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두랑갈라 정상에서 바라본 시기리야의 모습 .시기리야 북쪽 사자문과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정상에 오르면 흔들바위를 만난다. 피두랑갈라가 화산활동으로 200m를 솟아오를 때도 굴러 떨어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나 보다!시기리야를 배경으로 다양한 모습을 연출한다.
피두랑갈라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석굴사원의 외관 모습.하얀색 석굴사원 건물로 들어서면 불상을 모신 내실 입구를 사자와 수호신들이 지키고 있다.석굴사원 내부에 불상을 모신 내실의 모습. 중앙에 길게 와불상이 모셔져 있고 좌우 양쪽 끝에 입상 또는 좌상의 불상이 마주보고 있다.
이사원의이름은피두랑갈라시기리라자마하사원(Pidurangala Sigiri Rajamaha Viharaya)이다. 피두랑갈라의역사는기원전1~2세기로거슬러올라간다. 그당시부터불교사원이자리하고있었다고하지만사람들에게알려진것은시기리야에성채와도시를건설했던카샤파1세(Kashayapa I, 473-495 AD)가통치하던시기였다.
테르메즈 공항의 대합실 창문 너머로 낡은 트럭이 수하물을 실어와 컨베이어 벨트에 수하물을 부리고 있다. 같은 세기를 살고 있는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개도국을 여행하다 보면 흔히 보는 광경이기도 하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의정벌과헬레니즘문명의확립
길목에위치한땅이어서외래문명을빨리접할수있었던장점도있었지만, 외세의침략에시달려온땅이기도했다. 기원전 6세기에이미옛이란의아케메네스(Achaemenes) 왕조의침입이있었다. 그로부터 200년이지나기원전 4세기에는마케도니아(Macedonia)의알렉산드로스대왕이이곳테르메즈를점령했었다. 알렉산드로스제국의점령은이곳에동양의문화에그리스문화가더해져새롭게탄생한헬레니즘문화가뿌리를내리는계기가됐다. 고대자료에알렉산드로스대왕이건설했다는 ‘옥수스의알렉산드리아(Alexandria on the Oxus)’라는도시가바로테르메즈였다.
사실마케도니아는그리스내에서도아테네와스파르타처럼선진적인도시국가로발전하지못한변방의작은왕국이었다. 그리스자체도거대한이웃페르시아제국의침략과괴롭힘을당하는처지였다. 이러한처지에도마케도니아의필리포스 2세(Philippos II)는군사력을키워그리스전체를수중에넣고페르시아제국자체를멸망시키고그땅을차지하겠다는원대한꿈을품고있었다. 필리포스는아들알렉산드로스의눈부신활약으로마침내숙원이었던그리스도시국가들의공수동맹인코린트동맹(League of Corinth)의맹주자리에오르고, 이어페르시아정벌에나섰다. 그러나그는자신의경호원중한명에게불의의죽임을당하고말았다.
기원전 500 년경 아케메네스왕조 시대의 페르시아제국 영토 . 페르시아제국은 속주의 종교와 관습을 최대한 인정하면서 주변 문명을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로 녹여낸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 박트리아는 거대한 페르시아제국의 동쪽 끝에 위치했다 . 위키피디아 .
메난드로스 1 세 시대에 발행되었던 은화에 나타난 메난드로스왕의 모습 . ‘ 구세주 메난드로스왕 ’ 이라 새겨져 있다 . 대영박물관 ( 왼쪽 ); 메난드로스 1 세 시대의 기본 동전으로 왼쪽의 전면에는 중앙에 법륜 ( 法輪 ) 과 함께 ‘ 구세주 메난드로스왕 ’ 이란 글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가 새겨져 있다 . 대영박물관 ( 오른쪽 )
메난드로스 2 세 때의 주화로 제우스신이 법륜 위로 승리의 화환을 건네는 승리의 여신 니케를 잡고 있는 모습이 주조되어 있다 . ( 왼쪽 ); 그리스식의 망토와 모자를 쓰고 법륜을 굴리고 있는 신의 모습이 주도되어 있다 . ‘ 법륜을 굴리는 사람 ’ 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 오른쪽 )
기원전 3세기의아소카(Aśoka, 阿育王) 치세때개최되었던불교제3차결집이후붓다의가르침을전하기위해각지로전법사들이파견되었다. 박트리아도이때불교가전파된곳들가운데하나라는주장도있다. 그러나학자들의고고학적연구결과로뒷받침되는사실은기원전2세기에전법사들이박트리아에파견되어불법을전하기시작했을수는있으나, 박트리아북부에불교건축물들이널리세워지고불법이널리전파된것은기껏해야기원후1세기후반이되어서야이루어진일이라고한다.
