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링가전투 현장, 아쇼카왕의 불교 귀의

칼링가(Kalinga) 인도 중동부 해안지방의 옛이름이다. 지배자마다 영토가 변하면서 경계선도 따라 변경되긴 했지만, 일반적으로 마하나디(Mahanadi) 강과 고다바리(Godavari) 강을 경계로 하는 지역이다. 넓었을 때에는 지금의 오디샤(Odisha) 전체와 안드라프라데시(Andhra Pradesh) 주의 북동부 지역, 텔랑가나(Telangana) , 차티스가르(Chhattisgarh) 등의 일부가 포함되는 넓은 지역이었다.

칼링가가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Maurya) 왕조 3 왕인 아소카(Aśoka, 산스크리트 Ashoka) 왕이 지방을 정복했을 때였다. 칼링가전쟁은 매우 치열했으며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불교 전승에 의하면, 참혹한 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아소카왕은 번민하게 되었고 결국 불교에 귀의하여 정법(正法, Dharma)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轉輪聖王, chakravarti-rāja) 되었다고 전한다.

인도 안드라프라데시주의 작은 마을 아마라티(Amarāvati)에 있었으나 지금은 다 허물어져 버린 큰 스투파의 아름다운 부조에 묘사된 전륜성왕의 모습으로 아소카왕을 묘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1세기, 파리 국립기메동양박물관(Guimet Museum)

전쟁을 통해 통일제국의 통치권을 확립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우리아왕조를 찬드라굽타(Chandragupta, 322-297 BCE) 이래로 세력을 확대하여 왕의 통치권을 제약하고 있던 브라만 세력을 극복하고 다양한 계급 계층을 포용해야 필요성을 가지고 있던 아소카왕으로서는 사회통합을 위해 계급을 부정하고 모든 계층의 평등을 주장하는 불교를 받아들일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평온하기만 전쟁터

아소카왕이 기원전 261 칼링가를 정복하면서 참혹한 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 오디샤(Odisha) 주도인 부바네스와르(Bhubaneswar)에서 남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울리(Dhauli) 지역이다. 316 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다야(Daya) 강을 건너자 마자 오른쪽으로 빠져나와 다울리路를 따라가면 이곳을 유유히 흘러가는 다야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다다른다. 언덕이 다울리기리(Dhauligiri)이다.

아소카왕의 군대와 칼링가왕국의 군대가 일전을 벌였던 다야강과 다울리기리 지역

다울리路를 따라 다울리기리로 향하는 길가에서 먼저 바위에서 코끼리가 나오려는 듯한 모습으로 코끼리 머리와 앞다리가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는 곳을 만난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칼링가 정복 무자비하게 살육된 시체들을 바라보며 정복과 살육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아소카왕은 물리적 정복을 포기하고 대신 문화정복 정책으로 전환했다고 한다. 코끼리 조각상이 바로 아소카왕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던 장소를 표시한다고 전해지기도 하는데 믿어야 지는 모르겠다.

다울리기리 주변 지역 지도.
다울리기리로 향하는 길가에서 만나는 코끼리상으로 유명한 다울리기리 아소카 바위 담마칙령. 관리인이 깨끗이 정비하고 있는 내부와는 달리 외부는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다울리기리 아소카 바위 담마칙령에 새겨져 있는 칙령 내용들. 특이하게도 칼링가전쟁 내용이 포함된 칙령 13호와 칙령 11호, 12호가 빠져 있고 그 대신 별도의 칙령 2개가 새겨져 있다.

코끼리상은 기원전 3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오디샤주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조각상이면서 매우 희귀한 마우리아시대의 예술품이기도 하다. 코끼리 조각상은 붓다의 탄생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아소카왕이 폭력을 버리고 불법에 귀의하여 이룬 정신적 탄생과 연관하여 이곳에서 아소카왕이 심경의 변화를 맞았다는 이야기로 발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들었다. 코끼리 전체의 모습이 아니라 상반신이 바위에서 나오려는 모습이라 인상적이었다.

