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샤주의 다이아몬드 삼각지대, (1) 우다야기리

(1) 떠오르는 태양의 언덕, 우다야기리

오리사(Orissa) 번성했던 불교 신앙과 교육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가운데에 다이아몬드 삼각지대(Diamond Triangle) 있었는데 인접한 개의 언덕에 위치한 우다야기리(Udayagiri), 라트나기리(Ratnagiri), 랄리트기리(Lalitgiri) 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금강승(金剛乘, Vajrayāna) 시작되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우다야기리의 상징적인 불전(佛殿)의 모습. 승원2의 천장이 없는 신전 안에 노출된 불상이 보인다.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를 포함해 대부분의 오디샤주 관광지와 유적지를 찾을 경우 오디샤주의 주도인 부바네스와르(Bhubaneswar) 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는 하루 내에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를 모두 둘러보기 위해 아침 일찍 부바네스와르의 호텔을 나섰다. 자지푸르(Jajpur) 지구에 속하는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는 부바네스와르에서 북동쪽으로 직선거리 60km가량 떨어져 있다. 부바네스와르를 벗어나 1958년까지 주도였던 쿠타크(Cuttack) 지나면서 교통량이 많이 늘어났지만 한적해졌다. 16 고속도로에서 파라딥(Paradip) 방향으로 53 고속도로로 바꿔 탔다가 왼쪽으로 벗어나 우리의 번째 목적지인 우다야기리에 도착했다.

부바네스와르에서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에 이르는 길.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를 구성하는 우다야기리, 라트나기리, 랄리트기리의 위치.

오리사의 불교

오리사는 불교와 오랜 관계를 맺어왔다. 불교 전승에 의하면,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대각을 이룬 49일동안 7일씩 7 자리를 옮겨가며 선정(禪定) 들었다고 하는데 선정을 마칠 때쯤 길을 찾아와 붓다에게 떡과 꿀을 올리고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귀의하여 () () 이보(二寶) 귀의한 최초의 재가신도가 되었다는 따뿟사(Tapussa, 提謂) 발리까(Bhallika, 波利)라는 상인이 바로 이곳 오리사 출신이었다.

또한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Maurya) 왕조 3 왕인 아소카(Aśoka, 산스크리트 Ashoka) 왕이 칼링가(Kalinga) 정복하면서 참혹한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정법(正法, Dharma)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轉輪聖王, chakravarti-rāja) 되면서 불교의 흥성과 전파에 크게 기여하게 계기가 되었던 칼링가가 바로 이곳 오리사였다.

붓다가 살아 있을 오리사 땅에 발을 디딘 적은 없지만 불교는 시작과 함께 이곳 오리사에서 뿌리를 내리고 번성하여 15~16세기까지는 명백을 유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7세기 초에 북인도를 지배했고 날란다(Nalanda) 승원을 중건ž확장하며 날란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바르다나(Vardhana) 왕조의 하르샤(Harsha, 戒日王, 606~647) 왕이 오르사의 일부 지역을 정복하고 우트칼라(Utkala) 캉고다(Kangoda)지역에 대한 통치를 위해 소마다타(Somadatta) 총독으로 파견했을 당시에 오리사의 불교는 상당히 번영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의 유학승 현장() 639년경 오리사 땅을 밟았던 것도 바로 때쯤이었다. 현장은 이곳을 오차국(烏茶國)이라 불렀는데 오리사의 이름 가운데 하나였던 Odra 한자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현장에 의하면, 오차국 사람들의 용모는 우람하고 얼굴색은 누렇고 가무잡잡한데 언어와 억양은 중인도와는 달랐다. 게으름이 없고 학예를 즐겨하여 대부분 불교를 믿고 있었다. 가람은 1백여 군데로, 승도는 1만여 명인데 모두 대승의 가르침을 학습하고 있었다. 천사는 50군데이며, 이도인들이 잡거하고 있었다. 스투파는 10 군데로 모두 여래가 설법했던 곳이며 아소카왕이 세웠던 것들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리사에서 불교는 8~10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시기에 현재의 오디샤 일부를 포함하여 인도 동부를 지배했던 바우마-까라(Bhauma-Kara) 왕조(736~910 AD) 통치 아래에서 불교는 국교가 되었다. 그들의 비호 하에 많은 가람들이 번영을 누렸다. 시기에는 또한 밀교(密敎, Tantricism) 많은 발전을 보였다. 랄리트기리, 라트나기리, 우다야기리에서 발굴된 다양한 대승불교의 신들도 바우마-까라 시대의 것들이다.