동전의 전면에 덥수룩한 수염의 카니슈카 1 세가 두꺼운 외투와 긴 장화를 신고 있는 모습 . ‘ 왕중 왕 , 쿠샨의 카니슈카왕 ’ 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 ( 왼쪽 ); 후면에는 시무외인 ( 施無畏印 , abhaya mudra) 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헬레니즘 양식의 붓다 상 . 붓다의 모습 왼쪽에 붓다 (Boddo), 오른쪽에는 카니슈카의 문장 ( 紋章 ) 이 새겨져 있다 . ( 오른쪽 )
1908~1909 년 페샤와르의 고대도시에 위치한 카니슈카대탑의 발굴 과정에서 대탑 아래 부분의 안치실에서 발견된 붓다 사리함 . 위 부분에는 좌우로 브라마신과 인드라신의 경배를 받고 있는 붓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 ( 왼쪽 ); 사리함 몸체의 아래 부분에는 카니슈카왕으로 보이는 쿠산의 왕이 좌우에 이란의 해와 달 신들과 함께 조각되어 있다 . ( 오른쪽 ) 페샤와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사라함 안에는 붓다의 뼈조각 3 과가 들어 있었으나 영국이 미얀마의 만달라이 (Mandalay) 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2 세기 간다라 지역에서 최초로 출현했던 불상들 가운데 하나로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왼쪽); 2세기에 간다라에서 출현했던 불상이며 오른쪽에서 붓다를 보호하고 있는 금강수보살(金剛手菩薩)이 헤라클레스로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
간다라불상에서특이한것은머리카락이고수머리가아니고물결모양의장발이라는점과용모는눈언저리가깊고콧대가우뚝한것이마치서양사람과같다는점이다. 또얼굴의생김새가인간적이고개성이있다는점, 입고있는옷의주름이깊게새겨졌고그모양이자연스러워형식화된것이아니라는점등을그특징으로들수있다. 즉, 간다라불상의표현은그리스풍의자연주의ㆍ현실주의에바탕을두고있다는점이독특했다.
이렇게오늘날파키스탄의북부지방인간다라에서꽃피웠던그리스-불교예술은인도로퍼져나가마투라의예술, 그리고이후에는굽타(Gupta) 왕국의예술에크게영향을미쳤으며, 이는다시동남아시아전역으로파급되었다. 간다라의불교문화는또한북쪽으로도퍼져나갔는데한갈래가중앙아시아로퍼져나갔으며, 다른한갈래는타림분지를거쳐중국, 한국, 일본까지큰영향을끼쳤다.
테르메즈의불교유적
고고학발굴로수세기에걸쳐고대테르메즈는중앙아시아에서중요한불교중심지였음이밝혀졌다. 포교사들이이곳을출발하여북서쪽으로는철문관을넘어소그디아나로불교를전달하였고, 북동쪽으로는파미르고원과알라이산맥을넘어東투르케스탄(East Turkestan)으로그리고그너머중국, 한국, 일본에까지불법(佛法)을전했다. 옛문서에는산스크리트어(Sanskrit) 불교경전을한역(漢譯)한사람들의이름을포함하여중국에서불교포교활동을벌였던박트리아인들의이름이남아있다.
7세기초옛테르메즈를통과해인도로향했던현장은「대당서역기」에서 테르메즈를 달밀국(呾蜜國)이라 칭했으며, 10여개의 사원이 있고 스님들도 1000여명이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도 불교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장이 보았던 옛 테르메즈는 동서로 600여리, 남북으로 400여리였고, 도성의 둘레는 20여리에 달하며, 동서로는 길고 남북으로는 좁은 모양이었다.
이곳파야즈테파에서고고학자들이발견한조각상들과토기들도그우아함과기교로예술적가치를높이인정받았다. 특히양편에두스님이서있는가운데성스러운보리수나무아래에가부좌자세로앉아있는붓다상이주목을끌었는데비나야삼존불이라불리는이불상은이곳파야즈테파에서발견된불교예술품들중최고의작품으로꼽힌다. 이불상은아치모양의테두리안에앉아있는모습인데아치는그리스의코린트식기둥위에얹혀져있다. 붓다상자체도그리스풍예술의영향을받은흔적이뚜렷이남아있다. 이조각품은석회석에새겨졌으며금박장식이되어있다. 현재이조작품은타쉬켄트소재의우즈베키스탄역사박물관(State Museum of History of Uzbekistan)에전시되어있다.
