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머무는 삶을 꿈꾸며...
不二 / 2020. 4. 1. 11:14 / 세계여행/스리랑카

피두랑갈라, 장대한 시기리야 조망점

피두랑갈라(Pidurangala)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관광명소인 시기리야(Sigiriya)로부터 북쪽으로 직선거리 1km 떨어진 곳에 솟아오른 바위산이다. 이곳은 시기리야 성채(城砦) 가장 조망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시기리야의 모습도 훌륭하지만 사방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전경도 숨을 멎게 만든다. 또한 피두랑갈라 정상은 멋진 해돋이를 감상할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어 해가 뜨기 전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피두랑갈라   정상에서   바라본   시기리야의   모습 .
시기리야 북쪽 사자문과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정상에 오르면 흔들바위를 만난다. 피두랑갈라가 화산활동으로 200m를 솟아오를 때도 굴러 떨어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나 보다!
시기리야를 배경으로 다양한 모습을 연출한다.

이곳 정상에서 누릴 조망은 정말 뛰어나다. 이곳 정상에서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대자연을 바라보면 감동이 밀려온다. 아마도 시기리야에서 있는 전경보다 뛰어난 같다. 그래서일까? 시기리야처럼 화려하지 않아서인지 이곳을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었다고 하는데, 이제 입소문으로 알려져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파두랑갈라와   시기리야   주변   지도.

시기리야 남문 입구에서 왼쪽으로 해자를 따라 가다 시기리야 북쪽에서 북쪽으로 길로 접어들면 그리 오래지 않아 피두랑갈라 입구에 이르게 된다. 거리는 2.6km 다른 길보다는 짧지만 이곳의 경비원이 차량을 통과시켜 주지 않아서, 차량으로 이동할 경우 되돌아서야 가능성이 크다. 차량이나 툭툭으로 이동할 경우, 다른 길은 시기리야호수를 지나 하바라나(Habarana) 향하는 길에서 서쪽으로 길로 들어서면 피두랑갈라에 도착할 있다. 길은 길이가 3.5km 이르며, 정글 속으로 길을 따라가다 보면 구석구석에서 민박집과 게스트하우스를 만난다.

멀리서 보면, 피두랑갈라는 사방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벌판에 봉곳이 솟아오른 소녀의 젖가슴 같다. 피두랑갈라는 시기리야와 같이 화산폭발로 생성되어 주변 평지에서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바윗덩어리이다. 바위기둥이 솟아오른 모습의 시기리야보다는 피두랑갈라가 좀더 보인다. 반면에 피두랑갈라의 정상에 오르면 시기리야와 같이 거대한 바윗덩어리이지만 심하게 경사가 있다. 아마도 옛날 시기리야 정상에 왕성을 건설했던 사람들에게 피두랑갈라의 정상은 그들의 목적에 들어맞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기리야 북쪽 정상에서 바라본 피두랑갈라의 모습. 시기리야와 같이 화산활동으로 융기한 바윗덩어리이지만 외관은 봉곳이 솟아오른 산봉우리 모습이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배경으로 갑자기 솟아 있는 산봉우리 하나가 신비롭다.

피두랑갈라사원

피두랑갈라에 오르려면 입구에 있는 불교사원을 통과해야 한다. 길가에서 가까운 사원입구로 들어서면 스리랑카의 불교사원을 방문할 때면 언제나 그런 것처럼 신발을 벗어야 한다. 이곳에는 승려 기거 시설, 불상을 모신 법당, 강연실 등으로 갖춰져 있다. 사원을 지나면 다시 신발을 신고 산을 올라야 하므로 우리는 신발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실제론 기부금으로 1인당 500루피) 구입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맞은편에 외관이 하얀색인 석굴사원이 나타난다. 이곳은 불상을 모신 법당이다.

피두랑갈라 정상에 오르는 길.
피두랑갈라 정상에 오르려면 이 입구를 통과해서 사원을 지나야 한다.

