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라바스티, 붓다가 25 안거를 보낸 금강경의 무대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고려대장경판 金剛般若波羅蜜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때에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는데, 비구들 천이백오십인과 더불어 계시었다.”

러크나우(Lucknow)까지는 국내선 항공으로 이동한 , 차량을 이용해 처음 슈라바스티(Śrāvastī, 팔리어 Śāvatthī, 舍衛城) 찾아가는 길은 멀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것이 가장 이유였다. 그래도 가는 내내 가슴 벅찬 감정이 좀체 가라앉질 않았다. 금강경(金剛經) 무대가 되고 있는 사위국(舍衛國) 또는 사위성(舍衛城) 바로 이곳 슈라바스티이다.

「반야심경」과 함께 널리 독송되고 있는 「금강경」은 대승불교 철학의 핵심인 공사상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어 교종이나 선종을 막론하고 대승불교권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원래 이름은 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인데, 우리가 주로 보고 있는 것은 쿠마라지바(Kumārajīva, 鳩摩羅什) 한역한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으로 흔히 줄여서 「금강경」 또는 「금강반야경」이라고 부른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대승권에서는 「금강경」이 붓다에 의해 이곳 사위성에서 설해졌다고 믿는다. 

왕사성과 기원정사가 위치했던 현재의 사헤트-마헤트 지역 지도

또한 슈라바스티는 45년의 교화 기간 붓다가 가장 오랜 기간 머문 곳이기도 하다. 슈라바스티는 당대 강국이었던 코살라(Kosala, 拘薩羅) 국의 수도로 파세나디(Pasenadi, 波斯匿) 왕이 다스리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붓다는 25번의 안거(安居, vassa) 보냈다 (24 또는 26번이라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붓다의 많은 설법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현재 전하는 경전의 80% 가량이 바로 이곳 슈라바스티에서 설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5세기 상좌부 대주석가이자 학승이었던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 저자 부다고사(Buddhaghosa, 佛音) 슈라바스티가 57 세대가 거주하던 아름다운 도시였다고 묘사했으며 대승반야 중관사상의 대가인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 슈라바스티가 90 명이 사는 당대 6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고 것으로 보아 당시 떠오르던 거대 상업도시 가운데 하나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복원된 현재의 기원정사의 모습
기원정사는 ASI에서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으며 비교적 고요함

슈라바스티가 나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 있던 하나의 이유는 신라의 수도 서라벌(徐羅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란 이름이 바로 슈라바스티에서 왔다는 설명을 오래 전에 책에서 읽을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당나라의 현장() 법사는 귀국하여 자신이 인도에서 가져온 많은 경전을 번역했다. 그는 산스크리트(Sanskrit)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하여, 쿠마라지바가 사위성이라고 번역했던 슈라바스티를 실라벌성(室羅筏城)이라고 음역하였다. 실라벌(室羅筏) 서라벌(徐羅伐) 되었다는 주장이었고, 서울은 서라벌(徐羅伐) 줄여서 부르던 서벌(徐伐)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매우 흥미로운 주장이었고, 사실이라면 신라인들이 그렇게 동경했던 슈라바스티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지 않을 없었다.

우리 일행이 슈라바스티에 도착한 것은 이미 어둠이 낮게 깔린 뒤였다. 슈라바스티는 당대 6 도시 가운데 하나로 마가다(Magadha, 摩揭陀) 국의 라지기르(Rajgir, 고대 Rājagaha, 王舍城) 밧지연합(Vajjian Confederacy, 跋祇國) 바이살리(Vaishali, 혹은 Vesāli, 毘舍離)보다도 크게 번성했던 도시였다. 그러나 지금은 언뜻언뜻 차창 밖으로 보이는 집이나 가게의 모습에서 영광의 모습이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그저 작은 시골 벽촌의 모습이었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늦은 식사를 하는 마는 하고는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이고 잠을 청했다.

