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르메즈, 고대 서역 불교의 중심지

이른 아침 테르메즈(Termez) 국내선 항공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테르메즈가 주도로있는 수르한다리야(Surxondaryo) 지역을 둘러볼 참이었다. 옛날 구법승들이 지역에서 아무다리야강(Amu Darya River, 고대 그리스 Oxus) 건너서 발흐(Balkh, 고대 그리스 Bactra), 바미안(Bamyan), 카불(Kabul) 지나 카이버고개(Khyber Pass) 넘고 페샤와르(Peshawar) 카슈미르(Kashmir) 거쳐 인도를 오갔었다. 길은 또한 아득한 옛날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인도 평원을 공략하기 위한 침입로로도 사용되어 왔었다.

사마르칸트(Samarkand)에서 테르메즈에 이르는 좁은 고갯길로, 7세기에 이곳을 지나갔던 현장() 자신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묘사했던 철문관(鐵門關, Iron Gate) 보고 싶어 차로 이동하고 싶었으나 모두 걱정하는 소리를 했다. 도로 사정으로 하루 종일 차를 타야 거라고 했다. 파미르-알라이(Pamir-Alay) 산맥에서 뻗어 나온 기사르산맥(Gissar Range) 서쪽 끝이 수르한다리야의 북쪽 경계를 감싸고 지나가면서 수르한다리야를 우즈베키스탄의 다른 지역과 분리시켜 독특한 문화와 식생을 발전시켰다. 우즈베키스탄 지역의 기사르산맥에서 가장 높은 곳은 4,634m 이른다.

수르한다리야로 향하는 비행기 기내에서 내려다 본 기사르산맥의 모습. 러시아 항공기여서 깨름직한 마음으로 이륙을 했지만 금새 바깥 정경에 마음이 빼았꼈다. 저 너머에 파미르고원이 펼쳐진다.

아무다리야강 북안에 자리잡고 있는 테르메즈는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더운 곳이다. 남쪽으로는 아무다리야강을 사이에 두고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이웃한 접경지로 군사도시이기도 하다. 도시의 이름은 이란어 tara-maiθa 연원을 소그드어 Tarmiδ에서 것으로건너는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에도 이곳은 아무다리야강을 건너던 곳이었던 모양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어로따뜻한이란 의미의 thermos에서 왔다고 주장하는데, 알렉산더대왕과 연결하기도 한다. 밖에도강둑 위에 있는이란 의미의 산스크리트어 taramato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다. 고대도시 테르메즈가 언제 정확히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없지만, 2002 도시 건립 250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식이 있었다.

나를 태운 비행기는 높은 산맥도 발밑 아래에 두고 가뿐히 넘어 테르메즈 공항에 내렸다. 호텔에 체크인부터 했는데도 여전히 오전 이른 시간이었다. 우리는 테르메즈의 고대 불교 유적지를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테르메즈는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간다라(Gandhara, 陀羅) 지방(현재 파키스탄 페쌰와르 지역) 거쳐 카이버고개를 넘고 바미안 지방을 거쳐 사마르칸트 쪽으로 올라가는 경유지여서 부근에서는 불교 관련 유적지와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실크로드의 중간에 위치한 지리적인 이점이 불교 중심지가 되는데 크게 작용했던 같다.

테르메즈 공항의 대합실 창문 너머로 낡은 트럭이 수하물을 실어와 컨베이어 벨트에 수하물을 부리고 있다. 같은 세기를 살고 있는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개도국을 여행하다 보면 흔히 보는 광경이기도 하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정벌과 헬레니즘 문명의 확립

길목에 위치한 땅이어서 외래 문명을 빨리 접할 있었던 장점도 있었지만,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땅이기도 했다. 기원전 6세기에 이미 이란의 아케메네스(Achaemenes) 왕조의 침입이 있었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나 기원전 4세기에는 마케도니아(Macedonia)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이곳 테르메즈를 점령했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점령은 이곳에 동양의 문화에 그리스 문화가 더해져 새롭게 탄생한 헬레니즘 문화가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됐다. 고대 자료에 알렉산드로스대왕이 건설했다는옥수스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on the Oxus)’라는 도시가 바로 테르메즈였다.

사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내에서도 아테네와 스파르타처럼 선진적인 도시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변방의 작은 왕국이었다. 그리스 자체도 거대한 이웃 페르시아제국의 침략과 괴롭힘을 당하는 처지였다. 이러한 처지에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Philippos II) 군사력을 키워 그리스 전체를 수중에 넣고 페르시아제국 자체를 멸망시키고 땅을 차지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 필리포스는 아들 알렉산드로스의 눈부신 활약으로 마침내 숙원이었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공수동맹인 코린트동맹(League of Corinth) 맹주 자리에 오르고, 이어 페르시아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경호원 명에게 불의의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기원전  500 년경   아케메네스왕조   시대의   페르시아제국   영토 .  페르시아제국은   속주의   종교와   관습을   최대한   인정하면서   주변   문명을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로   녹여낸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  박트리아는   거대한   페르시아제국의   동쪽   끝에   위치했다 .  위키피디아 .

