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르칸트,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

우즈베키스탄에서 24일간의 체류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 이번에 사마르칸트(Samarkand) 가보지 못하고 귀국하는가 보다며 체념하고 있는데 귀국까지 이틀을 앞두고 갑자기 사마르칸트에 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마이클과 둘이서 가게 되었는데, 바로 다음날 이른 시간의 고속열차에 좌석이 없어서 예약을 없었다. 없이, 동안 나의 손발이 되어주었던 바딤의 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고려인 3세인 바딤은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충분히 가능하고, 우즈베크어와 러시아어가 유창해서 여러 곳을 다니면서 여간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말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을 미리 읽고 배려해주는 세심한 사람이었다. 나중에는 둘이서만 비바람을 뚫고 어둠 속에서 산속을 헤맬 때도 크게 걱정되거나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고 의지가 되었다.

약속대로 새벽 5시가 되자 바딤이 호텔에 도착했다. 아직 어둑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우리는 서둘러 출발했다. 시간대와는 다르게 차량이 많지 않은 타슈켄트(Tashkent) 시내를 비교적 빠르게 벗어나면서 마이클과 나는 뒷좌석에 앉아 비몽사몽 간을 헤맸다. 고속도로 중간에서 잠시 식당에 들러 휴식을 포함해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는 얼마 마침내 고대 실크로드의 중심도시 사마르칸트의 심장인 레기스탄(Registan) 도착했다. 시간을 보니 호텔을 출발한 4시간이 지났다.

사마르칸트를 대표하는 레기스탄 광장

중세 사마르칸트의 파괴

7세기 초에 불전 원본을 구하기 위해 불교 발상지인 천축(天竺, 인도)으로 향하던 당나라의 구법승(求法僧) 현장() 630년경 이곳 사마르칸트를 찾았었다. 당시 ()에서는 강국(康國)이라 부르던 사마르칸트를 현장은 삽말건국(建國)이라 칭했으며, 둘레가 1 6~7백리에 이르고 동서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고도 했다. 현장은 자신의 여행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사마르칸트의 대도성은 둘레가 20리에 이르고, 주민이 많으며 땅의 형세가 험하고 수비가 견고하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현재 실크로트 또는 사마르칸트를 상징하는 이곳 레기스탄의 모습을 현장은 보지 못했다. 현장이 묘사했던 물산이 풍부하고 주변 오랑캐국들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고 사마르칸트의 대도성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1km 조금 넘는 곳에 있는 아프로시압(Afrosiab) 언덕 위에 완전히 파괴된 묻혀 있다. 사마르칸트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어 asmara(, 바위) 소그드어 gand(요새, 도시)에서 유래했으며, 바위요새 또는 바위도시라는 의미이다.

사마르칸트의 주요 유적지

13세기 사마르칸트를 포함한 중앙아시아와 이란 지역의 지배자는 투르크 계열의 무슬림 술탄인 알라아딘 무하마드(Shah Ala ad Din Muhammad)였다. 그의 왕국은 호라즘제국(Khwarezmid Empire)이라 불렸다. 당시 몽골고원에서 급격히 성장하던 칭기스칸(Chingiz Khan, 成吉思汗) 금나라를 정벌 중이었으며, 중앙아시아의 정벌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호라즘과의 교역을 열기 위해 대상(隊商) 사절단을 보냈지만, 술탄은 대상과 사절단을 죽이거나 모욕적인 대우를 함으로써 칭기스탄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술탄이 천산산맥 너머 몽골고원에서 일어나고 있던 변화를 알지 못한 것인지, 칭기스칸의 교역 제안에 의심을 품은 것인지는 없으나, 이것은 자신과 자신의 제국뿐만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멀리 유럽까지 이어지는 드넓은 땅의 운명을 바꿔놓게 되었다. 분노한 칭기스칸은 군대를 이끌고 먼저 부하라(Bukhara) 순식간에 파괴하고, 1220 3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에 도착했다. 현장이 땅의 형세가 험하고 수비가 견고하다 묘사했던 성은 순식간에 함락되고 철저히 파괴되었다. 몽골군의 호라즘 정벌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던 지리학자 야쿠트 하마위(Yāqūt al-amawī al-Rūmī) 몽골군의 파괴를 아름답고 화려한 궁들을 종이에서 글을 지워버리듯이 땅에서 지워버렸다 묘사했다.

실크로드의 주역들 가운데 하나인 소그드인들이 아프로시압 언덕 위에 세웠던 중세의 사마르칸트성이 너무나도 철저히 파괴되었기 때문인지 후대들은 차마 자리에 다시 삶을 일으켜 세울 용기를 가질 없었나 보다. 사마르칸트는 지금 내가 서있는 이곳 레기스탄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아프로시압을 둘러싸고 다시 재건되었다. 지금의 사마르칸트를 상징하는 코발트블루의 커다란 돔들과 이슬람 고유의 첨탑들로 장식된 건축물들은 대부분 14세기에 시작된 티무르제국(Timurid Empire, 帖木兒帝國) 시대에 지어진 것들이다.

