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라바스티의 동원정사, 코살라국 불교 전파의 중요한 근거지

코살라(Kosala, 拘薩羅) 국의 거부였던 수다타(Sudatta, 須達多) 장자(長者) 불교에 귀의하고 막대한 재산을 기부해 사위성(舍衛城, Śāvatthī, 산스크리트 Śrāvastī) 인근에 기원정사(祇園精舍, Jetavana Vihāra) 건립하여 붓다에게 기부하면서 기원정사는 교단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붓다 당시 기원정사와 더불어 코살라국에 불교를 전파하는 중요한 근거지가 곳이 있었다. 녹자모(鹿子母, Migāramāta) 별명으로 알려진 비사카(Visākhā, 毘舍) 기증한 동원정사(東園精舍, Pubbārāma, 또는 Purvarām, Vihāra)였다.

붓다의 가장 든든한 여성후원자였던 비사카가 붓다의 성도 31번째 해에 기원정사의 동쪽에 위치한 속에 건립하여 기증한 가람은 녹자모강당(鹿子母講堂, Migāramātupāsāda)이라고도 불렸다. 전승에 의하면, 층에 500실을 갖춘 2 건물이었고, 사위성에서 기원정사 다음으로 붓다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중요한 설법들이 행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붓다는 슈라바스티에서 보낸 25번의 안거 가운데 기원정사에서 19, 동원정사에서 6번을 각각 보낸 것으로 전한다. 저명한 팔리어학자였던 우드워드(Frank Lee Woodward) 의하면, 니까야(Nikāya, 阿含) 경장(經藏) 가운데 모두 871개의 경이 슈라바스티에서 설해졌으며, 가운데 844개가 기원정사에서, 23개가 동원정사에서, 그리고 4개가 슈라바스티 교외에서 설해졌다고 한다.

슈라바스티의 동원정사 위치도

5세기 슈라바스티를 방문했던 동진(東晋) 출신의 법현(法顯) 기원정사에서 북동쪽으로 6~7 거리에 비사카가 세운 동원정사가 여전히 건재했다고 기록했다. 그로부터 2백년이 지난 7세기 초에 당나라의 현장()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는 이미 사위성에 주민은 있었으나 황폐해져 있었으며 기원정사도 옛날에는 가람이었으나 이젠 황폐해져 있었다라고 묘사했다. 이때 이미 동원정사가 흔적조차 없어진 상태였는지는 없으나 현장은 동원정사에 대해서는 글자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현대의 동원정사

동원정사 유적 발굴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것으로 보이지만, 학자들의 의견은 대체로 현대의 칸드바리(Kandhbhari) 마을이 원래 동원정사가 있었던 장소로 보고 있다. 현재 마을 어귀에 비사카 동원정사(Visakha Purvaram Mahavihar)” 있다. 사원이 2008 문을 열기 전까지 이곳에는 마을사람들이 시바(Shiva) 신의 링감(Lingam; 시바신을 상징하는 남근상)으로 숭배하던 부러진 아쇼카왕의 석주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동원정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간판이 많이 눈이 띄었다. 수행정진보다는 기부금을 노리는 사이비 종교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했다. 인도의 여러 불교 순례 유적지가 힌두교 신자가 차지하고 손쉽게 많은 기부금 수입을 확보하는 수단이 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갖게 된 의심하는 마음인 듯싶었다. 정사를 관리하는 현지 인도스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었으나 여름 안거를 위해 자리를 비운 스님을 뵐 수는 없었다.
현재의 동원정사 한 가운데 시바신의 링감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 기괴한 느낌을 주었으나 부러진 아쇼카왕의 석주가 맞아 보였다. 이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가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사위성에 세워졌던 아쇼카왕의 석주들이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는 듯했다. 이 링감은 아직도 마을사람들이 숭배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순례자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물을 뿌려 지웠거나, 지난 번 비에 지워진 듯 하지만 링감과 바닥에 붉은 색깔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현재 가람은 스리랑카에서 출가한 반테 비말(Bhante Vimal)이란 이름의 인도 스님 분이 운영하고 있으며, 내가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 그는 여름 안거에 들어간 상태로 이곳에 없었다. 스님을 여러 만난 적이 있는 샨텀이 매년 여름 이맘때쯤이면 스님이 안거를 보내기 위해 자리를 비운다고 알려 주었다. 대신 심부름꾼인 듯한 현지인 명이 숙소는 없지만 30 가량을 수용할 있는 명상실을 갖춘 가람을 관리하고 있었다. 스님을 뵙지 못해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그런대로 불가의 스님이 가람을 관리하고 있다는 점에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동원정사의 입구. 큰 나무들로 둘러싸여서인지 산속 같은 느낌이었다. 관리인이 우리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입구에 서서 우리를 보고 있다.
정사 내 한쪽 구석에 양철로 지어진 명상실의 모습.
아마도 주변에서 그 동안 찾아낸 듯한 유물들이 한 쪽에 모아져 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차량을 이용해서 칸드바리 마을을 통해 동원정사에 접근한다. 마을 한가운데에서 정사까지는 200m가량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이다. 대부분의 인도 시골마을이 그런 것처럼 더럽고 지저분한 마을과 골목길에 마음이 편치 않을 있지만 금방 마을에서 벗어나 나무들이 울창하게 덮고 있는 마을어귀에 다다른다. 이른 시간이었는데 많은 수의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있어야 시간이었는데 하는 의아한 생각에 샨텀에게 물어보니, 학교 교사들이 무단으로 나타나지 않아 이런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사실이지만, 인도에서는 높은 교사 결근률이 교육의 질을 떨어뜨리는 이유가 되고 있었다.