필리포스가 갑작스럽게 죽고 , 알렉산드로스는 불과 20세의 나이에 순식간에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제거하고 필리포스의 후계자로 마케도니아의 왕위와 코린트동맹의 맹주 지위를 차지했다. 그런 다음 그는 아버지의 원대한 꿈인 페르시아 정벌을 단행했다. 기원전 334 코린트동맹의 총사령관으로 메케도니아-그리스 동맹군을 소집한 알렉산드로스는 47천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의 문호라는 뜻의 헬레스폰트(Hellespont, 현재 다르다넬스해협) 건넜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대군도 당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Darius III) 군대와 비교하면 골리앗을 상대하는 다윗 정도밖에는 여겨지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의 흉상.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알렉산드로스와 다리우스는 이수스(Issus) 가우가멜라(Gaugamela)에서 2차례에 걸쳐 결전을 치렀다. 알렉산드로스가 불가능이라 여겨지는 어려움을 불굴의 의지와 창의적 전법으로 이겨낸 반면, 다리우스는 이해할 없는 전투 지휘관의 도주로 페르시아군의 전열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말았다. 번의 전투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세계제국을 잃고 것이다.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추격을 피해 페르시아제국의 가장 동쪽 끝에 있는 박트리아(Bactria) 도주했지만, 그곳의 총독(satrap) 베수스(Bessus)에게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이것으로 아케메네스제국은 패망했다. 베수스는 스스로를 다리우스의 계승자라 선언하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Artaxerxes V) 칭했다.

알렌산드로스의   대제국과   그의   정벌   여정 .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차지했다 .

알렉산드로스의 원정군은 다리우스의 죽음으로 원정은 이제 끝났다는 생각에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왕위 찬탈자인 베수스를 용서할 없었다. 분노한 그는 베수스를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힌두쿠시를 넘고 죽음의 북부 아프가니스탄 사막을 건너 마침내 옥수스강(현대 아무다리야강) 당도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박트리아에 도착하기 전에 베수스는 소그디아나(Sogdiana) 이미 도주한 상태였다. 당시 그리스인들에게는 마라칸다(Maracanda) 알려져 있던 사마르칸트가 소그디아나의 수도였다. 그를 쫓기 위해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아무다리야강을 건너 테르메즈 땅에 발을 디뎠다. 베수스를 잡아 벌을 주기 위한 여정은 결국 광범위한 중앙아시아와 인도 서북부 정벌로 이어졌다. 소그디아나로 도주했던 베수스도 그곳에서 배신을 당하고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져 페르시아식 극형을 언도받고 끔찍한 형벌을 받았다.

알렉산드로스가 군대를 이끌고 소그디니아로 가기 위해 아무다리야강 건넌 곳으로 여겨지는 장소는 현재의 테르메즈에서 북서쪽으로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슈랍(Shurob) 마을이다. 고대 건널목을 지키기 위해 알렉산드로스는 이곳에 요새를 건설했다. 이곳의 캄피르테파(Kampyr-Tepa) 유적이 오랫동안 역사학자들이 찾아 헤매던 옥수스의 알렉산드리아, 옥시아나(Oxiana)라는 방향으로 학자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같다. 이곳에서는 기원전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성벽과 성문 등의 강력한 방어 시스템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곳은 박트리아의 중심지인 박트라(Bactra, 현재 발흐)에서 사마르칸트로 넘어가는 철문관과의 일직선 상에 위치한다.

박트리아 지역 지도. 수르한다리야 남부 지역의 평야지대에는 구소련 시대부터 대규모 면화재배를 위해 아무다리야강으로부터 물을 끌어오기 위한 방대한 운하망이 보인다. 그로 인해 강물의 수위가 낮아져 그 옛날처럼 강물이 범람하지는 않는다.

 캄피르테파 유적에서는 마케도니아, 그레코-박트리아(Greco-Bactria), 쿠샨(Kushan) 왕조의 유적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특히 기원후 1~2세기의 카니슈카(Kanishka) 대왕 시대에 황금기를 맞이했었음을 보여준다. 옥수스강의 범람으로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렸고 후에는 버려졌기 때문에 초기 도시계획이 그대로 남아있다. 캄피르테파는 그리스 양식의 요새, 주거지역, 교역지대, 항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0년이 유적지가 그래도 보존될 있었던 하나의 요인은 곳이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에 인접하고 있어 오랫동안 출입금지 구역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출입이 금지되어야만 보존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처럼 느껴졌다.