사마르칸트의 심장, 레기스탄

레기스탄 입구에서는 이미 많은 우즈베크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부심인 거대하고 화려한 레기스탄의 건축물들을 배경으로 각자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레기스탄은 원래 티무르제국의 수도였으며 지금은 우즈베키스탄에 위치하고 있는 중세도시 사마르칸트의 심장으로 대중광장이었다. 레기스탄은 모래땅이란 의미라고 한다. 아마도 처음에 이곳은 모래밖에 없는 사막이었던 모양이다.

레기스탄 광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방문객들.

레기스탄 광장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것은 중앙아시아 건축의 기념비적 상징물이 위대한 건축물들 때문이었다. 레기스탄은 동쪽, 서쪽, 북쪽으로 광장의 중심을 향하여 마드라사(madrasah)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어 ㄷ자 모양으로 남쪽으로는 열려 있는 모습이었다. 언뜻 보아 대부분의 기념비적인 이슬람 건축물들이 그런 것처럼 좌우대칭인 알았으나, 모두 서로 다른 구조와 장식을 가지고 있었다.

레기스탄의 마드라사와 비비하눔 모스크.

그러나 정작 도시를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부활시킨 티무르(Timur, 帖木兒) 이들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을 보지 못했다. 레기스탄 광장은 티무르가 위대한 도시를 건설한 이래 상업활동의 중심지로 대규모 시장이 있었으나, 15세기 전반 울루그베그(Ulūgh Beg) 이곳에 마스지드(masjid, 이슬람교 사원) 마드라사(이슬람교 신학교), 공중목욕탕, 기숙사시설 등을 건설함으로써 시장의 성격에서 벗어나 좀더 신성한 이슬람교 연구 교육의 장소로 변모했다.

레기스탄 광장의 마드라사 건물들 가운데 처음 광장에 들어선 건물은 서쪽에 있는 울루그베그 마드라사(Ulugh Beg Madrasah)였다. 티무르의 손자인 울루그베그는 티무르제국의 4 술탄이었다. 수학자, 천문학자였던 그는 특별히 천문학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티무르제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409년부터 사마르칸트의 지배자가 그는 1417년부터 1420년에 걸쳐 마드라사를 건설했다. 마드라사는 직사각형 형태로 내부에 정사각형 모양의 안뜰이 있으며, 안에는 모스크와 강의실들이 있고 학생들의 기숙사 방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원래 울루그베그 마드라사는 2 건물로 귀퉁이에 형태로 개의 강의실이 있었다고 한다.

레기스탄의 마드라사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된 울루그베그 마드라사.

2개의 미나레트가 양쪽 끝에 있는 마드라사의 전면부는 광장을 향하고 있다. 이슬람 건축에서 표현되는 거대한 아치 형태의 출입구인 이완(Iwan) 이완을 둘러싸고 있는 직육면체 형태의 구조물인 피슈타크(Pishtaq) 육중한 규모는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위엄을 나타내기에 모자람이 없는 듯이 보였다. 이곳의 피슈타크 부분에는 울루그베그가 관심을 가졌던 하늘과 천문학을 표현한 듯이 별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후에 이곳 레기스탄의 마드라사와 비비하눔 모스크(Bibi Khanum Mosque) 사마르칸트의 건축물로부터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무굴제국의 타지마할과 비교하면 표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방법에도 변화가 있었던 하다. 이곳 건축물들의 이완과 피슈타크는 전체가 화려한 색감과 문양의 타일로 빼곡히 장식되어 있는 반면, 타지마할의 경우에는 흰색 대리석 벽에 주변으로 п 형태로 코란에서 따온 문구를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기법으로 상감장식하거나 대리석 가장자리에 다양한 문양을 흑백 또는 화려한 색상으로 상감장식해 전체적으로 흰색 대리석 건축물처럼 보였다.

울루그베그 마드라사에서는 처음에 이슬람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곧이어 천문학, 철학, 수학, 과학 여러 분야의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마드라사는 울루그베그 당시에 사마르칸트에서 교육의 중심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15세기에 중앙아시아 이슬람세계 최고의 신학대학 가운데 하나였다.

울루그베그 사후 티무르제국은 급격히 기울었고, 16세기 초에는 사마르칸트가 유목 우즈베크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곧이어 수도가 부하라로 옮겨가자 사마르칸트는 더욱 쇠퇴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사마르칸트의 총독으로 부임한 우즈베크족 야한그도슈 바하도르(Yalangtush Bakhodur) 울루그베그 마드라사 맞은편에 똑같은 하나의 마드라사를 건축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울루그베그 마드라사가 건립된 200 맞은편에 세워지게 것이 셰르도르 마드라사(Sher-Dor Madrasah, 1619-1636)이다.