11~12세기 이후 인도 각지에 무슬림 침략이 증가하고 오리사에도 힌두 왕국들이 연이어 들어서면서 오리사의 여러 곳에서도 불교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이후로는 오리사에서 이상 불교가 존속하지 못하게 된다. 잦은 무슬림의 공격으로 승려들과 불교도들은 티벳과 히말라야 지역으로 탈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명맥이 끊긴 오리사 땅의 불교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갔다.

우다야기리의 발굴

그리고 세기가 흐른 , 우다야기리가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것은 1870 당시 자지푸르의 부행정관이었던 바부 찬드라세크하라 바누르지(Babu Chandrasekhara Banurji) 야생동물들이 출몰하는 깊은 정글 속에 위치한 언덕을 찾아 이에 대한 짧은 보고서를 캘커타 벵갈 아시아학회지(Journal of the Asiatic Society of Bengal)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언덕 밑에서 불상을 만났으며, 곳에서부터 계단식 우물이 있는 사이에 많은 유물들이 널려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우물에서 15m 위쪽으로 많은 유물이 산재해 있는 하나의 유적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으로 문설주와 경내에 안치되어 있던 불상을 꼽았다. 불상은 서로 다른 덩어리의 돌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명상을 하고 있는 듯한 좌상이었다고 기록했다. 그에 의하면, 상처를 받지 않은 온전한 불상은 거의 찾아볼 없었다고 했다.

바누르지의 보고서를 읽고 여기에 자극을 받은 당시 쿠타크의 행정관이었던 빔스(John Beams) 1875 현장을 방문하고 자신의 방문 보고서를 벵갈 아시아학회지 발표했다. 강들로 둘러싸여 있고 강들이 교차하는 곳이어서 접근이 매우 어려웠다고 그는 기록했다. 그는 또한 승인을 받아 쿠타크시의 공공정원에 설치하기 위해 바누르지가 언급했던 문설주를 반출했음도 언급했다.

1928년에는 당시 캘커타대학(Calcutta University) 교수였던 차칼다르(H. C. Chakaldar) 자신의 현장 방문 보고서를 모던 리뷰지(Modern Review) 발표했다. 그는 언덕 밑에 있던 연화수보살(蓮花手菩薩, Bodhisattva Padmapani) () 언급하며 불교교리 문구와 케사바 굽타(Kesava Gupta) 기부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고 했다. 바누르지가 방문했을 당시 많은 고대 유물들이 널리 산재해 있었다고 했던 보살상과 계단식 우물 사이의 공간은 다른 종파 사람들이 그들의 성전을 조성하기 위해 유물들을 무단 반출하면서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우물 위쪽에서 거대한 붓다 좌상을 발견했으며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을 시켜 땅에서 파내도록 했다. 빔스가 문설주를 반출한 남겨져 있던 구덩이를 여전히 있었다고도 기록했다.

