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샤주의 다이아몬드 삼각지대, (3) 랄리트기리

(3) 붉은 언덕, 랄리트기리

오리사(Orissa) 번성했던 불교 신앙과 교육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가운데에 다이아몬드 삼각지대(Diamond Triangle) 있었는데 인접한 개의 언덕에 위치한 우다야기리(Udayagiri), 라트나기리(Ratnagiri), 랄리트기리(Lalitgiri) 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금강승(金剛乘, Vajrayāna) 시작되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랄리트기리의 상징적인 장면이면서 이 인도 땅에서 처음 뿌리를 내렸지만 가르침이 사라져버린 인도의 불교 상황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장면인 것 같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라트나기리를 떠난 우리는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의 마지막 목적지인 랄리트기리로 향했다. 랄리트기리는 라트나기로부터 남서쪽으로 직선거리 10.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의 유적지 근처에는 식당 등의 편의시설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랄리트기리로 이동하는 중에 고속도로 근처의 낡은 호텔에서 간단한 인도식 식사를 마치고 랄리트기리에 도착했다. 벌써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의 위치와 라트나기리에서 랄리트기리로 오는 길.

우리는 아시아(Assia) 산맥에서 뻗어 나오긴 했지만 외따로 있는 란다(Landa) 언덕과 맞은편의 파라바디(Parabhadi) 언덕 사이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는 마을을 가로질러 랄리트기리의 승원 유적이 위치한 란다언덕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의 비포장 주차장에는 오후 늦은 시간이어서 인지 차가 대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서서 유적 사이를 걷는 동안에도 다른 방문객을 전혀 수가 없었으며 주변은 고요하고 평화로울 뿐이었다.

랄리트기리에서 찬드라디티야 사원(Chandraditya Vihar) 가장 중요한 시설들 하나로 기원전 2~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리사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규모가 시설이었다. 다울리 아소카 바위 담마칙령(Dhauli Ashokan Rock Edict) 랑구디(Langudi) 유적이 시기에 속한다. 란다언덕에 대한 발굴 작업에서 마하스투파(Mahastupa), 반원형 차이트야그리하(Chaityagriha, 사리탑실), 4개의 승원, 밖의 차이트야그리하 인근의 많은 작은 스투파들과 봉헌탑 등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랄리트기리의 발굴

랄리트기리에 대한 가장 이른 현대의 기록은 1870 자지푸르(Jajpur) 부행정관이었던 바부 찬드라세크하라 바누르지(Babu Chandrasekhara Banurji) 남겨 놓은 것이다. 그는 랄리트기리의 다른 이름인 날티기리(Naltigiri) 단지 아랍어 라나트(la’nat), 랄리트기리에 대한 예언자의 저주의 변형일 뿐이라고 언급했다.

바누르지는 낮은 언덕 정상 부분에서 크고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졌던 아주 오래된 개의 구조물이 발견됐으며 이곳의 쇠퇴에는 단순히 세월의 길이와는 다른 어떠한 힘이 작용되었다고 언급했다. 그는 또한 이러한 파괴가 무슬림 침공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구조물의 건축 재료를 사용하여 지어진 모스크가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언덕 사이의 고개길에 개의 구조물과 같은 배치를 가진 하나의 구조물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나은 보존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내부에는 1.5m 높이의 불상이 있었다.

가장 높은 언덕의 정상부에서는 원형 건물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언덕의 서쪽 경사지에는 코끼리 동굴이란 뜻의 하티칼(Hathi-khal)이란 곳이 있다. 바누르지는 이곳에서 줄로 서있는 같은 크기의 불상 여섯 개를 봤다고 기록했다. 불상에는 불교 경전 내용이 새겨져 있었고, 걸음 떨어진 곳에는 여신상이 서있었을 기단이 발견되었다. 지역민들은 바누르지에게 날티기리의 사원과 불상들은 바쇼칼파왕(Raja Bashokalpa) 건립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바누르지의 기록을 읽고 자극을 받은 쿠타크의 행정관이었던 빔스(John Beams) 1875 언덕을 방문했다. 그는 알티(Alti) 강들로 둘러싸여 있고 강들이 교차하는 곳이어서 접근이 매우 어려웠다고 기록했는데 날티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는 또한 바누르지의 무슬림 침공에 의한 파괴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예언자가 아니라 솔로몬왕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1928년에는 당시 캘커타대학(Calcutta University) 교수였던 차칼다르(H. C. Chakaldar) 자신의 현장 방문 보고서를 모던 리뷰지(Modern Review) 발표했다. 차칼다르는 랄리트기리에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Bhumisparsha Mudrā) 자세의 거대한 붓다 좌상이 가장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고 말한다. 랄리트기리의 보살상들은 보살상들과 비교할 근엄함과 장엄함이 특징적인 우다야기리(Udayagiri) 보살상들과는 확연히 차별화되는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랄리트기리의 불상들은 인도 지질학자들이 아트가르(Atgarh) 사암(沙巖)이라 명명하고 있는 지역의 돌로 주로 조각한 것이며, 언덕에 있는 채석장은 차칼다르의 방문 때에도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차칼다르는 또한 우다야기리 다른 곳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많은 불상들이 현장에서 반출되었다고 언급했다.