울루그베그 마드라사가 건립된 후 200년이 지나 그 맞은편에 건립된 셰르도르 마드라사.
피슈타크의 윗부분에 떠오르는 태양을 등에 지고 하얀 사슴을 뒤쫓고 있는 호랑이 모자이크는 고대 페르시아의 미트라교 신앙 모티브를 표현하고 있는 바 종교적 건축물에 살아있는 생물의 묘사를 금지하는 이슬람 율법을 무시하고 있어 이슬람교도들의 반감을 샀으나 신기하게도 건물은 살아 남았다.
동행했던 마이클도 호랑이 모자이크가 신기했던지 카메라에 담고 있다.

피슈타크의 윗부분에는 떠오르는 태양을 등에 지고 있는 호랑이 마리가 하얀 사슴을 뒤쫓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호랑이 모자이크는 고대 페르시아의 미트라교 신앙 모티브를 표현하면서 종교적 건축물에 살아있는 생물의 묘사를 금지하는 이슬람 율법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건축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일정 부분 녹아 있다. 셰르(Sher) 호랑이(또는 사자) 나타내며, 셰르도르란호랑이 장식의 의미이다.

야한그도슈 바하도르는 티무르제국의 황금기를 이룩했던 울루그베그를 많이 의식했던 모양이다. 규모와 화려함에서 울루그베그 마드라사에 뒤지지 않는 완전히 닮음 꼴의 건축물을 울루그베그 마드라사 맞은편에 대칭으로 구현하고자 하였으나, 실제 지어진 마드라사에는 가지 차이가 생기고 말았다. 2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울루그베그 마드라사는 건축물 자체의 무게로 인해 땅속으로 가라앉아 광장 자체의 높이가 2미터 가량 융기한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났다. 결과, 새로 건축된 마드라사는 높이가 높아지고 말았다.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실제 셰르도르 마드라사는 어른 키보다 높은 위에 지어져 있었다. 그러나 마드라사들의 규모가 너무 커서였는지 눈으로는 이러한 차이들을 쉽게 인지할 없었다.

셰르도르 마드라사가 완공되고 10년이 지난 , 야한그도슈 바하도르는 카라반사라이(caravanserai) 있던 레기스탄 광장의 북쪽에 하나의 마드라사를 건립했다. 열성적인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셰르도르 마드라사에 대한 반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틸랴카리 마드라사(Tilya-Kori Madrasah, 1646-1660) 이름의 새로운 마드라사는 단순히 기숙 교육기관이 아니라 마스지드(이슬람교 사원) 역할도 수행했다. 이층 구조로 이루어진 전면부는 개의 마드라사가 ㄷ자로 닫힌 공간을 구성하도록 설계되었다.

광장의 북쪽에 가장 늦게 건립된 틸랴카리 마드라사.
세 마드라사는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지만 광장이 마치 세 마드라사가 둘러싸고 있는 안뜰처럼 느껴진다.

전면부의 끝에는 키가 낮은 미나레트가 있고, 안쪽에는 회랑과 함께 기숙사 방들로 둘러싸인 넓은 안뜰이 있다. 안뜰의 왼쪽에 마스지드의 코발트블루 형태의 타워가 보인다. 번째 건축물은 서로 위엄을 자랑하며 뽐내고 있는 앞의 마드라사를 안정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주고 있는 했다.

틸랴카리 마드라사의 돔 천장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금도금 장식. 틸랴카리란 말 자체가 “금박으로 된”이란 뜻이다.
방문객들이 화려한 금박 장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직접 카메라에 담고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금색의 화려하고 호화로운 내부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황금으로 도금된 천장과 기도실 미흐라브(mihrab)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뒤로 젖힌 화려함에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거나 모습을 담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틸랴카리란 이름도금박으로 이란 뜻으로 금박의 화려한 내부장식에서 이름이었다.

이들 마드라사의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일부분은 갤러리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많은 부분이 수공예 작업실 판매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자기그릇, 옷감, 양탄자 다양한 물건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판매되고 있었지만, 이들 마드라사의 안뜰은 마치 어느 바자르의 구석처럼 느껴졌다. 마드라사들이 한창 역할을 하고 있을 때의 분위기를 느낄 있는 것은 정작 많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았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곳 레기스탄에서 남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대한 정복자 티무르가 영면하고 있는 구르아미르(Gur-e Amir) 향했다.

마드라사의 안뜰로 들어가는 입구. (왼쪽); 기숙사동이나 강의동으로 둘러싸인 마드라사의 안뜰 모습. (오른쪽)
마드라사 안뜰의 건물들은 지역의 수공예 상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품질을 확인할 수 없으며 시장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 마드라사 본래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유의 푸른색 도자기를 파는 판매대.
다양한 무늬의 옷감을 파는 판매대.
양탄자를 판매하고 있는 판매대.