석굴사원 암벽의 상단 부분에는 담불라 석굴사원(Dambulla Cave Temple) 경우와 마찬가지로 빗물이 석굴 내부로 흘러 들어가지 못하도록 처리되어 있었다. 부분에 새겨져 있는 브라미(Brahmi) 문자로 추정해보면 석굴사원에 불교사원이 조성된 것은 최소한 기원전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피두랑갈라 언덕 기슭에 자리잡은 석굴사원 가장 안쪽에는 중앙에 와불상이 길게 누워 있고 좌우 양쪽 끝에는 입상 또는 좌상의 불상들이 마주보고 있다.

양쪽 끝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불상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석굴사원의 안쪽, 불상이 모셔져 있는 부분을 제외하면 외부의 하얀색 건축물과 승려들 기거 시설 강연실 등은 모두 역사가 그리 오래지 않다. 최근의 보수작업으로 양쪽의 불상에 현대적 기법이 적용되긴 했지만 원래의 우아한 모습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내실의 벽에는 붓다의 생애에서 주요한 장면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내실 출입문 주변에는 실물 크기의 마리의 사자와 칼을 쥐고 있는 수호신들이 지키고 있다.

피두랑갈라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석굴사원의 외관 모습.
하얀색 석굴사원 건물로 들어서면 불상을 모신 내실 입구를 사자와 수호신들이 지키고 있다.
석굴사원 내부에 불상을 모신 내실의 모습. 중앙에 길게 와불상이 모셔져 있고 좌우 양쪽 끝에 입상 또는 좌상의 불상이 마주보고 있다.

사원의 이름은 피두랑갈라 시기리 라자마하 사원(Pidurangala Sigiri Rajamaha Viharaya)이다. 피두랑갈라의 역사는 기원전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부터 불교사원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시기리야에 성채와 도시를 건설했던 카샤파 1(Kashayapa I, 473-495 AD) 통치하던 시기였다.

그는 당시 적자였던 목갈라나(Moggallana) 왕자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을 염려하여 아버지인 다투세나(Dhatusena, 455–473 AD)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 남인도로 피신한 목갈라나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를 버리고 이곳의 깎아지른 바위산 시기리야에 궁전과 난공불락의 요새를 건설했다고 전한다. 그는 시기리야에서 수행하던 승려들을 피두랑갈라로 옮기도록 하고 새로이 사원을 건립하도록 많은 기부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피두랑갈라라는 말도 싱할라어로 무더기를 기부한이란 의미라고 한다.

피두랑갈라 주변의 고고학 발굴현장 배치도.
피두랑갈라사원 길 건너편 북쪽에 있는 이 고대 스투파는 카샤파왕의 다비식이 이루어졌던 곳으로 전해져 온다. 스투파 위쪽 구조물은 사라지고 없다.

당시 카샤파왕이 건립했다는 우팔라바나 카샤파 기리 사원(Uppalavanna Kashyapa Giri Viharaya) 피두랑갈라에 위치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재의 피두랑갈라 시기리 라자마하 사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피두랑갈라 주변 일대에 넓게 자리잡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현재의 피두랑갈라사원으로부터 길을 건너 북쪽으로 200m 되는 곳에 퍼져 있는 피두랑갈라 고고학 발굴현장이 일부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엔 유적 잔해들이 여전히 곳곳에 남아있다.

석굴사원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피두랑갈라로 오르는 돌계단이 시작된다. 돌계단을 오르기 전에 신발을 다시 신을 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그리 힘들지 않을 정도이며 천천히 올라가도 30분이 걸릴까 말까 정도였다. 대부분의 길은 전혀 복잡하지 않아 따라갈 있을 정도였으며, 평지도 나타나지만 그리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진다.

석굴사원에서 시작되는 돌계단 입구.
정상으로 가는 돌계단은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었다.
돌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도달하면 오른쪽으로 거대한 피드랑갈라 바윗덩어리를 두고 산을 오르게 된다. 왼쪽으로는 숲이어서 멀리서 보면 하나의 산봉우리처럼 보인다.