1930년에는 당시 캘커타 인도박물관(Indian Museum, Calcutta) 책임 고고학 담당자였던 프라사드 찬다(Ram Prasad Chanda) 1927~28 기간동안 현장 방문 자신의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찬다는 박물관에 전시할 유물 수집을 위해 현장을 찾았던 것이다. 그는 지역 주민들을 통해 빔스가 문설주만 반출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조각품도 여러 점을 함께 반출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운데 점의 조각품이 쿠타크 소재 사원으로 옮겨졌으며, 가운데 열두 팔의 프라쥬나파라미타像과 강가여신像 이렇게 점은 함께 반출됐던 문설주와 함께 현재 파트나박물관(Patna Museum) 있다.

우다야기리의 불교 유적은 1870년부터 알려져 있었고 1937년부터는 인도고고학위원회(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로부터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실제 대규모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985년이 되어서였다. 대규모 발굴조사는 2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1 발굴은 1985~1989 기간에 진행되었으며 계곡의 북쪽 절반 지역에 국한되어 이루어졌다. 2 발굴은 1997~2003 기간에 진행되었으며 계곡의 남쪽 절반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차례에 걸친 대규모 발굴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낸 유물들은 우다야기리 불교 유적에 강한 금강승 전통의 영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라보살(多羅菩薩, Tara), 지세보살(持世菩薩, Vasudhāra), 아파라지타(Aparājitā), 귀자모신(鬼子母神, Hārītī), 준제보살(準提菩薩), 프라쥬나파라미타, 작명불모(作明佛母, Kurukullā), 양우리동녀(梨童女, Janguli) 이곳에서 발견된 다양한 여신상들은 금강승불교의 다양한 가르침을 나타내며 금강승이 숭배되고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우다야기리뿐만 아니라 라트나기리와 랄리트기리의 발굴로 수많은 조각품, 불상, 파편들, 석판, 도기류, 동전, 진흙판, 스투파 엄청난 양의 유물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발굴로 사람들은 현장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묘사했으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없었던 푸시파기리(Pushpagiri, 波祇釐) 승가람이 발견된 것으로 생각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를 이루는 곳의 유적군이 바로 푸시파기리라는 가설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1996~2006년의 기간 동안 진행된 랑구디(Langudi) 언덕에 대한 고고학 발굴 과정에서 pupa sabhar giriya라는 명문(銘文) 발견되면서 날란다, 탁사실라(Takshashila), 비크람실라(Vikramshila) 등과 비견되는 고대 불교대학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우다야기리의 입구

우리의 번째 목적지 우다야기리가 위치한 아시아(Assia) 산맥의 가장 동쪽 끝자락에 도착한 우리 일행의 앞에는 푸른 초원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초원을 나지막한 언덕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었는데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언덕은 U 모양으로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동쪽을 향해 열려 있어 해가 때면 U 계곡 곳곳에 따스한 햇살이 비친다. 그래서인지 언덕의 이름이 떠오르는 태양의 언덕, 우다야기리가 되었나 보다.

U자형 우다야기리 계곡 내에 펼쳐져 있는 승원1과 승원2 구역.

U자형 계곡은 남과 북으로 이등분된다. 부분 가운데 북쪽에는 우다야기리 승원1(Udayagiri Monastery No. 1) 마하스투파(Mahastupa) 위치한다. 그리고 남쪽 부분에는 우다야기리 승원2(Udayagiri Monastery No. 2) 차이트야그리하(Chaityagrha, 사리탑실) 있다. 우다야기리의 대부분의 봉헌탑들은 차이트야그리하 주변에 산재해 있다.

나무가 늘어선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금방 이곳의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불상들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곳에 도달한다. 라트나기리와 랄리트기리와는 달리 이곳에는 현장 박물관이 없다. 아직 추가로 발굴이 필요한 지역이 많아 남아서인지 아니면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조각품들은 작품성이 떨어져서 인지는 수가 없었다. 전시되어 있는 조각들을 하나씩 둘러보던 가운데 하나가 발길을 붙잡았다.