기원정사에서 붓다의 주 거처였던 간다쿠티의 모습

오랜 기간 교단의 상징이 되어 기원정사

우리는 아침 일찍 서둘러 슈라바스티에서 가장 중요한 곳인 기원정사(祇園精舍, Jetavana Vihara) 향했다. 아직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붉은 벽돌 유적들 사이로 아주 엷은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안개 때문인지 엄숙한 분위기가 붓다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공간을 무겁게 감싸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붓다가 거처했던 곳으로 여겨지고 있는 간다쿠티(Gandhakuī)에서 예를 표하고 아직도 붓다의 체취가 군데군데 배어있음을 느끼며 천천히 맞은편 사원 터로 자리를 옮겨 간다쿠티를 바라보며 자리를 잡았다. 샨텀도 걸음 떨어진 곳에 앉아 명상에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쪽에서는 동남아에서 듯한 스님 분이 우리보다 앞서 이곳에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명상에 잠겨 있었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듯한 스님 한 분이 우리보다 먼저 와 미동도 하지 않고 명상에 들어 있음
한 무리의 스님들이 향실에 꽃을 올린 후, 간다쿠티에 자리를 잡고 주변 청소를 하고 있음

고대도시 슈라바스티의 영역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현재 지역은 사헤트-마헤트(Saheth-Maheth)라고 알려져 있다. 사헤트는 기원정사의 유적이 있는 지역을 가리키며, 마헤트는 고대 사위성 유적이 위치한 곳을 가리킨다. 이곳의 기원정사는 라지기르의 죽림장사(Venuvana Vihara, 竹林精舍) 함께 2 정사로 일컬어진다. 기원정사는 기수급고독원정사(祇樹給孤獨園精舍) 줄임말로, 당시 코살라국의 수도 사위성에 있던 제타왕자(Prince Jetakumāra, 祇陀太子) 소유의 숲에 급고독(給孤獨, Anāthapiṇḍika) 장자(長者) 조성해 보시한 승원이라는 뜻이다.

슈라바스티에는 기원정사 이외에도 녹자모(鹿子母, Migāramāta) 별명으로 알려진 비사카(Visākhā, 毘舍) 기증한 동원정사(東園精舍, Pubbārāma) 파세나디왕이 비구니를 위해 기증한 것으로 추정되는 왕원정사(王園精舍, Rājakārāma) 왕과 장자들 그리고 헌신적인 여인들의 도움으로 조성된 많은 승원들이 있었다. 가운데 가장 중요했던 곳은 기원정사와 동원정사로 당시 바라문교와 자이나교 외도(外道)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거대 도시에서 붓다의 가르침이 뿌리를 내리고 널리 퍼져나가는 기반이 되었다. 붓다는 기원정사에서 19안거를 보냈고 동원정사에서 6안거를 보낸 것으로 전한다. 저명한 팔리어학자였던 우드워드(Frank Lee Woodward) 의하면, 니까야(Nikāya, 阿含) 경장(經藏) 가운데 모두 871개의 경이 슈라바스티에서 설해졌으며, 가운데 844개가 기원정사에서, 23개가 동원정사에서, 그리고 4개가 슈라바스티 교외에서 설해졌다고 한다.

급고독장자는 원래 슈라바스티 출신의 대부호로 자비로운 마음으로 외롭고 늙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보시를 하였다 하여 붙여진 존칭이며, 원래 이름은 수다타(Sudatta, 須達多)였다. 수다타는 갠지스강을 오르내리며 무역업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마가다국의 왕사성에 있는 친척집에 갔다가 붓다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분이 출현했다는 말을 듣고 감격하여 바로 붓다를 찾아가 설법을 듣고는 붓다에게 귀의하고 재가신도가 되었다. 그리고는 슈라바스티로 와서 설법해 것을 청하고 붓다의 승낙을 받았다.