벽돌 와불상

한동안 길을 따라 올라가면 만한 거리에 평지가 나타난다. 운동장처럼 넓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규모의 공간이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절벽 아래 부분에는 움푹 파인 공간이 길게 자리하고 있어 예전엔 석굴사원이 자리하고 있었던 같다. 석굴은 벽돌 벽으로 구분되어 여러 개의 방을 이루고 있는데 한가운데 가장 방에 13.7m 길이의 아름다운 벽돌 와불상(臥佛像) 누워있다. 벽돌로 불상을 조성하는 것은 폴론나루와(Polonnaruwa) 시대 불상의 특징이며, 불상의 의상 스타일도 폴론나루와 시대 불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벽돌 와불상 앞의 평지의 모습. 와불상 앞뒤로 여러 개의 방들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벽돌 와불상에는 외관을 장식했던 회반죽의 원래 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다.
와불상의 상반신은 오랜 세파를 겪으며 훼손되었다가 복원되었다.

와불상의 발치 아래로 6-7세기 싱할라어로 바위 위에 새겨진 명문(銘文) 있으나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닳아서 해독에 어려움이 있다. 어느 역사기록에도 피두랑갈라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곳의 여기저기에 새겨진 명문들이 피두랑갈라의 역사에 대한 해답을 제공할 있었을테지만, 이렇게 마모로 해독이 어렵거나 브라미어 명문처럼 너무 간단해서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미래에 신기술이 나와 완전한 해독의 실마리를 풀게 날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발걸음을 옮겼다.

피두랑갈라 정상

벽돌 와불상을 지나면, 정상까지 남은 구간이 아주 어렵지는 않지만 거의 암벽등반에 가까운 코스이다. 바위를 기어올라 가기도 해야 하고, 좁아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기다렸다가 다시 오를 있기도 하다. 활동이 자유로운 젊은이들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은 오르기 힘든 길이다. 그리고 마지막 걸음은 등반의 화룡점정이라도 되듯이 크게 뛰어올라야 하는데 거대한 바위에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마침내 정상에 올라서면 모든 수고로움이 하나도 아깝게 느껴지지 않을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피두랑갈라에서 바라보는 시기리야의 모습에서 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인생샷하나 만들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경치였다. 그래서인지 시기리야를 바라볼 있는 흔들바위 주위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다.

피두랑갈라에서 바라본 남쪽 전경.
피두랑갈라에서 바라본 남쪽 전경.
시기리야 조망점에 바라본 시가리야의 북면 모습.

그러나 흔들바위를 지나 정상의 넓게 열린 공간으로 나오면 사방 킬로까지 시야를 가리는 것이 전혀 없다. 거대한 바윗덩어리 위에 신기하게도 무리의 나무가 있다. 나무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좁고 비교적 평평한 반면, 서쪽으로는 넓고 크게 경사가 있다. 주변 경치를 휴대폰에 담는 사람들도 있고, 여기저기 홀로 앉아 명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해돋이 조망점에 바라본 피두랑갈라 정상의 모습.
피두랑갈라 정상에서 만나는 한 무리의 나무들.
해돋이 조망점에 바라본 북쪽 전경.

내려가는 길은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간다. 오래 머물고 싶고, 다시 찾고 싶은 곳이었다. 영감을 받고 싶을 찾고 싶은 곳이었다. 고대로부터 진리를 찾아 정진하기 위해 불교 승려들이 밀림 한가운데 불쑥 솟아 있던 이곳에 자리 잡았던 것도 그런 이유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우리는 하산을 시작했다.

不二 / 2019. 4. 5. 14:47 / 세계여행/스리랑카

시기리야, 정글 한가운데 있는 고대 하늘도시

오래 전에 TV 다큐멘터리에서 스리랑카의 정글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와 바위 꼭대기에 지어진 신비로운 궁전에 대한 이야기를 적이 있었다. 모습은 오랫동안 머리 속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곳은 시기리야(Sigiriya), 혹은 싱하기리(Sinhagiri) 불리는 일명 사자바위와 위에 지어진 도시이자 요새로 스리랑카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행지이기도 했다.