파야즈테파에서 발견된 비나야삼존불 . 1~2 세기 추정 . 우즈베키스탄 역사박물관 ( 왼쪽 ); 궁정신하들을 묘사한 벽화로 파야즈테피에서 발굴되었다 . 1~3 세기 추정 . 우즈베키스탄 역사박물관
2000 년 세월을 견뎌 온 진흙탑을 보기 위해서는 반구형 보호 지붕에 나 있는 이 출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평소에는 자물쇠로 잠겨져 있다.발굴 당시 탑의 모습 (왼쪽); 반구형 보호 지붕 안에 있는 현재의 탑의 모습 (오른쪽)반구형 보호 지붕 안에 있는 현재의 탑의 모습
13세기초사마르칸트를포함한중앙아시아와이란지역의지배자는투르크계열의무슬림술탄인샤알라아딘무하마드(Shah Ala ad Din Muhammad)였다. 그의왕국은호라즘제국(Khwarezmid Empire)이라불렸다. 당시몽골고원에서급격히성장하던칭기스칸(Chingiz Khan, 成吉思汗)은금나라를정벌중이었으며, 중앙아시아의정벌은전혀고려하고있지않았다. 그는호라즘과의교역을열기위해대상(隊商)과사절단을보냈지만, 술탄은대상과사절단을죽이거나모욕적인대우를함으로써칭기스탄의분노를불러일으켰다.
울루그베그 마드라사가 건립된 후 200년이 지나 그 맞은편에 건립된 셰르도르 마드라사.피슈타크의 윗부분에 떠오르는 태양을 등에 지고 하얀 사슴을 뒤쫓고 있는 호랑이 모자이크는 고대 페르시아의 미트라교 신앙 모티브를 표현하고 있는 바 종교적 건축물에 살아있는 생물의 묘사를 금지하는 이슬람 율법을 무시하고 있어 이슬람교도들의 반감을 샀으나 신기하게도 건물은 살아 남았다.동행했던 마이클도 호랑이 모자이크가 신기했던지 카메라에 담고 있다.
마드라사의 안뜰로 들어가는 입구. (왼쪽); 기숙사동이나 강의동으로 둘러싸인 마드라사의 안뜰 모습. (오른쪽)마드라사 안뜰의 건물들은 지역의 수공예 상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품질을 확인할 수 없으며 시장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 마드라사 본래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특유의 푸른색 도자기를 파는 판매대.다양한 무늬의 옷감을 파는 판매대.양탄자를 판매하고 있는 판매대.
티무르의 영묘 건물이며, 돔 바로 아래 안쪽에 티무르가 누워 있다.이슬람 건축에서 내부 천장 부분을 장식하는 기법으로 사마르칸트의 건축물에서도 두루 나타나고 있는 무하르나스(Muqarnas).다른 무덤들과는 색깔이 다른 가운데 흑옥석관이 티무르의 무덤이며, 울루그베그가 설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거대한 흑옥은 1420년대 모굴리스탄 정벌에서 울루그베그가 획득한 전리품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구르아미르의 무덤 배치도
부분적으로 파괴된 채로 19세기에 촬영된 구르아미르의 모습 (왼쪽); 20세기에 복원된 구르아미르의 모습 (오른쪽) RadioFreeEurope/RadioLiberty 사진갤러리.1941년 구(舊) 소련의 게라시모프가 티무르의 두개골에서 복원한 티무르의 얼굴 모습. 몽골초원의 몽골인에 가까운 모습이다. (왼쪽); 구르아미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티무르의 초상화. 좀더 서구화 혹은 페르시아화 된 모습을 보인다. (오른쪽)
시압바자르 입구에서 바라본 비비하눔 모스크.비비하눔 모스크 입구의 거대한 이완과 피슈타크의 규모는 티무르가 이 모스크 건립에 들인 의지와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모스크 내부 저 멀리 보이는 본당 건물의 이완과 피슈타크 역시 매우 큰 규모여서 중심 돔을 가리고 있어 볼 수가 없다.
티무르는이거대한건축물에자신이사랑했던왕비의이름을붙여비비하눔모스크라명명했다. 그녀의이름은사라이물크하눔(Saray Mulk Khanum)이었다. 사마르칸트의많은건축물이그런것처럼, 이모스크에도처음모스크의건축이이루어질당시의아름답지만슬픈전설이전하고있다. 전하는전설은조금씩다른버전이있어내용이조금씩은다르긴하지만기본적인내용은비슷하다.