위대한 정복자 티무르가 영면하고 있는 , 구르아미르

구르(Gur) , 아미르(Amir) 또는 지배자를 뜻한다. 구르아미르는 왕의 묘란 뜻이다. 역사적으로는 흔히 아미르 티무르(Amir Timur) 알려져 있으며, 유럽에서는 보통 태멀린(Tamerlane)이라 불리던 그를 동시대인들은 신의 재앙또는 세계의 정복자 불렀다. 방금 레기스탄 광장에서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들에게 압도당하다 와서인지 위대한 정복자의 영묘에 대한 첫인상은 조금은 소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서니 영묘 치고는 웅장한 편이었으며 티무르의 자존심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르아미르 단지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은 14세기 무하마드 술탄(Muhammad Sultan) 의해 건설되었다.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부분은 마드라사와 호나코(khanaka) 기단, 단지의 정문, 개의 미나레트 가운데 하나의 일부분뿐이다. 영묘 자체는 티무르의 왕위 계승자로 정해져 있던 가장 사랑하는 손자, 무하마드 술탄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티무르가 1403년에 건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티무르 자신은 영묘가 완성되는 것을 살아서 보지 못하고, 그의 다른 손자 울루그베그가 완성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차양시설이 된 한쪽 공간에 보존되어 있다.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자 건물터인 듯 한 곳이 남이 있다.
구르아미르 경내의 모습.

티무르는 자신을 위해서는 샤흐리삽스(Shahrisabz) 아크사라이 궁전(Ak-Saray Palace) 좀더 작은 무덤을 만들어놨었다. 그러나 1405 ()나라를 정벌하려고 떠났다가 오트라르(Otrar)에서 병사하면서 그의 시신은 이곳으로 돌아와 묻혔다. 샤흐리삽스로 가는 고개가 눈에 파묻혔기 때문이었다. 사랑했던 손자를 위해 자신이 마련했던 무덤에 자신이 묻힌 것만이 아니라 티무르 왕조의 왕들이 대대로 이곳에 묻혔다. 그의 곁에는 아들 로흐(Shāh Rokh) 미란 (Miran Shah), 손자 울루그베그와 무하마드 술탄, 그리고 티무르의 스승인 사이드 바라카(Sayyid Baraka) 함께 묻혀 있다.

구르아미르 입구 정면의 모습. 짙은 청색 타일로 장식된 이완과 피슈타크가 인상적이다.
구르아미르의 전경. 세로로 줄이 깊게 난 멜론 모양의 돔 지붕 건물이 티무르가 영면하고 있는 영묘 건물이다.

정문의 출입구 이완을 통과해 들어오면 레기스탄의 셰르도르 마드라사에서 봤던 세로로 줄이 멜론 모양의 돔이 지붕 가운데 있는 단일 건물과 마주한다. 세로 줄의 홈이 깊고 촘촘하면서 단아한 모양이 이곳의 엄숙한 분위기에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건물 전면부에는 푸른색의 타일 위에 하얀색으로 기하학적 문양과 함께 코란 문구들이 새겨져 있다. 바로 아래에 티무르의 능묘가 있는 독립된 방이 위치한다.

내부에 들어서자 천장이 높고 금색의 다양한 문양으로 장식된 벽들로 둘러싸인 커다란 방이 나왔다. 실내에는 약간의 간접 조명이 있어 벽을 장식하고 있는 각종 문양을 자세히 감상할 있도록 배려하고 있지만, 채광이 되어 비교적 밝아서 내부는 맨눈으로 있을 정도였다. 아래 가운데 자리에 티무르의 흑옥석관이 자리하고 있고 주변에 그의 아들과 손자들의 관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후 무굴제굴의 타지마할(Taj Mahal)에서도 있는 것처럼 사실 관들은 진짜가 아니다. 실제 관들은 이와 비슷한 크기로 좀더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4m 아래 지하에 같은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티무르의 영묘 건물이며, 돔 바로 아래 안쪽에 티무르가 누워 있다.
이슬람 건축에서 내부 천장 부분을 장식하는 기법으로 사마르칸트의 건축물에서도 두루 나타나고 있는 무하르나스(Muqarnas).
다른 무덤들과는 색깔이 다른 가운데 흑옥석관이 티무르의 무덤이며, 울루그베그가 설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거대한 흑옥은 1420년대 모굴리스탄 정벌에서 울루그베그가 획득한 전리품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구르아미르의 무덤 배치도

17세기 말부터 사마르칸트는 오랜 기간에 걸쳐 쇠퇴기를 겪게 됐다. 수도는 부하라로 옮겨간 지가 이미 상당 기간이 흘렀고 실크로드도 위대했던 도시를 비켜가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1941 () 소련의 고고학위원회에서 발굴하여 새롭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당시 한번 티무르의 관이 개봉되었다. 당시 발굴 책임자였던 소련의 고고학 인류학자였던 게라시모프 (Mikhail Mikhaylovich Gerasimov) 티무르의 두개골로부터 그의 얼굴 모습을 재현해냈다. 또한 발굴로 172cm 티무르가 다리를 다쳐 부자유스런 장애를 안고 살았다는 것과 그의 손자 울루그베그가 머리가 잘려 죽었다는 설이 사실로 밝혀졌다.