바위의 윗부분에 코끼리의 상반신이 조각되어 있다. 아소카왕 시대의 조각상이며, 이 바위 아래 부분에 바위 담마칙령이 새겨져 있다.
코끼리상은 2300년 동안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여전히 보호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코끼리상에서 돌아 아래로 내려오면 같은 바위의 벽면에 다울리 바위 담마칙령(Dhauli Rock Edict)으로 알려진 아소카 칙령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는 칙령 1~10, 14 별도의 2개의 칙령이 새겨져 있다. 바위 담마칙령은 마우리아왕조의 전통적 거점이었던 비하르(Bihar) 지역이 아닌 아소카왕에 의해 통치되던 지방 변경지역에 주로 설치되었다. 칙령의 내용도 본질적으로 도덕적이고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붓다 혹은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정법(담마)이라는 일반적인 개념 아래 질서 있고 적절한 행동 그리고 비폭력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아마도 당시 급격히 팽창한 광대한 영토를 멀리 떨어진 파탈리푸트라에서 감당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변경의 모든 국민들을 포용하고 교화할 있는 방법이 필요했었을 듯하다.

코끼리상이 조각된 바위의 측면 아래쪽에 새겨진 바위 담마칙령을 보존하기 위해 보호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바위 위에 새겨진 다울리 바위 담마칙령.
다울리 담마칙령의 별도 칙령 1호 탁본.

다울리 바위 담마칙령 주변은 아름다운 정원처럼 꾸며져 있다. 특별히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꾸며진 정원인가 보다 하고 지나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일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아 한산한 편이었다. 특히 이곳을 찾는 인도인 방문객들은 대부분 이곳을 그냥 지나쳐 정상으로 항했다. 우리도 아쉬운 마음을 접고 이곳을 나와 언덕을 향했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 다다르자 주차장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인도의 여느 사원이나 관광지에서처럼 주자장을 둘러싸고 가장자리를 따라 열을 지어 기념품점들이 들어서 있고 가운데 공간과 길을 따라 사람들을 싣고 차량과 버스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었다. 여기서 정상을 향해 조금만 걸어가면 가장 높은 곳에 세계평화탑으로도 불리는 하얀색의 비슈와 샨티 스투파(Vishwa Shanti Stupa) 나타난다.

다울리기리 정상의 주자장 모습.
다울리기리 정상에 자리 잡은 세계평화탑(샨티스투파).

다야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있는 언덕 위에 위치한 샨티스투파는 일본불교에서 「법화경」을 소의로 하는 법화계열의 신생종파인 일본산 묘법사에서 세계 도처에 건립한 80개의 세계평화탑 가운데 하나로 1972년에 건립되었다. 불상이나 사자상을 포함하여 스투파의 여기저기를 살펴보면 시멘트로 조악하게 처리되어 있어 마을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평화탑이 다울리기리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세계평화탑에 올라서면 칼링가전쟁 당시 전장의 무자비한 살육으로 핏물이 온통 빨갛게 흘러 넘쳤다고 했던 다야강과 주변의 전장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지금 아래에 흘러가고 있는 다야강의 강물은 여느 강과 같이 푸르스름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강이 넓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기대와는 다르게 강폭이 상당히 좁았다. 그리고 강의 양안으로는 드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논밭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사람들이 거주하는 마을도 드문드문 눈에 띈다.

다울리기리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다야강과 주변 평야의 모습 .
그 옛날 참혹했던 전쟁터의 흔적은 하나도 찾을 수 없다.
오디샤주는 다울리기리를 세계적인 불교유적지로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앞으로 몰려올 관광객을 위해 다울리 수공예품시장을 조성했으나 제대로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수공예품시장은 인도의 다른 곳에서도 보아오던 것처럼 동선계획이나 시설의 수준이 낮은 것도 문제이지만, 시장 수요에 대한 고려 없이 이렇게 큰 투자를 해 놓았는데 텅 빈 곳으로 남아 있어 마음이 아팠다.
수공예품시장 인근에 다울리 예술공예대학이란 교육시설이 위치하고 있었다. 입구 정원에는 이곳에서 교수 및 학생들이 제작한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예술공예대학의 존재도 수공예품시장이 이곳에 유치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공예대학의 복도에서 작품을 만들고 있는 모습.