밀림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하늘도시 , 시기리야

역사적 배경

화산 폭발로 생성된 바위는 주변 평지에서 180m 높이까지 치솟아 있고, 우리가 오늘날 보게 되는 것처럼 1.5 헥타르에 이르는 정상의 평지까지 좁은 계단과 작은 길을 연결하여 궁전, 저수지, 정원 등을 만들고 아래 산기슭에는 정원과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건설했던 사람은 5세기 지역을 지배했던 카샤파 1(Kashyapa I, 473–495 AD)였다.

그는 당시 적자였던 목갈라나(Moggallana) 왕자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을 염려하여 아버지인 다투세나(Dhatusena, 455–473 AD)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 남인도로 피신한 목갈라나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버리고 이곳의 깎아지른 바위산에 궁전과 난공불락의 요새를 건설했다고 전한다.

남쪽에서 바라본 시기리야의 모습
서문을 통과해 서쪽에서 바라본 시기리야의 모습

서문주차장과 박물관

우리 일행이 시기리야 근처에 도착하자 멀리 거대한 몸체의 바위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자바위는 생긴 모습 때문에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모양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서문주차장에서 차에서 내려 먼저 박물관으로 향했다. 외국인들은 보통 서문주차장을 통해 시기리야로 접근하게 된다. 외국인 입장권은 서문주차장 가까이에 있는 박물관에서 판매하기 때문이었다. (외국인 입장료는 1인당 $30이다.) 지점을 지나면 화장실을 사용할 없기 때문에 화장실 사용도 박물관을 찾아야 하는 중요한 과제 하나이다.

시기리야 주변 지도

많은 사람들이 바쁜 마음에 표만 구입해서 서둘러 시기리야로 향한다. 그러나 시간 여유가 있다면,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도 충분히 수고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자바위가 지질학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이곳의 고대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등을 각종 시청각 자료를 통해 쉽게 있고, 현장에서는 사람들에게 밀려 건성으로 보기 쉬운 유명한 시기리야의 프레스코 벽화를 재현된 벽화를 통해 여유롭게 감상할 수도 있다. 또한 동안의 발굴 결과를 집약한 시기리야 고대도시의 모형을 통해 복원된 고대도시를 만날 수도 있다.

서문 입구를 통과하며 볼 수 있는 해자의 모습
견원지간 ( 犬猿之間 ). 박물관 근처에서 개와 원숭이가 죽일 듯이 싸우는 모습에 잠시 갈 길을 멈추었다 .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없지만 스리랑카나 인도 등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잠시 눈길을 끌었다 .

물의 정원과 바위정원

박물관에서 시기리야를 향해 조금 걷다 보면 고대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해자를 만난다.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방어에 치중한 요새의 일면을 실감하며 고대도시로 들어서면 넓게 펼쳐진 정원을 만난다. 거대한 바위로 향하는 가운데 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어느 정도 발굴과 복원이 이루어져 있고 이와 대칭으로 조성된 왼쪽은 미래를 위해 발굴을 미루어 모습이었다. 5세기에 지어졌음에도 붉은 벽돌, 잔디, 연못 등으로 조성된 물의 정원(Water Gardens) 상당히 고풍스런 모습이었을 것임을 짐작할 있었다. 지금 평가해도 뛰어난 수로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하니 최고의 고대 계획도시로 평가받는 이유를 있을 같았다.

물의 정원 모습
해자와 물의 정원 사이에 있는 벽돌 내성벽에서 바라본 물의 정원
고대 분수시설로 지하에 물울 공급하는 수로가 설치되어 있다 . 비가 올 때면 여진히 분수가 작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시기리야 정상에서 내려다 본 물의 정원 모습과 왼쪽 아래 편에는 남문주차장이 보인다 .

고개를 드니 바로 앞에 거대한 사자바위 성채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정원이 끝나는 지점에서 성채가 시작되고 여기서부터는 1,200개의 계단을 통해 정상에 이르게 된다. 성채를 이루는 바위 곳곳에 홈이 파져 있었다. 이들 홈에 붉은 벽돌이 얹혀져 벽돌 벽과 바위가 이어져 하나의 성채를 이루었던 했다. 벽돌담 안쪽으로 바위와 바위 사이에는 돌들이 쌓아져 빈틈을 견고하게 메우고 있었다.