기원정사 내부 배치도

슈라바스티로 돌아와 붓다와 제자들이 머물 장소를 물색하던 수다타는 제타왕자 소유의 숲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여 매입을 제안했다. 제안을 거절하던 왕자는 거듭되는 수다타의 요청에 부자인 수다타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기고 장난 삼아 전체를 금화로 뒤덮으면 팔겠다고 했다. 그러자 수다타는 수레에 금화를 가득 싣고 숲에 금화를 깔기 시작했다. 수다타의 결의와 정성에 감복한 제타왕자는 숲을 바치고 정사를 짓는데 필요한 목재까지 내놓았다고 한다. 수다타는 많은 재산을 동원해 사리불(舍利弗, Sāriputta) 조언을 들으며 건물을 세우고, 우물을 팠으며 정원을 가꾸어 붓다에게 바쳤다. 이곳이 경전에서 제타숲에 위치한 급고독장자의 정사(Jetavane Anāthapindikassa ārāma)라고 언급되는 곳이다.

급고독장자가 제타숲을 동전으로 덮다. 인도 마디아프라데시주 바르후트(Bhārhut) 스투파의 부조에 브라미 문자로 새겨짐. (왼쪽); 기원정사에서 붓다가 즐겨 머물던 세 곳을 나타냄. 산치대탑 부조. (오른쪽)

당시 수다타는 동산 가운데에 붓다가 머물 전각 간다쿠티를 지었다고 하는데, 5세기 슈라바스티를 방문했던 동진(東晋) 출신 법현(法顯) 기록에 의하면 간다쿠티는 원래 7 목조건물이었으며 화재로 소실된 2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고 했다. 간다쿠티란 내음이 그득한 향실(香室) 의미하며, 수많은 신자들이 붓다가 오랜 시간 머문 장소를 찾아 붓다를 친견하듯 전단향을 올리면서 불리게 이름이 아닐까 싶었다. 혹은 붓다가 마야부인에게 설법하기 위해 도리천(利天) 머무는 동안 붓다를 너무 그리워하던 코살라국의 파세나디왕이 전단향나무로 붓다의 모습을 조성해 향실에 봉안해 놓고 예배했다고 해서 향실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지금도 사원2(Temple 2) 명명된 간다쿠티에서는 주변을 청소하고 향을 올리는 신도들을 끊임없이 있다.

도리천에서의 설법 후 붓다의 삼도보계강하(三道寶階降下) 장면.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의 명으로 조성된 산치대탑의 부조에서는 붓다가 보리수로 표현됨; 붓다가 마야부인에게 설법하기 위해 도리천에 올라간 동안 파세나디왕이 간다쿠티에 전단향으로 만든 붓다의 형상을 봉안한 것이 불상의 시초라고 불국기(佛國記)에 기록한 법현의 주장은 고고학적 사실에 비추어 설득력이 떨어짐.

법현이 찾았을 당시, 슈라바스티도 운이 다했는지 거주민이 2백여 가구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쇠퇴해 있었다. 코살라국은 파세나디왕의 아들인 비두다바(Vidūdabha, 毘瑠璃) 시대에 이미 마가다국에게 멸망되었다. 법현은 기원정사가 사위성 남문에서 1,200 거리에 있다고 적었으며, 기원전 3세기에 이곳을 찾은 아쇼카왕이 세웠다는 개의 석주를 봤다. 꼭대기에 바퀴 모양의 조각이 있는 왼쪽 석주와 황소 모양의 조각이 있는 오른쪽 석주는 2백여 년이 지난 7세기 현장이 다시 이곳을 찾았을 떼에도 여전히 자리에 있었음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기록되어 있다. 현장은 석주의 높이가 70 척이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현장이 찾은 사위성에는 주민은 있었으나 이미 황폐해져 있었다. 가람은 수백 있었으나 무너진 곳이 대단히 많았으며, 승도의 수는 적었고 정량부를 학습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힌두교 사원은 1백여 군데였는데 외도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고 것으로 보아 점점 세력을 확장하는 힌두교의 위세에 눌려 불교는 중심부로부터 점차 쇠퇴기를 맞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장은 기원정사에 대해서도 옛날에는 가람이었으나 이젠 황폐해져 있다라고 묘사했다.