칼링가왕국의 상황

칼링가국은 아소카왕의 담마칙령에 크게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대해 알려진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 수도는 토살리(Tosali) 지금의 오디샤주 주도인 부바네스와르 인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곳에서는 불교와 자이나교가 모두 성행했었다. 칼링가국은 아소카왕에게 정복당할 당시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강력한 왕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아소카왕의 군대가 침공해오기 훨씬 이전부터 칼링가국은 버마 땅에도 식민지를 건설했었던 것으로 전한다.

칼링가국 국력의 근간은 무역에 있었다. 대부분의 벵골만(Bay of Bengal) 장악하고 있어 칼링가의 항구들은 자바, 말레이, 발리 등의 동남아 섬들과의 무역에서 우위에 서있었으며 동남아시아와 인도를 연결하는 해로(海路) 장악하고 있었다. 무역만 왕성했던 것은 아니었다. 칼링가의 토지는 강들을 끼고 있어 비옥했으며 주민들에게 번영을 가져왔다.

따라서 칼링가국의 왕에게는 이러한 부를 배경을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대가 있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us Siculus) 의하면, 특히 칼링가군에는 거대한 규모의 코끼리부대가 있었다. 주변의 많은 나라들이 코끼리부대의 규모와 힘에 압도당하여 두려움을 느꼈으며, 어느 나라에게도 정복된 적이 없다고 했다.

고대에는 코끼리부대가 전쟁에서 가공할 만한 위협적인 존재였다 .

셀레우코스 왕조(Seleucid Empire)에서 대사로 파견되어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궁정에서 머물렀던 메가스테네스(Megasthenes) 칼링가의 군사력에 대해 간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있다. 그에 의하면, 찬드라굽타 시절에 칼링가국의 왕은 근위대로만 6만명의 보병, 1 명의 기병, 700마리의 코끼리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왕의 근위부대 규모가 정도였다면 칼링가국 전체의 군사 규모는 훨씬 컸을 것이다.

칼링가의 진정한 힘을 느낄 있는 것은 찬드라굽타가 인도의 넓은 영토를 정복해 나갔으며 알렉산드로스왕의 동방 정벌에 참가하여 알렉산드로스 사후 광대한 그리스계 왕국을 건설했던 셀레우코스(Seleucus) 왕을 격퇴하면서도 자신의 제국의 수도 파탈리푸트라(Pāaliputra)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했던 칼링가를 정복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한 그의 아들이자 아소카왕의 부왕인 빈두사라(Bindusara) 강력한 군주였으며적들의 살육자(Amitraghata)’라고 알려진 인물이지만 칼링가국을 침공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같다.

칼링가의 역사와 관련하여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 가운데 하나는 칼링가전쟁 당시 칼링가국의 왕은 누구였는가 또는 달리 표현하자면 칼링가국은 왕국이었는가 아니면 다른 형태의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역사 기록의 부재로 혼란이 있지만, 많은 학자들이 칼링가전쟁 당시 칼링가는 군주제 국가가 아니라 밧지연합(Vajjian Confederacy, 跋祇國) 또는 말라(Malla, 末羅) 같은 고대 인도의 공화제 국가였을 거라고 주장한다.

놀랍게도 아소카왕은 잔혹한 전쟁에서 자신이 무찌른 칼링가국의 이름을 칙령에 새겨 넣지 않았다. 당시에는 관행적으로 승리한 정복자가 자신이 굴복시킨 상대방 왕의 이름을 기록으로 남겼다. 아소카는 어떤 이유에서 인지 이러한 관행을 따르지 않았다. 이후의 마애칙령에서는 자신이 특사를 파견했던 외국 궁정의 이름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아소카는 자신의 인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온 칼링가전쟁에서 승리한 칼링가국 왕의 이름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는지는 정확히 수는 없다.

그러나 아소카는 칼링가전쟁을 기록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칼링가국의 또는 국민을 지칭하며 칼링가라는 용어만 사용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칼링가가 사람의 뚜렷한 군주를 갖지 못한 과두정치 또는 공화정 체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추정하기도 한다. 아마도 여기에서 칼링가국이 공화제 국가일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 듯하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의견에 의문이 들었다.