캄피르테파 유적 전경

알렉산더대왕의 사망 , 테르메즈를 포함한 박트리아 지방의 지배자는 셀레우코스왕조(Seleucid Empire) 거쳐 그레코-박트리아왕국과 인도-그리스왕국(Indo-Greek Kingdom)으로 바뀌면서 기원 직전까지 잔존했던 그리스계 헬레니즘 국가였다. 전성기 때의 영역은 동쪽으로는 타림 분지, 서쪽으로는 페르시아, 북쪽으로는 소그디아나, 남쪽으로는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이었다. 기원전 2세기 전반부터 간다라 지방에 진출해 그리스 문화를 전파함으로써 헬레니즘 문화와 인도 불교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간다라 예술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서쪽으로부터는 파르티아(Parthia) 침입을 받았고, 특히 북쪽으로 유입된 대월지(大月氏) 정복되어 멸망하였다.

박트리아의 불교 전파

대월지는 전국시대 말기에 서몽골로부터 간쑤(甘肅) 서부, 황허강(黃河) 상류, 동투르키스탄, 중가리아, 서투르키스탄의 일부까지 영향력을 펼치고 있던 대세력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 흉노(匈奴) 갑자기 일어나 압박해오자 기원전 2세기에 쫓겨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무다리야강 북안에 중심을 두고 세력을 키워나갔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는 박트리아까지 밀고 내려와 영역을 확장했으며, 기원 전후 대월지의 다섯 제후들 가운데 하나였던 쿠샨(Kushan, 貴霜) 가문의 쿠줄라 카드피세스(Kujula Kadphises) 다른 제후를 제거하고 쿠샨왕조를 열었으며 힌두쿠시 이남으로 진출하여 간다라까지 지배했다.

쿠샨왕조를 연 쿠줄라 카드피세스의 흉상.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박트리아의 초기 불교 전파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인물이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인도-그리스왕국의 왕이었던 메난드로스 1(Menandros I)이다. 그는 북부 펀자브의 부유한 도시였던 사갈라(Sagala, 舍竭城: 현재의 시아르코트[Sialkot]라는 설이 유력) 수도로 삼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도 서북부에 이르는 영토를 지배했다. 불교도들에게는 미란다(Milinda, 彌蘭陀) 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나가제나(Nagasena, 那先) 비구에 의해 교화되어 불교로 귀의했다고 전해진다. 사람의 대화가 팔리어 불전 미란다판하(Milinda Pañha: 미란다왕의 질문) 한역불전의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 수록되어 있다.

메난드로스  1 세   시대에   발행되었던   은화에   나타난   메난드로스왕의   모습 . ‘ 구세주   메난드로스왕 ’ 이라   새겨져   있다 .  대영박물관  ( 왼쪽 );  메난드로스  1 세   시대의   기본   동전으로   왼쪽의   전면에는   중앙에   법륜 ( 法輪 ) 과   함께  ‘ 구세주   메난드로스왕 ’ 이란   글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가   새겨져   있다 .  대영박물관  ( 오른쪽 )

알렉산드로스의 사망 , 박트리아에 뿌리를 내린 그리스계 헬레니즘 왕국들은 끊임없는 내부분열과 왕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빠르게 약화되어 갔다. 이들 왕국의 주화들이 박트리아의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후기의 고립된 소수의 그리스계 지배층은 토착 피지배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전통적인 그리스 양식의 주화를 포기하고 토착민의 호응을 이끌어 있는 양식의 주화를 발행한 것으로 보인다. 메난드로스왕의 불교 귀의는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징기스칸이 중앙아시아를 정벌한 , 그곳에 몽골계 국가들을 건설했던 징기스칸의 후예들도 세대를 거치면서 같은 문제에 봉착해 피지배층과의 동화를 위해 피지배층의 종교였던 이슬람교로 전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과 비슷한 현상 같았다.

메난드로스  2 세   때의   주화로   제우스신이   법륜   위로   승리의   화환을   건네는   승리의   여신   니케를   잡고   있는   모습이   주조되어   있다 . ( 왼쪽 );  그리스식의   망토와   모자를   쓰고   법륜을   굴리고   있는   신의   모습이   주도되어   있다 . ‘ 법륜을   굴리는   사람 ’ 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 오른쪽 )

기원전 3세기의 아소카(Aśoka, 阿育王) 치세 개최되었던 불교 3 결집 이후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각지로 전법사들이 파견되었다. 박트리아도 불교가 전파된 곳들 가운데 하나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학자들의 고고학적 연구 결과로 뒷받침되는 사실은 기원전 2세기에 전법사들이 박트리아에 파견되어 불법을 전하기 시작했을 수는 있으나, 박트리아 북부에 불교 건축물들이 널리 세워지고 불법이 널리 전파된 것은 기껏해야 기원 1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이루어진 일이라고 한다.