불교의 발생지에서 쇠퇴하던 불교가 잠시 부흥기를 맞은 8세기 이곳을 찾은 신라 출신의 혜초는 자신의 여행기록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서 기원정사에 절도 있고 승려가 있는 것을 보았다고만 간략히 기록하여 아쇼카왕의 석주를 보았는지는 없으나, 기원정사가 여전히 승원으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은 석주들이 흔적조차 없다. 따라서 석주들이 세워졌다고 알려진 기원정사 동문의 위치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1863 이곳을 방문한 알렉산더 컨닝햄(Alexander Cunningham) 법현과 현장의 기록에 의거하여 고대 사위성 기원정사와 관련된 유적지들을 발굴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그는 기원정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평가 받는 간다쿠티와 코삼비쿠티(Kosambikuī) 찾아내는데 직접적인 기여를 했다. 코삼비쿠티는 간다쿠티로부터 남쪽으로 50m 거리에 위치하며 간다쿠티와 같이 동쪽을 향하고 있다. 사원3(Temple 3)으로 명명된 이곳은 수다타가 붓다를 위한 명상실로 조성했던 최초의 코삼비쿠티가 서있던 곳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붓다가 직접 사용했던 곳이기도 했다. 길쭉한 연단은 붓다가 고요한 속에서 걷기명상을 하던 산책로가 있던 곳이다.

코삼비쿠티에서 다시 남쪽으로 70m 발걸음을 옮기면 기원정사에서 순례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들 가운데 하나인 아난다보리수(Anandabodhi Tree) 나온다. 보리수나무 둘레에는 언제나 많은 오색깃발로 장식되어 있어 순례자들의 신심을 짐작할 있게 한다. 붓다가 계실 당시, 붓다가 불법을 전하기 위해 기원정사를 비웠을 신도들이 붓다를 친견할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수다타가 아난다(Ānanda, 阿難陀)에게 이를 상의했다. 아난다는 붓다의 승낙을 받고, 목갈라나(Moggallāna, )에게 부탁하여 보드가야의 원래 보리수나무로부터 씨앗을 얻어 기원정사의 정문 옆에 이를 심도록 했다고 한다. 이 보리수는 아난다보리수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보드가야의 보리수나무 다음으로 중요한 보리수로 여겨진다.

아난다보리수의 모습

코살라국의 수도, 사위성

기원정사 입구에서 양쪽의 사이로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500m 올라가면 나지막한 토성(土城) 군데군데 훼손된 모습으로 있는 사위성의 남문에 다다른다. 남문을 통과하면 바로 오른쪽으로 상당한 규모의 자이나교 사원 유적지를 지난다. 슈라바스티는 자니아교의 2명의 중간 교주가 태어난 곳으로 자이나교 교세가 상당했던 곳이다. 닦인 도로를 따라가다 길이 끝나는 곳에 이르면 왼쪽에 규모의 벽돌 스투파를 만난다. 파키쿠티(Pakki Kuti)라고 명명된 이곳을 컨닝햄은 법현과 현장이 보았다고 기록했던 앙굴리말라(Agulimāla, 央掘魔羅) 스투파로 확인했다.