부분적으로 파괴된 채로 19세기에 촬영된 구르아미르의 모습 (왼쪽); 20세기에 복원된 구르아미르의 모습 (오른쪽) RadioFreeEurope/RadioLiberty 사진갤러리.
1941년 구(舊) 소련의 게라시모프가 티무르의 두개골에서 복원한 티무르의 얼굴 모습. 몽골초원의 몽골인에 가까운 모습이다. (왼쪽); 구르아미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티무르의 초상화. 좀더 서구화 혹은 페르시아화 된 모습을 보인다. (오른쪽)

티무르는 1336 사마르칸트에서 남쪽으로 80km 떨어진 케쉬(Kesh, 현재 샤흐리삽스)에서 이슬람화된 몽골 씨족의 하나인 바를라스(Barlas) () 일원으로 태어났다. 티무르의 집안은 예전엔 명문가였으나 그가 태어날 즈음엔 이미 몰락한 유목민 일가에 불과했다. 양과 말을 약탈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던 그는 마침내 중앙아시아의 가장 비옥한 지역을 기반으로 30년에 걸친 정복사업을 통해 북쪽으로는 러시아로부터 남쪽으로 인도, 동쪽은 중국 변경으로부터 서쪽으로는 소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지역을 정복했다. 30년의 정복활동 수도 사마르칸트에 머문 것은 2~3년에 불과했다.

티무르의 영토와 티무르의 정복활동을 설명하는 지도

티무르는 가혹한 정복자였다고 한다. 그의 치세에 중앙아시아, 특히 사마르칸트는 번영을 누렸지만,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델리 밖의 아랍, 페르시아와 인도의 다른 도시들은 철저히 유린되고 파괴되었다. 이들 많은 정복지의 주민들이 처참하게 학살되어 그의 정복전쟁으로 당시 세계 인구의 5% 이르는 17백만 명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신의 행위로 인해 자신이 영면하고 있는 잠자리가 편치 않았는지, 티무르의 무덤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전한다. “내가 죽음에서 일어설 때면 세상은 두려움에 떨게 것이다.”

비비하눔 모스크

다음으로 우리는 사마르칸트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며, 15세기에 이슬람세계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모스크였던 비비하눔 모스크(Bibi Khanum Mosque) 향했다. 레기스탄에서 북동쪽으로 700m 떨어져 있으며 아프로시압으로 가는 길가에 있다. 걸어서 이동할 수도 있는 거리였지만 바딤의 차량으로 이동하던 우리는 시압바자르(Siab Bazaar) 북쪽의 길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서 이동했다.

시압바자르 북쪽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비비하눔 모스크를 향해 가는 마이클과 바딤. 왼쪽 도로 건너편이 아프로시압이다. 공중 다리를 건너가면 하즈라트 히즈르 모스크(Hazrat Hyzr Mosque)를 만날 수 있다.

비비하눔 모스크와 시압바자르 앞길은 넓고 포장된 인도로만 이루어진 길이었다. 아프로시압 방향에서 시압바자르 입구를 지나면 바로 비비하눔 모스크에 이르게 되는데, 인도의 포장 상태와 관리 상태가 상당히 좋은 것으로 보아 지역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느낄 있었다. 입구에는 이완과 피슈타크로 구성된 거대한 규모의 출입구가 위압감을 주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시압바자르 입구에서 바라본 비비하눔 모스크.
비비하눔 모스크 입구의 거대한 이완과 피슈타크의 규모는 티무르가 이 모스크 건립에 들인 의지와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모스크 내부 저 멀리 보이는 본당 건물의 이완과 피슈타크 역시 매우 큰 규모여서 중심 돔을 가리고 있어 볼 수가 없다.

티무르는 거대한 건축물에 자신이 사랑했던 왕비의 이름을 붙여 비비하눔 모스크라 명명했다. 그녀의 이름은 사라이 물크 하눔(Saray Mulk Khanum)이었다. 사마르칸트의 많은 건축물이 그런 것처럼, 모스크에도 처음 모스크의 건축이 이루어질 당시의 아름답지만 슬픈 전설이 전하고 있다. 전하는 전설은 조금씩 다른 버전이 있어 내용이 조금씩은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인 내용은 비슷하다.

