그런 이유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우리는 하산을 시작했다.

不二 / 2020. 3. 9. 10:24 / 세계여행/우즈베키스탄

테르메즈, 고대 서역 불교의 중심지

이른 아침 테르메즈(Termez) 국내선 항공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테르메즈가 주도로있는 수르한다리야(Surxondaryo) 지역을 둘러볼 참이었다. 옛날 구법승들이 지역에서 아무다리야강(Amu Darya River, 고대 그리스 Oxus) 건너서 발흐(Balkh, 고대 그리스 Bactra), 바미안(Bamyan), 카불(Kabul) 지나 카이버고개(Khyber Pass) 넘고 페샤와르(Peshawar) 카슈미르(Kashmir) 거쳐 인도를 오갔었다. 길은 또한 아득한 옛날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인도 평원을 공략하기 위한 침입로로도 사용되어 왔었다.

사마르칸트(Samarkand)에서 테르메즈에 이르는 좁은 고갯길로, 7세기에 이곳을 지나갔던 현장() 자신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묘사했던 철문관(鐵門關, Iron Gate) 보고 싶어 차로 이동하고 싶었으나 모두 걱정하는 소리를 했다. 도로 사정으로 하루 종일 차를 타야 거라고 했다. 파미르-알라이(Pamir-Alay) 산맥에서 뻗어 나온 기사르산맥(Gissar Range) 서쪽 끝이 수르한다리야의 북쪽 경계를 감싸고 지나가면서 수르한다리야를 우즈베키스탄의 다른 지역과 분리시켜 독특한 문화와 식생을 발전시켰다. 우즈베키스탄 지역의 기사르산맥에서 가장 높은 곳은 4,634m 이른다.

수르한다리야로 향하는 비행기 기내에서 내려다 본 기사르산맥의 모습. 러시아 항공기여서 깨름직한 마음으로 이륙을 했지만 금새 바깥 정경에 마음이 빼았꼈다. 저 너머에 파미르고원이 펼쳐진다.

아무다리야강 북안에 자리잡고 있는 테르메즈는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더운 곳이다. 남쪽으로는 아무다리야강을 사이에 두고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이웃한 접경지로 군사도시이기도 하다. 도시의 이름은 이란어 tara-maiθa 연원을 소그드어 Tarmiδ에서 것으로건너는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에도 이곳은 아무다리야강을 건너던 곳이었던 모양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어로따뜻한이란 의미의 thermos에서 왔다고 주장하는데, 알렉산더대왕과 연결하기도 한다. 밖에도강둑 위에 있는이란 의미의 산스크리트어 taramato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다. 고대도시 테르메즈가 언제 정확히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없지만, 2002 도시 건립 250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식이 있었다.

나를 태운 비행기는 높은 산맥도 발밑 아래에 두고 가뿐히 넘어 테르메즈 공항에 내렸다. 호텔에 체크인부터 했는데도 여전히 오전 이른 시간이었다. 우리는 테르메즈의 고대 불교 유적지를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테르메즈는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간다라(Gandhara, 陀羅) 지방(현재 파키스탄 페쌰와르 지역) 거쳐 카이버고개를 넘고 바미안 지방을 거쳐 사마르칸트 쪽으로 올라가는 경유지여서 부근에서는 불교 관련 유적지와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실크로드의 중간에 위치한 지리적인 이점이 불교 중심지가 되는데 크게 작용했던 같다.

테르메즈 공항의 대합실 창문 너머로 낡은 트럭이 수하물을 실어와 컨베이어 벨트에 수하물을 부리고 있다. 같은 세기를 살고 있는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개도국을 여행하다 보면 흔히 보는 광경이기도 하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정벌과 헬레니즘 문명의 확립

길목에 위치한 땅이어서 외래 문명을 빨리 접할 있었던 장점도 있었지만,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땅이기도 했다. 기원전 6세기에 이미 이란의 아케메네스(Achaemenes) 왕조의 침입이 있었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나 기원전 4세기에는 마케도니아(Macedonia)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이곳 테르메즈를 점령했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점령은 이곳에 동양의 문화에 그리스 문화가 더해져 새롭게 탄생한 헬레니즘 문화가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됐다. 고대 자료에 알렉산드로스대왕이 건설했다는옥수스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on the Oxus)’라는 도시가 바로 테르메즈였다.

사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내에서도 아테네와 스파르타처럼 선진적인 도시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변방의 작은 왕국이었다. 그리스 자체도 거대한 이웃 페르시아제국의 침략과 괴롭힘을 당하는 처지였다. 이러한 처지에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Philippos II) 군사력을 키워 그리스 전체를 수중에 넣고 페르시아제국 자체를 멸망시키고 땅을 차지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 필리포스는 아들 알렉산드로스의 눈부신 활약으로 마침내 숙원이었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공수동맹인 코린트동맹(League of Corinth) 맹주 자리에 오르고, 이어 페르시아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경호원 명에게 불의의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기원전  500 년경   아케메네스왕조   시대의   페르시아제국   영토 .  페르시아제국은   속주의   종교와   관습을   최대한   인정하면서   주변   문명을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로   녹여낸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  박트리아는   거대한   페르시아제국의   동쪽   끝에   위치했다 .  위키피디아 .

필리포스가 갑작스럽게 죽고 , 알렉산드로스는 불과 20세의 나이에 순식간에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제거하고 필리포스의 후계자로 마케도니아의 왕위와 코린트동맹의 맹주 지위를 차지했다. 그런 다음 그는 아버지의 원대한 꿈인 페르시아 정벌을 단행했다. 기원전 334 코린트동맹의 총사령관으로 메케도니아-그리스 동맹군을 소집한 알렉산드로스는 47천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의 문호라는 뜻의 헬레스폰트(Hellespont, 현재 다르다넬스해협) 건넜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대군도 당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Darius III) 군대와 비교하면 골리앗을 상대하는 다윗 정도밖에는 여겨지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의 흉상.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알렉산드로스와 다리우스는 이수스(Issus) 가우가멜라(Gaugamela)에서 2차례에 걸쳐 결전을 치렀다. 알렉산드로스가 불가능이라 여겨지는 어려움을 불굴의 의지와 창의적 전법으로 이겨낸 반면, 다리우스는 이해할 없는 전투 지휘관의 도주로 페르시아군의 전열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말았다. 번의 전투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세계제국을 잃고 것이다.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추격을 피해 페르시아제국의 가장 동쪽 끝에 있는 박트리아(Bactria) 도주했지만, 그곳의 총독(satrap) 베수스(Bessus)에게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이것으로 아케메네스제국은 패망했다. 베수스는 스스로를 다리우스의 계승자라 선언하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Artaxerxes V) 칭했다.

알렌산드로스의   대제국과   그의   정벌   여정 .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차지했다 .

알렉산드로스의 원정군은 다리우스의 죽음으로 원정은 이제 끝났다는 생각에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왕위 찬탈자인 베수스를 용서할 없었다. 분노한 그는 베수스를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힌두쿠시를 넘고 죽음의 북부 아프가니스탄 사막을 건너 마침내 옥수스강(현대 아무다리야강) 당도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박트리아에 도착하기 전에 베수스는 소그디아나(Sogdiana) 이미 도주한 상태였다. 당시 그리스인들에게는 마라칸다(Maracanda) 알려져 있던 사마르칸트가 소그디아나의 수도였다. 그를 쫓기 위해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아무다리야강을 건너 테르메즈 땅에 발을 디뎠다. 베수스를 잡아 벌을 주기 위한 여정은 결국 광범위한 중앙아시아와 인도 서북부 정벌로 이어졌다. 소그디아나로 도주했던 베수스도 그곳에서 배신을 당하고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져 페르시아식 극형을 언도받고 끔찍한 형벌을 받았다.

알렉산드로스가 군대를 이끌고 소그디니아로 가기 위해 아무다리야강 건넌 곳으로 여겨지는 장소는 현재의 테르메즈에서 북서쪽으로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슈랍(Shurob) 마을이다. 고대 건널목을 지키기 위해 알렉산드로스는 이곳에 요새를 건설했다. 이곳의 캄피르테파(Kampyr-Tepa) 유적이 오랫동안 역사학자들이 찾아 헤매던 옥수스의 알렉산드리아, 옥시아나(Oxiana)라는 방향으로 학자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같다. 이곳에서는 기원전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성벽과 성문 등의 강력한 방어 시스템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곳은 박트리아의 중심지인 박트라(Bactra, 현재 발흐)에서 사마르칸트로 넘어가는 철문관과의 일직선 상에 위치한다.

박트리아 지역 지도. 수르한다리야 남부 지역의 평야지대에는 구소련 시대부터 대규모 면화재배를 위해 아무다리야강으로부터 물을 끌어오기 위한 방대한 운하망이 보인다. 그로 인해 강물의 수위가 낮아져 그 옛날처럼 강물이 범람하지는 않는다.

 캄피르테파 유적에서는 마케도니아, 그레코-박트리아(Greco-Bactria), 쿠샨(Kushan) 왕조의 유적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특히 기원후 1~2세기의 카니슈카(Kanishka) 대왕 시대에 황금기를 맞이했었음을 보여준다. 옥수스강의 범람으로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렸고 후에는 버려졌기 때문에 초기 도시계획이 그대로 남아있다. 캄피르테파는 그리스 양식의 요새, 주거지역, 교역지대, 항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0년이 유적지가 그래도 보존될 있었던 하나의 요인은 곳이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에 인접하고 있어 오랫동안 출입금지 구역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출입이 금지되어야만 보존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처럼 느껴졌다.

캄피르테파 유적 전경

알렉산더대왕의 사망 , 테르메즈를 포함한 박트리아 지방의 지배자는 셀레우코스왕조(Seleucid Empire) 거쳐 그레코-박트리아왕국과 인도-그리스왕국(Indo-Greek Kingdom)으로 바뀌면서 기원 직전까지 잔존했던 그리스계 헬레니즘 국가였다. 전성기 때의 영역은 동쪽으로는 타림 분지, 서쪽으로는 페르시아, 북쪽으로는 소그디아나, 남쪽으로는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이었다. 기원전 2세기 전반부터 간다라 지방에 진출해 그리스 문화를 전파함으로써 헬레니즘 문화와 인도 불교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간다라 예술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서쪽으로부터는 파르티아(Parthia) 침입을 받았고, 특히 북쪽으로 유입된 대월지(大月氏) 정복되어 멸망하였다.

박트리아의 불교 전파

대월지는 전국시대 말기에 서몽골로부터 간쑤(甘肅) 서부, 황허강(黃河) 상류, 동투르키스탄, 중가리아, 서투르키스탄의 일부까지 영향력을 펼치고 있던 대세력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 흉노(匈奴) 갑자기 일어나 압박해오자 기원전 2세기에 쫓겨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무다리야강 북안에 중심을 두고 세력을 키워나갔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는 박트리아까지 밀고 내려와 영역을 확장했으며, 기원 전후 대월지의 다섯 제후들 가운데 하나였던 쿠샨(Kushan, 貴霜) 가문의 쿠줄라 카드피세스(Kujula Kadphises) 다른 제후를 제거하고 쿠샨왕조를 열었으며 힌두쿠시 이남으로 진출하여 간다라까지 지배했다.

쿠샨왕조를 연 쿠줄라 카드피세스의 흉상.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박트리아의 초기 불교 전파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인물이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인도-그리스왕국의 왕이었던 메난드로스 1(Menandros I)이다. 그는 북부 펀자브의 부유한 도시였던 사갈라(Sagala, 舍竭城: 현재의 시아르코트[Sialkot]라는 설이 유력) 수도로 삼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도 서북부에 이르는 영토를 지배했다. 불교도들에게는 미란다(Milinda, 彌蘭陀) 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나가제나(Nagasena, 那先) 비구에 의해 교화되어 불교로 귀의했다고 전해진다. 사람의 대화가 팔리어 불전 미란다판하(Milinda Pañha: 미란다왕의 질문) 한역불전의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 수록되어 있다.

메난드로스  1 세   시대에   발행되었던   은화에   나타난   메난드로스왕의   모습 . ‘ 구세주   메난드로스왕 ’ 이라   새겨져   있다 .  대영박물관  ( 왼쪽 );  메난드로스  1 세   시대의   기본   동전으로   왼쪽의   전면에는   중앙에   법륜 ( 法輪 ) 과   함께  ‘ 구세주   메난드로스왕 ’ 이란   글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가   새겨져   있다 .  대영박물관  ( 오른쪽 )

알렉산드로스의 사망 , 박트리아에 뿌리를 내린 그리스계 헬레니즘 왕국들은 끊임없는 내부분열과 왕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빠르게 약화되어 갔다. 이들 왕국의 주화들이 박트리아의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후기의 고립된 소수의 그리스계 지배층은 토착 피지배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전통적인 그리스 양식의 주화를 포기하고 토착민의 호응을 이끌어 있는 양식의 주화를 발행한 것으로 보인다. 메난드로스왕의 불교 귀의는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징기스칸이 중앙아시아를 정벌한 , 그곳에 몽골계 국가들을 건설했던 징기스칸의 후예들도 세대를 거치면서 같은 문제에 봉착해 피지배층과의 동화를 위해 피지배층의 종교였던 이슬람교로 전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과 비슷한 현상 같았다.

메난드로스  2 세   때의   주화로   제우스신이   법륜   위로   승리의   화환을   건네는   승리의   여신   니케를   잡고   있는   모습이   주조되어   있다 . ( 왼쪽 );  그리스식의   망토와   모자를   쓰고   법륜을   굴리고   있는   신의   모습이   주도되어   있다 . ‘ 법륜을   굴리는   사람 ’ 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 오른쪽 )

기원전 3세기의 아소카(Aśoka, 阿育王) 치세 개최되었던 불교 3 결집 이후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각지로 전법사들이 파견되었다. 박트리아도 불교가 전파된 곳들 가운데 하나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학자들의 고고학적 연구 결과로 뒷받침되는 사실은 기원전 2세기에 전법사들이 박트리아에 파견되어 불법을 전하기 시작했을 수는 있으나, 박트리아 북부에 불교 건축물들이 널리 세워지고 불법이 널리 전파된 것은 기껏해야 기원 1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이루어진 일이라고 한다.