당시 캘커타 인도박물관(Indian Museum, Calcutta) 책임 고고학 담당자였던 프라사드 찬다(Ram Prasad Chanda) 1927~28 기간동안 박물관에 전시할 유물 수집을 위해 현장을 찾았다. 그는 이곳에 개의 언덕이 있으며 언덕이 함께 날라티기리(Nalatigiri) 알려져 있다고 했다. 언덕에는 유적이 없고, 란다언덕과 파라바디언덕에만 유적이 있다고도 했다.

찬다는 또한 대지주인 람고빈다 자그데브(Ramgovinda Jagdev) 이곳에서 4개의 불상을 케드라파다(Kedrapada) 있는 자신의 집으로 옮겨갔다고 언급했다. 후에 다른 대지주에 의해 개의 불상이 반출되었다고 했다. 찬다는 1870 바누르지가 보고했던 하티칼 인근의 여섯 개의 불상을 봤음도 기록했다.

랄리트기리에 대한 체계적 조사와 발굴 작업은 1977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1977 소규모 발굴 작업을 주도한 것은 우트칼대학의 K. S. 베헤라(K. S. Behera) 박사였다. 베헤라는 굽타 예술 전통이 서려 있는 랄리트기리의 조각품들이야 말로 오디샤 조각의 오랜 발전과정에서 잃어버렸던 연결고리를 제공해 준다고 설명한다. 그는 또한 랄리트기리의 지형적 환경이 현장이 묘사한 푸시파기리(Pushpagiri, 波祇釐) 지형과 여러 가지로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발굴작업에서 주목할 만한 발견은 굽타왕조의 찬드라굽타 2(Chandragupta II) 궁수 양식의 금화였다.

인도고고학위원회(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ASI) 실시한 대규모 발굴은 1985~1992년에 이루어졌다. 발굴 과정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4개의 승원, 반원형 차이트야그리하, 개의 스투파, 다양한 조각품과 많은 수의 봉헌탑 등이었다. 랄리트기리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은 다섯 시기로 분류된다: 1 (기원전 1~3세기마우리아왕조 이후 시기), 2 (기원전 1세기~기원후 3세기 쿠샨왕조 이후 시기), 3 (4세기~6세기굽타왕조), 4 (7세기~9세기 굽타 이후 바우마-까라왕조), 5 (10세기부터 이후까지 소마밤슈왕조 중세).

랄리트기리 박물관

주차장에서 출입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면 금방 오른쪽으로 새로 건립된 랄리트기리 고고학 현장박물관(Archaeological Site Museum, Lalitgiri) 만난다. 2018 1224일에 개장한 박물관은 6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곳 랄리트기리에 대한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다양한 불교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랄리트기리의 배치도.
2018년 신축된 랄리트기리의 현장박물관.
2015년 2월 당시 랄리리트기리의 입구 근처에서 박물관 신축을 위한 철근 기초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

박물관 내부에는 중앙홀에 전시된 항마촉지인 자세의 거대한 붓다 좌상을 비롯하여 문수보살, 다라보살, 5선나불, 반야바라밀다, 지세보살(持世菩薩, Vasudhāra) 5~11세기의 다양한 불상들과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지만 박물관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지는 소장품은 사람들이 붓다의 사리가 들어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황금 사리함일 것이다.

(), 동석(凍石), 콘돌라이트(khondolite) 용기에 겹겹이 싸여 가장 안쪽에 황금 사리함에 보존되어 있던 성스러운 뼈와 치아 유물이 랄리트기리의 난다언덕에 대한 ASI 발굴 과정에 발견되었다. 발견된 3개의 사리함 가운데 번째에서는 황금줄이 덮고 있는 또는 치아 유물이 담겨 있었고, 번째에는 금박에 싸여 황금줄에 단단히 매어져 있는 또는 치아 모양의 유물이 담겨 있었다. 번째 사리함에는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사리함에는 아무런 명문도 새겨져 있지 않지만, 전문가들은 금박에 싸여 황금줄로 매여 있는 사리가 붓다의 또는 치아 사리일 것으로 믿고 있다. 그리고 황금줄로만 매여 있는 또는 치아 사리는 아마도 붓다의 뛰어난 제자, 사리자(舍利子, Sāriputta) 또는 목건련(, Moggallāna) 사리일 것이라고 한다. 사리함은 발굴 직후 보안상의 이유로 부바네스와르의 ASI 사무소에 보관되어 오다가 이곳 현장박물관이 신축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랄리트기리의 마하스투파에서 발견된 사리함.
박물관에 전시된 사리함의 모습.