이 관음보살상의 양손은 모두 떨어져 나가고 없지만, 남아 있는 부분과 우다야기리의 다른 구역에서 발견된 유사한 관음보살상을 봤을 때 여원인(與願印, Varada mudra)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오른팔을 길게 아래로 늘어뜨리고 손가락을 펴서 바깥으로 향하도록 하고 있으며 왼손은 어깨 높이로 올리고 연꽃 줄기를 잡고 있는 모습으로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고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주겠다는 표시이다.

이 구역의 입구에 세워져 있던 관음보살(觀音菩薩, Avalokiteśvara) 상이다. 밀교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왼손에 들고 있는 연꽃은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불성(佛性) 갖추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어, 像을 지나 승원으로 들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번뇌망상에 물들지 않고 장차 피어날 불성을 갖추고 있음을 상기시키려는 듯했다. 발견 당시 가슴 부위에서 동강이 상태였으나 지금은 흔적은 남아있으나 하나로 이어져 있다.

야외에 불상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뒤에 현장 관리사무소 같은 건물이 있고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상주하고 있다.
우다야기리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불상들이 이곳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

계곡의 북쪽 지역, 승원1 구역

이곳에서 서쪽 방향으로 나무가 늘어선 길을 계속 따라가면 1 발굴 작업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우다야기리 승원1 구역이 나타난다. 승원1 구역에 도착하여 반달 또는 연꽃 문양의 계단을 올라서면 제일 먼저 우뚝 솟은 마하스투파를 마주한다. 스투파는 바닥이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변이 10m 된다. 바닥은 기초에서 연장되어 사람들이 탑돌이를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스투파의 높이는 원래 9m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뒤에 우다야기리 정상을 배경으로 서있는 현재 4.8m 높이의 벽돌 스투파는 방향으로 깊게 감실(龕室) 만들어져 있으며 인도 밀교의 5선나불(Dbyani-Buddha) 상들이 모셔져 있어 만다라(Mandala) 위에 구현된 듯했다: 중앙에 대일여래, 동쪽에 아축(, Akshobhya)여래, 남쪽에 보생(寶生, Ratnasambhava)여래, 서쪽에 아미타(Amitabha)여래, 북쪽에 불공성취(不空成就, Amoghasidhi)여래. 스투파의 부분은 훼손되어 있었으며 수미산 정상의 천계(천계) 상징하는 하르미카(harmika) 차트라(chhatri) 발견되지 않았다.

연꽃 또는 반달 문양의 계단 위로 우다야기리 언덕을 배경으로 마하스투파가 서 있다.
마하스투파의 네 방향으로 감실이 깊게 설치되어 있고 주변에는 탑돌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마하스투파를 지나치면 우다야기리 정상을 항해 느리게 오르막으로 공지가 나타난다. 공지 여기저기에는 아직도 유물들이 널브러져 있다. 아마도 발굴 당시 가치를 크게 인정받지 못한 것들인가 보다. 그리고 공지를 지나 가장 자리로 올라가면 정사각형(35mx35m) 벽돌 승원1 동향으로 앉아 있다. 승원의 실제 이름이 새겨진 문장(紋章) 발굴 과정에서 여러 차례 발견되었다. 승원의 이름은 마드하바푸라 마하비하라(Madhavapura Mahavihara)였다.

마하스투파와 승원1 사이의 공지에는 여전히 유물들이 널려 있었다. 훼손이 심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아마도 가치가 많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된 모양이었다.
공지 가장자리에 서 있는 네 팔의 관음보살상의 모습. 아래로 떨어뜨린 오른손 하나는 활짝 펴서 앞으로 향하고 있고 다른 오른손 하나는 염주를 쥐고 있다. 떨어져 나간 왼손에는 활짝 핀 연꽃이 쥐어져 있었을테고 다른 왼손 하나는 물병을 쥐고 있다.