고대 공화제 국가들은 대부분 작은 국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대부분 하나의 중심도시를 중심으로 주변의 마을들을 통합하고 있는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규모였던 밧지연합의 경우에도 밧지(Vajji)족과 릿차비(Licchavi) , 8개의 종족이 각자의 지배 영토를 가지고 연합하여 세운 공화국으로 비교적 넓은 영토와 체계적 지배 체제를 갖추고 있었지만 남쪽으로 고다바리강에서 북으로 갠지스강 유역에 이르고 동으로는 칼링가 해안에서 서쪽으로 빈디아산맥(Vindhya Range)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던 칼링가국과 비교할 있을 정도의 규모는 아니었다.

칼링가와 같은 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통치시스템과 조직적인 행정시스템을 갖추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각지의 반란 등으로 사회는 혼란스럽고 안정적인 통상을 확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영토를 넓혀가던 찬드라굽타 빈두사라의 마우리아왕국에 맞서 오랫동안 경쟁관계를 유지하고 영토를 보존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전쟁의 배경

아소카는 왕의 자리에 즉위한 8년이 되는 (기원전 261, 혹은 262년으로 추정)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달성하지 못했던 업적을 달성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칼링가 땅으로 쳐들어갔다. 칼링가전쟁은 인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처참했던 전쟁 하나로 꼽힌다. 처절한 전쟁 끝에 칼링가는 마우리아제국에 병합되었다. 아소카왕은 전쟁의 참상이 극심했었음을 자신의 마애칙령 13호에 기록했다.

칼시(Kalsi) 마애칙령의 앞면(동쪽, 왼쪽)과 그 탁본(오른쪽). 우타라칸트(Uttarakhand) 칼시의 바위 앞면에 아소카왕의 칙령 1~12호와 13호의 앞부분이 새겨져 있다.
코끼리가 새겨진 칼시 마애칙령의 북면(왼쪽 위)과 칙령 13호의 나머지와 14호 새겨진 남면(왼쪽 아래)의 탁본과 그 내용(오른쪽).

왕위에 오른 8년이 지나 이제 신의 총애를 받는 쁘리야다르시(Priyadaarsi) 칼링가를 정복했노라. 15 명이 포로가 되었고, 10 명이 전사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유들로) 죽었다. 이제 칼링가는 합병되었고, 이후로는 신의 총애를 받는 자는 충실히 정법을 실행하고, 정법을 갈망하고, 정법을 가르쳤노라. 칼링가를 정복하고 , 신의 총애를 받는 자는 깊은 회한에 잠겼다.” – 아소카, 마애칙령 13 중에서

구자라(Gujarra) 본 작은 바위 담마칙령 1호에 새겨진 아소카대왕의 정식 칭호, 데바남피야 피야다시 아소카라자(Devanampiya Piyadasi Asokaraja). 칙령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명칭인 신의 총애를 받는 자 피야다시 (Devanampiya Piyadasi) 또는 쁘리야다르시(Priyadaarsi)왕이 아소카왕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아소카왕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추구해 영토확장정책을 계속 추진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피해왔거나 또는 실행했으나 실패했을 칼링가 정복을 단행했다. 그러나 칼링가 정벌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전쟁에서 칼링가 측에는 10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아소카왕의 군대에도 비슷한 규모의 피해가 발행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다른 전설에 따르면 아소카 군대는 칼링가 군의 절반의 피해를 입었다고도 한다. 아소카왕이 입은 피해 규모를 정확히 확인하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을 테지만, 피해 규모가 막대했음은 사실인 듯하다.

이렇듯 엄청난 피해를 무릅쓰고 아소카왕이 칼링가를 침공해 병합한 이유는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명확해 보인다. 칼링가 정벌은 찬드라굽타와 빈두사라가 추진해 인도대륙의 영토 통합과 인도대륙의 정치적 통합을 완결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칼링가 영토는 마우리아제국의 북부, 특히 제국의 중심인 수도 파탈리푸트라 지역을 남부지역과 분리시켜 통치, 상업활동, 군사 여러 면에서 짐이 되었을 것이다.