때가 유명한 쿠샨왕조 3 왕인 카니슈카(Kanishka, 色迦) 대왕의 치세에 해당한다. 그의 통치기간이 1세기 후반에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 않으며, 대체로 2세기에 생존했던 것은 분명한 같다. 그는 간다라지방의 푸루샤푸라(Puruapura, 현재 Peshawar) 수도로 삼고, 북서쪽으로는 아무다리야강 이북의 남부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으로부터 카슈미르를 포함한 인도 서북부와 남동쪽으로 마투라(Mathura)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동전의   전면에   덥수룩한   수염의   카니슈카  1 세가   두꺼운   외투와   긴   장화를   신고   있는   모습 . ‘ 왕중   왕 ,  쿠샨의   카니슈카왕 ’ 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 ( 왼쪽 );  후면에는   시무외인 ( 施無畏印 , abhaya mudra) 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헬레니즘   양식의   붓다   상 .  붓다의   모습   왼쪽에   붓다 (Boddo),  오른쪽에는   카니슈카의   문장 ( 紋章 ) 이   새겨져   있다 . ( 오른쪽 )

불교 전승에서 카니슈카대왕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대승불교의 후원과 전파에서 보여준 카니슈카왕의 역할은 상좌부 불교에 대한 후원과 전파에서 보여준 아소카대왕의 역할에 비견된다. 카니슈카왕 시대에 불교의 4 결집이 이루어졌다. 4 결집은 기원후 100년경에 파르슈와(Pārśva) 존자의 건의에 따라 카니슈카왕의 후원으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 삼장(三藏) 대한 논서(論書)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삼장에 정통한 500명의 비구들을 소집하여 바수미트라(Vasumitra) 비구의 주재로 행해졌다.

집대성된 문헌이 30 () 660 () 달하는 대주석서 『아비달마대비바사론(毗達磨大毘婆沙論, Abhidharma Mahāvibhāā Śāstra)』이다. 현장이 번역한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의 「발 跋」에 의하면, 4 결집은 붓다의 입멸 이후 400년경에 카슈미르의 환림사(環林寺, Monastery of Kundalavan)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붓다의 입멸 시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가장 유력한 설인 기원전 483년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실제 4 결집은 불멸 이후 600년경에 이루어진 것이 된다.

카니슈카왕은 수많은 탑을 건립하고 동전에 붓다의 모습을 새겨 넣은 불교 보호와 전파에 힘썼다. 시대의 화폐에 새겨진 신상이나 유적을 보면 왕과 일족은 이란계 신이나 힌두교의 시바신 등도 함께 신봉했던 것을 있으나, 후에 열성적인 불교신자가 되어 불교의 후원과 전파에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수도인 푸루샤푸라에 카니슈카대탑을 건립했는데, 1908~1909년의 고고학 조사에서 지름이 87m 이르는 것으로 확인된 불탑의 기단이 발견되었다. 현장은 탑의 높이가 180~210m 달했으며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었다고 기록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엄청난 규모의 고대 건축물이었을 것이다.

1908~1909 년   페샤와르의   고대도시에   위치한   카니슈카대탑의   발굴   과정에서   대탑   아래   부분의   안치실에서   발견된   붓다   사리함 .  위   부분에는   좌우로   브라마신과   인드라신의   경배를   받고   있는   붓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 ( 왼쪽 );  사리함   몸체의   아래   부분에는   카니슈카왕으로   보이는   쿠산의   왕이   좌우에   이란의   해와   달   신들과   함께   조각되어   있다 . ( 오른쪽 )  페샤와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사라함   안에는   붓다의   뼈조각  3 과가   들어   있었으나   영국이   미얀마의   만달라이 (Mandalay) 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불상의 출현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대왕이 박트리아를 정벌한 동서간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기원 전후 수세기에 걸쳐 독특한 불교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이렇게 형성된 간다라문화가 카니슈카왕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우리의 주목을 끌게 되는 데에는 가지 이유가 있었다. 기원전 5세기부터 불교의 가르침이 전해져 왔지만 예배의 대상인 불상이 만들어진 것은 그로부터 5~600백년이 지난 기원후 1세기 무렵 쿠샨왕조 시대에 이르러서였기 때문이다.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예배의 대상은 붓다의 사리를 모신 스투파, 불탑(佛塔)이었다. 또한 그때까지 붓다는 오직 보리수(菩提樹), 법륜(法輪), 보좌(寶座) 등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었을 뿐이었다. 시기를 흔히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까지 불상이 조성되지 않았던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있지만, 전통적인 동양적 가치관 아래에서는 지고의 대상을 공백이나 상징물로 대신하는 경우는 많았다. 서울의 청계천에 왕실의궤 그림을 180m 길이의 벽화로 옮겨놓은 정조대왕 능행차도 봐도 감히 왕의 얼굴을 그림으로 표현할 없었는지 정조대왕은 어가(御駕) 표현되어 있다.