벽돌이 바위와 맞물리도록 바위에 홈이 파져 있다 .
바위 , 벽돌 , 큰 돌이 서로의 빈 공간을 메우고 맞물려 견고한 성벽을 이루고 있다 .

계단 층을 올라가면 바로 아치형 바위입구가 성채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고 있다. 지형지물을 이용한 훌륭한 군사용 방어사설이었다. 이러한 아치형 바위입구는 이곳 말고도 여러 곳에서 성채의 입구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은 성채의 입구이기도 하지만 바위정원(Boulder Gardens) 입구이기도 했다.

바위정원 입구의 아치형 바위입구

테라스 정원과 사자문

바위정원을 지나자 계단은 좀더 가팔라지면서 벽돌과 석회석으로 만든 여러 층의 테라스정원(Terrace Gardens) 지났다. 그리고 얼마간을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거울의 (Mirror Wall) 사자문(Lion Gate) 있는 사자바위의 중간 부분에 도달했다. 부분은 테라스정원의 가장 부분에 속한다. 여기서는 먼저 바위 표면에 고정된 19세기 철제 나선형 계단을 통해 흔히 시기리아의 미인들(Sigiriya Damsels)이라고 불리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유명한 프레스코 벽화가 있는 절벽에 움푹 파인 공간으로 올랐다. (벽화가 있는 공간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프레스코 벽화와 거울의 벽이 있는 시기리야의 허리 부분의 모습
거울의 벽은 거대한 바위의 허리를 휘감은 채 기나긴 세월을 견뎠다 . ( 왼쪽 ); 프레스코 벽화와 거울의 벽으로 가는 통로의 모습 . ( 중간 ); 프레스코 벽화를 보기 위해서는 좁은 나선형 철제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 ( 오른쪽 )

미인도는 5세기에 그려졌다고 하니 1500년이 지났음에도 빼어난 고대 벽화기술 덕에 지금도 섬세하고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스리랑카에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비종교적 벽화이면서 가장 많이 복제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벽화가 그려진 프레스코 벽은 한때 세상에서 가장 갤러리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사자바위의 서쪽 표면에 가로로 140m, 세로로 40m 폭으로 바위의 북동쪽 가장자리까지 펼쳐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500 명이 그려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22명의 여인들만이 남아있다.

시기리야를 상징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인 시기리야 미인도 벽화 .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
시기리야 서쪽 면의 북동쪽 가장자리로 이곳까지 시기리야의 미인도가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

미인도 벽화가 있는 곳까지 오르내리는 나선형 철제 계단은 쌍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데 매우 좁아서 병목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종종 한낮에는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성채 입구까지 줄이 길게 늘어져 있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지체하게 된다. 이를 피하고 싶은 사람들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은 이른 아침 또는 늦은 오후에 방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낮이면 거울의 벽과 프레스코 벽화가 있는 바위 허리 부분으로 올라가기 위해 테라스정원 아래까지 긴 줄이 이어진다 .
긴 줄은 생각보다 더디게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예상보다 긴 시간이 걸린다 .

벽화를 보고 나면, 길은 바깥 쪽이 거울의 벽으로 막힌 사자바위 표면에 홈을 따라 나있다. 거울의 표면은 원래 석회, 계란흰자, 밀랍, 야생 꿀을 섞어 만들어 광택이 많이 나는 석고반죽이 입혀져 있었으며, 원래의 석고반죽이 입혀진 일부 구간이 아직도 남아 있어 놀라운 광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표면은 이곳을 방문했던 사람들이 남긴 낙서들로 뒤덮혀 있었으며, 주로 6세기부터 14세기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거울의 벽 통로의 모습 . ( 왼쪽 );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원래의 광택을 볼 수 있으며 배수구멍도 볼 수 있었다 . ( 중간 ); 벽 표면에 남겨진 낙서들 . ( 오른쪽 )
우리나라 전방에서 볼 수 있는 적 탱크의 전진을 저지시키기 위한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과 같이 그 옛날 돌 조각으로 지탱시켜 놓은 거대한 바위덩이를 볼 수 있다 . 적이 쳐들어오면 저 바위를 아래로 굴려 아래의 적을 공격했을 것이다 .