때가 유명한 쿠샨왕조 3 왕인 카니슈카(Kanishka, 色迦) 대왕의 치세에 해당한다. 그의 통치기간이 1세기 후반에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 않으며, 대체로 2세기에 생존했던 것은 분명한 같다. 그는 간다라지방의 푸루샤푸라(Puruapura, 현재 Peshawar) 수도로 삼고, 북서쪽으로는 아무다리야강 이북의 남부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으로부터 카슈미르를 포함한 인도 서북부와 남동쪽으로 마투라(Mathura)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동전의   전면에   덥수룩한   수염의   카니슈카  1 세가   두꺼운   외투와   긴   장화를   신고   있는   모습 . ‘ 왕중   왕 ,  쿠샨의   카니슈카왕 ’ 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 ( 왼쪽 );  후면에는   시무외인 ( 施無畏印 , abhaya mudra) 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헬레니즘   양식의   붓다   상 .  붓다의   모습   왼쪽에   붓다 (Boddo),  오른쪽에는   카니슈카의   문장 ( 紋章 ) 이   새겨져   있다 . ( 오른쪽 )

불교 전승에서 카니슈카대왕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대승불교의 후원과 전파에서 보여준 카니슈카왕의 역할은 상좌부 불교에 대한 후원과 전파에서 보여준 아소카대왕의 역할에 비견된다. 카니슈카왕 시대에 불교의 4 결집이 이루어졌다. 4 결집은 기원후 100년경에 파르슈와(Pārśva) 존자의 건의에 따라 카니슈카왕의 후원으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 삼장(三藏) 대한 논서(論書)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삼장에 정통한 500명의 비구들을 소집하여 바수미트라(Vasumitra) 비구의 주재로 행해졌다.

집대성된 문헌이 30 () 660 () 달하는 대주석서 『아비달마대비바사론(毗達磨大毘婆沙論, Abhidharma Mahāvibhāā Śāstra)』이다. 현장이 번역한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의 「발 跋」에 의하면, 4 결집은 붓다의 입멸 이후 400년경에 카슈미르의 환림사(環林寺, Monastery of Kundalavan)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붓다의 입멸 시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가장 유력한 설인 기원전 483년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실제 4 결집은 불멸 이후 600년경에 이루어진 것이 된다.

카니슈카왕은 수많은 탑을 건립하고 동전에 붓다의 모습을 새겨 넣은 불교 보호와 전파에 힘썼다. 시대의 화폐에 새겨진 신상이나 유적을 보면 왕과 일족은 이란계 신이나 힌두교의 시바신 등도 함께 신봉했던 것을 있으나, 후에 열성적인 불교신자가 되어 불교의 후원과 전파에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수도인 푸루샤푸라에 카니슈카대탑을 건립했는데, 1908~1909년의 고고학 조사에서 지름이 87m 이르는 것으로 확인된 불탑의 기단이 발견되었다. 현장은 탑의 높이가 180~210m 달했으며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었다고 기록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엄청난 규모의 고대 건축물이었을 것이다.

1908~1909 년   페샤와르의   고대도시에   위치한   카니슈카대탑의   발굴   과정에서   대탑   아래   부분의   안치실에서   발견된   붓다   사리함 .  위   부분에는   좌우로   브라마신과   인드라신의   경배를   받고   있는   붓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 ( 왼쪽 );  사리함   몸체의   아래   부분에는   카니슈카왕으로   보이는   쿠산의   왕이   좌우에   이란의   해와   달   신들과   함께   조각되어   있다 . ( 오른쪽 )  페샤와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사라함   안에는   붓다의   뼈조각  3 과가   들어   있었으나   영국이   미얀마의   만달라이 (Mandalay) 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불상의 출현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대왕이 박트리아를 정벌한 동서간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기원 전후 수세기에 걸쳐 독특한 불교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이렇게 형성된 간다라문화가 카니슈카왕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우리의 주목을 끌게 되는 데에는 가지 이유가 있었다. 기원전 5세기부터 불교의 가르침이 전해져 왔지만 예배의 대상인 불상이 만들어진 것은 그로부터 5~600백년이 지난 기원후 1세기 무렵 쿠샨왕조 시대에 이르러서였기 때문이다.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예배의 대상은 붓다의 사리를 모신 스투파, 불탑(佛塔)이었다. 또한 그때까지 붓다는 오직 보리수(菩提樹), 법륜(法輪), 보좌(寶座) 등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었을 뿐이었다. 시기를 흔히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까지 불상이 조성되지 않았던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있지만, 전통적인 동양적 가치관 아래에서는 지고의 대상을 공백이나 상징물로 대신하는 경우는 많았다. 서울의 청계천에 왕실의궤 그림을 180m 길이의 벽화로 옮겨놓은 정조대왕 능행차도 봐도 감히 왕의 얼굴을 그림으로 표현할 없었는지 정조대왕은 어가(御駕) 표현되어 있다.

사실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불교계에서는 혁신적인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때까지의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는 스스로의 수행에 의한 깨우침을 통해 해탈을 목표로 해왔던 반면, 새롭게 일어나고 있던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는 모든 중생의 구원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대승불교의 성립과 관련하여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이와 같은 변화는 불교가 인도를 뛰어 넘어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피할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달바르진테파에서 발굴된 2~3세기 보살상의 복제품 (왼쪽); 파야즈테파에서 발굴된 1~2세기 보살상 (중앙); 옛테르메즈 지역에서 별견된 2~3세기 2층 구조의 불상 (오른쪽).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이러한 대승불교의 발달로 석가모니는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로 변했으며, 미륵불도 때를 기다리는 미래의 붓다가 아니라 현실 세계를 구제하는 적극적인 존재로 변모했다. 또한 붓다의 이상 세계인 정토신앙이 성행하여 수행을 통한 자아실현의 노력보다는 절대적 존재에 의지해 구원을 얻으려는 종교적 색채가 짙어졌다. 불교가 보편적 종교의 모습으로 변모해가자 인간의 모습을 예배 대상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토착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던 박트리아 지방에서 그들의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상을 조각해 숭배하던 사람들이 새로운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불상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시작된 곳이 당시 박트리아와 간다라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쿠샨왕국의 수도 페샤와르 지역으로 간다라라 불리던 곳이었다.

카니슈카왕 시대의 동전에 나타나는 붓다의 모습은 이미 상당히 정형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오른쪽 손바닥에는 법륜이 새겨져 있고, 미간에는 오른쪽으로 감기어 빛을 발하는 (白毛) 있으며, 몸에서는 신광(身光) 내뿜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전의 붓다가 입고 있는 겉옷은 양쪽 어깨를 모두 덮고 있어 간다라 불상들과 괘를 같이 한다.

1~2 세기 간다라 지역에서 최초로 출현했던 불상들 가운데 하나로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왼쪽); 2세기에 간다라에서 출현했던 불상이며 오른쪽에서 붓다를 보호하고 있는 금강수보살(金剛手菩薩)이 헤라클레스로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

간다라 불상에서 특이한 것은 머리카락이 고수머리가 아니고 물결 모양의 장발이라는 점과 용모는 눈언저리가 깊고 콧대가 우뚝한 것이 마치 서양 사람과 같다는 점이다. 얼굴의 생김새가 인간적이고 개성이 있다는 , 입고 있는 옷의 주름이 깊게 새겨졌고 모양이 자연스러워 형식화된 것이 아니라는 등을 특징으로 있다. , 간다라 불상의 표현은 그리스풍의 자연주의현실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 독특했다.

이렇게 오늘날 파키스탄의 북부지방인 간다라에서 꽃피웠던 그리스-불교 예술은 인도로 퍼져 나가 마투라의 예술, 그리고 이후에는 굽타(Gupta) 왕국의 예술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다시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간다라의 불교문화는 또한 북쪽으로도 퍼져 나갔는데 갈래가 중앙아시아로 퍼져 나갔으며, 다른 갈래는 타림분지를 거쳐 중국, 한국, 일본까지 영향을 끼쳤다.

테르메즈의 불교 유적

고고학 발굴로 세기에 걸쳐 고대 테르메즈는 중앙아시아에서 중요한 불교 중심지였음이 밝혀졌다. 포교사들이 이곳을 출발하여 북서쪽으로는 철문관을 넘어 소그디아나로 불교를 전달하였고, 북동쪽으로는 파미르고원과 알라이산맥을 넘어 東투르케스탄(East Turkestan)으로 그리고 너머 중국, 한국, 일본에까지 불법(佛法) 전했다. 문서에는 산스크리트어(Sanskrit) 불교경전을 한역(漢譯) 사람들의 이름을 포함하여 중국에서 불교 포교활동을 벌였던 박트리아인들의 이름이 남아 있다.

부파불교 시대를 거치며 철학적 깊이를 더한 불교는 이곳 간다라와 박트리아에서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만나며 보살사상과 불상 조성 대승불교의 특징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쿠샨왕국을 통해 꽃을 피운 대승불교는 카니슈카왕 전성기를 맞이하고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을 거쳐 한반도, 그리고 일본까지 전해지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동북아시아에서 더욱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정작 쿠샨제국은 일찍 종말을 맞이했다. 쿠샨제국은 230년경 사산왕조 페르시아(Sassanian Persia)에게 정복됐으며, 이후 땅은 5세기에 에프탈(Hephthalites), 6세기에 투르크, 7세기에 우마이야왕조(Umayyad Dynasty), 8세기에 아랍의 아바스왕조(Abbasids) 의해 차례로 지배를 받으면서 이슬람 문화가 곳곳에 스며들었다. 쿠샨인들이 5세기 중엽까지 잔존하긴 했지만 테르메즈 땅에서 번성했던 불교사원은 이교도들의 파괴행위와 주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파괴되고 쇠락해갔다.

7세기 테르메즈를 통과해 인도로 향했던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테르메즈를 달밀국(蜜國)이라 칭했으며, 10여개의 사원이 있고 스님들도 1000여명이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도 불교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장이 보았던 옛 테르메즈는 동서로 600여리, 남북으로 400여리였고, 도성의 둘레는 20여리에 달하며, 동서로는 길고 남북으로는 좁은 모양이었다.

고대 테르메즈의 불교 유적들

그러나 아마도 테르메즈 땅에 건립되었던 불교사원들의 운명에 결정적인 사건은 13세기 전반기에 이곳에 들이닥쳤던 칭기즈칸의 몽골군대였을 것이다. 몽골군대에 이틀 동안 포위됐던 테르메즈의 주민들은 격렬히 저항했고, 이에 분노한 칭기즈칸은 도시 전체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살육했다. 13세기 후반기에 새로운 테르메즈가 테르메즈의 동쪽에 다시 세워졌다. 그리고 이보다 남쪽으로 아무다리야강에 가깝게 위치한 현재의 테르메즈는 19세기에 들어서 건설된 것이다. 흙벽돌로 쌓아 올려진 거대한 고대 불교사원들은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모습을 잃어갔고 거센 모래바람이 만들어 놓은 언덕 아래에 파묻혀 흔적조차 찾을 없게 것이다.

동안 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모습을 드러낸 곳은 파야즈테파(Fayaz Tepa), 카라테파(Kara Tepa), 달베르진테파(Dalverzin Tepa), 주르말라대탑(Zurmala Stupa) 되지 않지만, 500헥타르의 광대한 고대 테르메즈 땅에서 몽골군대의 파괴와 혹독한 기후를 견디고 년을 버텨온 되는 테르메즈의 대표적인 불교 유적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아직은 그리 많지 않은 방문객들에게 매우 흥미롭기 그지없다. 그리고 위대한 불교 유적들이 건립되었던 쿠샨왕조 시대가 땅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이 꽃피웠던 시기이기도 했다.

파야즈테파

황무지와 같은 고대 테르메즈 지역에서 살아남은 가장 유명한 불교 유적들 가운데 하나인 파야즈테파는 옛테르메즈(Old Termez) 부근 카라테파 언덕의 불교사원 근처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하던 러시아의 고고학자 L. 알바움(L. Albaum) 의해 1963년에 발견되었다. 불교사원에서는 많은 벽화와 보존된 조각품들이 발굴되었다. 사원은 U자형의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고, 통로를 따라 수도실과 성소가 배치되어 있는 구조였다. 또한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개의 불사리탑이 발견되었다.

파야즈테파 전경
파야즈테파 입구의 출입구가 유일하게 조그마한 그늘을 제공해 관리인이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관리인은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수르한다리야 황무지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 하루하루를 저 조그만 그늘에서 버티고 있었나 보다.

벌판을 가로질러 멀리에서부터 완전한 모양의 반구를 머리에 이고 있는 탑이 차량으로 파야즈테파에 접근하고 있는 우리의 시야에 들어왔다. 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 빛을 보게 진흙벽돌탑이라고는 믿기지 않아 복원을 너무 번듯하게 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현장에 당도했다. 우리가 도착하자 어디에서 나왔는지 허둥지둥 달려 나온 남루한 모습의 관리인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황무지 외딴 곳에 나타난 사람들이 그저 반가웠는지 그는 우리 일행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의 젊은 직원이 나를 동행해 현장을 안내했다. 통역관이 타쉬켄트로부터 이곳까지 따라왔지만 젊은 박물관 직원이 유창하지는 않으나 직접 영어로 설명하려고 노력하자 없이 뒤에서 어슬렁거리며 따라왔다.

파야즈테파의 건물은 부분으로 나뉜다. 부분은 숙소와 부속 건물이고, 번째는 식당과 부엌이며, 번째는 종교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파야즈테파는 자체가 중앙아시아의 기념비적인 불교 건축물이기도 하지만, 건물 벽을 장식하고 있던 불교 예술품을 품고 있던 되는 사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파야즈테파의 모습
파야즈테파의 모습

사원의 벽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된 붓다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성소의 벽에도 다양한 붓다의 모습과 붓다 관련 이야기들이 묘사되어 있었으며, 사실 파야즈테파에서 발견된 붓다상은 현재까지 존재하는 고대 불상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하며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곳에서 발견된 벽화와 조각상들은 주로 1~3세기에 속하는 것들이었으며, 일부 4세기에 속하는 것도 있어 그때까지도 사원이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엿보게 해준다.