사실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불교계에서는 혁신적인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때까지의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는 스스로의 수행에 의한 깨우침을 통해 해탈을 목표로 해왔던 반면, 새롭게 일어나고 있던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는 모든 중생의 구원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대승불교의 성립과 관련하여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이와 같은 변화는 불교가 인도를 뛰어 넘어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피할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달바르진테파에서 발굴된 2~3세기 보살상의 복제품 (왼쪽); 파야즈테파에서 발굴된 1~2세기 보살상 (중앙); 옛테르메즈 지역에서 별견된 2~3세기 2층 구조의 불상 (오른쪽).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이러한 대승불교의 발달로 석가모니는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로 변했으며, 미륵불도 때를 기다리는 미래의 붓다가 아니라 현실 세계를 구제하는 적극적인 존재로 변모했다. 또한 붓다의 이상 세계인 정토신앙이 성행하여 수행을 통한 자아실현의 노력보다는 절대적 존재에 의지해 구원을 얻으려는 종교적 색채가 짙어졌다. 불교가 보편적 종교의 모습으로 변모해가자 인간의 모습을 예배 대상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토착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던 박트리아 지방에서 그들의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상을 조각해 숭배하던 사람들이 새로운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불상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시작된 곳이 당시 박트리아와 간다라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쿠샨왕국의 수도 페샤와르 지역으로 간다라라 불리던 곳이었다.

카니슈카왕 시대의 동전에 나타나는 붓다의 모습은 이미 상당히 정형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오른쪽 손바닥에는 법륜이 새겨져 있고, 미간에는 오른쪽으로 감기어 빛을 발하는 (白毛) 있으며, 몸에서는 신광(身光) 내뿜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전의 붓다가 입고 있는 겉옷은 양쪽 어깨를 모두 덮고 있어 간다라 불상들과 괘를 같이 한다.

1~2 세기 간다라 지역에서 최초로 출현했던 불상들 가운데 하나로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왼쪽); 2세기에 간다라에서 출현했던 불상이며 오른쪽에서 붓다를 보호하고 있는 금강수보살(金剛手菩薩)이 헤라클레스로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

간다라 불상에서 특이한 것은 머리카락이 고수머리가 아니고 물결 모양의 장발이라는 점과 용모는 눈언저리가 깊고 콧대가 우뚝한 것이 마치 서양 사람과 같다는 점이다. 얼굴의 생김새가 인간적이고 개성이 있다는 , 입고 있는 옷의 주름이 깊게 새겨졌고 모양이 자연스러워 형식화된 것이 아니라는 등을 특징으로 있다. , 간다라 불상의 표현은 그리스풍의 자연주의현실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 독특했다.

이렇게 오늘날 파키스탄의 북부지방인 간다라에서 꽃피웠던 그리스-불교 예술은 인도로 퍼져 나가 마투라의 예술, 그리고 이후에는 굽타(Gupta) 왕국의 예술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다시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간다라의 불교문화는 또한 북쪽으로도 퍼져 나갔는데 갈래가 중앙아시아로 퍼져 나갔으며, 다른 갈래는 타림분지를 거쳐 중국, 한국, 일본까지 영향을 끼쳤다.

테르메즈의 불교 유적

고고학 발굴로 세기에 걸쳐 고대 테르메즈는 중앙아시아에서 중요한 불교 중심지였음이 밝혀졌다. 포교사들이 이곳을 출발하여 북서쪽으로는 철문관을 넘어 소그디아나로 불교를 전달하였고, 북동쪽으로는 파미르고원과 알라이산맥을 넘어 東투르케스탄(East Turkestan)으로 그리고 너머 중국, 한국, 일본에까지 불법(佛法) 전했다. 문서에는 산스크리트어(Sanskrit) 불교경전을 한역(漢譯) 사람들의 이름을 포함하여 중국에서 불교 포교활동을 벌였던 박트리아인들의 이름이 남아 있다.

부파불교 시대를 거치며 철학적 깊이를 더한 불교는 이곳 간다라와 박트리아에서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만나며 보살사상과 불상 조성 대승불교의 특징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쿠샨왕국을 통해 꽃을 피운 대승불교는 카니슈카왕 전성기를 맞이하고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을 거쳐 한반도, 그리고 일본까지 전해지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동북아시아에서 더욱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정작 쿠샨제국은 일찍 종말을 맞이했다. 쿠샨제국은 230년경 사산왕조 페르시아(Sassanian Persia)에게 정복됐으며, 이후 땅은 5세기에 에프탈(Hephthalites), 6세기에 투르크, 7세기에 우마이야왕조(Umayyad Dynasty), 8세기에 아랍의 아바스왕조(Abbasids) 의해 차례로 지배를 받으면서 이슬람 문화가 곳곳에 스며들었다. 쿠샨인들이 5세기 중엽까지 잔존하긴 했지만 테르메즈 땅에서 번성했던 불교사원은 이교도들의 파괴행위와 주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파괴되고 쇠락해갔다.