기원정사에서 사위성으로 가는 길은 포장이 되어 있지만, 사람이나 차량보다는 양들이 더 많이 이용하고 있었음.
관목숲으로 덮혀 있는 사위성 토성의 모습. 토성의 왼쪽이 성내임. 토성은 군데군데 훼손된 부분이 많았으며 양들과 어린 목동의 놀이터가 되고 있었음.
사위성 토성 위에서 바라본 전경. 사위성 앞은 대부분 논이었음. 붓다도 저 논두렁을 가로질러 다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듦.
사위성과 기원정사 사이의 논 한가운데에 돌담들이 세워져 있는 모습. 뒤 배경의 거대한 불상을 세운 태국사원(Maha Mongkokhal Temple)이 사정이 어려운 지역 농민의 논을 사들이고 돌담을 설치해 그 가운데 갇힌 논에는 물을 댈 수 없어 팔지 않으려고 버티다 할 수 없이 싼 값에 다시 태국사원에 논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풀이 되고 있음. 이미 이 태국사원은 현재의 기원정사보다도 더 큰 땅을 보유하고 있으나 더 많은 땅을 확보하려는 욕심은 끝이 없어 보임. 이미 지역에서 굉장한 영향력을 확보한 태국사원 때문인지 관리들도 힘없는 농민의 하소연에도 고개를 돌리고 있음. 태국 방콕에서 미용사로 일하던 여인이 많은 사람들의 기부금을 받아 세운 절로 알려져 있으며 자신을 마하마티(Maha Mati)라 칭함. 깨끗하고 정갈하게 꾸며진 명상센터로 찾는 사람들에게 좋은 경험을 제공하고 있는 면도 있지만, 힘없는 많은 사람들의 눈물 위에 세워진 자신의 사업체를 붓다의 이름을 팔아 운영하는 거만한 하나의 상(相)이 보이는 것 같아 씁쓸했음.

앙굴리말라는 브라만교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999명의 사람을 죽이고 손가락을 잘라 머리장식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1,000명째로 붓다를 만나 교화를 받고 제자가 사람이다. 예전의 행위 때문에 사람들의 박해를 받았으나 참고 견디며 참회의 생활을 보내다 마침내 바로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건너편 수다타 스투파에서 바라본 앙굴리말라 스투파의 모습.
최근에 내린 비에 앙굴리말라 수투파의 뒤 부분이 일부 무너져 내린 모습. (왼쪽); ASI에서 고용한 사위성 관리인. 주로 수다타 스투파와 앙굴리말라 스투파를 관리하는데 박봉에도 불구하고 밝아 보였음.

그리고 앙굴리말라 스투파에서 동남쪽으로 길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건너편에 좀더 규모의 벽돌 스투파가 자리하고 있다. 카치쿠티(Kachchi Kuti)라고 명명된 이곳은 역시 법현과 현장이 직접 보았다고 기록했던 급고독장자, 수다타의 집터에 세워진 스투파로 알려져 있다. 스투파 위에 오르면 사위성의 성벽 넘어 멀리까지 펼쳐진 논과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있다. 마침 우리가 스투파 위에 올랐을 때에 석양이 지기 시작하면서 무척이나 고즈넉한 분위기에 누구도 먼저 내려가려고 서두르는 사람이 없었다.

수다타 스투파의 모습. 위에 올라가면 주변의 멋진 경관을 감상할 수 있어서 인지 언제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음.

우리는 수다타 스투파 위에서 성벽 너머 다리 위에 마을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봤다. 그곳까지 가보기로 하고 차를 탔다. 그러나 지점 이후로는 도로 상태가 매우 불량한 상태였다. 어제 내린 비로 인해 진흙 길은 통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4륜구동인 우리 차조차 겨우 힘겹게 통과해 다리에 도착했다. 다리 위에는 다양한 연령의 남자들만 난간에 모여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자신들의 소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동원정사 근처에서 사위성의 토성벽을 바라본 모습. 크게 함몰된 부분으로 사람과 동물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오솔길이 나 있어 우리도 이곳을 통해 사위성으로 들어가 봤음.

어제 일이 떠올랐다. 동원정사를 살펴 보고 오후 늦게 무너진 토성 벽을 통과해 수다타 수투파를 향해 걷다가 성내에서 수풀이 우거지고 웅덩이가 있는 곳에서 놀고 있는 무리의 물소떼를 만났었다. 날이 어둑해지자 물속에서 놀고 있던 물소들이 하나둘씩 모두 한쪽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었다. 소들이 저녁이면 스스로 이렇게 집을 찾아 돌아오는 것이었다. 정말 조금 있으니 소들이 다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면 주인인 듯한 사람이 잡담을 마치고 일어서서 소들과 집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치쿠티에서 진흙 길을 따라 북쪽 성벽을 통과하자 돌다리 위에서 해가 진 뒤 집으로 돌아올 소들을 기다리고 있는 한 무리의 마을사람들을 만남.
저녁이 되어 기다리던 소들이 돌아오고 주인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음.