이곳 파야즈테파에서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조각상들과 토기들도 우아함과 기교로 예술적 가치를 높이 인정받았다. 특히 양편에 스님이 서있는 가운데 성스러운 보리수나무 아래에 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는 붓다상이 주목을 끌었는데 비나야 삼존불이라 불리는 불상은 이곳 파야즈테파에서 발견된 불교 예술품들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불상은 아치 모양의 테두리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인데 아치는 그리스의 코린트식 기둥 위에 얹혀져 있다. 붓다상 자체도 그리스풍 예술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조각품은 석회석에 새겨졌으며 금박장식이 되어 있다. 현재 조작품은 타쉬켄트 소재의 우즈베키스탄 역사박물관(State Museum of History of Uzbekistan) 전시되어 있다.

파야즈테파에서   발견된   비나야삼존불 . 1~2 세기   추정 .  우즈베키스탄   역사박물관  ( 왼쪽 );  궁정신하들을   묘사한   벽화로   파야즈테피에서   발굴되었다 . 1~3 세기   추정 .  우즈베키스탄   역사박물관

사원에 인접하여 10m 높이의 탑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내부에는 3m 높이의 작은 탑이 하나 들어 있는 구조이다. 탑의 건립연도는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멀리서부터 시야에 들어왔던 완전한 모양의 반구는 탑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일종의 반구형 지붕이었던 것이다. 우리 뒤를 따라다니던 관리인은 재빨리 내가 반구형 보호 지붕 안으로 들어가 있도록 잠겨 있던 자물쇠를 열어주었다. 열린 작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어두운 공간에 2000년의 세월을 버텨왔을 진흙 벽돌탑이 있었다. 허리춤에서 바라본 탑의 모습은 비바람에 마모되고 가는 금들이 있어 연약해 보였으나 속에는 2000년의 세월을 견딘 내공이 감춰져 있어 손을 대면 같이 단단함이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차마 손을 대어 수는 없었다.

2000 년 세월을 견뎌 온 진흙탑을 보기 위해서는 반구형 보호 지붕에 나 있는 이 출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평소에는 자물쇠로 잠겨져 있다.
발굴 당시 탑의 모습 (왼쪽); 반구형 보호 지붕 안에 있는 현재의 탑의 모습 (오른쪽)
반구형 보호 지붕 안에 있는 현재의 탑의 모습

혼자 탑을 감상하도록 모두 자리를 비켜주어서 잠시 밖으로 나오자 관리인만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내오면 문을 잠그려고 기다리는 듯했다. 그런데 그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며 갑자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냈다. 정확히 그의 말을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이곳 현장에서 발견한 유물들인데 돈을 주면 팔겠다는 의미 같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대자 자신이 발견했다는 유물들을 들어 보이며 포즈까지 취해 주었다. 그런 그를 보며 화가 나기보다는 측은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일반 공무원의 급여도 낮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고 들은 같은데 관리인은 급여로 가족을 먹이고 수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가 가짜 유물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우리를   따라   다니던   관리인의   모습  ( 왼쪽 );  관리인을   보면 , 1900 년   그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아   흙모래에   묻혀   있던   돈황석굴을   보고   이를   관리해오던   호북성   출신의   도사   왕원록 ( 王圓 籙 ) 의   모습이   겹쳐왔다 . ( 오른쪽 )

3세기에 사산조 페르시아(Sassanian Persia) 침공으로 불교사원들이 파괴되었으며, 이때 파야즈테파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종교적 활동은 후에도 어느 정도는 이어졌지만 쇠망의 길을 피할 없었던 모양이었다. 발굴 당시 사원은 두꺼운 모래와 층으로 덮여 있었으며, 발굴 과정에서 건물들이 크게 해를 입었다. 그리고 유적지 인근에 현장 박물관이 있다.

파야즈테파 인근에 있는 현장 박물관.

카라테파

카라테파도 불교사원으로 옛테르메즈(Old Termez)에서 북서 방향으로 400m, 파야즈테파에서 남서 방향으로 비슷한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카라테파는 파야즈테파와는 서로 시야에 들어오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파야즈테파가 오래된 사원으로 사원 옆에 거대한 탑이 있어 지역의 구심점이 되는 사원이었던 반면에, 카라테파는 무리의 승방들과 여러 개의 작은 탑들을 갖춘 사원으로 개의 작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무리들 가운데 남쪽 언덕 위에 있는 사원은 인공 굴과 소박한 진흙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승방들이었다. 장식이라고 해야 일부 회반죽 벽에서 발견된 벽화 정도였다. 서쪽 언덕 위의 경우는 남쪽 언덕과 비슷하나 궁정과 탑이 있었다. 북쪽 언덕은 규모의 궁정과 여러 개의 탑들이 있었으며 스님들의 거주 공간은 없었다. 서쪽과 북쪽 언덕의 궁정에는 그리스 양식의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카라테파 전경

2세기 초에 건립된 카라테파는 특히 2세기 말과 3세기 초에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4~5세기에는 상당 부분의 사원 기능이 멈춘 것으로 보이며, 기간에는 승방들이 묘지로 사용되었으며 승방의 입구들이 벽돌로 봉해졌었다. 그러나 사원의 일부, 특히 지상 부분에서는 6세기까지 불교의 종교적 집회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역의 불교사원들이 모두 아랍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랍인들은 중앙아시아의 이교도 사원들을 없애기 위해 비이슬람 종교 대상물에 대해 특별 과세를 부과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방식이 테르메즈와 인근 지역의 불교사원이 문을 닫게 되는 실질적인 계기가 되었다. 테르메즈 지역의 불교사원에 있던 승려들은 아직 불교가 성행하고 있던 캬슈미르(Kashmir) 지역으로 옮겨갔다. 카라테파는 이후 9~10세기에 수피교의 이슬람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다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이곳은 아프카니스탄과의 접경 지역으로 군사지역 내에 위치하고 있다. 국경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며, 얼마 전까지 아프가니스탄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격전지였다. 다행이도 현재는 전쟁도 막을 내리고 사전에 허가를 받으면 방문이 가능하다.

주르말라대탑

주르말라대탑으로 가는 길가에는 집들도 보이지 않았고, 우리가 타고 가는 4륜자동차가 마른 진흙길에서 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며 달릴 뿐이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속도를 내는 것도 아니었건만 출렁이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있는 느낌이었다. 더운 곳에도 누군가가 온실농업을 시도하려는 대규모의 온실을 설치하고 있었다. 한가운데 높게 쌓아 올린 진흙더미 같은 주르말라대탑이 눈에 들어왔다.

2000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갑자기 밭 한가운데 솟아오른 듯한 주르말라대탑.
주르말라대탑은 여전히 아무런 보호장치가 없이 뜨거운 햇볕에 노출되어 있어 앞으로 얼마나 이 모습을 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지금은 폐허가 고대 테르메즈의 동쪽에 위치한 주르말라대탑은 12m 높이의 불교 유적이다. 유적은 불교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번성하던 시기인 기원전 1~2세기, 쿠샨왕조 시대에 건립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을 맞으면서 원래의 모습은 잃어버린 불교 유적이었음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된 모습이었다.

지름이 14m 이상이었을 원통형 탑으로 원래 토대 위에 세워졌었으며 전체 높이는 16m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탑은 진흙 벽돌로 건립되었으며 돔형의 지붕이 있었다. 탑의 부분에는 성물(聖物) 보관하는 공간이 있어 불경과 불상 등이 보관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탑의 외관은 진홍색으로 칠해져 있었다고 한다.

주르말라대탑 이곳 저곳의 모습들

주르말라대탑은 20세기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된 최초의 불교 건축물이었다. 지역에 남아있는 가장 규모의 불교사탑이기도 탐은 아마도 우즈베키스탄 전체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축물일 있다. 탑이 불교 숭배와 관련된 건축물임을 처음 확인한 사람은 1927년경부터 러시아 동양문화박물관의 과학탐험대의 일원이었던 A. 스트렐코프(A. Strelkov)였다.

주르말라대탐에서 발굴된 1~2세기 남녀상.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이날 우리를 안내하던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Termez Archaeological Museum) 직원과의 마지막 일정으로 우리는 바로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으로 향했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박물관을 우리에게 보여주게 되어서인지 신이 듯했다. 박물관 건물은 무슬림 양식의 거대한 덩이의 건물로 외관에선 박물관인지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정면 높은 곳에 우즈벡어로 고고학 박물관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건물.

테르메즈에서는 그레코-박트리아와 쿠샨왕조 시대의 많은 고고학 유물들이 발굴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우즈베키스탄 역사박물관과 이곳 테르메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 또는 보관되어 있다. 고고학박물관은 2002 42 테르메즈의 도시 건립 2500주년을 기념하며 문을 열었다. 역사박물관과 비교하면, 박물관은 분야에만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이곳에 전시 중인 것은 대부분 고고학 유물이거나 고고학과 관련된 전시물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중앙홀에 석기시대부터 중세 칸제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대표적 유물들이 시대별로 배치되어 방문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박물관에서 전시 또는 수장 중인 유물이 27,000 점이 넘는다고 한다. 많은 가정용 도구, 고대 중세시대 무기류, 지배자들의 동전과 인장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많은 수량의 고대 벽화와 조각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조각품에는 그레코-박트리아 시대의 조각품과 지금은 폐허가 쿠샨시대의 수도원들에서 발견된 불상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달바르진테파에서 발굴된 쿠샨왕조 왕자의 상. 1~3세기로 추정.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소장품에는 지배자들의 편지와 경제 관련 서류 각종 문서들도 포함되어 있다. 16,000 점에 이르는 책과 문서들이 박물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 문서들은 대부분의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되어 있다.

박물관에서 제일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쿠샨시대의 유물들이었다. 대월지에서 출발해 쿠샨왕조로 발전하면서 2000여년 대승불교의 발전과 동아시아로의 불교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그들의 숨소리와 발자취가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시된 유물과 자료는 풍부했다. 감동이 가시지 않아서인지 박물관을 떠나는 발걸음이 아직 구름 속에 있는 듯했다.

不二 / 2019. 9. 11. 22:29 / 세계여행/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

우즈베키스탄에서 24일간의 체류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 이번에 사마르칸트(Samarkand) 가보지 못하고 귀국하는가 보다며 체념하고 있는데 귀국까지 이틀을 앞두고 갑자기 사마르칸트에 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마이클과 둘이서 가게 되었는데, 바로 다음날 이른 시간의 고속열차에 좌석이 없어서 예약을 없었다. 없이, 동안 나의 손발이 되어주었던 바딤의 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고려인 3세인 바딤은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충분히 가능하고, 우즈베크어와 러시아어가 유창해서 여러 곳을 다니면서 여간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말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을 미리 읽고 배려해주는 세심한 사람이었다. 나중에는 둘이서만 비바람을 뚫고 어둠 속에서 산속을 헤맬 때도 크게 걱정되거나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고 의지가 되었다.

약속대로 새벽 5시가 되자 바딤이 호텔에 도착했다. 아직 어둑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우리는 서둘러 출발했다. 시간대와는 다르게 차량이 많지 않은 타슈켄트(Tashkent) 시내를 비교적 빠르게 벗어나면서 마이클과 나는 뒷좌석에 앉아 비몽사몽 간을 헤맸다. 고속도로 중간에서 잠시 식당에 들러 휴식을 포함해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는 얼마 마침내 고대 실크로드의 중심도시 사마르칸트의 심장인 레기스탄(Registan) 도착했다. 시간을 보니 호텔을 출발한 4시간이 지났다.

사마르칸트를 대표하는 레기스탄 광장

중세 사마르칸트의 파괴

7세기 초에 불전 원본을 구하기 위해 불교 발상지인 천축(天竺, 인도)으로 향하던 당나라의 구법승(求法僧) 현장() 630년경 이곳 사마르칸트를 찾았었다. 당시 ()에서는 강국(康國)이라 부르던 사마르칸트를 현장은 삽말건국(建國)이라 칭했으며, 둘레가 1 6~7백리에 이르고 동서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고도 했다. 현장은 자신의 여행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사마르칸트의 대도성은 둘레가 20리에 이르고, 주민이 많으며 땅의 형세가 험하고 수비가 견고하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현재 실크로트 또는 사마르칸트를 상징하는 이곳 레기스탄의 모습을 현장은 보지 못했다. 현장이 묘사했던 물산이 풍부하고 주변 오랑캐국들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고 사마르칸트의 대도성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1km 조금 넘는 곳에 있는 아프로시압(Afrosiab) 언덕 위에 완전히 파괴된 묻혀 있다. 사마르칸트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어 asmara(, 바위) 소그드어 gand(요새, 도시)에서 유래했으며, 바위요새 또는 바위도시라는 의미이다.

사마르칸트의 주요 유적지

13세기 사마르칸트를 포함한 중앙아시아와 이란 지역의 지배자는 투르크 계열의 무슬림 술탄인 알라아딘 무하마드(Shah Ala ad Din Muhammad)였다. 그의 왕국은 호라즘제국(Khwarezmid Empire)이라 불렸다. 당시 몽골고원에서 급격히 성장하던 칭기스칸(Chingiz Khan, 成吉思汗) 금나라를 정벌 중이었으며, 중앙아시아의 정벌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호라즘과의 교역을 열기 위해 대상(隊商) 사절단을 보냈지만, 술탄은 대상과 사절단을 죽이거나 모욕적인 대우를 함으로써 칭기스탄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술탄이 천산산맥 너머 몽골고원에서 일어나고 있던 변화를 알지 못한 것인지, 칭기스칸의 교역 제안에 의심을 품은 것인지는 없으나, 이것은 자신과 자신의 제국뿐만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멀리 유럽까지 이어지는 드넓은 땅의 운명을 바꿔놓게 되었다. 분노한 칭기스칸은 군대를 이끌고 먼저 부하라(Bukhara) 순식간에 파괴하고, 1220 3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에 도착했다. 현장이 땅의 형세가 험하고 수비가 견고하다 묘사했던 성은 순식간에 함락되고 철저히 파괴되었다. 몽골군의 호라즘 정벌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던 지리학자 야쿠트 하마위(Yāqūt al-amawī al-Rūmī) 몽골군의 파괴를 아름답고 화려한 궁들을 종이에서 글을 지워버리듯이 땅에서 지워버렸다 묘사했다.