7세기 테르메즈를 통과해 인도로 향했던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테르메즈를 달밀국(蜜國)이라 칭했으며, 10여개의 사원이 있고 스님들도 1000여명이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도 불교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장이 보았던 옛 테르메즈는 동서로 600여리, 남북으로 400여리였고, 도성의 둘레는 20여리에 달하며, 동서로는 길고 남북으로는 좁은 모양이었다.

고대 테르메즈의 불교 유적들

그러나 아마도 테르메즈 땅에 건립되었던 불교사원들의 운명에 결정적인 사건은 13세기 전반기에 이곳에 들이닥쳤던 칭기즈칸의 몽골군대였을 것이다. 몽골군대에 이틀 동안 포위됐던 테르메즈의 주민들은 격렬히 저항했고, 이에 분노한 칭기즈칸은 도시 전체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살육했다. 13세기 후반기에 새로운 테르메즈가 테르메즈의 동쪽에 다시 세워졌다. 그리고 이보다 남쪽으로 아무다리야강에 가깝게 위치한 현재의 테르메즈는 19세기에 들어서 건설된 것이다. 흙벽돌로 쌓아 올려진 거대한 고대 불교사원들은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모습을 잃어갔고 거센 모래바람이 만들어 놓은 언덕 아래에 파묻혀 흔적조차 찾을 없게 것이다.

동안 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모습을 드러낸 곳은 파야즈테파(Fayaz Tepa), 카라테파(Kara Tepa), 달베르진테파(Dalverzin Tepa), 주르말라대탑(Zurmala Stupa) 되지 않지만, 500헥타르의 광대한 고대 테르메즈 땅에서 몽골군대의 파괴와 혹독한 기후를 견디고 년을 버텨온 되는 테르메즈의 대표적인 불교 유적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아직은 그리 많지 않은 방문객들에게 매우 흥미롭기 그지없다. 그리고 위대한 불교 유적들이 건립되었던 쿠샨왕조 시대가 땅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이 꽃피웠던 시기이기도 했다.

파야즈테파

황무지와 같은 고대 테르메즈 지역에서 살아남은 가장 유명한 불교 유적들 가운데 하나인 파야즈테파는 옛테르메즈(Old Termez) 부근 카라테파 언덕의 불교사원 근처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하던 러시아의 고고학자 L. 알바움(L. Albaum) 의해 1963년에 발견되었다. 불교사원에서는 많은 벽화와 보존된 조각품들이 발굴되었다. 사원은 U자형의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고, 통로를 따라 수도실과 성소가 배치되어 있는 구조였다. 또한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개의 불사리탑이 발견되었다.

파야즈테파 전경
파야즈테파 입구의 출입구가 유일하게 조그마한 그늘을 제공해 관리인이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관리인은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수르한다리야 황무지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 하루하루를 저 조그만 그늘에서 버티고 있었나 보다.

벌판을 가로질러 멀리에서부터 완전한 모양의 반구를 머리에 이고 있는 탑이 차량으로 파야즈테파에 접근하고 있는 우리의 시야에 들어왔다. 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 빛을 보게 진흙벽돌탑이라고는 믿기지 않아 복원을 너무 번듯하게 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현장에 당도했다. 우리가 도착하자 어디에서 나왔는지 허둥지둥 달려 나온 남루한 모습의 관리인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황무지 외딴 곳에 나타난 사람들이 그저 반가웠는지 그는 우리 일행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의 젊은 직원이 나를 동행해 현장을 안내했다. 통역관이 타쉬켄트로부터 이곳까지 따라왔지만 젊은 박물관 직원이 유창하지는 않으나 직접 영어로 설명하려고 노력하자 없이 뒤에서 어슬렁거리며 따라왔다.

파야즈테파의 건물은 부분으로 나뉜다. 부분은 숙소와 부속 건물이고, 번째는 식당과 부엌이며, 번째는 종교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파야즈테파는 자체가 중앙아시아의 기념비적인 불교 건축물이기도 하지만, 건물 벽을 장식하고 있던 불교 예술품을 품고 있던 되는 사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파야즈테파의 모습
파야즈테파의 모습

사원의 벽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된 붓다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성소의 벽에도 다양한 붓다의 모습과 붓다 관련 이야기들이 묘사되어 있었으며, 사실 파야즈테파에서 발견된 붓다상은 현재까지 존재하는 고대 불상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하며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곳에서 발견된 벽화와 조각상들은 주로 1~3세기에 속하는 것들이었으며, 일부 4세기에 속하는 것도 있어 그때까지도 사원이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엿보게 해준다.

이곳 파야즈테파에서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조각상들과 토기들도 우아함과 기교로 예술적 가치를 높이 인정받았다. 특히 양편에 스님이 서있는 가운데 성스러운 보리수나무 아래에 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는 붓다상이 주목을 끌었는데 비나야 삼존불이라 불리는 불상은 이곳 파야즈테파에서 발견된 불교 예술품들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불상은 아치 모양의 테두리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인데 아치는 그리스의 코린트식 기둥 위에 얹혀져 있다. 붓다상 자체도 그리스풍 예술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조각품은 석회석에 새겨졌으며 금박장식이 되어 있다. 현재 조작품은 타쉬켄트 소재의 우즈베키스탄 역사박물관(State Museum of History of Uzbekistan) 전시되어 있다.

