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각산, 붓다가 6년의 고행 기간 중 머물렀던 동굴
보드가야 대보리사(Mahabodhi Mahavihara)에서 북동쪽으로 7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온통 바위로 뒤덮인 나지막한 산이 하나 있다. 지금은 둥게스와리(Dungeswari)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코끼리 형상이라 하여 상두산(象頭山)이라고도 하지만,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전 수행한 곳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어 흔히 전정각산(前正覺山, Pragbodhi)이라고 불렸다. 붓다 당시에는 바위산 아래에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버리는 시타림(尸陀林, 공동묘지)이 있었으며 근처에 불가촉천민 마을이 있었다고 전한다.
전정각산의 모습
차량으로 보드가야 대보리사를 출발한 우리 일행은 보드가야路를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120번 고속도로를 만나자 차량 흐름이 많아졌지만, 70번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다시 차량 흐름도 적어지고 앞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70번 고속도로를 벗어나자, 길은 먼지가 폴폴 일어나는 진흙길로 비가 오면 차량 통행도 어려울 것 같은 상태였다. 이 길이 맞을까 싶은 마음이 들 즈음에 전정각산 아래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건물 위의 전정각사라는 한글 간판이었다. 바로 옆에는 우리나라의 미디어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JTS 수자타아카데미의 간판이 역시 굳게 닫힌 철문 위 높은 곳에서 눈길을 끌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마오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던 지역이었으며 밤이면 총을 들고 와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높은 담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JTS에서도 초기에 목숨을 잃은 분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서 꾸준히 활동을 하고 있는 분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정각사 앞에서 시작하여 전정각산굴이 있는 산중턱까지 생각지도 않았던 콘크리트길이 나 있었다. 라오스 사람들의 지원으로 놓인 길이라고 한다. 순례객들이 몰려올 때면 어디서 나타나는지 어린이와 아기를 안은 아낙네들이 콘크리트길을 따라 자리를 잡고 앉아 구걸을 한다. 그 옛날 이곳은 불가촉천민들의 거주지였다고 했는데, 이 콘크리트길에 자리 잡고 있는 이들이나 이곳까지 오면서 길가에서 지나쳤던 집들을 보면 이들의 사정이 그리 크게 변하지 않은 듯했다.
바위산 꼭대기에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절벽 아래에 있는 전정각산굴은 현재 티베트 출신의 스님들이 관리하고 있으며 이분들이 운영하는 둥게스와리 석굴사원(Dungeswari Cave Temple) 경내에 위치한다. 이곳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순례객들이 찾는 곳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전 6년 고행 기간 중에 머물렀다고 알려진 전정각산의 작은 자연동굴이다. 동굴 안은 그리 넓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들어갈 수 없어서인지 순례객들이 몰릴 때면 이 동굴 앞에는 길게 줄이 만들어진다. 다행이랄까, 전정각산굴에 들어서는 순례객들은 그 안에서 그리 오래 머무르지 않는 듯했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순간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동굴 안은 너무 어두웠다. 금방 동굴 안쪽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고행 중인 붓다상이었다. 바로 이 동굴에 머물 당시 붓다의 모습이 그러했을 것이다. 나는 입구 가까운 곳에 동굴 안쪽을 바라보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샨텀도 말없이 옆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앉아 있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 온몸으로 사투를 벌이던 곳에 내 자신이 앉아 있다는 생각에 온몸에 감동이 밀려왔다.
동굴 안의 어두움에 시각이 조금 익숙해지자 내부의 모습이 좀 더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순례객들은 들어와 붓다의 고행상에 예를 표하고 불전함에 지폐를 넣고는 금방 나가버렸다. 그러고 보니 어두운 동굴 안에 고행하는 붓다상만큼이나 큼지막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영어로 적혀 있는 불전함이었다. 그리고 쿠시나가르(Kuśinagar)의 열반당(涅槃堂, Nibbāna Temple)에서 보았던 것처럼, 붓다의 고행지를 지키려고 서 있는지 아니면 불전함을 지키려고 서 있는지 알 수 없는 티베트인 또는 인도인 승려가 한쪽 구석에서 서성이는 모습도 보였다.
동굴을 나오면 바로 남쪽으로 절벽 아래를 하얀색 벽으로 막아 붓다를 모셔 놓은 방을 만들어 놓았으나 순례객들의 발길을 잡지는 못하는 모습이었다. 사원의 북쪽으로 돌아 산 정상으로 오를 수 있다. 멀리까지 전경을 감상할 수 있고, 고대 스투파들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순례객들은 전정각산굴만 염두에 두고 이곳을 찾기 때문에 그리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찾는 것이 아니어서인지 정상까지 오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전정각산의 유래와 유영굴의 전설
이곳 전정각산굴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전 6년간의 고행 기간 내내 기거하며 수행정진하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고행 기간 중 일정 기간 동안에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는 6년의 고행 기간을 마칠 무렵 아사 직전 우루벨라(Uruvela) 마을의 숲이 울창한 네란자라강(Nerañjarā, 산스크리트어 Nairanjana, 尼連禪河) 강변에서 수자타(Sujātā)로부터 유미죽(乳味粥)을 얻어 먹고 기운을 차린 후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기 직전 잠시 전정각산에 올라 찾았던 곳이 전정각산굴이라는 이야기까지 다양한 전정각산굴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이 가운데 어떤 이야기가 역사적 붓다와 지금은 전정각산굴로 알려진 이 동굴과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전정각산굴이 역사적 붓다와 관련이 있기는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러한 혼란은 붓다의 전기(傳記)가 형성되어온 과정을 이해한다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갈 수도 있다.