승원1 중앙에 개방된 정사각형의 중정(中庭) 또는 안뜰이 있고 이를 21개의 개별 수련실이 둘러싸고 있는 차투-살라(chatuh-sala) 양식으로 지어졌다. 그리고 승원의 출입구는 동쪽으로 있으나 출입문과 문틀은 빔스가 다른 문설주를 반출했던 것처럼 누군가가 가져간 것인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훼손된 것인지 수는 없으나 사라지고 없었다. 승원은 1 일부가 아직도 남아 있다.

우다야기리 승원1의 전경.
승원의 가장자리에는 개별 수련실이 배치되어 있다. 개별 수련실을 배정 받은 승려들은 각 방에서 기거를 하며 득도를 향한 정진에 매진했을 것이다.

승원의 안쪽 벽에는 미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출입구가 설치된 신전이 있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문설주의 쪽에 9개의 미려한 불상과 불교 신상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었다고 했으나 현재는 자리에 이들 불상과 신상들이 없었다. 문설주 위부분에는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고, 좌우로는 칼을 들고 날아 다니는 지명행자(持明行者, Vidhyadhara)들이 보위하고 있다. 그리고 문설주의 아래 부분에는 수호신 드바라팔라(Dvārapāla) 뱀신 나가(Naga) 신전을 지키고 있다.

승원의 서쪽 벽에는 신전(불전)이 위치하고 있으며,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문설주가 눈길을 끌었다.
문설주 위부분의 조각 모습. 아래 부분 중앙에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고, 그 좌우로는 칼을 들고 날아 다니는 지명행자들이 보위하고 있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신전 내부에서 붓다, 지세보살 8개의 신상들이 발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신전 내부에는 다섯 개의 신상만이 남아 있다. 신전의 중심 불상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Bhumisparsha Mudrā) 자세로 금강보좌에 앉아 있는 붓다像으로 개의 서로 다른 석재로 만들어져 있다. 붓다의 뒤편 왼쪽에는 보관(寶冠) 지권인(智拳印, Bodhyangi Mudrā) 자세의 대일여래(大日如來, Mahāvairocanna Tathāgata)像이 있고 오른쪽에는 잠발라(Jambhala)像이 있다.

신전 내부의 모습. 중앙에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는 순간 붓다의 모습이 있고, 그 뒤 좌우에는 각각 대일여래와 잠발라가 배치되어 있다. 중앙의 붓다像은 세 개의 서로 다른 돌로 만들어진 모습이 선명히 보인다.

그리고 붓다상의 앞쪽으로 양편에는 각각 금강저(金剛杵, vajra) 오른손으로 잡고 가슴에 대고 있는 금강살타보살(金剛薩菩薩, Vajrasattva) 머리 부분이 훼손되고 전법륜인(轉法輪印, Dharmachakra Pravartana Mudrā) 자세를 하고 있는 다른 대일여래像이 배치되어 있다. 대일여래像이 앉아 있는 기단에는 전법륜인과 어울리게 초전법륜이 있었던 사르나트의 녹야원을 상징하는 법륜과 사슴이 조각되어 있다.

마하스투파와 승원1 7세기경에 건립되었으며, 승원은 7~12세기에 4차례에 걸쳐 건립ž증축이 진행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승원1 구역이 버려진 뒤에는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인도의 많은 고대 건축물들이 겪었던 운명처럼 지역민들이 건축물로부터 벽돌과 돌을 가져갔으며, 결과로 남아 있는 건축물의 높이도 각각이다. 군데군데 전체가 사라진 곳들도 있다.

승원 너머 북서쪽으로 정상 부근의 언덕이 돌출된 곳에 관음불, 작명불모(作明佛母, Kurukullā) 등의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고 근처에는 동굴도 하나 있다고 하는데 현재 그곳에 접근할 있는 길이 여의치 않아 눈앞에 두고 보질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계곡의 남쪽 지역, 승원2 구역

승원1 구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2 발굴로 모습을 드러낸 우다야기리 승원2 구역이 있다. 남동쪽 방향으로 직선거리 250m 떨어져 있다. 여기에는 심하프라스타 마하비하라(Simhaprastha Mahavihara)라는 이름을 가진 승원2 있다. 불상들이 야외에 전시된 곳까지 가지 않고 바로 승원2 있도록 중간에 다른 오솔길이 나무들 사이로 있다.