티무르가 사랑했던 비비하눔이란 왕비가 인도 원정을 마치고 돌아올 티무르를 깜짝 놀래키려고 거대한 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티무르가 돌아오기 전에 완공시켜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던 차에 왕비를 몰래 사랑하던 건축가가 왕비에게 자신에게 입맞춤을 준다면 완공시켜주겠다고 했다. 망설이던 왕비는 이를 허락하고 건축가와 입맞춤을 하게 되었는데 왕비의 볼에 건축가의 입맞춤 자국이 남게 되었다. 돌아온 티무르는 거대한 모스크를 보고 기뻤지만, 왕비의 얼굴에 남은 입맞춤 자국을 발견하고 분노한 티무르는 건축가를 사형시키고 왕비에게는 차도르를 쓰도록 했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왕비가 모스크의 미나레트에서 뛰어 내려 죽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슬픈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티무르가 인도 원정을 마친 것은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였고, 사라이 물크 하눔도 오십 중반을 넘기고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는데 젊은 건축가가 사랑에 빠져 그런 모험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그러나 더욱 결정적인 것은 사실 거대한 모스크의 건축을 지시한 사람은 다름 아닌 티무르 자신이었다. 인도 원정을 마친 1399 티무르는 이슬람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사원을 짓겠다는 결심을 세우고 정복지 곳곳에서 수백 명의 건축가, 장인 등을 동원해 모스크를 짓게 했으며, 1404 다른 원정을 마치고 티무르가 사마르칸트에 돌아왔을 모스크의 건축은 거의 끝나가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티무르는 완성되어 가던 모스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같다. 즉시 많은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수정 작업은 중심 돔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건축 초기부터 구조적 문제점이 드러나 여러 차례의 재건축 또는 보강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불과 미흐라브 위의 돔에서 벽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모스크의 거대한 규모는 당시의 건축 기술로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이러한 기술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건축을 서두르면서 결정적 문제에 봉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가로 167m, 세로 109m 직사각형의 담장 안에 비스듬히 앉은 대형 마스지드가 지어졌다. 주변을 압도하며 35m 높이로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는 입구를 들어서면 중세 이슬람 건축의 특징적인 안뜰을 마주하게 된다. 안뜰 건너 맞은편에 정사각형의 기초 위에 40m 높이의 중심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돔은 모스크의 돔으로는 가장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거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건물의 전면이 깊이 파인 이완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피슈타크로 가려져 있어 돔은 안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비비하눔묘에서 바라 본 비비하눔 모스크의 모습.
본당 건물의 중심 돔이 거대한 피슈타크의 등 뒤에 숨어 있다.

상대적으로 좀더 작은 규모의 돔을 머리에 이고 있는 나머지 개의 돔은 좀더 아담한 규모의 이완이 전면부를 장식하고 있으며 남쪽과 북쪽에서 안뜰의 중앙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원래 안뜰 내부에는 400개의 대리석 기둥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 7.2m 높이의 개방된 회랑이 있었으나 지금은 수가 없다. 바깥 담장의 구석에 있는 미나레트는 복원이 되어 있으나, 입구의 피슈타크와 중앙 건물의 피슈타크에 있었다는 개의 미나레트는 아직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모스크 외부의 남쪽에서 볼 수 있는 모스크의 양 측면에 설치된 두 개의 돔. 남쪽으로 이어지는 상가의 첫 가게에서 잠시 차와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가졌다.
비비하눔 모스크에서 레기스탄으로 이어지는 길은 이렇게 인도로 조성되어 있고 길 양 편에는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매력적인 상가로 만들어졌다기 보다 관광객들에게 사마르칸트 또는 우즈베키스탄도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처럼 보였다.
1905 년과 1915 년 사이에 세르게이 프로쿠딘 - 고르스키 (Sergei Mikhailovich Prokudin-Gorskii) 가 촬영한 사진으로 1897 년 지진으로 무너진 비비하눔 모스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지금은 사라진 회랑의 모습도 볼 수 있다 .

그리고 안뜰의 중앙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대리석 덩어리들로 만들어진 거대한 코란 받침대가 놓여 있다. 이것은 14세기 티무르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다. 혹은 할아버지 티무르에 대한 존경의 표현으로 손자 울루그베그가 설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티무르가 현재의 이라크 땅에 있는 쿠파(Kufa) 정복하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코란 필사본을 손에 넣어 사마르칸트로 가지고 왔으며 코란 받침대에 놓아 두었다고 전한다.

티무르가 사마르칸트로 가져온 코란은 우스만 으로 알려진 최종판으로 651 3 칼리프 우스만 이븐 아판(Uthmān ibn ‘Affān) 의해 메디나에서 만들어졌으며, 지방마다 다르게 읽혀 오던 것을 대체하는 표준 정본으로 선포되었다. 모두 6본만이 편찬되었으며, 티무르가 가져온 코란은 바로 우스만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필사본이었으며, 현재는 타슈켄트 ()시가지에 있는 하즈라티 이맘 광장(Hazrati Imam Complex) 내의 바라크칸 마드라사(Barak-Khan Madrasah) 보관 중이다.

모스크 안뜰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코란 받침대.