찬드라굽타는 기원전 321년 같은 마가다국 출신의 난다왕조를 멸망시키고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인도 침공과 퇴각 과정에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을 틈타 인도 서북부의 지배권을 확립하였고, 그 뒤를 이은 빈두사라왕에 이르러 칼링가와 인도 남부지역 일부를 제외한 인도대륙 대부분을 통합했다. (왼쪽); 마우리아제국의 3대 아소카왕에 이르러 칼링가를 합병하여 남부 일부를 제외한 인도 전체를 통일하여 마침내 세계제국을 완성했다. (오른쪽)

마우리아왕국은 제국의 수도 바로 남쪽에서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듯한 칼링가의 존재에 마음이 편치 못했을 것이다. 바로 이웃한 마우리아왕국의 강력한 경쟁자이면서 부유한 재정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칼링가가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점이 작지 않은 위협이었을 것이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칼링가는 인도양을 지배하며 해양무역을 독점했다. 칼링가가 동부해안에서 누리고 있던 패권으로 사실상 마우리아왕국의 상인들에게는 해로가 봉쇄되었던 것이다. 갠지스강 유역에서 남부 데칸(Deccan) 지역를 연결하는 육로통상도 칼링가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칼링가에 의해 통상이 봉쇄되면서 거대한 영토를 통치하는데 소요되는 막대한 재원 마련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란 점을 쉽게 짐작할 있다.

마우리아왕국은 찬드라굽타로부터 빈두사라를 거쳐 아소카왕에 이르기까지 급속하게 영토를 확장해왔다. 따라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운용해야 하는 군대 유지비와 드넓은 제국의 통치를 위한 비용이 급속히 늘어났을 것이다. 찬드라굽타 시대에 마우리아왕국의 군대 규모는 보병 60 , 기병 3 , 코끼리부대 9 마리와 전차 8 대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소카왕에 이르면, 마우리아의 군대 규모는 훨씬 커졌을 가능성이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아소카왕의 군대에는 인도 서북부 중앙아사아의 그리스계 왕국과 박트리아 출신의 용병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티베트불교 조낭파(Jonang School) 대학승이었으며 「인도불교사」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따라나타(Taranatha) 이야기로 인해 일부 학자들은 칼링가의 뱃사람들이 아소카왕에게 바치기 위해 값비싼 보물을 싣고 오던 배들을 약탈했다고 믿고 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면, 마가다 출신의 뱃사람들이 인도양을 항해했다면 방해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전의 어느 기록에도 없는 것을 이야기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확신할 없을 같다.

오디샤주 해안의 어촌마을에 널리 떠도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다. 이에 따르면, 아소카는 어부의 딸이면서 칼링가국 왕세자의 약혼녀였던 카루바키(Karuvaki) 미모에 반해 칼링가를 침공했다고 한다. 일견 터무니없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야기지만, 왕비 칙령에 아소카왕에게는 카루바키란 이름의 왕비가 있었음을 전한다. 그녀는 아소카왕의 번째 왕비이며 티발라(Tivala) 왕자의 친모였다. 아소카에게는 많은 왕비들이 있었지만 남아있는 아소카왕의 칙령에 이름이 새겨져 전해오는 유일한 왕비이며, 티발라 역시 이름이 새겨져 전해오는 유일한 왕자이다.

전쟁의 영향, 아소카왕과 불교

아소카왕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칼링가 지역을 정벌했다. 그는 인도 또는 세계 역사상 최고의 제왕으로까지 불리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아소카왕이 인도대륙에서 최초로 가장 넓은 판도를 가진 마우리아 통일제국을 건설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그후 그의 통치이념과 불교옹호정책이 역할을 덕분이었을 것이다. 칼링가전쟁은 아소카왕 자신뿐만 아니라 인류가 오늘까지 느낄 있는 영향을 남겼다고 있다.

칼링가전쟁의 참상으로 심경의 변화를 경험한 아소카왕은 바위 담마칙령 13호에서칼링가를 정복하고 , 신의 총애를 받는 자는 독립국이 정복당할 발생한 살육과 부상과 포로로 극도의 고통과 슬픔으로 마음이 무거웠다라고 적었다. 깊은 고뇌와 참회 끝에 아소카는 무력 정복(bherighosa) 포기하고 법의 정복(dhammaghosa)으로 전환했다.