거울의 벽을 지나자 사자바위의 북쪽으로 갑자기 너른 평지가 앞에 펼쳐졌다. 사자문 테라스였다. 사자문은 바위산 정상의 궁전으로 올라갈 있는 유일한 계단을 지키는 정문이었다. 시기리야의 상징적인 존재들 가운데 하나인 사자문은 지금은 개의 거대한 발과 사이에 설치된 고대 석회암 계단 주변의 벽돌 구조물만 남아 있었다. 사자문 앞에 펼쳐진 테라스는 사자문을 통과해 정상으로 향하기 대기실과 같은 역할을 했을 같았다. 테라스 한쪽에는 사자바위에서 유일하게 물을 구입할 있는 곳이 있고, 옆쪽에서는 현지인들이 수도에서 물을 바로 마시고 있었다.

원래는 방문객들이 크게 벌어진 사자의 입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옛날 이곳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입구에 버티고 거대한 사자상에 압도당했을 것이다. 사자는 싱할라 왕족의 상징이었으며, 사자상의 크기는 아마도 카샤파 1세가 나타내고 싶었던 자신의 위엄, 권력, 그리고 왕위 찬탈로 손상 받은 왕권 정당성의 크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모든 것이 결국 일장춘몽이었던 듯하다.

사자문 테라스에서 볼 수 있는 사자바위 북면의 모습 . 정상까지 오르는 전체 계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위키피디아
사자문의 현재 모습 . 사자의 발만 남이 있다 .
위에서 바라본 사자문과 사자문 테라스의 모습 .
정상으로 오르면서 시기리야의 북쪽으로 피두랑갈라를 볼 수 있다 .

사자바위 정상의 궁전

사자의 사이로 돌계단을 올라가자 지그재그로 이어진 철제계단으로 연결되었다. 사자바위 북쪽 표면에 고정된 좁은 철제계단은 조금 가파른 부분도 있었지만 그리 어려운 코스는 아니었다. 철제계단이 없었던 고대에는 거울의 벽처럼 바깥 쪽에 벽돌 벽이 있고 기와로 연결된 지붕이 갖춰진 석회석 계단이 정상까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상의 북서쪽에는 궁전 건물의 기단부들이 남아 있다 .
정상의 남서쪽 모습

그리고 철제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갑자기 넓은 평지가 나타났다. 시기리야 정상의 왕의 궁전, 하늘도시였다. 정상의 궁전은 고대도시의 중심이기도 했다. 주변 평지에서는 180m, 해수면에서는 360m 높이에 있는 정상은 1.5 헥타르 규모의 계단 모양의 평지로 동쪽이 낮고 서쪽은 조금 높은 형태였으며, 특히 남동쪽에 정상의 빗물을 모을 있는 저수시설이 여럿 설치되어 있었다.

정상의 남동쪽 모습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 여유롭게 앉아 있고 싶어졌다. 정상에 오른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편한 곳에 앉아 주변을 몸으로 느끼려는 듯했다. 사방이 트여 있어 밀림 멀리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불현듯 궁전의 주인은 이러듯 난공불락의 요새를 지어놓고 막상 적이 침공하자 적을 맞으러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싸우다 참패를 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자신이 걱정했던 것처럼 남인도로 피신했던 동생 목갈라나 왕자가 마침내 타밀 용병들을 규합해 복수를 위해 쳐들어왔다고 한다. 카샤파왕은 침략군을 맞이하기 위해 요새에서 내려와 앞에서 코끼리를 타고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평지로 진군했다. 그러던 코끼리가 놀라 대오를 이탈하자 뒤따르던 군사들은 왕이 도망치는 것으로 오인해 왕만 혼자 남겨둔 모두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혼자 생포될 것을 두려워한 왕은 자신의 칼로 자결했다고 전한다. 허망한 결말이 아닐 없다.