실크로드의 주역들 가운데 하나인 소그드인들이 아프로시압 언덕 위에 세웠던 중세의 사마르칸트성이 너무나도 철저히 파괴되었기 때문인지 후대들은 차마 자리에 다시 삶을 일으켜 세울 용기를 가질 없었나 보다. 사마르칸트는 지금 내가 서있는 이곳 레기스탄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아프로시압을 둘러싸고 다시 재건되었다. 지금의 사마르칸트를 상징하는 코발트블루의 커다란 돔들과 이슬람 고유의 첨탑들로 장식된 건축물들은 대부분 14세기에 시작된 티무르제국(Timurid Empire, 帖木兒帝國) 시대에 지어진 것들이다.

사마르칸트의 심장, 레기스탄

레기스탄 입구에서는 이미 많은 우즈베크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부심인 거대하고 화려한 레기스탄의 건축물들을 배경으로 각자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레기스탄은 원래 티무르제국의 수도였으며 지금은 우즈베키스탄에 위치하고 있는 중세도시 사마르칸트의 심장으로 대중광장이었다. 레기스탄은 모래땅이란 의미라고 한다. 아마도 처음에 이곳은 모래밖에 없는 사막이었던 모양이다.

레기스탄 광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방문객들.

레기스탄 광장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것은 중앙아시아 건축의 기념비적 상징물이 위대한 건축물들 때문이었다. 레기스탄은 동쪽, 서쪽, 북쪽으로 광장의 중심을 향하여 마드라사(madrasah)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어 ㄷ자 모양으로 남쪽으로는 열려 있는 모습이었다. 언뜻 보아 대부분의 기념비적인 이슬람 건축물들이 그런 것처럼 좌우대칭인 알았으나, 모두 서로 다른 구조와 장식을 가지고 있었다.

레기스탄의 마드라사와 비비하눔 모스크.

그러나 정작 도시를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부활시킨 티무르(Timur, 帖木兒) 이들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을 보지 못했다. 레기스탄 광장은 티무르가 위대한 도시를 건설한 이래 상업활동의 중심지로 대규모 시장이 있었으나, 15세기 전반 울루그베그(Ulūgh Beg) 이곳에 마스지드(masjid, 이슬람교 사원) 마드라사(이슬람교 신학교), 공중목욕탕, 기숙사시설 등을 건설함으로써 시장의 성격에서 벗어나 좀더 신성한 이슬람교 연구 교육의 장소로 변모했다.

레기스탄 광장의 마드라사 건물들 가운데 처음 광장에 들어선 건물은 서쪽에 있는 울루그베그 마드라사(Ulugh Beg Madrasah)였다. 티무르의 손자인 울루그베그는 티무르제국의 4 술탄이었다. 수학자, 천문학자였던 그는 특별히 천문학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티무르제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409년부터 사마르칸트의 지배자가 그는 1417년부터 1420년에 걸쳐 마드라사를 건설했다. 마드라사는 직사각형 형태로 내부에 정사각형 모양의 안뜰이 있으며, 안에는 모스크와 강의실들이 있고 학생들의 기숙사 방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원래 울루그베그 마드라사는 2 건물로 귀퉁이에 형태로 개의 강의실이 있었다고 한다.

레기스탄의 마드라사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된 울루그베그 마드라사.

2개의 미나레트가 양쪽 끝에 있는 마드라사의 전면부는 광장을 향하고 있다. 이슬람 건축에서 표현되는 거대한 아치 형태의 출입구인 이완(Iwan) 이완을 둘러싸고 있는 직육면체 형태의 구조물인 피슈타크(Pishtaq) 육중한 규모는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위엄을 나타내기에 모자람이 없는 듯이 보였다. 이곳의 피슈타크 부분에는 울루그베그가 관심을 가졌던 하늘과 천문학을 표현한 듯이 별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후에 이곳 레기스탄의 마드라사와 비비하눔 모스크(Bibi Khanum Mosque) 사마르칸트의 건축물로부터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무굴제국의 타지마할과 비교하면 표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방법에도 변화가 있었던 하다. 이곳 건축물들의 이완과 피슈타크는 전체가 화려한 색감과 문양의 타일로 빼곡히 장식되어 있는 반면, 타지마할의 경우에는 흰색 대리석 벽에 주변으로 п 형태로 코란에서 따온 문구를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기법으로 상감장식하거나 대리석 가장자리에 다양한 문양을 흑백 또는 화려한 색상으로 상감장식해 전체적으로 흰색 대리석 건축물처럼 보였다.

울루그베그 마드라사에서는 처음에 이슬람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곧이어 천문학, 철학, 수학, 과학 여러 분야의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마드라사는 울루그베그 당시에 사마르칸트에서 교육의 중심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15세기에 중앙아시아 이슬람세계 최고의 신학대학 가운데 하나였다.

울루그베그 사후 티무르제국은 급격히 기울었고, 16세기 초에는 사마르칸트가 유목 우즈베크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곧이어 수도가 부하라로 옮겨가자 사마르칸트는 더욱 쇠퇴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사마르칸트의 총독으로 부임한 우즈베크족 야한그도슈 바하도르(Yalangtush Bakhodur) 울루그베그 마드라사 맞은편에 똑같은 하나의 마드라사를 건축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울루그베그 마드라사가 건립된 200 맞은편에 세워지게 것이 셰르도르 마드라사(Sher-Dor Madrasah, 1619-1636)이다.

울루그베그 마드라사가 건립된 후 200년이 지나 그 맞은편에 건립된 셰르도르 마드라사.
피슈타크의 윗부분에 떠오르는 태양을 등에 지고 하얀 사슴을 뒤쫓고 있는 호랑이 모자이크는 고대 페르시아의 미트라교 신앙 모티브를 표현하고 있는 바 종교적 건축물에 살아있는 생물의 묘사를 금지하는 이슬람 율법을 무시하고 있어 이슬람교도들의 반감을 샀으나 신기하게도 건물은 살아 남았다.
동행했던 마이클도 호랑이 모자이크가 신기했던지 카메라에 담고 있다.

피슈타크의 윗부분에는 떠오르는 태양을 등에 지고 있는 호랑이 마리가 하얀 사슴을 뒤쫓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호랑이 모자이크는 고대 페르시아의 미트라교 신앙 모티브를 표현하면서 종교적 건축물에 살아있는 생물의 묘사를 금지하는 이슬람 율법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건축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일정 부분 녹아 있다. 셰르(Sher) 호랑이(또는 사자) 나타내며, 셰르도르란호랑이 장식의 의미이다.

야한그도슈 바하도르는 티무르제국의 황금기를 이룩했던 울루그베그를 많이 의식했던 모양이다. 규모와 화려함에서 울루그베그 마드라사에 뒤지지 않는 완전히 닮음 꼴의 건축물을 울루그베그 마드라사 맞은편에 대칭으로 구현하고자 하였으나, 실제 지어진 마드라사에는 가지 차이가 생기고 말았다. 2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울루그베그 마드라사는 건축물 자체의 무게로 인해 땅속으로 가라앉아 광장 자체의 높이가 2미터 가량 융기한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났다. 결과, 새로 건축된 마드라사는 높이가 높아지고 말았다.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실제 셰르도르 마드라사는 어른 키보다 높은 위에 지어져 있었다. 그러나 마드라사들의 규모가 너무 커서였는지 눈으로는 이러한 차이들을 쉽게 인지할 없었다.

셰르도르 마드라사가 완공되고 10년이 지난 , 야한그도슈 바하도르는 카라반사라이(caravanserai) 있던 레기스탄 광장의 북쪽에 하나의 마드라사를 건립했다. 열성적인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셰르도르 마드라사에 대한 반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틸랴카리 마드라사(Tilya-Kori Madrasah, 1646-1660) 이름의 새로운 마드라사는 단순히 기숙 교육기관이 아니라 마스지드(이슬람교 사원) 역할도 수행했다. 이층 구조로 이루어진 전면부는 개의 마드라사가 ㄷ자로 닫힌 공간을 구성하도록 설계되었다.

광장의 북쪽에 가장 늦게 건립된 틸랴카리 마드라사.
세 마드라사는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지만 광장이 마치 세 마드라사가 둘러싸고 있는 안뜰처럼 느껴진다.

전면부의 끝에는 키가 낮은 미나레트가 있고, 안쪽에는 회랑과 함께 기숙사 방들로 둘러싸인 넓은 안뜰이 있다. 안뜰의 왼쪽에 마스지드의 코발트블루 형태의 타워가 보인다. 번째 건축물은 서로 위엄을 자랑하며 뽐내고 있는 앞의 마드라사를 안정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주고 있는 했다.

틸랴카리 마드라사의 돔 천장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금도금 장식. 틸랴카리란 말 자체가 “금박으로 된”이란 뜻이다.
방문객들이 화려한 금박 장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직접 카메라에 담고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금색의 화려하고 호화로운 내부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황금으로 도금된 천장과 기도실 미흐라브(mihrab)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뒤로 젖힌 화려함에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거나 모습을 담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틸랴카리란 이름도금박으로 이란 뜻으로 금박의 화려한 내부장식에서 이름이었다.

이들 마드라사의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일부분은 갤러리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많은 부분이 수공예 작업실 판매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자기그릇, 옷감, 양탄자 다양한 물건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판매되고 있었지만, 이들 마드라사의 안뜰은 마치 어느 바자르의 구석처럼 느껴졌다. 마드라사들이 한창 역할을 하고 있을 때의 분위기를 느낄 있는 것은 정작 많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았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곳 레기스탄에서 남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대한 정복자 티무르가 영면하고 있는 구르아미르(Gur-e Amir) 향했다.

마드라사의 안뜰로 들어가는 입구. (왼쪽); 기숙사동이나 강의동으로 둘러싸인 마드라사의 안뜰 모습. (오른쪽)
마드라사 안뜰의 건물들은 지역의 수공예 상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품질을 확인할 수 없으며 시장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 마드라사 본래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유의 푸른색 도자기를 파는 판매대.
다양한 무늬의 옷감을 파는 판매대.
양탄자를 판매하고 있는 판매대.

위대한 정복자 티무르가 영면하고 있는 , 구르아미르

구르(Gur) , 아미르(Amir) 또는 지배자를 뜻한다. 구르아미르는 왕의 묘란 뜻이다. 역사적으로는 흔히 아미르 티무르(Amir Timur) 알려져 있으며, 유럽에서는 보통 태멀린(Tamerlane)이라 불리던 그를 동시대인들은 신의 재앙또는 세계의 정복자 불렀다. 방금 레기스탄 광장에서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들에게 압도당하다 와서인지 위대한 정복자의 영묘에 대한 첫인상은 조금은 소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서니 영묘 치고는 웅장한 편이었으며 티무르의 자존심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르아미르 단지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은 14세기 무하마드 술탄(Muhammad Sultan) 의해 건설되었다.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부분은 마드라사와 호나코(khanaka) 기단, 단지의 정문, 개의 미나레트 가운데 하나의 일부분뿐이다. 영묘 자체는 티무르의 왕위 계승자로 정해져 있던 가장 사랑하는 손자, 무하마드 술탄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티무르가 1403년에 건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티무르 자신은 영묘가 완성되는 것을 살아서 보지 못하고, 그의 다른 손자 울루그베그가 완성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차양시설이 된 한쪽 공간에 보존되어 있다.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자 건물터인 듯 한 곳이 남이 있다.
구르아미르 경내의 모습.

티무르는 자신을 위해서는 샤흐리삽스(Shahrisabz) 아크사라이 궁전(Ak-Saray Palace) 좀더 작은 무덤을 만들어놨었다. 그러나 1405 ()나라를 정벌하려고 떠났다가 오트라르(Otrar)에서 병사하면서 그의 시신은 이곳으로 돌아와 묻혔다. 샤흐리삽스로 가는 고개가 눈에 파묻혔기 때문이었다. 사랑했던 손자를 위해 자신이 마련했던 무덤에 자신이 묻힌 것만이 아니라 티무르 왕조의 왕들이 대대로 이곳에 묻혔다. 그의 곁에는 아들 로흐(Shāh Rokh) 미란 (Miran Shah), 손자 울루그베그와 무하마드 술탄, 그리고 티무르의 스승인 사이드 바라카(Sayyid Baraka) 함께 묻혀 있다.

구르아미르 입구 정면의 모습. 짙은 청색 타일로 장식된 이완과 피슈타크가 인상적이다.
구르아미르의 전경. 세로로 줄이 깊게 난 멜론 모양의 돔 지붕 건물이 티무르가 영면하고 있는 영묘 건물이다.

정문의 출입구 이완을 통과해 들어오면 레기스탄의 셰르도르 마드라사에서 봤던 세로로 줄이 멜론 모양의 돔이 지붕 가운데 있는 단일 건물과 마주한다. 세로 줄의 홈이 깊고 촘촘하면서 단아한 모양이 이곳의 엄숙한 분위기에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건물 전면부에는 푸른색의 타일 위에 하얀색으로 기하학적 문양과 함께 코란 문구들이 새겨져 있다. 바로 아래에 티무르의 능묘가 있는 독립된 방이 위치한다.

내부에 들어서자 천장이 높고 금색의 다양한 문양으로 장식된 벽들로 둘러싸인 커다란 방이 나왔다. 실내에는 약간의 간접 조명이 있어 벽을 장식하고 있는 각종 문양을 자세히 감상할 있도록 배려하고 있지만, 채광이 되어 비교적 밝아서 내부는 맨눈으로 있을 정도였다. 아래 가운데 자리에 티무르의 흑옥석관이 자리하고 있고 주변에 그의 아들과 손자들의 관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후 무굴제굴의 타지마할(Taj Mahal)에서도 있는 것처럼 사실 관들은 진짜가 아니다. 실제 관들은 이와 비슷한 크기로 좀더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4m 아래 지하에 같은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티무르의 영묘 건물이며, 돔 바로 아래 안쪽에 티무르가 누워 있다.
이슬람 건축에서 내부 천장 부분을 장식하는 기법으로 사마르칸트의 건축물에서도 두루 나타나고 있는 무하르나스(Muqarnas).
다른 무덤들과는 색깔이 다른 가운데 흑옥석관이 티무르의 무덤이며, 울루그베그가 설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거대한 흑옥은 1420년대 모굴리스탄 정벌에서 울루그베그가 획득한 전리품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구르아미르의 무덤 배치도

17세기 말부터 사마르칸트는 오랜 기간에 걸쳐 쇠퇴기를 겪게 됐다. 수도는 부하라로 옮겨간 지가 이미 상당 기간이 흘렀고 실크로드도 위대했던 도시를 비켜가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1941 () 소련의 고고학위원회에서 발굴하여 새롭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당시 한번 티무르의 관이 개봉되었다. 당시 발굴 책임자였던 소련의 고고학 인류학자였던 게라시모프 (Mikhail Mikhaylovich Gerasimov) 티무르의 두개골로부터 그의 얼굴 모습을 재현해냈다. 또한 발굴로 172cm 티무르가 다리를 다쳐 부자유스런 장애를 안고 살았다는 것과 그의 손자 울루그베그가 머리가 잘려 죽었다는 설이 사실로 밝혀졌다.