승원1

랄리트기리에서는 4개의 승원이 발견되었다. 모든 승원은 중앙에 개방된 정사각형의 중정(中庭) 또는 안뜰이 있고 중정을 돌기둥이 있는 베란다와 개별 수련실이 둘러싸고 있는 차투-살라(chatuh-sala) 양식으로 지어졌다. 벽의 개별 수련실들 가운데 하나가 주요 신을 모시는 성소 역할을 하고 있다.

승원1의 모습.
승원의 출입구에는 문설주 돌기둥만 양쪽에 서서 자리를 지키고 있고, 연꽃 모양의 돌계단이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박물관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승원1 오른쪽에 나타난다. 승원1 정사각형(36mx36m) 구조이며 동향으로 앉아 있다. 18개의 개별 수련실이 사면의 쪽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신전은 뒤쪽 벽에 위치한다. 다른 입구 하나가 남쪽 끝에 만들어져 있으며 저수지는 뒤쪽에 있다. 출입구, 기둥, 계단, 배수관을 제외한 승원 전체가 벽돌로 지어졌다. 신전 안에는 항마촉지인 자세의 거대한 불상이 있었으나, 현재는 현장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승원3

승원1에서 걸음 나가지 않아 남동향으로 앉아 있는 승원3 나타난다. 승원3 약간 직사각형(28mx27m) 구조를 띠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배치는 승원1 차이가 없는 모습이다. 사면의 승원 벽에 15개의 개별 수련실이 배치되어 있다. 뒤쪽 벽에 있는 신전의 남쪽 벽에 설치된 벽감에서 항마촉지인 자세의 붓다상이 발견되었다. 역시 벽돌로 건립된 승원도 그동안 승원의 벽돌을 사람들이 함부로 가져가버려 1~2m 높이의 벽만 남아 있다. 승원에서 발견된 유물을 승원은 5~6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4개의 승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승원3의 모습.

승원4

승원4 승원3에서 건너편에 서향으로 앉아 있으며, 정사각형(30mx30m) 구조이다. 다른 승원들처럼 차투-살라 양식의 구조이지만 승원4에는 모두 10개의 개별 수련실이 남쪽과 북쪽 벽에만 배치되어 있다. 뒤쪽 벽에 있는 신전에는 원래 있었던 자리에서 노출된 앉아 있는 항마촉지인 자세의 거대한 붓다상이 있으나 현재 머리 부분은 사라지고 없는 상태이다. 붓다상은 여러 개의 조각된 돌로 구성되었던 듯하다.

승원에서 Sri Chandraditya Vihara Samagra Arya Bhikshu Sangha라는 명문이 새겨진 테라코타 명패가 발견되면서 승원이 찬드라디티야 사원이라고 불렸음을 알려준다. 명패에는 위쪽에 바퀴 문양이 새겨져 있고 옆으로 사슴이 새겨져 있다. 새겨진 문자로 9~10세기 것으로 추정되었다. 굽타시대 브라미(Brahmi) 문자로 새겨진 개의 부러진 명패가 추가로 발견되었으며 여기에도 찬드라디티야 사원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승원은 4~5세기까지도 찬드라디티야 사원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승원4의 전경.
승원4의 모습.
뒤쪽 벽 중앙에 있는 신전에는 천장이 사라졌고 머리 부분이 없는 붓다상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반원형 차이트야그리하

반월형 차이트야그리하 1986~87년과 1987~88 발굴 시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구조물 역시 벽돌로 지어졌으며 동쪽을 향하고 있다. 차이트야그리하는 길이가 22m, 너비가 11.4m이며 끝에 있는 반원 부분에는 돌로 만들어진 원형 스투파가 있다. 차이트야그리하의 너비는 3.3m이다. 이러한 형태의 스투파실은 라트나기리나 랑구디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다.

스투파실에는 돌출된 출입문이 있었으며, 바깥 둘레에는 탑돌이를 위한 것인 바닥에 돌로 만들어진 보행로가 있다. 그리고 보행로의 바깥 가장자리를 따라 원래부터 자리에 있었는지 아니면 주변에서 옮겨 놓은 것인 지는 없으나 작은 봉헌탑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다. 스투파실 입구의 왼쪽으로 쿠샨시대와 굽타시대의 브라미 문자로 새겨진 석판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콘돌라이트로 조각된 붓다의 두상이 스투파의 중앙에서 누운 상태로 발견되었다.