모스크 외부의 남쪽에서 볼 수 있는 모스크의 양 측면에 설치된 두 개의 돔. 남쪽으로 이어지는 상가의 첫 가게에서 잠시 차와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가졌다.비비하눔 모스크에서 레기스탄으로 이어지는 길은 이렇게 인도로 조성되어 있고 길 양 편에는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매력적인 상가로 만들어졌다기 보다 관광객들에게 사마르칸트 또는 우즈베키스탄도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처럼 보였다.1905 년과 1915 년 사이에 세르게이 프로쿠딘 - 고르스키 (Sergei Mikhailovich Prokudin-Gorskii) 가 촬영한 사진으로 1897 년 지진으로 무너진 비비하눔 모스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지금은 사라진 회랑의 모습도 볼 수 있다 .
러시아제국이 중앙아시아를 점령하고 이 지역을 투르케스탄(Turkestan)이라 불렀으며, 첫 투르케스탄 총독으로 부임했던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Konstantin P. von Kaufman) 장군에 의해 1871~72년에 걸쳐 지역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6권의 사진첩이 제작되었다. 이 가운데 고고학 분야에 들어 있던 비비하눔묘의 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스.시압바자르 출입구의 모습. 모스크에서 나오면 북쪽으로 연이어 시압바자르가 위치하고 있다.
울루그베그천문대
아직해가지지는않았지만해가질때까지시간이그렇게많이남지는않았음을느낄수있었다. 우리는해가지기전에서둘러울루그베그천문대(Ulugh Beg Observatory)까지둘러보기로하고서두르기로했다. 천문대는우리가다시타슈켄트로돌아가는길가에있는추반아타(Chupanata) 언덕에자리잡고있었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을 천문대가 있는 추반아타 언덕을 지키고 있는 울루그베그의 상(像).인도 무굴제국을 세운 바부르(Babur)가 보았다고 묘사한 3층 높이의 울루그베그 천문대 모습. 그는 천문대 건물이 지름 46m, 높이 30m의 둥근 건물로 바깥에 광택이 나는 타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했다.천문대 내부를 보여주는 그림. 바부르가 중앙홀에 거대한 관측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 것이 현재는 지하 부분의 흔적만 남아 있는 거대한 규모의 육분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의 정원 모습해자와 물의 정원 사이에 있는 벽돌 내성벽에서 바라본 물의 정원고대 분수시설로 지하에 물울 공급하는 수로가 설치되어 있다 . 비가 올 때면 여진히 분수가 작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시기리야 정상에서 내려다 본 물의 정원 모습과 왼쪽 아래 편에는 남문주차장이 보인다 .
프레스코 벽화와 거울의 벽이 있는 시기리야의 허리 부분의 모습거울의 벽은 거대한 바위의 허리를 휘감은 채 기나긴 세월을 견뎠다 . ( 왼쪽 ); 프레스코 벽화와 거울의 벽으로 가는 통로의 모습 . ( 중간 ); 프레스코 벽화를 보기 위해서는 좁은 나선형 철제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 ( 오른쪽 )
이미인도는5세기에그려졌다고하니1500년이지났음에도빼어난고대벽화기술덕에지금도섬세하고생생한모습을그대로보여주고있었다. 스리랑카에서현재까지남아있는유일한비종교적벽화이면서가장많이복제되고있는작품이기도하다. 벽화가그려진프레스코벽은한때세상에서가장큰갤러리라고불리기도했는데, 사자바위의서쪽표면에가로로140m, 세로로 40m의폭으로바위의북동쪽가장자리까지펼쳐져있었을것으로추정하고있다. 원래500여명이그려졌을것으로보이지만현재22명의여인들만이남아있다.
시기리야를 상징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인 시기리야 미인도 벽화 .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시기리야 서쪽 면의 북동쪽 가장자리로 이곳까지 시기리야의 미인도가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
거울의 벽 통로의 모습 . ( 왼쪽 );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원래의 광택을 볼 수 있으며 배수구멍도 볼 수 있었다 . ( 중간 ); 벽 표면에 남겨진 낙서들 . ( 오른쪽 )우리나라 전방에서 볼 수 있는 적 탱크의 전진을 저지시키기 위한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과 같이 그 옛날 돌 조각으로 지탱시켜 놓은 거대한 바위덩이를 볼 수 있다 . 적이 쳐들어오면 저 바위를 아래로 굴려 아래의 적을 공격했을 것이다 .