사라이 물크 하눔은 티무르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그녀의 남편은 투글루크의 점령에 저항하기 위해 티무르와 손을 잡았으나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대립하게 발흐(Balkh) 지방호족 아미르 후사인(Amir Husayn)이었다. 1370 티무르는 발흐를 점령한 , 후사인을 처형하고 그의 부인들을 모두 차지했으며 사라이 물크 하눔도 이들 가운데 명이었던 것이다. 사라이는 티무르보다 5~7살가량 젊었으며 매우 아름다웠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녀가 티무르의 1부인이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가 (Khan) 딸이자 징기스칸의 직계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라이는 칭기스탄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Chagatai) 중앙아시아에 건립한 몽골왕국 차가타이칸국(Chagatai Khanate) 마지막 칸이었던 카잔 이븐 야사우르(Qazan Khan ibn Yasaur) 딸로 태어났다. 따라서 사라이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눔(Khanum, 칸의 )이란 명칭으로 불렸다. Bibi 귀부인 또는 어머니를 뜻한다. 징기스칸 몽골제국의 부활을 꿈꾸었으며 스스로를 징기스칸의 계승자로 생각했으나 징기스칸의 직계후손이 아니었기에 스스로를 칸이라 칭할 없어 아미르라 칭하는 것으로 만족할 밖에 없었던 티무르는 징기스칸의 후손인 사라이 물크 하눔과 결혼함으로써 구레겐(Guregen, 부마, 駙馬) 칭호를 주장할 있었다. 그렇게 원하던 징기스칸 가문의 일원이 있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외관은 복원되었지만 건물들 내부는 고증의 어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재원부족 문제인지 수는 없으나 전혀 복원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뭔가가 아직은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며 비비하눔 모스크의 출구를 나와 건너편으로 향했다. 울타리에 둘러싸인 오각형의 빈터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광장이라고 해야 공간이 있고, 제일 안쪽에 자그마한 건물 하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복원이 진행되기 전에 심하게 훼손된 상태로 촬영된 비비하눔 모스크의 모습인 것으로 보인다.
모스크의 본당 건물 내부는 벽만 서 있는 상태였다.

18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규모의 마드라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대한 고고학 발굴에서 전통적인 안뜰을 갖춘 중세 마드라사의 배치가 확인되었었다. 마드라사는 10~12세기의 기념비적인 건물이 있었던 곳에 건축되었으며, 입구는 폭이 60m, 아치의 폭도 20m 달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마드라사는 사라이 물크 하눔이 지었으며, 원래의 입구는 건너편의 비비하눔 모스크의 입구보다 높아 티무르를 화나게 했다고 한다. 티무르의 명령으로 결국 입구는 낮게 다시 지어졌다. 입구의 양편에는 지름이 6m 이르는 미나레트가 있었으며, 미나레트에는 부분적으로 10~12세기 벽돌이 사용되었었다. 마드라사는 1740 이란 나디르 (Nādir Shāh) 왕의 군대가 침공했을 파괴되었다

그리고 이곳의 동쪽에는, 입구에서 제일 안쪽에 있는 건물은 비비하눔묘(Bibi Khanum Mausoleum) 사라이 물크 하눔의 가족 공동묘지이다. 묘지에는 사라이 자신만 묻혔던 것이 아니라, 당시 왕가의 다른 여인들도 묻혔다. 다른 설에 의하면, 묘지는 사라이 물크 하눔의 어머니와 왕가의 다른 여인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비비하눔 영묘 건물. 전면의 이완과 피슈타크에 푸른색의 타일로 아무런 정식이 되어 있지 않은 점이 특이했다.
영묘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의 단순한 모습과는 달리 문과 벽들이 여러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지하 묘실의 모습

코란 문구로 장식된 원통형 구조물 위에 코발트블루의 돔이 얹혀져 있는 자그마한 건물의 지하로 내려가면 대리석의 묘실이 있다. 그리고 묘실에는 석관에 담긴 3기의 여성 무덤이 있다. 건물 내부의 벽과 천장에는 다양한 장식의 문양과 함께 모자이크 패널과 그림으로 꾸며져 있으며, 그림들은 사후 깨끗한 사람들이 가게 된다는 천국의 정원이 양식화된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다. 비비하눔 모스크의 건물들처럼, 영묘 건물도 대지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제국이 중앙아시아를 점령하고 이 지역을 투르케스탄(Turkestan)이라 불렀으며, 첫 투르케스탄 총독으로 부임했던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Konstantin P. von Kaufman) 장군에 의해 1871~72년에 걸쳐 지역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6권의 사진첩이 제작되었다. 이 가운데 고고학 분야에 들어 있던 비비하눔묘의 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스.
시압바자르 출입구의 모습. 모스크에서 나오면 북쪽으로 연이어 시압바자르가 위치하고 있다.