사위성신변의 현장, 천불화현탑(오라자르)

붓다는 원래 신통을 부리거나 신변에 기대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붓다가 가장 오랜 기간 머물렀던 슈라바스티는 붓다가 행한 기적으로도 유명하다. 붓다의 출현이 있기 전부터 사위성에는 여러 교단의 수행자들이 있었다. 파세나디왕도 처음에는 바라문교 신자였으며 총애하던 왕비 말리카(Mallika) 권유로 붓다에게 귀의하게 된다. 당시 육사외도(六師外道) 강한 교세를 형성하고 있던 사위성에서 뿌리를 내리고 교세를 확장해 나가려는 붓다는 그들과의 마찰을 피할 없었을 것이다.

불교와 다른 교단의 경쟁은 신통력의 우열로 판가름이 났다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신통력에 대한 이야기들이 세력 확장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틀림없었던 같다. 다만 신통력이 당시 교단의 능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는지, 아니면 후대 경전이 기록될 당시 포교에 도움이 되도록 신통력에 대한 이야기들이 필요했는지는 수가 없다. 사위성에서 다른 교단의 수행자들과 붓다가 신통력을 겨룬 유명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슈라바스티의 기적 또는 사위성신변(舍衛城神變)이다.

사위성신변을 묘사한 부조로 아프가니스탄의 파이타바(Paitava)에서 발견됨. 붓다가 공중으로 부양한 체 발에서는 물을, 어깨에서는 불을 내뿜고 있음.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미술관(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 - Guimet) 소장. (왼쪽); 연꽃 위에 앉은 붓다가 천불화현의 신통을 펼침.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Lahore Museum) 소장 (오른쪽)

붓다는 사위성에서 파세나디왕과 육사외도 앞에서 몸에서 물과 불을 번갈아 가며 방출하는 쌍신변(雙神變) 순식간에 수많은 붓다를 출현시킨 천불화현(千佛化現) 가지 신통력을 펼친 것으로 전한다. 그리고 사위성신변은 많은 불교예술품의 모티브가 되어 왔다. 기원정사에서 동남 방향으로 1.4km 직선거리에 사위성신변이 실제 있었던 곳으로 믿고 많은 순례자들이 찾고 있는 오라자르(Orajhar) 있다. 26 주고속도로 상의 언덕 위에서 건축 유적을 발견한 사람은 해밀턴이었다.

유적지 입구에는 인도고고학조사위원회(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ASI)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어디에도 사위성신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관광부의 자료에도 오라자르 유적과 관련하여 마찬가지로 사위성신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아마도 최소한 고고학적 조사에서 사위성신변과 관련된 유적이라는 확인이 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순례자들은 이곳을 아예 천불화현탑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오라자르 유적지 입구에 서있는 ASI의 안내판.
천불화현탑으로 알려진 이곳에는 간간히 찾아오는 순례자들 이외에는 찾는 사람들이 없으며, 원숭이들만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음
천불화현탑은 큰 길가의 작은 언덕 위에 있지만 올라가는 길은 전혀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았음.

이곳 슈라바스티에 머무는 동안 나와 샨텀은 매일의 일정이 마무리되면 언제나 간다쿠티에서 붓다의 체취를 느끼며 한동안 명상을 하고는 호텔로 향하곤 했다. 늦은 시간의 간다쿠티 주변에는 언제나 적막하다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어슴푸레한 저편에 붓다가 있음이 느껴지며 정신이 고양됨을 느끼곤 했다. 낮에는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아니면 더위를 피해 있던 많은 원숭이들만 자기들만의 세상이라는 듯이 무리를 지어 몰려 다녔다. 자신들의 수가 많다는 것을 아는지 피하지도 않았다. 없이 우리가 피해서 지나다니곤 했다. 매일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붓다를 친견하러 우리는 기원정사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