사자문 테라스에서 볼 수 있는 사자바위 북면의 모습 . 정상까지 오르는 전체 계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위키피디아사자문의 현재 모습 . 사자의 발만 남이 있다 .위에서 바라본 사자문과 사자문 테라스의 모습 .정상으로 오르면서 시기리야의 북쪽으로 피두랑갈라를 볼 수 있다 .
왼쪽 물탱크 바위와 오른쪽 알현실 바위 사이에는 대리석 바닥의 통로가 나 있었다 .오른쪽의 알현실 바위는 왼쪽의 물탱크 바위의 일부분이었으나 인위적으로 분리되었다 . ( 왼쪽 ); 물탱크 바위에서 가운데 통로가 물을 흘려 보내는 홈이 파져 있었다 . ( 중앙 , 오른쪽 )
피두랑갈라(Pidurangala) 바위: 시기리야에서 북쪽으로 직선으로 830m 거리에 있는 바위산이다. 시기리야의 전체 모습을 조망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고대에 불교사원이 있던 곳이므로 거대한 와불상 등 문화재가 있으며, 입장료는 500루피로 저렴했다. 일출이나 석양을 보기에도 좋은 장소이다.
코끼리 사파리: 하바라나 주변에 있는 국립공원이나 야생보호지역에서 코끼리 사파리를 즐길 수 있다. 가까이에서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후룰루 에코파크(Hurulu Eco Park) 또는 미네리야국립공원(Mineriya National Park)인데 코끼리들이 물을 찾아 이동하기 때문에 시즌에 따라 코끼리들이 몰리는 곳이 있으며 사파리 지프 운전사들이 그때그때 코끼리들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 입장료와 사파리 지프를 패키지로 구매하게 되는데 이를 판매하는 곳이 하바라나 시내에 10여 곳이 있으나, 하바라나 빌리지 바이 시나몬 입구에 가장 큰 판매소가 있다.
오크레이 목각장식품점(Oak Ray Woodcarving): 시기리야의 서문주차장과 남문주차장 진입로 중간에 있으며, 비교적 품질이 좋은 목각 기념품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직접 제작한 것들도 있고 가져다 파는 것들도 있다. 입구의 작업장에서는 시기리야 벽화 등에 사용된 천연물감을 만드는 시범을 볼 수 있다.
기만할라호텔(Gimanhala Hotel): 담불라 시내 중심거리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편리하고, 시설이 오래됐지만 운치가 있다.
호텔 골든레이(Hotel Golden Ray): 새로 지은 호텔로 깨끗하지만, 중심거리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야 해서 특히 밤에는 불편한 점이 있다. 식당이 조금 불편한데 마치 야전식당을 이용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바라나
하바라나 빌리지 바이 시나몬(Habarana Village by Cinnamon): 시설은 다소 오래됐지만 서비스나 경치는 훌륭하다. 4성급으로 하바라나 사거리에서 담불라 방향으로 800m 거리에 있다.
다나와 리조트(Danawwa Resort): 하바라나 사거리에서 아누라다푸라 방향으로 400m 거리에 위치하여 이용하기 편리하다. 시설이 다소 오래되었지만, 방이 넓고 아침과 저녁은 뷔페식으로 제공되어 단체객들이 많이 이용한다.
식당및식료품
망고망고(Mango Mango): 담불라 시내 중심거리에 있어서 찾기는 싶지만 항상 차들로 붐벼서 주차가 번거로운 면이 있다. 1층에서 이미 준비되어 진열된 음식을 먹는 사람들도 있지만, 2층으로 올라가면 주문해서 시켜 먹을 수도 있다. 음식도 괜찮은 편이고 가격은 저렴해서 그리 부담이 되지 않는다.
카길 푸드시티(Cargill Food City): 식료품 체인점으로 담불라와 하바라나에 있는 것은 소규모의 카길 푸드시티 익스프레스이다. 담불라에는 망고망고 식당과 바로 붙어 있고, 하바라나에서는 하바라나 사거리와 하바라나 빌리지 바이 시나몬 사이에 있다.
뉴 시기리 식당(New Sigiri Restaurant): 시기리야 서문주차장 입구에서 담불라 방향으로 430m쯤 떨어져 있으며, 점심식사를 뷔페식으로 할 수 있다. 시기리야에 온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