파야즈테파에서   발견된   비나야삼존불 . 1~2 세기   추정 .  우즈베키스탄   역사박물관  ( 왼쪽 );  궁정신하들을   묘사한   벽화로   파야즈테피에서   발굴되었다 . 1~3 세기   추정 .  우즈베키스탄   역사박물관

사원에 인접하여 10m 높이의 탑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내부에는 3m 높이의 작은 탑이 하나 들어 있는 구조이다. 탑의 건립연도는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멀리서부터 시야에 들어왔던 완전한 모양의 반구는 탑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일종의 반구형 지붕이었던 것이다. 우리 뒤를 따라다니던 관리인은 재빨리 내가 반구형 보호 지붕 안으로 들어가 있도록 잠겨 있던 자물쇠를 열어주었다. 열린 작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어두운 공간에 2000년의 세월을 버텨왔을 진흙 벽돌탑이 있었다. 허리춤에서 바라본 탑의 모습은 비바람에 마모되고 가는 금들이 있어 연약해 보였으나 속에는 2000년의 세월을 견딘 내공이 감춰져 있어 손을 대면 같이 단단함이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차마 손을 대어 수는 없었다.

2000 년 세월을 견뎌 온 진흙탑을 보기 위해서는 반구형 보호 지붕에 나 있는 이 출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평소에는 자물쇠로 잠겨져 있다.
발굴 당시 탑의 모습 (왼쪽); 반구형 보호 지붕 안에 있는 현재의 탑의 모습 (오른쪽)
반구형 보호 지붕 안에 있는 현재의 탑의 모습

혼자 탑을 감상하도록 모두 자리를 비켜주어서 잠시 밖으로 나오자 관리인만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내오면 문을 잠그려고 기다리는 듯했다. 그런데 그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며 갑자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냈다. 정확히 그의 말을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이곳 현장에서 발견한 유물들인데 돈을 주면 팔겠다는 의미 같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대자 자신이 발견했다는 유물들을 들어 보이며 포즈까지 취해 주었다. 그런 그를 보며 화가 나기보다는 측은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일반 공무원의 급여도 낮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고 들은 같은데 관리인은 급여로 가족을 먹이고 수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가 가짜 유물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우리를   따라   다니던   관리인의   모습  ( 왼쪽 );  관리인을   보면 , 1900 년   그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아   흙모래에   묻혀   있던   돈황석굴을   보고   이를   관리해오던   호북성   출신의   도사   왕원록 ( 王圓 籙 ) 의   모습이   겹쳐왔다 . ( 오른쪽 )

3세기에 사산조 페르시아(Sassanian Persia) 침공으로 불교사원들이 파괴되었으며, 이때 파야즈테파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종교적 활동은 후에도 어느 정도는 이어졌지만 쇠망의 길을 피할 없었던 모양이었다. 발굴 당시 사원은 두꺼운 모래와 층으로 덮여 있었으며, 발굴 과정에서 건물들이 크게 해를 입었다. 그리고 유적지 인근에 현장 박물관이 있다.

파야즈테파 인근에 있는 현장 박물관.

카라테파

카라테파도 불교사원으로 옛테르메즈(Old Termez)에서 북서 방향으로 400m, 파야즈테파에서 남서 방향으로 비슷한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카라테파는 파야즈테파와는 서로 시야에 들어오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파야즈테파가 오래된 사원으로 사원 옆에 거대한 탑이 있어 지역의 구심점이 되는 사원이었던 반면에, 카라테파는 무리의 승방들과 여러 개의 작은 탑들을 갖춘 사원으로 개의 작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무리들 가운데 남쪽 언덕 위에 있는 사원은 인공 굴과 소박한 진흙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승방들이었다. 장식이라고 해야 일부 회반죽 벽에서 발견된 벽화 정도였다. 서쪽 언덕 위의 경우는 남쪽 언덕과 비슷하나 궁정과 탑이 있었다. 북쪽 언덕은 규모의 궁정과 여러 개의 탑들이 있었으며 스님들의 거주 공간은 없었다. 서쪽과 북쪽 언덕의 궁정에는 그리스 양식의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카라테파 전경