부분적으로 파괴된 채로 19세기에 촬영된 구르아미르의 모습 (왼쪽); 20세기에 복원된 구르아미르의 모습 (오른쪽) RadioFreeEurope/RadioLiberty 사진갤러리.
1941년 구(舊) 소련의 게라시모프가 티무르의 두개골에서 복원한 티무르의 얼굴 모습. 몽골초원의 몽골인에 가까운 모습이다. (왼쪽); 구르아미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티무르의 초상화. 좀더 서구화 혹은 페르시아화 된 모습을 보인다. (오른쪽)

티무르는 1336 사마르칸트에서 남쪽으로 80km 떨어진 케쉬(Kesh, 현재 샤흐리삽스)에서 이슬람화된 몽골 씨족의 하나인 바를라스(Barlas) () 일원으로 태어났다. 티무르의 집안은 예전엔 명문가였으나 그가 태어날 즈음엔 이미 몰락한 유목민 일가에 불과했다. 양과 말을 약탈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던 그는 마침내 중앙아시아의 가장 비옥한 지역을 기반으로 30년에 걸친 정복사업을 통해 북쪽으로는 러시아로부터 남쪽으로 인도, 동쪽은 중국 변경으로부터 서쪽으로는 소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지역을 정복했다. 30년의 정복활동 수도 사마르칸트에 머문 것은 2~3년에 불과했다.

티무르의 영토와 티무르의 정복활동을 설명하는 지도

티무르는 가혹한 정복자였다고 한다. 그의 치세에 중앙아시아, 특히 사마르칸트는 번영을 누렸지만,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델리 밖의 아랍, 페르시아와 인도의 다른 도시들은 철저히 유린되고 파괴되었다. 이들 많은 정복지의 주민들이 처참하게 학살되어 그의 정복전쟁으로 당시 세계 인구의 5% 이르는 17백만 명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신의 행위로 인해 자신이 영면하고 있는 잠자리가 편치 않았는지, 티무르의 무덤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전한다. “내가 죽음에서 일어설 때면 세상은 두려움에 떨게 것이다.”

비비하눔 모스크

다음으로 우리는 사마르칸트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며, 15세기에 이슬람세계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모스크였던 비비하눔 모스크(Bibi Khanum Mosque) 향했다. 레기스탄에서 북동쪽으로 700m 떨어져 있으며 아프로시압으로 가는 길가에 있다. 걸어서 이동할 수도 있는 거리였지만 바딤의 차량으로 이동하던 우리는 시압바자르(Siab Bazaar) 북쪽의 길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서 이동했다.

시압바자르 북쪽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비비하눔 모스크를 향해 가는 마이클과 바딤. 왼쪽 도로 건너편이 아프로시압이다. 공중 다리를 건너가면 하즈라트 히즈르 모스크(Hazrat Hyzr Mosque)를 만날 수 있다.

비비하눔 모스크와 시압바자르 앞길은 넓고 포장된 인도로만 이루어진 길이었다. 아프로시압 방향에서 시압바자르 입구를 지나면 바로 비비하눔 모스크에 이르게 되는데, 인도의 포장 상태와 관리 상태가 상당히 좋은 것으로 보아 지역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느낄 있었다. 입구에는 이완과 피슈타크로 구성된 거대한 규모의 출입구가 위압감을 주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시압바자르 입구에서 바라본 비비하눔 모스크.
비비하눔 모스크 입구의 거대한 이완과 피슈타크의 규모는 티무르가 이 모스크 건립에 들인 의지와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모스크 내부 저 멀리 보이는 본당 건물의 이완과 피슈타크 역시 매우 큰 규모여서 중심 돔을 가리고 있어 볼 수가 없다.

티무르는 거대한 건축물에 자신이 사랑했던 왕비의 이름을 붙여 비비하눔 모스크라 명명했다. 그녀의 이름은 사라이 물크 하눔(Saray Mulk Khanum)이었다. 사마르칸트의 많은 건축물이 그런 것처럼, 모스크에도 처음 모스크의 건축이 이루어질 당시의 아름답지만 슬픈 전설이 전하고 있다. 전하는 전설은 조금씩 다른 버전이 있어 내용이 조금씩은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인 내용은 비슷하다.

티무르가 사랑했던 비비하눔이란 왕비가 인도 원정을 마치고 돌아올 티무르를 깜짝 놀래키려고 거대한 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티무르가 돌아오기 전에 완공시켜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던 차에 왕비를 몰래 사랑하던 건축가가 왕비에게 자신에게 입맞춤을 준다면 완공시켜주겠다고 했다. 망설이던 왕비는 이를 허락하고 건축가와 입맞춤을 하게 되었는데 왕비의 볼에 건축가의 입맞춤 자국이 남게 되었다. 돌아온 티무르는 거대한 모스크를 보고 기뻤지만, 왕비의 얼굴에 남은 입맞춤 자국을 발견하고 분노한 티무르는 건축가를 사형시키고 왕비에게는 차도르를 쓰도록 했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왕비가 모스크의 미나레트에서 뛰어 내려 죽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슬픈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티무르가 인도 원정을 마친 것은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였고, 사라이 물크 하눔도 오십 중반을 넘기고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는데 젊은 건축가가 사랑에 빠져 그런 모험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그러나 더욱 결정적인 것은 사실 거대한 모스크의 건축을 지시한 사람은 다름 아닌 티무르 자신이었다. 인도 원정을 마친 1399 티무르는 이슬람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사원을 짓겠다는 결심을 세우고 정복지 곳곳에서 수백 명의 건축가, 장인 등을 동원해 모스크를 짓게 했으며, 1404 다른 원정을 마치고 티무르가 사마르칸트에 돌아왔을 모스크의 건축은 거의 끝나가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티무르는 완성되어 가던 모스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같다. 즉시 많은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수정 작업은 중심 돔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건축 초기부터 구조적 문제점이 드러나 여러 차례의 재건축 또는 보강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불과 미흐라브 위의 돔에서 벽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모스크의 거대한 규모는 당시의 건축 기술로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이러한 기술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건축을 서두르면서 결정적 문제에 봉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가로 167m, 세로 109m 직사각형의 담장 안에 비스듬히 앉은 대형 마스지드가 지어졌다. 주변을 압도하며 35m 높이로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는 입구를 들어서면 중세 이슬람 건축의 특징적인 안뜰을 마주하게 된다. 안뜰 건너 맞은편에 정사각형의 기초 위에 40m 높이의 중심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돔은 모스크의 돔으로는 가장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거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건물의 전면이 깊이 파인 이완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피슈타크로 가려져 있어 돔은 안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비비하눔묘에서 바라 본 비비하눔 모스크의 모습.
본당 건물의 중심 돔이 거대한 피슈타크의 등 뒤에 숨어 있다.

상대적으로 좀더 작은 규모의 돔을 머리에 이고 있는 나머지 개의 돔은 좀더 아담한 규모의 이완이 전면부를 장식하고 있으며 남쪽과 북쪽에서 안뜰의 중앙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원래 안뜰 내부에는 400개의 대리석 기둥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 7.2m 높이의 개방된 회랑이 있었으나 지금은 수가 없다. 바깥 담장의 구석에 있는 미나레트는 복원이 되어 있으나, 입구의 피슈타크와 중앙 건물의 피슈타크에 있었다는 개의 미나레트는 아직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모스크 외부의 남쪽에서 볼 수 있는 모스크의 양 측면에 설치된 두 개의 돔. 남쪽으로 이어지는 상가의 첫 가게에서 잠시 차와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가졌다.
비비하눔 모스크에서 레기스탄으로 이어지는 길은 이렇게 인도로 조성되어 있고 길 양 편에는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매력적인 상가로 만들어졌다기 보다 관광객들에게 사마르칸트 또는 우즈베키스탄도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처럼 보였다.
1905 년과 1915 년 사이에 세르게이 프로쿠딘 - 고르스키 (Sergei Mikhailovich Prokudin-Gorskii) 가 촬영한 사진으로 1897 년 지진으로 무너진 비비하눔 모스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지금은 사라진 회랑의 모습도 볼 수 있다 .

그리고 안뜰의 중앙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대리석 덩어리들로 만들어진 거대한 코란 받침대가 놓여 있다. 이것은 14세기 티무르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다. 혹은 할아버지 티무르에 대한 존경의 표현으로 손자 울루그베그가 설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티무르가 현재의 이라크 땅에 있는 쿠파(Kufa) 정복하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코란 필사본을 손에 넣어 사마르칸트로 가지고 왔으며 코란 받침대에 놓아 두었다고 전한다.

티무르가 사마르칸트로 가져온 코란은 우스만 으로 알려진 최종판으로 651 3 칼리프 우스만 이븐 아판(Uthmān ibn ‘Affān) 의해 메디나에서 만들어졌으며, 지방마다 다르게 읽혀 오던 것을 대체하는 표준 정본으로 선포되었다. 모두 6본만이 편찬되었으며, 티무르가 가져온 코란은 바로 우스만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필사본이었으며, 현재는 타슈켄트 ()시가지에 있는 하즈라티 이맘 광장(Hazrati Imam Complex) 내의 바라크칸 마드라사(Barak-Khan Madrasah) 보관 중이다.

모스크 안뜰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코란 받침대.

사라이 물크 하눔은 티무르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그녀의 남편은 투글루크의 점령에 저항하기 위해 티무르와 손을 잡았으나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대립하게 발흐(Balkh) 지방호족 아미르 후사인(Amir Husayn)이었다. 1370 티무르는 발흐를 점령한 , 후사인을 처형하고 그의 부인들을 모두 차지했으며 사라이 물크 하눔도 이들 가운데 명이었던 것이다. 사라이는 티무르보다 5~7살가량 젊었으며 매우 아름다웠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녀가 티무르의 1부인이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가 (Khan) 딸이자 징기스칸의 직계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라이는 칭기스탄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Chagatai) 중앙아시아에 건립한 몽골왕국 차가타이칸국(Chagatai Khanate) 마지막 칸이었던 카잔 이븐 야사우르(Qazan Khan ibn Yasaur) 딸로 태어났다. 따라서 사라이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눔(Khanum, 칸의 )이란 명칭으로 불렸다. Bibi 귀부인 또는 어머니를 뜻한다. 징기스칸 몽골제국의 부활을 꿈꾸었으며 스스로를 징기스칸의 계승자로 생각했으나 징기스칸의 직계후손이 아니었기에 스스로를 칸이라 칭할 없어 아미르라 칭하는 것으로 만족할 밖에 없었던 티무르는 징기스칸의 후손인 사라이 물크 하눔과 결혼함으로써 구레겐(Guregen, 부마, 駙馬) 칭호를 주장할 있었다. 그렇게 원하던 징기스칸 가문의 일원이 있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외관은 복원되었지만 건물들 내부는 고증의 어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재원부족 문제인지 수는 없으나 전혀 복원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뭔가가 아직은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며 비비하눔 모스크의 출구를 나와 건너편으로 향했다. 울타리에 둘러싸인 오각형의 빈터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광장이라고 해야 공간이 있고, 제일 안쪽에 자그마한 건물 하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복원이 진행되기 전에 심하게 훼손된 상태로 촬영된 비비하눔 모스크의 모습인 것으로 보인다.
모스크의 본당 건물 내부는 벽만 서 있는 상태였다.

18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규모의 마드라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대한 고고학 발굴에서 전통적인 안뜰을 갖춘 중세 마드라사의 배치가 확인되었었다. 마드라사는 10~12세기의 기념비적인 건물이 있었던 곳에 건축되었으며, 입구는 폭이 60m, 아치의 폭도 20m 달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마드라사는 사라이 물크 하눔이 지었으며, 원래의 입구는 건너편의 비비하눔 모스크의 입구보다 높아 티무르를 화나게 했다고 한다. 티무르의 명령으로 결국 입구는 낮게 다시 지어졌다. 입구의 양편에는 지름이 6m 이르는 미나레트가 있었으며, 미나레트에는 부분적으로 10~12세기 벽돌이 사용되었었다. 마드라사는 1740 이란 나디르 (Nādir Shāh) 왕의 군대가 침공했을 파괴되었다

그리고 이곳의 동쪽에는, 입구에서 제일 안쪽에 있는 건물은 비비하눔묘(Bibi Khanum Mausoleum) 사라이 물크 하눔의 가족 공동묘지이다. 묘지에는 사라이 자신만 묻혔던 것이 아니라, 당시 왕가의 다른 여인들도 묻혔다. 다른 설에 의하면, 묘지는 사라이 물크 하눔의 어머니와 왕가의 다른 여인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비비하눔 영묘 건물. 전면의 이완과 피슈타크에 푸른색의 타일로 아무런 정식이 되어 있지 않은 점이 특이했다.
영묘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의 단순한 모습과는 달리 문과 벽들이 여러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지하 묘실의 모습

코란 문구로 장식된 원통형 구조물 위에 코발트블루의 돔이 얹혀져 있는 자그마한 건물의 지하로 내려가면 대리석의 묘실이 있다. 그리고 묘실에는 석관에 담긴 3기의 여성 무덤이 있다. 건물 내부의 벽과 천장에는 다양한 장식의 문양과 함께 모자이크 패널과 그림으로 꾸며져 있으며, 그림들은 사후 깨끗한 사람들이 가게 된다는 천국의 정원이 양식화된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다. 비비하눔 모스크의 건물들처럼, 영묘 건물도 대지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제국이 중앙아시아를 점령하고 이 지역을 투르케스탄(Turkestan)이라 불렀으며, 첫 투르케스탄 총독으로 부임했던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Konstantin P. von Kaufman) 장군에 의해 1871~72년에 걸쳐 지역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6권의 사진첩이 제작되었다. 이 가운데 고고학 분야에 들어 있던 비비하눔묘의 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스.
시압바자르 출입구의 모습. 모스크에서 나오면 북쪽으로 연이어 시압바자르가 위치하고 있다.