울루그베그 천문대

 

아직 해가 지지는 않았지만 해가 때까지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는 않았음을 느낄 있었다.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울루그베그 천문대(Ulugh Beg Observatory)까지 둘러보기로 하고 서두르기로 했다. 천문대는 우리가 다시 타슈켄트로 돌아가는 길가에 있는 추반아타(Chupanata)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천문대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가장 먼저 별이 빛나는 우주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울루그베그의 () 만나게 된다. 울루그베그는 1420년대에 지름 48m, 3 높이의 원형 건물에 육분의, 상한의, 해시계 등이 갖춰진 세계 최고의 천문대를 건설했다. 그는 이곳에서의 관측한 것을 바탕으로 1437 992 별의 위치를 밝힌 지디이 술타니(Zīj-i Sultānī)라는 당대 최고의 천문도를 발간했고,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eos) 이래 12세기 동안 바뀌지 않았던 천문 상식들을 수정했다. 그는 1년이 365 6시간 10 8초라고 계산해 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관측 결과와 1분의 차이도 나지 않는 정확한 계산이었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을 천문대가 있는 추반아타 언덕을 지키고 있는 울루그베그의 상(像).
인도 무굴제국을 세운 바부르(Babur)가 보았다고 묘사한 3층 높이의 울루그베그 천문대 모습. 그는 천문대 건물이 지름 46m, 높이 30m의 둥근 건물로 바깥에 광택이 나는 타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했다.
천문대 내부를 보여주는 그림. 바부르가 중앙홀에 거대한 관측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 것이 현재는 지하 부분의 흔적만 남아 있는 거대한 규모의 육분의였던 것으로 보인다.

1405 티무르의 사망으로 중국 정벌도 취소되었지만 타무르가 자신의 후계자를 명확히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티무르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내부 투쟁이 발발했다. 어린 울루그베그도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울루그베그의 아버지, 로흐가 마침내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으나, 자신의 아버지인 티무르와는 달리 제국의 수도를 자신이 총독으로 있던 헤라트(Herāt) 옮겼다. 그리고 사마르칸트는 자신의 장남인 울루그베그에게 주어 다스리게 했으며, 울루그베그는 트란스옥시아나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420년대 중반까지도 울루그베그의 군대는 모굴리스탄 일부 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했지만, 그는 점차 학문적 연구와 예술 후원에 몰두해갔다. 1420년에 레기스탄에 마드라사를 건립한 , 그는 뛰어난 학자들이 이곳에서 연구할 있도록 초빙했다. 한창일 이곳에는 60~70명의 천문학자들이 연구 활동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마드라사에서의 천문학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천문대 건립에 착수하여, 1429년에 완공했던 것이다.

1447 아버지 로흐가 죽자, 그는 왕위를 이어받았다. 왕좌에 오른 겨우 2년이 지났을 무렵, 이웃 경쟁국과의 전투에서 차례 패한 그는 자신의 아들 압둘라티프(Abdal-Latif Mirza) 의해 재판에 넘겨졌다. 울루그베그는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처벌로 메카 순례를 판결 받고 길을 떠났으나, 사마르칸트 외곽에서 아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참수당했다.

울루그베그가 죽은 , 천문대는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과학자들은 모두 쫓겨났다. 수세기 동안 이곳은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져 갔고 천문대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908 () 소련의 고고학자 바실리 비야트킨(Vassily Vyatkin) 의해 발견된 육분의를 지탱했던 지하 부분과 천문대의 기초뿐이다. 언덕의 정상에 육분의의 흔적과 작은 박물관이 있는데, 박물관에 전시된 관측기구 모형과 그림으로 당시를 추측해 있을 뿐이다.

지금 남아있는 육분의의 흔적.
1970년에 건립된 울루그베그 천문대 박물관. 울루그베그의 「지디이 술타니」 아랍어 원고 복제품을 비롯한 각종 저작물과 관측기구, 천문대 축소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내부의 모습. 각종 관측기구와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다.

울루그베그는 티무르제국의 4 황제로 많은 일들을 했지만 자신의 과학적 업적으로 가장 기억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세운 마드라사는 이슬람 세계에서 학문의 중심이 되었고 그가 죽은 후에도 영향력은 널리 퍼져나갔다. 그의 역작들이 유럽에도 마침내 소개되었지만 그것은 17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하지만 울루그베그의 저작들이 알려질 때까지 유럽의 천문 연구에도 진전이 오면서 유럽의 천문학에 미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가 이슬람세계와 인도 무굴제국에 미친 영향력이 훨씬 중요했다고 있다.

고대와 중세를 거쳐 동서 무역로의 가운데에 위치하여 실크로드의 중심 도시로서의 부침을 겪어 왔을 사마르칸트는 도시가 누렸을 최전성기여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14~15세기의 티무르제국 영광 속에 박제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소리까지 느끼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음에 아쉬움을 느껴졌다. 어느덧 해도 지기 시작하고 석양이 물들어 가고 있었다. 길이 우리는 다시 서둘러 길을 떠나기 위해 바담의 차에 몸을 실었다.

 

'세계여행 > 우즈베키스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테르메즈, 고대 서역 불교의 중심지  (0) 2020.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