반월형 차이트야그리하의 전경.
반월형 차이트야그리하는 동서로 자리 잡고 있으며 동쪽에 입구가, 서쪽 끝 반월 부분에 원형 스투파가 있다.
차이트야그리하의 바깥쪽에는 돌로 포장된 보행로가 있으며 바깥 경계에는 봉헌탑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랄리트기리에서는 반월형 차이트야그리하 주변에 특히 봉헌탑들이 많이 모여 있다.

차이트야그리하 통로 남쪽 측면의 받침대에 새겨진 명문으로 보아 구조물은 랄리트기리에서 가장 오래된 구조물로 보인다. 정사각형(1.42mx1.42m) 받침대에는 기원전 2~3세기 브라미 문자로 새겨진 프라크리트어(Prakrit) 줄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사리함이 나온 마하스투파와 함께 차이트야그리하는 랄리트기리가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불교 유적지임을 증명한다.

랄리트기리의 차이트야그리하 받침대 명문, 기원전 2세기

마하스투파

차이트야그리하에서 다시 조금 앞으로 나가면 기다란 1 건물 1동이 나타난다. 랄리트기리 입구에서 만났던 신축 박물관이 세워지기 전까지 랄리트기리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많은 유물과 조각품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어서 임시 박물관의 역할을 했었다. 때는 칸막이도 없이 뚫린 공간에 유물들을 대충 열을 지어 세워놓았지만 그나마 유물들이 비를 피할 있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었다.

입구의 신축 박물관이 건립될 때까지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던 임시 박물관.

임시 박물관 건물 뒤편에 있는 란다언덕의 가장 높은 지점에 대한 발굴 작업에서 심하게 파손된 원형(원둘레가 대략 36m) 스투파가 발견되었다. 스투파는 진흙 반죽에 돌더미를 아무렇게 쌓아 조성되었으며 겉면에는 얇은 마름돌을 쌓아 올렸다. 스투파 꼭대기에는 하르미카(harmika) 차트라(chattra) 있었으나, 발굴 당시 하르미카의 잔해만 발견되었다. 그리고 반원형 스투파 둘레에는 탑돌이를 위해 돌로 포장된 보행길이 만들어져 있다.

임시 박물관 뒤편 언덕에 마하스투파가 위치한다.
나지막한 계단 끝에 마하스투파가 보인다.
마하스투파의 모습.

스투파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발굴 과정에 스투파의 중심부에서 봉헌탑 모양의 콘돌라이트로 만들어진 개의 사리함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신축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바로 사리함이다. 사리함들은 스투파의 가장 중심부에서 각각 남쪽, 북쪽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산치(Sanchi)에서도 3개의 사리함이 발견되었으며 명문에 따르면 각각 붓다와 붓다의 제자인 사리자와 목건련의 사리함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랄리트기리에서도 같은 숫자의 사리함이 발견되면서 이들 사리함들을 붓다와 제자의 사리함으로 추정하는 듯하다. 제자의 사리함 가운데 하나의 내용물은 분실되었다는 것이다.

승원2

마하스투파에서 내려와 언덕을 내려오다가 입구의 신축 박물관 뒤로 길을 따라 가면 승원2 다다른다. 승원2 랄리트기리에서 발견된 가장 작은 승원이다. 승원은 동향으로 앉아 있으며 5개의 개별 수련실이 있다. 승원 역시 뒤쪽에 신전이 있다. 그러나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승원 전체가 심하게 도굴된 상태였으며 승원의 벽도 기단 부분까지 파손된 상태였다고 한다. 발굴 당시에는 북쪽과 서쪽 벽만이 발견되었으며, 후대 어느 시점엔 힌두사원으로도 사용되었었다.

랄리트기리야 말로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의 유적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아니라 오리사에서 불교의 출발점들 가운데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곳의 일부 유적과 유물은 마우리아(Maurya) 왕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4세기경에 사람들이 이곳을 완전히 버리고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는 줄곧 종교적 활동이 이루어졌다. 이곳이 당시에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붓다의 사리가 붓다가 가장 아끼던 제자의 사리와 함께 이곳에 모셔지게 것이 아니었을까?

오디샤주의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에 대한 발굴은 최근에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랄리트기리에 대한 체계적인 대규모 발굴만 보더라도 1992년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따라서 아직 그리 널리 알려지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오디샤주에서도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에 대한 자부심이 높으며 보드가야 사르나트와 같이 순례객과 관광객이 찾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매년 부바네스와르에서 국제불교회의(International Buddhist Conclave) 개최하고 있으며 붓다와 관련된 성지를 운행하는 특별관광열차 대열반특급(Mahanirvana Express) 많은 노력 끝에, 손님 부족으로 중단되긴 했지만, 오디샤에까지 연장 운행하도록 하기도 했었다. 언젠가는 지금 우다야기리, 라트나기리, 랄리트기리에 흩어져 있는 유적들 사이를 거닐며 만끽할 있는 고적함을 누릴 있는 시간도 다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랄라리트기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