울루그베그 천문대

 

아직 해가 지지는 않았지만 해가 때까지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는 않았음을 느낄 있었다.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울루그베그 천문대(Ulugh Beg Observatory)까지 둘러보기로 하고 서두르기로 했다. 천문대는 우리가 다시 타슈켄트로 돌아가는 길가에 있는 추반아타(Chupanata)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천문대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가장 먼저 별이 빛나는 우주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울루그베그의 () 만나게 된다. 울루그베그는 1420년대에 지름 48m, 3 높이의 원형 건물에 육분의, 상한의, 해시계 등이 갖춰진 세계 최고의 천문대를 건설했다. 그는 이곳에서의 관측한 것을 바탕으로 1437 992 별의 위치를 밝힌 지디이 술타니(Zīj-i Sultānī)라는 당대 최고의 천문도를 발간했고,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eos) 이래 12세기 동안 바뀌지 않았던 천문 상식들을 수정했다. 그는 1년이 365 6시간 10 8초라고 계산해 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관측 결과와 1분의 차이도 나지 않는 정확한 계산이었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을 천문대가 있는 추반아타 언덕을 지키고 있는 울루그베그의 상(像).
인도 무굴제국을 세운 바부르(Babur)가 보았다고 묘사한 3층 높이의 울루그베그 천문대 모습. 그는 천문대 건물이 지름 46m, 높이 30m의 둥근 건물로 바깥에 광택이 나는 타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했다.
천문대 내부를 보여주는 그림. 바부르가 중앙홀에 거대한 관측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 것이 현재는 지하 부분의 흔적만 남아 있는 거대한 규모의 육분의였던 것으로 보인다.

1405 티무르의 사망으로 중국 정벌도 취소되었지만 타무르가 자신의 후계자를 명확히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티무르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내부 투쟁이 발발했다. 어린 울루그베그도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울루그베그의 아버지, 로흐가 마침내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으나, 자신의 아버지인 티무르와는 달리 제국의 수도를 자신이 총독으로 있던 헤라트(Herāt) 옮겼다. 그리고 사마르칸트는 자신의 장남인 울루그베그에게 주어 다스리게 했으며, 울루그베그는 트란스옥시아나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420년대 중반까지도 울루그베그의 군대는 모굴리스탄 일부 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했지만, 그는 점차 학문적 연구와 예술 후원에 몰두해갔다. 1420년에 레기스탄에 마드라사를 건립한 , 그는 뛰어난 학자들이 이곳에서 연구할 있도록 초빙했다. 한창일 이곳에는 60~70명의 천문학자들이 연구 활동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마드라사에서의 천문학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천문대 건립에 착수하여, 1429년에 완공했던 것이다.

1447 아버지 로흐가 죽자, 그는 왕위를 이어받았다. 왕좌에 오른 겨우 2년이 지났을 무렵, 이웃 경쟁국과의 전투에서 차례 패한 그는 자신의 아들 압둘라티프(Abdal-Latif Mirza) 의해 재판에 넘겨졌다. 울루그베그는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처벌로 메카 순례를 판결 받고 길을 떠났으나, 사마르칸트 외곽에서 아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참수당했다.

울루그베그가 죽은 , 천문대는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과학자들은 모두 쫓겨났다. 수세기 동안 이곳은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져 갔고 천문대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908 () 소련의 고고학자 바실리 비야트킨(Vassily Vyatkin) 의해 발견된 육분의를 지탱했던 지하 부분과 천문대의 기초뿐이다. 언덕의 정상에 육분의의 흔적과 작은 박물관이 있는데, 박물관에 전시된 관측기구 모형과 그림으로 당시를 추측해 있을 뿐이다.

지금 남아있는 육분의의 흔적.
1970년에 건립된 울루그베그 천문대 박물관. 울루그베그의 「지디이 술타니」 아랍어 원고 복제품을 비롯한 각종 저작물과 관측기구, 천문대 축소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내부의 모습. 각종 관측기구와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다.

울루그베그는 티무르제국의 4 황제로 많은 일들을 했지만 자신의 과학적 업적으로 가장 기억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세운 마드라사는 이슬람 세계에서 학문의 중심이 되었고 그가 죽은 후에도 영향력은 널리 퍼져나갔다. 그의 역작들이 유럽에도 마침내 소개되었지만 그것은 17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하지만 울루그베그의 저작들이 알려질 때까지 유럽의 천문 연구에도 진전이 오면서 유럽의 천문학에 미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가 이슬람세계와 인도 무굴제국에 미친 영향력이 훨씬 중요했다고 있다.

고대와 중세를 거쳐 동서 무역로의 가운데에 위치하여 실크로드의 중심 도시로서의 부침을 겪어 왔을 사마르칸트는 도시가 누렸을 최전성기여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14~15세기의 티무르제국 영광 속에 박제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소리까지 느끼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음에 아쉬움을 느껴졌다. 어느덧 해도 지기 시작하고 석양이 물들어 가고 있었다. 길이 우리는 다시 서둘러 길을 떠나기 위해 바담의 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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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영원히 변치 않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 이야기

라자스탄(Rajasthan)으로 향하기 , 우리는 델리에서 생긴 하루의 여유를 아그라(Agra) 다녀오는데 사용하기로 했다. 전날 예약해 기사가 딸린 렌터카가 아침 일찍 호텔로 우리를 태우러 왔다. 2012 개통되었다는 야무나고속도로(Yamuna Expressway) 이용해 3시간 이내에 우리는 타지마할(Taj Mahal) 당도할 있었다.

타지마할 주차장에 도착한 우리는 어수선한 주변의 모습에 작잖게 놀랐다. 릭샤, 마차, 낙타차 등이 어지러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호객꾼들이 주차장에 도착하는 관광객들에게 꽤나 적극적으로 따라다녔다. 타지마할이 이런 곳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던 순간, 야무나(Yamuna) 강변에서 정말 동화처럼 눈부신 대리석의 타지마할이 앞에 나타났다.

타지마할의 모습
타지마할 주변 지도

타지마할 건설

타지마할은 무굴(Mughal) 제국의 수도였던 아그라의 야무나강 남쪽 강변에 자리잡은 궁전 형식의 묘지이다. 무굴제국의 황제였던 자한(Shah Jahan, 재위 1628~1658) 무척이나 사랑했던 왕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 추모하여 만든 것이다. 무굴제국은 물론 이탈리아, 이란, 프랑스를 비롯한 외국의 건축가와 전문가들을 불러오고, 기능공만 2 명이 동원되어 22년간 대공사 끝에 1653 완공되었다.

최고급 대리석과 붉은 사암은 인도 현지에서 조달되었지만, 궁전 내외부를 장식한 보석과 준보석들은 터키, 티베트, 미얀마, 이집트, 중국 세계 각지에서 수입되었다. 이슬람 건축의 걸작으로 평가 받으며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건축물 가운데 하나인 타지마할에는 국가 재정에 영향을 정도의 거액이 투자되었다고 한다. 당시 투입된 총비용은 대략 3,200백만 루피로, 2015 가치로 환산하면 528 루피 또는 827백만 달러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한은 타지마할이 완공된 얼마 되지 않은 1658 아들 가운데 하나인 아우랑제브(Aurangzeb) 반란으로 왕위를 박탈당하고 아그라요새(Agra Fort) 무삼만 버즈(Musamman Burj) 탑에 갇혀 말년을 보냈다. 다행히도 아그라요새에서는 2km 떨어진 타지마할의 모습을 있었고, 1666 죽은 뒤에는 그토록 사랑하던 부인 곁에 묻혔다.

타지마할 묘건물은 델리에 있는 후마윤 묘건물에서 건축형식이 확립되기 시작한 무굴제국의 묘건물 건축양식을 한층 발전시켜서 절정을 이루게 만든 것으로 평가된다. 야무나강을 배후에 두고 동서 300m, 남북 560m 대지를 점유하고 있으며 전정(前庭), 사분정원(四分庭園, Charbagh), 묘건물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타지마할 배치도

전정과 사분정원

오염문제 때문에 타지마할 500m 이내에는 차량 진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 우리 일행이 자연스럽게 도착한 곳은 서문이었다. 타지마할로 들어가는 문은 개가 있었다. 서문은 정문에 해당하며, 인도인 방문객들은 대부분 문을 통해 들어가기 때문에 하루 종일 줄이 줄어들지 않는다.

동문 근처에는 유명한 호텔들이 자리하고 있어서 외국인들이 주로 많이 이용하는 편이다. 많은 단체객들이 몰리기도 하는 해돋이 시간대를 제외하면 대체로 줄이 길지 않은 편이다. 입장권을 미리 구입한 경우라면 동문 이용이 가장 편할 있다. 남문은 가장 이용하는 사람이 적은 곳이다. 이곳은 타지간지(Taj Ganji) 불리는 곳으로 시장과 카라반사라이가 있던 지역이다. 지금도 저렴한 호텔들이 위치한 복잡한 시장 구역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저예산 여행객들이 선호한다. 또한 문을 여는 시간이 다른 문들보다 늦어서 8시이다.

전정에서 사분정원으로 들어가는 정문

줄을 따라 서문을 통과하고 전정을 가로지르자, 붉은 사암 벽돌건물의 아치형 주변에 흰색 대리석을 입힌 웅장하고 화려한 정문이 나타났다. 이슬람 건축에서 흔히 있는 움푹 들어간 아치형 안에 다시 개의 아치형 문이 위와 아래 2열로 만들어져 있고 아래 열의 가운데 문을 통해 출입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문 건물의 꼭대기 귀퉁이에는 차트리(chhatri) 설치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균형미를 더해 주고 있었다.

정문의 아치형 문 실루엣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되는 타지마할의 모습

정문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앞이 깜깜해졌다. 맞은편 아치형 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따라 다가가자 아치형 문틀 실루엣 안에 마치 폭의 그림인양 타지마할의 모습이 저쪽 편에 나타났다. 모습에 취한 사람들도 문틀을 넘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가 사분정원으로 들어섰다.

정문을 나와 사분정원이 시작되는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타지마할의 전경사진을 찍거나 타지마할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앞에 펼쳐진 사분정원의 중앙에는 분수가 솟아오르는 사각형의 연못이 있고, 동서와 남북을 가로질러 수로를 따라 정원이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 넓은 사분정원이 묘건물 전면에 펼쳐져 있고 야무나강이 전체 조경의 일부인 배후에 흐르고 있다. 사분정원의 수로 혹은 야무나강에 비친 타지마할의 모습 또한 환상적이어서 수많은 사진가들이 모습을 카메라 앵글에 담기 위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정문을 나서 사분정원이 시작되는 곳에 이르면 많은 사람들이 타지마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모여 있다 .

변의 길이가 300m 이르는 정사각형 형태의 사분정원이 지금은 분수와 수로가 있는 잔디정원으로 보이지만, 원래 페르시아 정원에서 영감을 받은 무굴 정원으로 천국의 개의 강이 흐르는 천국의 정원을 상징했다. 정원에 대해 묘사한 초기 기록에는 장미, 수선화, 과실나무 등이 무성이 자라고 있었다고 했지만, 대영제국 시대에 마치 런던의 잔디정원 모습으로 바뀌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좌우 대칭미가 뛰어난 타지마할의 모습

중앙의 묘건물

우리는 천천히 사분정원을 둘러보며 경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중앙의 묘건물로 향했다. 묘건물은 변이 95m, 높이 7m 정사각형 평면 기단 위에 있는 거대한 흰색의 대리석 구조물로 움푹 들어간 아치형 입구, 대형 돔과 뾰족한 꼭대기 장식이 달린 좌우 대칭의 건물이었다. 그리고 중앙에 솟아오른 둥근 돔의 높이는 65m이며 지붕과 천정의 2 구조로 되어 있다. 중앙의 돔을 닮은 보다는 작은 개의 차트리 귀퉁이에 있어 전체적으로 훨씬 안정감을 갖게 같다.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승달 문양이 끝을 장식하고 있는 돔의 뾰족한 꼭대기 장식은 원래 금으로 만들어졌었는데 19세기 초에 금동 복제품으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기단의 모서리에는 높이 40m 첨탑(minaret) 있으며, 비슷한 길이의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꼭대기에는 중앙 돔을 둘러싸고 있는 것과 유사한 차트리가 얹혀져 있다. 첨탑들은 보통의 경우보다 묘건물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고 바깥으로 약간 기울게 세워졌는데, 이것은 만약 첨탑이 무너질 경우 중앙의 묘건물에 피해를 주지 않고 바깥으로 무너지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타지마할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
1첨탑과 첨탑 주변의 모습

묘건물에 가까이 다가가자 묘건물의 사각형 모서리가 접혀 있어 마치 모서리가 깎인 사각형 건물처럼 보였다. 사면의 중앙에는 이완(iwan)이라 불리는 움푹 들어간 아치형 입구가 만들어져 있는데 구조의 천장이 덮여 있어 반외부 공간을 제공하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는 후마윤(Humayun) 묘건물에서도 있다.