정상의 남동쪽 끝에 은밀한 목욕탕이었을 것 같은 조그만 물탱크 안에는 연꽃만 가득 피어나고 있었다 . 주인은 오래 전에 가고 없는 허망함에 바쳐진 연꽃 같아 가슴에 짠한 감동이 밀려왔다 .

알현실과 물탱크 바위

내려오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는 좀더 빠르게 내려올 있었다. 사자바위 아래까지 내려와 남쪽 기단부의 바위정원에 이르면, 고대 스리랑카의 독특한 바위 건축물을 만나게 된다. 고대 바위 건축에서는 바위 위에 건물이나 정자를 짓고, 바위 아래 부분에는 벽화가 그려진 바위동굴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바위 건축의 대표적인 예가 알현실(Audience Hall) 물탱크(Cistern) 바위이다.

왼쪽 물탱크 바위와 오른쪽 알현실 바위 사이에는 대리석 바닥의 통로가 나 있었다 .
오른쪽의 알현실 바위는 왼쪽의 물탱크 바위의 일부분이었으나 인위적으로 분리되었다 . ( 왼쪽 ); 물탱크 바위에서 가운데 통로가 물을 흘려 보내는 홈이 파져 있었다 . ( 중앙 , 오른쪽 )

알현실 바위 정상은 평평한데 한쪽 끝에 5m 길이의 옥좌가 있고 주위에 알현실 건물이 있었던 듯한 흔적이 있다. 바로 맞은편의 물탱크 바위 정상에는 한가운데에 물을 저장할 있는 물탱크가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바위의 아래 부분에는 여러 겹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 조그만 동굴 같은 공간이 있다. 특히 물탱크 바위 아래에 있는 동굴에는 돌로 만든 옥좌 또는 제단이 있고 거울의 벽에서처럼 낙서들이 어지러이 벽과 천장을 장식하고 있었다. 특히 천장에는 훼손된 미인도의 일부가 희미하게 남아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알현실 바위는 원래 물탱크 바위의 일부였으나 인위적으로 잘라내 지금의 모습이 것이다.

알현실 바위 위 먼 쪽으로는 돌로 만든 옥좌가 보이고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 바위 아래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던 공간이 있다 .
물탱크 바위 아래에 있는 동굴 모습 .
물탱크 바위 아래 동굴의 천장에는 훼손된 미인도의 일부를 아직도 볼 수 있었다 .

물탱크 동굴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나오면 개의 아치형 바위입구를 지나 마치 코브라가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듯하여 코브라 머리 바위(Cobra Hood Boulder) 불리는 바위를 지나자 금방 남문주차장에 당도했다. 외국인들도 보통 이곳으로 하산하기 때문인지 기념품 가게들도 모두 이곳에 모여 있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카샤파 1세의 재위 기간은 18년이었다고 한다. 가운데 시기리야의 고대도시를 건설하는데 8년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이곳을 왕궁으로 온전히 사용했던 기간은 10 남짓이었을 것이다. 짧은 기간에 엄청난 규모의 도시를 건설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희생도 많이 따랐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있다. 그래도 후세에 전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보면 헛된 일을 것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시기리야를 떠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코브라 머리 바위의 모습

 

참고 사항

시기리아 세계문화유산 운영 시간: 오전 7 오후 5

시기리아 박물관 운영 시간: 오전 7:30 – 오후 5:30

입장료: 외국인 미화 30

주변에 갈만한

  • 피두랑갈라(Pidurangala) 바위: 시기리야에서 북쪽으로 직선으로 830m 거리에 있는 바위산이다. 시기리야의 전체 모습을 조망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고대에 불교사원이 있던 곳이므로 거대한 와불상 등 문화재가 있으며, 입장료는 500루피로 저렴했다. 일출이나 석양을 보기에도 좋은 장소이다.