적어도 외적으로는 또는 직접적으로는 칼링가전쟁의 참상으로 인한 고뇌와 참회로 아소카왕은 불교에 귀의 또는 불교 교리에 대한 옹호에 이르게 것으로 보인다. 북방불교와 남방불교의 전승에 따라, 아소카왕을 불교로 인도한 사람이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 스리랑카에서 내려오는 팔리어 전승에 의하면, 아소카왕은 즉위 3 동안은 자신의 부왕 빈두사라왕의 브라만 후원에 따라 6 명의 브라만을 보살폈다. 빈두사라왕과 왕비는 사명외도(邪命外道) 하나였던 아지비카(Ajivika)였으며, 따라서 아소카도 틀림없이 아지비카로 자라났을 것이다.

그러나 아소카왕은 자신이 후원하던 브라만의 행동에 점점 실망하게 되고 다른 종교에서 대안을 찾으려고 하던 차에 어느 창가 아래를 지나가던 동자승 니그로다(Nigrodha) 고요한 몸가짐에 이끌렸다. 그는 동자승을 데려오게 했다고 한다. 어린 동자승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이 제거했던 빈두사라왕의 왕세자이자 이복형이었던 수시마(Susima) 왕자의 아들이었다. 아소카왕은 니그로다를 좋아하게 되었고 불방일(不放逸, appamāda) 관한 설교를 듣게 된다. 이에 감동한 아소카왕은 삼보(三寶) 귀의하여 재가신도가 되었다고 한다.

아소카왕에 대한 전설로 가장 오래된 산스크리트어본은 불교설화를 집대성한 『디비야바다나(Divyāvadāna)』라는 책에 실린 것으로 통상 『아소카바다나(Aśokāvadāna)』라 불리는데 서진(西晉)에서 306년에 안법흠(安法欽) 의해 『아육왕전(阿育王傳) 7권으로 번역되고, 양나라 때인 512년에 건강(建康, 남경)에서 승가바라(僧伽婆羅) 의해 『아육왕경(阿育王經) 10권으로 다시 번역되었다.

전륜성왕에 대한 내용을 전하는 『아육왕전(阿育王傳)』이 해인사 고려대장경에 전한다. 서진(西晉) 안식삼장(安息三藏) 안법흠(安法欽)의 한역. 고려대장경연구소.
해인사 고려대장경에 전하는 전륜성왕에 대한 또 다른 번역으로 『아육왕경(阿育王經)』이 있다. 양(梁) 부남(扶南) 승가바라(僧伽婆羅)의 한역. 고려대장경연구소.

『아소카바다나』에 의하면, 아소카왕의 불교 귀의는 사무드라(Samudra)라는 승려가 행한 이적(異跡)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많은 불교학자들이 팔리어 전승이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아소카왕은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달리 불교에 귀의했으며 불교를 후원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리고 아소카왕의 불교 귀의는 그의 왕위 즉위 번째에 해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후 그는 파탈리푸트라에 있는 굴굴타아람마(Kukkuārāma, 屈屈阿濫摩)라는 사원을 자주 찾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불교 3차결집을 주관하게 되는 목갈리풋타팃사(Moggaliputta-Tissa)라는 고승을 만나게 된다. 또한 즉위 6 차에는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진 아소카왕의 자식들, 마힌다(Mahinda) 왕자와 상가미타(Saghamittā) 공주가 승려가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어느 불교 기록에도 칼링가전쟁이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그의 불교 귀의가 전쟁으로 인해 이루어진 일이라는 기록도 없다. 칼링가전쟁에 대한 기록은 아소카왕이 자신의 정복지에 건립한 마애칙령에만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소카왕은 전쟁으로 인해 불교에 귀의했다고 언급한 적이 없다. 전쟁 법의 실행과 전파에 열정을 쏟고 있다는 언급이 있어 그의 불교 귀의에 대한 언급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으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고 좀더 포용적인 정책을 펼치기 위해 불교의 가르침을 더욱 후원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 또한 충분히 있어 보인다.

아소카왕은 북인도에 머물고 있던 불교를 인도대륙을 통합하여 이룩한 거대한 제국 곳곳으로 퍼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 미얀마,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 그리스, 북아프리카 세계 각지로 불교 포교단을 파견하여 전파했다. 특히 스리랑카에는 자신의 왕자와 공주를 파견하여 포교에 성공하였고, 이로 인해 스리랑카는 남방불교(소승불교) 근거지가 되어 미얀마, 태국 수마트라, 자바 등의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불교가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