남쪽 이완 주변에 아랍어 글씨가 검정 대리석으로 새겨져 있다 .
화려한 꽃 문양과 추상적 문양이 피에트라 두라 기법으로 새겨져 있는 모습

묘건물의 대리석 벽에는 다양한 문양을 흑백 또는 화려한 색상으로 장식하고 있는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눈에 들어왔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상감기법과 유사한 것으로 흰색 대리석 표면에 검은 대리석으로 붓글씨를 끼워 넣거나, 다양한 보석과 준보석으로 추상적인 문양 또는 식물 문양을 끼워 넣어서 단순하게 보일 수도 있었던 흰색 대리석 벽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묘건물을 둘러보고 북쪽 피쉬타크로 나오는 사람들 ( 왼쪽 ); 묘건물 북쪽 그늘에서 사람들이 쉬고 있다 . ( 오른쪽 )

움푹 들어간 아치형 입구로 다가가면 가운데 나무로 만들어진 격자창이 설치되어 있어 밝은 바깥에선 안을 들여다 보기 어렵게 되어 있는 피쉬타크(Pishtaq) 불리는 아치형 문이 있다. 주변에는 п 형태로 코란에서 따온 문구가 역시 피에트라 두라 기법으로 대리석 벽에 새겨져 있었다. 관광객들은 묘건물의 남쪽 피쉬타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바퀴 둘러보고 북쪽의 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

묘건물 배치도 ( 왼쪽 ); 화려한 문양의 가짜 관 ( 왼쪽 위 ); 좀더 단순한 문양으로 장식된 지하의 진짜 관 ( 오른쪽 아래 )

묘건물로 들어서니 곳곳에 격자창을 통해 자연채광으로 빛이 들긴 하지만 대체로 어두운 편이었다. 묘건물의 가운데에 타지마할의 주인공인 뭄타즈 마할의 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 기단 위에 역시 문양으로 단장한 대리석 관이 남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뭄타즈 마할의 서쪽에 그녀의 관보다는 좀더 크고 하나가 좀더 높은 기단 위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녀보다 늦게 죽은 자한의 관이었다. 죽어서라도 그토록 사랑했던 왕비 곁에 몸을 뉘일 있게 되어 행복했을까?

주위에는 둥그렇게 대리석 격자 스크린이 둘러싸고 있었다. 격자 사이로 관들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편안히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많은 관람객들이 밀려오는데 구태여 이렇게 불편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특히나 관은 가짜 관이기 때문에 그랬다. 진짜 관은 바로 아래 지하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지구 위에 서 있는 샤 자한의 그림 ( 왼쪽 ); 뭄타즈 마할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 ( 오른쪽 )

뭄타즈 마할

뭄타즈 마할은 무굴제국에서 고관으로 있던 부유한 페르시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1593 아그라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아르주만드 바누 베굼(Arjumand Banu Begum)이었다. 15 후에 자한으로 알려지게 되는 쿠람(Khurram) 왕자와 약혼하고, 1612 20 결혼하여 그의 번째 부인이 되었다. 쿠람 왕자는 그녀에게 뭄타즈 마할이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궁정의 고귀한 라는 뜻이라고 한다.

뭄타즈 마할은 자한과의 사이에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중에는 자한이 가장 아끼던 자하나라 베굼(Jahanara Begum) 왕위계승자로 지목되었던 황태자 다라 슈코(Dara Shukoh)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6 무굴 황제로 등극한 사람은 여섯 번째 자식인 아우랑제브였다. 그리고 뭄타즈 마할은 1631 지금의 마디아프라데시에 있는 부란푸르(Burhanpur)에서 14번째 자식인 가우하르 아라 베굼(Gauhar Ara Begum) 낳다가 죽고 잠시 그곳에 묻혔다. 당시 자한은 아내의 죽음에 가눌 없는 슬픔에 빠졌던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황제는 후에 아내의 시신을 야무나 강변으로 옮기고 그녀를 위한 영원한 안식처를 건설했다.

타지마할 묘건물은 균형과 비례의 아름다움과 구석구석마다 완벽하게 마무리되어 있는 정교하고 뛰어난 기술 수준으로 말미암아서 인도의 이슬람 건축 문화를 대표하며 세계 건축사상 가장 뛰어난 걸작 중 하나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우리는 북쪽 피쉬타크를 통해 묘건물에서 나왔다. 묘건물의 그림자가 크게 있어 뜨거운 태양빛에 지친 사람들이 넓은 대리석 바닥에 앉아 쉬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담장 너머에 야무나강이 동서로 흐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너머에 25헥타르에 이르는 메흐타브정원(Mehtab Bagh) 있는데 야무나강에 비친 타지마할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특히 그쪽에서 보는 석양이 내려앉은 타지마할의 모습이 환상적이다.

야무나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타지마할의 북쪽 전경

자한은 애초 타지마할과 마주보는 야무나강 건너편에 검은 대리석으로 자신의 묘를 짓고, 구름다리로 연결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야무나강 건너편에서 건물의 기단을 조성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중앙의 묘건물과의 사이에 각각 수심이 얕고 넓은 장방형의 반사지(反射池) 두고 동쪽에는 타지마할을 찾는 왕족들이 머물던 영빈관이 있고, 서쪽에는 이슬람사원이 있다. 건물들은 붉은 사암으로 만든 전형적인 무굴양식의 건축으로 중심 부분에 있는 타지마할과 매우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관심이 집중된 타지마할 때문에 사람들은 건물들은 크게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다시 사분정원과 서문을 통해 주차장으로 향했다.

중앙 묘건물의 동쪽에 있는 영빈관 건물의 모습

사람들은 타지마할의 아름다움과 자한과 뭄타즈 마할의 애끓는 사랑 이야기에 이끌려 이곳을 찾는다. 게다가 타지마할은 1983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2007 세계 7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현재 1년에 7~8백만 명의 방문객들이 이곳을 찾으면서 인도를 대표하는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이런 타지마할도 걱정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그라의 심각한 대기오염으로 타지마할의 하얀색 대리석이 급격하게 노란색으로 변하고 있다. 타지마할 주변에서 오염원을 줄이려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나 한계가 있는 듯하다. 하나의 문제는 타지마할 아래 지하수 수위가 급격히 낮아져 타지마할이 군데군데 바른 속도로 갈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물속에 잠겨 있었던 나무로 토대부분이 썩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결과 첨탑도 점차 기울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후손들도 타지마할을 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안고 아그라를 떠났다.

 

참고 사항

  • 최적의 방문 시기: 11 ~ 2. 외의 기간에는 너무 덥거나 우기일 가능성이 높지만 각종 할인으로 가격이 저렴해 있다.

  • 운영시간: 오전 6 ~ 오후 7, 금요일은 폐장 (부속 이슬람사원의 종교활동 진행)

  • 입장료: 외국인 - 1,100 루피 (중심 묘건물 입장 추가 200 루피 선택)

  • 외국인의 입장료에는 신발 덮개, 생수 1, 아그라 관광지도, 입구까지 버스나 골프카트 서비스 등이 포함된다.

  • 야간 관람: 한달에 5 개장 (보름날, 보름 2, 보름 2)입장권은 야간 관람 하루 전에 아그라 ASI 에서 구입 가능 (오전 10 ~오후 6). 야간 입장권 가격: 외국인 750 루피, 어린이(3~15) 500 루피. 운영 시간: 20:30 ~ 00:30. 최대 50, 8 입장. 팀당 입장 시간은 30

  • 오디오 가이드: 인도 정부의 오디오 가이드 AudioCompass 설치하여 이용할 있다. 가지 외국어로 제공한다.

  • 승인을 받은 가이드는 50~60 밖에 되지 않으며, 입구에서 가이드라고 소개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법 가이드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같다.

  • 안전 조치: 최근 더욱 엄격한 안전 조치들이 지켜지고 있다. 모든 가방은 전자스캔 검사를 받아야 한다. 가방은 가지고 들어갈 없다. 입구에 보관시설이 있다. 작은 가방과 필수물품만 허용된다. (필수물품에는 휴대폰 1, 카메라 1, 1인당 물병 1 등이 포함된다. 음식물, 담배, 라이터, 휴대폰 충전기, 헤드폰, 태블렛PC, 손전등 등을 포함한 전기기기는 허용되지 않는다.)

  • 위험 요인: 거지, 암표상 등이 많으며 처음부터 관심을 표시하지 않는 것이 좋다. 가이드 또는 택시기사를 자처하고 무료 서비스 또는 할인 등을 제공하겠다며 따라 붙어서 끈질기게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 아그라 기차역 등지에서 24시간 운영되는 릭샤 또는 택시 정류장을 이용하는 것이 그나마 조금 안전하다. 오토릭샤 등을 이용할 경우, 어느 출입구로 달라고 정확히 요구해야 한다. 중간에 비싼 마차나 낙타차가 있는 곳에 내려 놓고 가버려서 곤란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不二 / 2019. 4. 5. 14:47 / 세계여행/스리랑카

시기리야, 정글 한가운데 있는 고대 하늘도시

오래 전에 TV 다큐멘터리에서 스리랑카의 정글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와 바위 꼭대기에 지어진 신비로운 궁전에 대한 이야기를 적이 있었다. 모습은 오랫동안 머리 속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곳은 시기리야(Sigiriya), 혹은 싱하기리(Sinhagiri) 불리는 일명 사자바위와 위에 지어진 도시이자 요새로 스리랑카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행지이기도 했다.

밀림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하늘도시 , 시기리야

역사적 배경

화산 폭발로 생성된 바위는 주변 평지에서 180m 높이까지 치솟아 있고, 우리가 오늘날 보게 되는 것처럼 1.5 헥타르에 이르는 정상의 평지까지 좁은 계단과 작은 길을 연결하여 궁전, 저수지, 정원 등을 만들고 아래 산기슭에는 정원과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건설했던 사람은 5세기 지역을 지배했던 카샤파 1(Kashyapa I, 473–495 AD)였다.

그는 당시 적자였던 목갈라나(Moggallana) 왕자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을 염려하여 아버지인 다투세나(Dhatusena, 455–473 AD)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 남인도로 피신한 목갈라나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버리고 이곳의 깎아지른 바위산에 궁전과 난공불락의 요새를 건설했다고 전한다.

남쪽에서 바라본 시기리야의 모습
서문을 통과해 서쪽에서 바라본 시기리야의 모습

서문주차장과 박물관

우리 일행이 시기리야 근처에 도착하자 멀리 거대한 몸체의 바위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자바위는 생긴 모습 때문에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모양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서문주차장에서 차에서 내려 먼저 박물관으로 향했다. 외국인들은 보통 서문주차장을 통해 시기리야로 접근하게 된다. 외국인 입장권은 서문주차장 가까이에 있는 박물관에서 판매하기 때문이었다. (외국인 입장료는 1인당 $30이다.) 지점을 지나면 화장실을 사용할 없기 때문에 화장실 사용도 박물관을 찾아야 하는 중요한 과제 하나이다.

시기리야 주변 지도

많은 사람들이 바쁜 마음에 표만 구입해서 서둘러 시기리야로 향한다. 그러나 시간 여유가 있다면,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도 충분히 수고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자바위가 지질학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이곳의 고대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등을 각종 시청각 자료를 통해 쉽게 있고, 현장에서는 사람들에게 밀려 건성으로 보기 쉬운 유명한 시기리야의 프레스코 벽화를 재현된 벽화를 통해 여유롭게 감상할 수도 있다. 또한 동안의 발굴 결과를 집약한 시기리야 고대도시의 모형을 통해 복원된 고대도시를 만날 수도 있다.

서문 입구를 통과하며 볼 수 있는 해자의 모습
견원지간 ( 犬猿之間 ). 박물관 근처에서 개와 원숭이가 죽일 듯이 싸우는 모습에 잠시 갈 길을 멈추었다 .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없지만 스리랑카나 인도 등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잠시 눈길을 끌었다 .

물의 정원과 바위정원

박물관에서 시기리야를 향해 조금 걷다 보면 고대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해자를 만난다.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방어에 치중한 요새의 일면을 실감하며 고대도시로 들어서면 넓게 펼쳐진 정원을 만난다. 거대한 바위로 향하는 가운데 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어느 정도 발굴과 복원이 이루어져 있고 이와 대칭으로 조성된 왼쪽은 미래를 위해 발굴을 미루어 모습이었다. 5세기에 지어졌음에도 붉은 벽돌, 잔디, 연못 등으로 조성된 물의 정원(Water Gardens) 상당히 고풍스런 모습이었을 것임을 짐작할 있었다. 지금 평가해도 뛰어난 수로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하니 최고의 고대 계획도시로 평가받는 이유를 있을 같았다.

물의 정원 모습
해자와 물의 정원 사이에 있는 벽돌 내성벽에서 바라본 물의 정원
고대 분수시설로 지하에 물울 공급하는 수로가 설치되어 있다 . 비가 올 때면 여진히 분수가 작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시기리야 정상에서 내려다 본 물의 정원 모습과 왼쪽 아래 편에는 남문주차장이 보인다 .

고개를 드니 바로 앞에 거대한 사자바위 성채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정원이 끝나는 지점에서 성채가 시작되고 여기서부터는 1,200개의 계단을 통해 정상에 이르게 된다. 성채를 이루는 바위 곳곳에 홈이 파져 있었다. 이들 홈에 붉은 벽돌이 얹혀져 벽돌 벽과 바위가 이어져 하나의 성채를 이루었던 했다. 벽돌담 안쪽으로 바위와 바위 사이에는 돌들이 쌓아져 빈틈을 견고하게 메우고 있었다.

벽돌이 바위와 맞물리도록 바위에 홈이 파져 있다 .
바위 , 벽돌 , 큰 돌이 서로의 빈 공간을 메우고 맞물려 견고한 성벽을 이루고 있다 .

계단 층을 올라가면 바로 아치형 바위입구가 성채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고 있다. 지형지물을 이용한 훌륭한 군사용 방어사설이었다. 이러한 아치형 바위입구는 이곳 말고도 여러 곳에서 성채의 입구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은 성채의 입구이기도 하지만 바위정원(Boulder Gardens) 입구이기도 했다.

바위정원 입구의 아치형 바위입구

테라스 정원과 사자문

바위정원을 지나자 계단은 좀더 가팔라지면서 벽돌과 석회석으로 만든 여러 층의 테라스정원(Terrace Gardens) 지났다. 그리고 얼마간을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거울의 (Mirror Wall) 사자문(Lion Gate) 있는 사자바위의 중간 부분에 도달했다. 부분은 테라스정원의 가장 부분에 속한다. 여기서는 먼저 바위 표면에 고정된 19세기 철제 나선형 계단을 통해 흔히 시기리아의 미인들(Sigiriya Damsels)이라고 불리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유명한 프레스코 벽화가 있는 절벽에 움푹 파인 공간으로 올랐다. (벽화가 있는 공간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프레스코 벽화와 거울의 벽이 있는 시기리야의 허리 부분의 모습
거울의 벽은 거대한 바위의 허리를 휘감은 채 기나긴 세월을 견뎠다 . ( 왼쪽 ); 프레스코 벽화와 거울의 벽으로 가는 통로의 모습 . ( 중간 ); 프레스코 벽화를 보기 위해서는 좁은 나선형 철제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 ( 오른쪽 )

미인도는 5세기에 그려졌다고 하니 1500년이 지났음에도 빼어난 고대 벽화기술 덕에 지금도 섬세하고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스리랑카에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비종교적 벽화이면서 가장 많이 복제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벽화가 그려진 프레스코 벽은 한때 세상에서 가장 갤러리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사자바위의 서쪽 표면에 가로로 140m, 세로로 40m 폭으로 바위의 북동쪽 가장자리까지 펼쳐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500 명이 그려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22명의 여인들만이 남아있다.