2세기 초에 건립된 카라테파는 특히 2세기 말과 3세기 초에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4~5세기에는 상당 부분의 사원 기능이 멈춘 것으로 보이며, 기간에는 승방들이 묘지로 사용되었으며 승방의 입구들이 벽돌로 봉해졌었다. 그러나 사원의 일부, 특히 지상 부분에서는 6세기까지 불교의 종교적 집회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역의 불교사원들이 모두 아랍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랍인들은 중앙아시아의 이교도 사원들을 없애기 위해 비이슬람 종교 대상물에 대해 특별 과세를 부과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방식이 테르메즈와 인근 지역의 불교사원이 문을 닫게 되는 실질적인 계기가 되었다. 테르메즈 지역의 불교사원에 있던 승려들은 아직 불교가 성행하고 있던 캬슈미르(Kashmir) 지역으로 옮겨갔다. 카라테파는 이후 9~10세기에 수피교의 이슬람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다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이곳은 아프카니스탄과의 접경 지역으로 군사지역 내에 위치하고 있다. 국경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며, 얼마 전까지 아프가니스탄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격전지였다. 다행이도 현재는 전쟁도 막을 내리고 사전에 허가를 받으면 방문이 가능하다.

주르말라대탑

주르말라대탑으로 가는 길가에는 집들도 보이지 않았고, 우리가 타고 가는 4륜자동차가 마른 진흙길에서 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며 달릴 뿐이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속도를 내는 것도 아니었건만 출렁이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있는 느낌이었다. 더운 곳에도 누군가가 온실농업을 시도하려는 대규모의 온실을 설치하고 있었다. 한가운데 높게 쌓아 올린 진흙더미 같은 주르말라대탑이 눈에 들어왔다.

2000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갑자기 밭 한가운데 솟아오른 듯한 주르말라대탑.
주르말라대탑은 여전히 아무런 보호장치가 없이 뜨거운 햇볕에 노출되어 있어 앞으로 얼마나 이 모습을 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지금은 폐허가 고대 테르메즈의 동쪽에 위치한 주르말라대탑은 12m 높이의 불교 유적이다. 유적은 불교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번성하던 시기인 기원전 1~2세기, 쿠샨왕조 시대에 건립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을 맞으면서 원래의 모습은 잃어버린 불교 유적이었음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된 모습이었다.

지름이 14m 이상이었을 원통형 탑으로 원래 토대 위에 세워졌었으며 전체 높이는 16m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탑은 진흙 벽돌로 건립되었으며 돔형의 지붕이 있었다. 탑의 부분에는 성물(聖物) 보관하는 공간이 있어 불경과 불상 등이 보관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탑의 외관은 진홍색으로 칠해져 있었다고 한다.

주르말라대탑 이곳 저곳의 모습들

주르말라대탑은 20세기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된 최초의 불교 건축물이었다. 지역에 남아있는 가장 규모의 불교사탑이기도 탐은 아마도 우즈베키스탄 전체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축물일 있다. 탑이 불교 숭배와 관련된 건축물임을 처음 확인한 사람은 1927년경부터 러시아 동양문화박물관의 과학탐험대의 일원이었던 A. 스트렐코프(A. Strelkov)였다.

주르말라대탐에서 발굴된 1~2세기 남녀상.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이날 우리를 안내하던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Termez Archaeological Museum) 직원과의 마지막 일정으로 우리는 바로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으로 향했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박물관을 우리에게 보여주게 되어서인지 신이 듯했다. 박물관 건물은 무슬림 양식의 거대한 덩이의 건물로 외관에선 박물관인지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정면 높은 곳에 우즈벡어로 고고학 박물관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건물.

테르메즈에서는 그레코-박트리아와 쿠샨왕조 시대의 많은 고고학 유물들이 발굴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우즈베키스탄 역사박물관과 이곳 테르메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 또는 보관되어 있다. 고고학박물관은 2002 42 테르메즈의 도시 건립 2500주년을 기념하며 문을 열었다. 역사박물관과 비교하면, 박물관은 분야에만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이곳에 전시 중인 것은 대부분 고고학 유물이거나 고고학과 관련된 전시물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중앙홀에 석기시대부터 중세 칸제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대표적 유물들이 시대별로 배치되어 방문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박물관에서 전시 또는 수장 중인 유물이 27,000 점이 넘는다고 한다. 많은 가정용 도구, 고대 중세시대 무기류, 지배자들의 동전과 인장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많은 수량의 고대 벽화와 조각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조각품에는 그레코-박트리아 시대의 조각품과 지금은 폐허가 쿠샨시대의 수도원들에서 발견된 불상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달바르진테파에서 발굴된 쿠샨왕조 왕자의 상. 1~3세기로 추정. 테르메즈 고고학박물관

소장품에는 지배자들의 편지와 경제 관련 서류 각종 문서들도 포함되어 있다. 16,000 점에 이르는 책과 문서들이 박물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 문서들은 대부분의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되어 있다.

박물관에서 제일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쿠샨시대의 유물들이었다. 대월지에서 출발해 쿠샨왕조로 발전하면서 2000여년 대승불교의 발전과 동아시아로의 불교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그들의 숨소리와 발자취가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시된 유물과 자료는 풍부했다. 감동이 가시지 않아서인지 박물관을 떠나는 발걸음이 아직 구름 속에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