승원1과 승원2 사이의 오솔길.

심하프라스타 마하비하라는 원래 2 구조의 벽돌 건물이었으며 개별 수련실로 둘러싸인 중앙의 정사각형 중정(中庭) 또는 안뜰이 있는 차투-살라 양식으로 지어졌다. 13개의 개별 수련실이 4면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남쪽에 4 그리고 나머지 3 면에는 각각 3개의 수련실이 있었다. 수련실에는 개의 벽감(壁龕) 있었는데, 하나는 램프를 놓는 곳이었고 다른 곳은 개인이 숭배하는 신상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벽감의 크기에 맞는 신상들이 발견되어 같은 견해를 뒷받침한다.

승원2 출입구는 북쪽으로 있으며, 거대한 출입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출입구의 측면 벽에는 수호신들을 모시는 벽감이 설치되어 있었다. 동측 벽감 안에는 원래 자리에서 발견된 귀자모신이 여전히 모셔져 있다. 서측 벽감은 상당 부분 파괴되었으며 신상도 없는 상태이다. 찬다가 캘커타 인도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수집해 유물 가운데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 Vaiśravaa) 벽감의 주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 그는 신상이 비사문천왕이 아니라 잠발라라고 확인하고 있다.

위 부분에 검게 그을린 듯한 유적이 아래의 차이트야그리하 구역에서 바라본 승원2의 모습이다.
승원2의 내부 모습.

유아보호를 상징하는 귀자모신이 승원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당나라의 유학승 의정(義淨)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원래 사악한 야차녀(夜叉女) 왕사성(王舍城) 와서 아이를 잡아먹곤 하였다. 붓다가 그를 제도하기 위하여 그의 500명의 자식들 가운데 아들을 숨겨 놓자, 야차녀는 비탄에 빠져 슬피 울었다. 이때 다른 부모의 슬픔을 상기시켜 주는 붓다의 설법을 듣고 불교 귀의하여 안산(安産) 유아보호의 서원(誓願) 하였다고 한다. 앞으로 자신의 아이들을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하느냐는 질문에 붓다는 비구들이 머무는 모든 승원에서 그의 자식들은 충분한 음식을 제공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이유로 팔로 아이를 안고 있거나 무릎 주변에 여러 명의 아이를 데리고 있는 모습의 귀자모신像이 모든 인도 승원의 현관이나 식당 구석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승원2의 신전은 특이하게도 벽에서 돌출되어 있고 신전 주변을 돌 수 있도록 보행로가 설치되어 있다.

승원의 중심 신전은 남쪽 중앙에 위치한다. 신전 둘레에는 신전 둘레를 있는 보행로가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은 오리사의 다른 승원에서는 없는 것으로 이곳에서만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신전의 문설주는 빔스가 반출했으며 현재 파트나박물관에 설치되어 있다. 신전 내부에는 항마촉지인 자세로 2.6m 높이의 붓다像이 앉아 있다. 불상은 여러 개의 석재 덩어리로 만들어졌다.

신전의 천장이 훼손되고 남아 있지 않아 고요한 산속에서 문설주 틀을 통해 만나는 붓다의 모습은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신전 너머로 보이는 2층도 신전(불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전 뒤의 남쪽 위에는 2층에 하나의 방이 있다. 방에는 돌로 만든 받침대가 하나 있으나 위에 모셔져 있던 신상은 사라지고 없다. 승원2 황금기는 대부분 바우마-까라 왕조의 지배하에 있던 8~10세기였다. 바우마-까라 왕조가 지나고 10세기의 마지막 2~30년동안 승원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12세기 초가 되면 모두 떠나고 승원은 완전히 버려진 곳이 되었다. 승원의 남쪽 담장에서 가까운 곳에서 넓은 저수지가 발굴되기도 했다.