시기리야를 상징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인 시기리야 미인도 벽화 .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
시기리야 서쪽 면의 북동쪽 가장자리로 이곳까지 시기리야의 미인도가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

미인도 벽화가 있는 곳까지 오르내리는 나선형 철제 계단은 쌍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데 매우 좁아서 병목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종종 한낮에는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성채 입구까지 줄이 길게 늘어져 있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지체하게 된다. 이를 피하고 싶은 사람들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은 이른 아침 또는 늦은 오후에 방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낮이면 거울의 벽과 프레스코 벽화가 있는 바위 허리 부분으로 올라가기 위해 테라스정원 아래까지 긴 줄이 이어진다 .
긴 줄은 생각보다 더디게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예상보다 긴 시간이 걸린다 .

벽화를 보고 나면, 길은 바깥 쪽이 거울의 벽으로 막힌 사자바위 표면에 홈을 따라 나있다. 거울의 표면은 원래 석회, 계란흰자, 밀랍, 야생 꿀을 섞어 만들어 광택이 많이 나는 석고반죽이 입혀져 있었으며, 원래의 석고반죽이 입혀진 일부 구간이 아직도 남아 있어 놀라운 광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표면은 이곳을 방문했던 사람들이 남긴 낙서들로 뒤덮혀 있었으며, 주로 6세기부터 14세기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거울의 벽 통로의 모습 . ( 왼쪽 );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원래의 광택을 볼 수 있으며 배수구멍도 볼 수 있었다 . ( 중간 ); 벽 표면에 남겨진 낙서들 . ( 오른쪽 )
우리나라 전방에서 볼 수 있는 적 탱크의 전진을 저지시키기 위한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과 같이 그 옛날 돌 조각으로 지탱시켜 놓은 거대한 바위덩이를 볼 수 있다 . 적이 쳐들어오면 저 바위를 아래로 굴려 아래의 적을 공격했을 것이다 .

거울의 벽을 지나자 사자바위의 북쪽으로 갑자기 너른 평지가 앞에 펼쳐졌다. 사자문 테라스였다. 사자문은 바위산 정상의 궁전으로 올라갈 있는 유일한 계단을 지키는 정문이었다. 시기리야의 상징적인 존재들 가운데 하나인 사자문은 지금은 개의 거대한 발과 사이에 설치된 고대 석회암 계단 주변의 벽돌 구조물만 남아 있었다. 사자문 앞에 펼쳐진 테라스는 사자문을 통과해 정상으로 향하기 대기실과 같은 역할을 했을 같았다. 테라스 한쪽에는 사자바위에서 유일하게 물을 구입할 있는 곳이 있고, 옆쪽에서는 현지인들이 수도에서 물을 바로 마시고 있었다.

원래는 방문객들이 크게 벌어진 사자의 입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옛날 이곳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입구에 버티고 거대한 사자상에 압도당했을 것이다. 사자는 싱할라 왕족의 상징이었으며, 사자상의 크기는 아마도 카샤파 1세가 나타내고 싶었던 자신의 위엄, 권력, 그리고 왕위 찬탈로 손상 받은 왕권 정당성의 크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모든 것이 결국 일장춘몽이었던 듯하다.

사자문 테라스에서 볼 수 있는 사자바위 북면의 모습 . 정상까지 오르는 전체 계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위키피디아
사자문의 현재 모습 . 사자의 발만 남이 있다 .
위에서 바라본 사자문과 사자문 테라스의 모습 .
정상으로 오르면서 시기리야의 북쪽으로 피두랑갈라를 볼 수 있다 .

사자바위 정상의 궁전

사자의 사이로 돌계단을 올라가자 지그재그로 이어진 철제계단으로 연결되었다. 사자바위 북쪽 표면에 고정된 좁은 철제계단은 조금 가파른 부분도 있었지만 그리 어려운 코스는 아니었다. 철제계단이 없었던 고대에는 거울의 벽처럼 바깥 쪽에 벽돌 벽이 있고 기와로 연결된 지붕이 갖춰진 석회석 계단이 정상까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상의 북서쪽에는 궁전 건물의 기단부들이 남아 있다 .
정상의 남서쪽 모습

그리고 철제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갑자기 넓은 평지가 나타났다. 시기리야 정상의 왕의 궁전, 하늘도시였다. 정상의 궁전은 고대도시의 중심이기도 했다. 주변 평지에서는 180m, 해수면에서는 360m 높이에 있는 정상은 1.5 헥타르 규모의 계단 모양의 평지로 동쪽이 낮고 서쪽은 조금 높은 형태였으며, 특히 남동쪽에 정상의 빗물을 모을 있는 저수시설이 여럿 설치되어 있었다.

정상의 남동쪽 모습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 여유롭게 앉아 있고 싶어졌다. 정상에 오른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편한 곳에 앉아 주변을 몸으로 느끼려는 듯했다. 사방이 트여 있어 밀림 멀리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불현듯 궁전의 주인은 이러듯 난공불락의 요새를 지어놓고 막상 적이 침공하자 적을 맞으러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싸우다 참패를 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자신이 걱정했던 것처럼 남인도로 피신했던 동생 목갈라나 왕자가 마침내 타밀 용병들을 규합해 복수를 위해 쳐들어왔다고 한다. 카샤파왕은 침략군을 맞이하기 위해 요새에서 내려와 앞에서 코끼리를 타고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평지로 진군했다. 그러던 코끼리가 놀라 대오를 이탈하자 뒤따르던 군사들은 왕이 도망치는 것으로 오인해 왕만 혼자 남겨둔 모두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혼자 생포될 것을 두려워한 왕은 자신의 칼로 자결했다고 전한다. 허망한 결말이 아닐 없다.

정상의 남동쪽 끝에 은밀한 목욕탕이었을 것 같은 조그만 물탱크 안에는 연꽃만 가득 피어나고 있었다 . 주인은 오래 전에 가고 없는 허망함에 바쳐진 연꽃 같아 가슴에 짠한 감동이 밀려왔다 .

알현실과 물탱크 바위

내려오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는 좀더 빠르게 내려올 있었다. 사자바위 아래까지 내려와 남쪽 기단부의 바위정원에 이르면, 고대 스리랑카의 독특한 바위 건축물을 만나게 된다. 고대 바위 건축에서는 바위 위에 건물이나 정자를 짓고, 바위 아래 부분에는 벽화가 그려진 바위동굴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바위 건축의 대표적인 예가 알현실(Audience Hall) 물탱크(Cistern) 바위이다.

왼쪽 물탱크 바위와 오른쪽 알현실 바위 사이에는 대리석 바닥의 통로가 나 있었다 .
오른쪽의 알현실 바위는 왼쪽의 물탱크 바위의 일부분이었으나 인위적으로 분리되었다 . ( 왼쪽 ); 물탱크 바위에서 가운데 통로가 물을 흘려 보내는 홈이 파져 있었다 . ( 중앙 , 오른쪽 )

알현실 바위 정상은 평평한데 한쪽 끝에 5m 길이의 옥좌가 있고 주위에 알현실 건물이 있었던 듯한 흔적이 있다. 바로 맞은편의 물탱크 바위 정상에는 한가운데에 물을 저장할 있는 물탱크가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바위의 아래 부분에는 여러 겹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 조그만 동굴 같은 공간이 있다. 특히 물탱크 바위 아래에 있는 동굴에는 돌로 만든 옥좌 또는 제단이 있고 거울의 벽에서처럼 낙서들이 어지러이 벽과 천장을 장식하고 있었다. 특히 천장에는 훼손된 미인도의 일부가 희미하게 남아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알현실 바위는 원래 물탱크 바위의 일부였으나 인위적으로 잘라내 지금의 모습이 것이다.

알현실 바위 위 먼 쪽으로는 돌로 만든 옥좌가 보이고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 바위 아래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던 공간이 있다 .
물탱크 바위 아래에 있는 동굴 모습 .
물탱크 바위 아래 동굴의 천장에는 훼손된 미인도의 일부를 아직도 볼 수 있었다 .

물탱크 동굴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나오면 개의 아치형 바위입구를 지나 마치 코브라가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듯하여 코브라 머리 바위(Cobra Hood Boulder) 불리는 바위를 지나자 금방 남문주차장에 당도했다. 외국인들도 보통 이곳으로 하산하기 때문인지 기념품 가게들도 모두 이곳에 모여 있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카샤파 1세의 재위 기간은 18년이었다고 한다. 가운데 시기리야의 고대도시를 건설하는데 8년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이곳을 왕궁으로 온전히 사용했던 기간은 10 남짓이었을 것이다. 짧은 기간에 엄청난 규모의 도시를 건설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희생도 많이 따랐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있다. 그래도 후세에 전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보면 헛된 일을 것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시기리야를 떠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코브라 머리 바위의 모습

 

참고 사항

시기리아 세계문화유산 운영 시간: 오전 7 오후 5

시기리아 박물관 운영 시간: 오전 7:30 – 오후 5:30

입장료: 외국인 미화 30

주변에 갈만한

  • 피두랑갈라(Pidurangala) 바위: 시기리야에서 북쪽으로 직선으로 830m 거리에 있는 바위산이다. 시기리야의 전체 모습을 조망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고대에 불교사원이 있던 곳이므로 거대한 와불상 등 문화재가 있으며, 입장료는 500루피로 저렴했다. 일출이나 석양을 보기에도 좋은 장소이다.

  • 코끼리 사파리: 하바라나 주변에 있는 국립공원이나 야생보호지역에서 코끼리 사파리를 즐길 수 있다. 가까이에서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후룰루 에코파크(Hurulu Eco Park) 또는 미네리야국립공원(Mineriya National Park)인데 코끼리들이 물을 찾아 이동하기 때문에 시즌에 따라 코끼리들이 몰리는 곳이 있으며 사파리 지프 운전사들이 그때그때 코끼리들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 입장료와 사파리 지프를 패키지로 구매하게 되는데 이를 판매하는 곳이 하바라나 시내에 10여 곳이 있으나, 하바라나 빌리지 바이 시나몬 입구에 가장 큰 판매소가 있다.

  • 오크레이 목각장식품점(Oak Ray Woodcarving): 시기리야의 서문주차장과 남문주차장 진입로 중간에 있으며, 비교적 품질이 좋은 목각 기념품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직접 제작한 것들도 있고 가져다 파는 것들도 있다. 입구의 작업장에서는 시기리야 벽화 등에 사용된 천연물감을 만드는 시범을 볼 수 있다.

 

문화삼가지 지도

위치: 아누라다푸라-폴론나루와-담불라로 연결되는 문화삼각지 내에 위치하며 접근로는 양호한 편이다.

도로: 담불라 또는 하바라나를 통해 접근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콜롬보에서 하바라나까지 5시간 가량 소요된다. 관건은 중간의 쿠루네갈라(Kurunegala)까지 차량 통행이 많은 편이며, 이에 따라 소요될 수도 있다. 콜롬보에서 차량으로 이동할 경우 차량의 통행이 적은 새벽에 출발하는 것이 좋다. 버스로 이동할 경우, 담불라 또는 하바라나까지 이동해서 시내버스 또는 툭툭을 이용해 시기리야까지 이동할 있다.

철도: 하바라나까지 기차로 이동할 있고, 다시 툭툭을 이용하면 편하게 이동할 있다.

항공: 시기리야에 작은 공항이 있어서 콜롬보에서 국내선 항공(시나몬항공)으로 직접 이동이 가능하다

숙소: 시기리야 근처에도 호텔과 게스트하우스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보통은 지역의 다른 관광 일정을 고려할 담불라 또는 하바라나에 숙소를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담불라

  • 기만할라호텔(Gimanhala Hotel): 담불라 시내 중심거리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편리하고, 시설이 오래됐지만 운치가 있다.

  • 호텔 골든레이(Hotel Golden Ray): 새로 지은 호텔로 깨끗하지만, 중심거리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야 해서 특히 밤에는 불편한 점이 있다. 식당이 조금 불편한데 마치 야전식당을 이용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바라나

  • 하바라나 빌리지 바이 시나몬(Habarana Village by Cinnamon): 시설은 다소 오래됐지만 서비스나 경치는 훌륭하다. 4성급으로 하바라나 사거리에서 담불라 방향으로 800m 거리에 있다.

  • 다나와 리조트(Danawwa Resort): 하바라나 사거리에서 아누라다푸라 방향으로 400m 거리에 위치하여 이용하기 편리하다. 시설이 다소 오래되었지만, 방이 넓고 아침과 저녁은 뷔페식으로 제공되어 단체객들이 많이 이용한다.

 

식당 식료품

  • 망고망고(Mango Mango): 담불라 시내 중심거리에 있어서 찾기는 싶지만 항상 차들로 붐벼서 주차가 번거로운 면이 있다. 1층에서 이미 준비되어 진열된 음식을 먹는 사람들도 있지만, 2층으로 올라가면 주문해서 시켜 먹을 수도 있다. 음식도 괜찮은 편이고 가격은 저렴해서 그리 부담이 되지 않는다.

  • 카길 푸드시티(Cargill Food City): 식료품 체인점으로 담불라와 하바라나에 있는 것은 소규모의 카길 푸드시티 익스프레스이다. 담불라에는 망고망고 식당과 바로 붙어 있고, 하바라나에서는 하바라나 사거리와 하바라나 빌리지 바이 시나몬 사이에 있다.

  • 뉴 시기리 식당(New Sigiri Restaurant): 시기리야 서문주차장 입구에서 담불라 방향으로 430m쯤 떨어져 있으며, 점심식사를 뷔페식으로 할 수 있다. 시기리야에 온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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