불교 전통에서는 붓다가 살아 있던 때부터 그의 깨달음과 가르침이 중요시되었으며, 그의 일생에 일어났던 일들이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일어났었는지에 대해 기록하는 일에는 무관심하거나 그 중요도를 구태여 무시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는 가장 초기 팔리어 경전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때부터 계속해서 전해져 내려오는 붓다의 전기는 없다. 이들 초기 경전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중요한 주제를 다루면서 이에 도움이 될 경우 단편적으로 시간 또는 지리적 정보가 주어져서 붓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구체적으로 알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초기 팔리어 경전에서 붓다의 출가 후 수행과 깨달음의 성취와 관련하여 자전적 설명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일부 학자들은 성스러운 구함이란 의미의 성구경(聖求經, Ariyapariyesana Sutta)이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여기에서 출가 구도자, 즉 사문(沙門, śramaṇa)이 된 붓다는 자신의 영적 성취를 도와줄 수 있는 스승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무소유처(無所有處)의 경지로 인도한 알라라 칼라마(Āḷāra Kālāma)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로 인도한 우다카 라마푸타(Uddaka Rāmaputta)를 찾아가 지도를 받았으나 그들의 가르침이 진정한 깨달음으로 인도할 수 없음을 깨닫고 붓다는 그들을 떠난다.
그런 나는 유익한 것[善]을 구하고 위없는 평화로운 경지를 찾아 마가다 지방에서 차례로 유행하다가 우루벨라(Uruvelā) 근처의 세나니가마(Senānigāma)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땅과 고요한 숲과 유유히 흐르는 깨끗한 강과 아름다운 강기슭과 근처에 탁발할 수 있는 마을을 보았다.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땅은 풍요롭고 숲은 고요하고 상쾌하다. 유유히 흐르는 강은 맑고, 강기슭은 아름답다. 근처에는 탁발할 수 있는 마을이 있다. 참으로 이곳은 열정적인 노력을 원하는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용맹정진하기에 적당한 곳이다.’ – 성구경
성구경을 비롯하여, 마지히마 니카야(Majjhima Nikaya, 中部)에서 붓다의 출가 후 수행, 고행 및 깨달음의 성취를 다루고 있는 사자후대경(師子吼大經 Mahasihanada Sutta), 살차가대경(薩遮迦大經 Maha Saccaka Sutta), 보리왕자경(菩提王子經 Bodhirajakumara Sutta) 등에서 두 스승을 떠난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하기까지 구체적인 발자취를 남긴 곳을 언급한 것은 이것이 유일한다. 붓다가 스스로 밝힌 것처럼 그는 우루벨라 근처의 세나니가마에 당도했다. 전정각산 또는 전정각산굴에 대한 언급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붓다의 바람과는 달리 고대로부터 붓다의 일생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들을 둘러싼 전기를 쓰려는 시도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렇게 후대에 쓰여진 붓다의 전기들은 붓다 입멸 후 수백 년이 지난 뒤부터 성립된 것이고, 더구나 붓다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입장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여러가지 창작과 가탁이 첨가되고 신화적전설적인 요소가 대단히 많다. 불교경전 중에서 붓다의 생애를 주제로 한 것을 일반적으로 ‘불전(佛傳)’, ‘불전경전(佛傳經典)’, 또는 ‘불전문학(佛傳文學)’이라고 하며,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한역(漢譯), 티베트어 역본(譯本) 등으로 다양하게 존재한다.
중요한 불전으로는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것으로 부파불교의 대중부(大衆部, Mahāsaṃghika) 가운데 설출세부(說出世部, Lokottaravādin)의 율장(律藏) 자료를 집대성한 마하바스투(Mahavastu, 大事), 붓다의 생애를 서사시적으로 묘사한 일련의 대승 원시경전인 랄리타비스타라경(Lalitavistara Sūtra, 普曜經), 불교시인 아슈바고샤(Aśvaghoṣa, 馬鳴)에 의해 카비야(Kāvya) 체라는 아름다운 미문(美文)으로 쓰여진 붓다짜리따(Buddhacharita, 佛所行讚), 자타카(Jātaka, 本生譚)의 서문에 해당되는 니다나카타(Nidānakathā, 因緣品) 등이 있고, 한역으로는 보요경(普曜經),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Abhiniskramana Sutra) 등이 있다.