동원정사에 접근하는 하나의 길은 기원정사에서 출발하여 차가르 반다르 고안 마을을 통과해 오솔길을 따라 가는 길이다. 거리는 1.5km이며, 가는 동안 논을 지나게 되고 시골 경치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작은 마을을 벗어나면 금방 버드나무 가지가 드리워진 자그마한 연못을 만난다. 옛날 이곳 들판을 가로질러 다녔을 붓다가 잠시 쉬었다 갔을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샨텀에게 이야기했더니 작은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기원정사에서 동원정사로 가는 오솔길의 모습.
운이 좋게도 논에서 먹이활동 중인 황새를 만났다. 황새가 놀라지 않도록 숨도 죽이고 지켜보았다.

동원정사의 유래

비사카는 당시 마가다(Magadha, 摩揭陀) 국의 속국이었던 앙가(Anga, 鴦伽) 국의 수도 밧디야(Bhaddiya, 婆提) 출신의 대부호였던 멘다카(Mendaka) 손녀였다. 비사카의 아버지 다난자야(Dhanañjaya) 사업감각이 뛰어났고 이내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며 무역가로 성장했다. 멘다카와 다난자야는 모두 수시로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며 후하게 대접했다. 멘다카가 붓다와 스님들을 초대하여 공양을 올리고 설법을 들을 때면 일곱 살의 어린 손녀 비사카도 함께 자리를 하곤 했다. 법문을 들을 때마다 크게 감동하던 비사카는 가족들과 함께 붓다에게 귀의했다.

멘다카를 따라 새로운 제국의 수도 왕사성(王舍城, Rājagaha)으로 이주해 자리를 잡고 있던 다난자야는 갑작스럽게 코살라국의 무역도시 사케타(Saketa) 이주하게 되었다. 이는 코살라국의 파세나디(Pasenadi, 波斯匿) 왕이 마가다국의 빔비사라(Bimbisāra, 頻婆娑羅) 왕에게 직접 요청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무역으로 성장한 사케타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도시였으며, 다난자야는 사케타를 거점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사케타에서 다난자야의 대성공은 수도 사위성까지 널리 퍼졌다. 사위성의 재력가였던 미가라(Migara, 鹿子) 다난자야와 연줄을 맺고 싶어하던 차에, 마침 16세로 혼기를 맞은 비사카를 며느리로 맞기 위한 혼담을 추진했다. 엄청난 지참금을 가지고 미가라 집안으로 시집온 비사카는 사위성에 정착했다. 사랑하는 딸을 멀리 떠나 보내게 다난자야는 사위성에서 존경 받는 여덟 명의 바라문에게 집과 연금을 제공하면서 비사카의 후견인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미가라 장자와 그의 가족들은 나체로 수행하는 외도(外道) 자이나교의 열렬한 신도였다. 탁발하는 불가의 스님들을 냉대하고 오직 자신들이 따르는 자이나교 수행자들에게만 후하게 대할 뿐이었다.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데 대한 인색함으로 결국 비사카는 미가라 장자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미가라 장자가 비시카를 내쫓으려 하자, 그녀의 후원자가 된 여덟 바라문이 나서서 양쪽의 말을 듣고 긴 토론 끝에 비사카에게 잘못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댁에 남는 것뿐만 아니라 스님들께 공양도 올릴 수 있게 된 비사카는 붓다와 스님들을 초대했다. 붓다가 집안에 들어서자 다른 가족들은 모두 집안 깊이 몸을 숨기고 비사카 홀로 붓다를 맞이했다. 공양을 마친 붓다가 설법을 시작하자 이를 몰래 듣고 있던 미가라 장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설법에 빠져들어 마침내 지혜의 눈이 열렸다. 그는 기쁨에 넘쳐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붓다에게 예를 올리고 귀의했다. 붓다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미가라 장자는 자신을 붓다의 가르침으로 인도해준 비사카에게 고마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무지했던 자신을 진리의 길로 인도해 준 비사카를 가리켜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고 했으며, 집안 살림에 대한 모든 권한을 맡겼다. 그 후 비사카는 미가라의 어머니(Migāramāta)’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한자로 의역하여 녹자모(鹿子母)’라고도 한다.

그날 이후 시아버지 미가라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비시카는 기원정사 동쪽에 있는 넓은 땅을 구입하여 1000 이상 수용 가능한 쾌적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지어 붓다와 교단에 기증하였다. 건물은 기원정사의 동쪽에 있다 하여동원정사라고 불렸고 혹은녹자모강당이라고도 알려지게 되었다.

비사카는 동원정사 외에도 다섯 가지 보시를 하겠다고 발원하였다. 다섯 가지 보시란 비구에게는 비옷을, 비구니에게는 목욕 입을 옷을, 병든 사람에게는 죽을, 병든 이를 간호하는 사람에게는 밥을, 곳에서 비구와 비구니에게는 죽을 공양하겠다는 발원이었다. 비사카는 자신의 발원을 평생 하루도 어기지 않고 지켜나갔다. 그녀의 보시는 무엇과도 비할 없는 보시라 하여무비(無比) 보시라고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