  • 코끼리 사파리: 하바라나 주변에 있는 국립공원이나 야생보호지역에서 코끼리 사파리를 즐길 수 있다. 가까이에서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후룰루 에코파크(Hurulu Eco Park) 또는 미네리야국립공원(Mineriya National Park)인데 코끼리들이 물을 찾아 이동하기 때문에 시즌에 따라 코끼리들이 몰리는 곳이 있으며 사파리 지프 운전사들이 그때그때 코끼리들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 입장료와 사파리 지프를 패키지로 구매하게 되는데 이를 판매하는 곳이 하바라나 시내에 10여 곳이 있으나, 하바라나 빌리지 바이 시나몬 입구에 가장 큰 판매소가 있다.

  • 오크레이 목각장식품점(Oak Ray Woodcarving): 시기리야의 서문주차장과 남문주차장 진입로 중간에 있으며, 비교적 품질이 좋은 목각 기념품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직접 제작한 것들도 있고 가져다 파는 것들도 있다. 입구의 작업장에서는 시기리야 벽화 등에 사용된 천연물감을 만드는 시범을 볼 수 있다.

 

문화삼가지 지도

위치: 아누라다푸라-폴론나루와-담불라로 연결되는 문화삼각지 내에 위치하며 접근로는 양호한 편이다.

도로: 담불라 또는 하바라나를 통해 접근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콜롬보에서 하바라나까지 5시간 가량 소요된다. 관건은 중간의 쿠루네갈라(Kurunegala)까지 차량 통행이 많은 편이며, 이에 따라 소요될 수도 있다. 콜롬보에서 차량으로 이동할 경우 차량의 통행이 적은 새벽에 출발하는 것이 좋다. 버스로 이동할 경우, 담불라 또는 하바라나까지 이동해서 시내버스 또는 툭툭을 이용해 시기리야까지 이동할 있다.

철도: 하바라나까지 기차로 이동할 있고, 다시 툭툭을 이용하면 편하게 이동할 있다.

항공: 시기리야에 작은 공항이 있어서 콜롬보에서 국내선 항공(시나몬항공)으로 직접 이동이 가능하다

숙소: 시기리야 근처에도 호텔과 게스트하우스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보통은 지역의 다른 관광 일정을 고려할 담불라 또는 하바라나에 숙소를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담불라

  • 기만할라호텔(Gimanhala Hotel): 담불라 시내 중심거리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편리하고, 시설이 오래됐지만 운치가 있다.

  • 호텔 골든레이(Hotel Golden Ray): 새로 지은 호텔로 깨끗하지만, 중심거리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야 해서 특히 밤에는 불편한 점이 있다. 식당이 조금 불편한데 마치 야전식당을 이용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바라나

  • 하바라나 빌리지 바이 시나몬(Habarana Village by Cinnamon): 시설은 다소 오래됐지만 서비스나 경치는 훌륭하다. 4성급으로 하바라나 사거리에서 담불라 방향으로 800m 거리에 있다.

  • 다나와 리조트(Danawwa Resort): 하바라나 사거리에서 아누라다푸라 방향으로 400m 거리에 위치하여 이용하기 편리하다. 시설이 다소 오래되었지만, 방이 넓고 아침과 저녁은 뷔페식으로 제공되어 단체객들이 많이 이용한다.

 

식당 식료품

  • 망고망고(Mango Mango): 담불라 시내 중심거리에 있어서 찾기는 싶지만 항상 차들로 붐벼서 주차가 번거로운 면이 있다. 1층에서 이미 준비되어 진열된 음식을 먹는 사람들도 있지만, 2층으로 올라가면 주문해서 시켜 먹을 수도 있다. 음식도 괜찮은 편이고 가격은 저렴해서 그리 부담이 되지 않는다.

  • 카길 푸드시티(Cargill Food City): 식료품 체인점으로 담불라와 하바라나에 있는 것은 소규모의 카길 푸드시티 익스프레스이다. 담불라에는 망고망고 식당과 바로 붙어 있고, 하바라나에서는 하바라나 사거리와 하바라나 빌리지 바이 시나몬 사이에 있다.

  • 뉴 시기리 식당(New Sigiri Restaurant): 시기리야 서문주차장 입구에서 담불라 방향으로 430m쯤 떨어져 있으며, 점심식사를 뷔페식으로 할 수 있다. 시기리야에 온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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