이들 대승불교 불전에서는 붓다가 우루벨라에 이르기 전에 가야산(伽倻山, Gayāsirśa)에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붓다가 고행한 장소가 우루벨라 마을의 동쪽의 네란자라강 강변이었다는 등 초기 팔리어 경전에서 보다는 좀 더 자세한 붓다의 행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정각산 또는 전정각산굴에 대한 언급은 여전히 찾을 수 없다. 전정각산굴에 대해 언급한 사람은 5세기 초 이곳을 찾았던 동진(東晋)의 유학승 법현(法顯)과 7세기에 역시 이곳을 찾았던 당(唐) 유학승 현장(玄奘)이었다.
법현은 그의 여행기록인 불국기(佛國記)에서 우루벨라에서 북동쪽으로 0.5 요자나(yojana), 즉 6~7.5km 거리에 바위에 난 조그만 동굴이 있고 그곳에서 붓다가 서쪽을 향해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고 기록했다. 그에 의하면, 바위 벽에 붓다의 그림자가 나타났었으며, 자신이 찾았을 때까지 그 자리가 밝게 빛났다고 했다. 범천(梵天)이 나타나 붓다에게 이곳은 과거미래의 제불이 완전한 지혜를 얻게 되는 곳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0.5 요자나도 되지 않는 거리에 보리수가 있으며 그곳에서 과거미래의 제불이 완전한 지혜를 얻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한역 불전 기록에서는 수자타에게서 유미죽은 받아 드시고 기운을 차린 붓다는 바로 서쪽으로 네란자라강을 건너 보리수로 향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보리수로 향하기 전에 북동쪽에 있는 바위 동굴로 향했다는 이야기나 붓다의 그림자 이야기 등은 법현이 접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 기록에 나타나는 것인지, 법현 자신의 창작인지는 알 수는 없으나 법현이 접했을 현재 전하는 한역 불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법현이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 현지인 가운데 누군가가 현지에서 전해져 오는 전설을 들려주고 안내하지 않았다면 짧은 방문기간동안 법현이 이곳을 찾아내기도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399년 60세가 넘어 인도로 구도여행을 시작한 법현은 683년에 당나라의 지바하라(地婆河羅)가 번역한 방광대장엄경과 6세기 말 수(隋)나라의 사나굴다(闍那崛多)가 번역한 불본행집경을 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412-421년에 북량(北凉)의 담무참(曇無讖)또는 5세기 초에 진(晉)나라 보운(寶雲)이 번역한 불소행찬도 그의 여행기간을 고려하면 접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방광대장엄경의 이역경으로 알려진 보요경은 4세기 초 서진(西晉) 출신의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법현도 접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7세기에 인도 구도여행을 떠난 현장의 경우, 이 모든 한역 불전기록을 접했을 가능성이 높고 법현의 여행기록까지도 모두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정각산굴에 대한 현장의 기록은 법현의 기록을 좀더 발전시킨 느낌이 든다. 전정각산이란 이름도 현장이 붙인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현장은 자신의 여행기록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붓다가 정각(正覺)을 얻으려 하면서 먼저 이 산에 올랐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현장의 기록에 의하면, 수자타의 유미죽을 받아먹고 기운을 차린 붓다는 동북쪽으로 와 이 산을 보자 유적(幽寂)의 느낌이 들어 여기서 깨달음을 열고자 했으나, 정상에 이르자 대지가 진동하고 산이 흔들렸으며 놀란 산신이 붓다에게 이 산은 깨달음을 여는 데 좋은 곳이 못 된다고 설득했다. 서남쪽으로 산을 내려오던 붓다는 산허리에서 동굴의 석실을 발견하고 들어가 발을 괴고 앉았으나 또 다시 대지가 움직이고 흔들리며 산도 기울었다고 한다. 그때 정거천(淨居天)이 하늘에서 소리 높여 이곳은 붓다가 깨달음을 열 곳이 못 되며 여기에서 서남쪽으로 14~5리 되는 곳에 보리수가 있고 그 아래에 금강좌가 있으며 과거미래의 제불이 모두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열게 되는 곳이니 그곳에서 깨달음을 열라고 알려 주었다.
그러나 이 동굴에 살고 있던 용이 붓다에게 이 동굴에 남아 깨달음을 열어 달라는 소망을 뿌리치지 못 해 자신의 그림자를 남겨 놓고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이 굴은 유영굴(留影屈)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현장은 또한 아소카왕이 붓다가 산을 오르면서 오르내린 자국에는 모두 기념하는 표지를 하고 스투파를 세웠다고 기록했다.
이곳에 오를 때마다 왜 인도고고학조사위원회(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에서는 이곳을 방치하고 안내판 하나 세우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고고학 측면에서 고증하고 검증하는 일은 어려울 것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이곳을 찾는 순례객들의 마음에는, 옛날 법현이나 현장이 그랬을 것처럼, 변함없이 붓다의 고행의 현장에 함께 한다는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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