승원2 북서쪽에는 신전단지(Shrine Complex) 위치한다. 한가운데에서 땅에 서있는 상당히 규모의 관음보살像이 눈에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신전단지의 출입구는 동쪽으로 있으며, 동쪽을 제외한 방향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단지 내에는 신상을 모시기 위한 여러 개의 돌출된 방들이 발견되었다. 남쪽과 북쪽 구석에 방이 각각 하나씩 있고, 북쪽 벽에 다른 개의 방이 위치한다.

신전단지 한 가운데 서서 한 몸에 주목을 끌고 있는 네 팔의 관음보상像.

머리에 보관은 팔의 관음보살은 또한 로케슈바라(Lokeśvara) 확인되었는데 무릎, 허리, 어깨에서 세번 굽히기(tri-bhanga)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른손 하나는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으며, 하나의 오른손은 염주를 쥐고 있다. 왼손은 각각 활짝 연꽃과 물병을 잡고 있다. 머리 보관에는 작은 아미타불이 새겨져 있다. 뒤의 석판 가장 부분에는 과거칠불이 차례로 앉아 있고, 관음보살 머리 부분 양쪽의 동굴에는 각각 선재동자(善財童子, Sudhana Kumāra) 브리쿠티(Bhkuī)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석판의 아래 부분에는 좌우에 다라보살과 마두관음(馬頭觀音, Hayagrīva) 자리하고 있다.

관음보살像 뒷면에는 사리가 들어있는 스투파 건립을 언급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스투파는 아마도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 蓮花生) 사리가 들어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신전단지의 서측에서 발굴된 바로 스투파인 것으로 보인다.

승원2 구역. 왼쪽으로 차이트야그리하가 위치하고 똑바로 앞으로 나아가면 승원2가 있다.

승원2 북동쪽에는 차이트야그리하가 있다. 차이트야그리하가 있는 구역으로 들어서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많은 사리탑과 봉헙탑들이다. 우다야기리에서는 어느 곳보다 많은 다양한 돌과 벽돌 스투파들이 차이트야그리하 근처에 몰려 있다. 차이트야그리하는 동쪽을 향하여 자리 잡고 있으며, 차이트야그리하 자체보다 오래된 석대(石臺) 위에 건립되었다. 석대는 명문이 새겨진 사리함을 보면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차이트야그리하는 3세기경에 건립되었다.

차이트야그리하 근처에는 다양한 사리탑과 봉헌탑들이 몰려 있다.
승원2 구역 여기저기에도 유물들이 발굴된 곳에서 방치되고 있었다.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유물들이 박물관 등지로 옮겨 보관되든지 아니면 원래 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체계적인 복개수로가 사용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아마도 하수가 처리된 수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차이트야그리하 인근의 봉헌탑. (왼쪽); 계단식 우물. 계단을 내려가면 지금도 물이 있지만 현재는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물은 더러웠다. (오른쪽)

승원2에서 일정을 마치고 우다야기리의 출입구를 향해 언덕을 내려오다 보면 불상들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곳에 도달하기 조금 전에 돌을 깎아 만든 계단형 우물을 만난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암반에 이르게 된다. 이곳 승원에 머물던 승려들이 이곳에서 물을 길어다 사용했을 것이다. 우물 주변으로는 축대가 둘러져 있고, 입구 앞에는 기둥 개가 있다. 입구의 오른쪽 벽과 가장 아래 계단에 있는 아치에 우물이 라나카 바즈라나가(Ranaka Vajranaga) 봉헌물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은 아니어서 고요한 분위기에서 차분하게 살펴볼 있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과 순례객이 아직 그리 많지 않고, 부바네스와르에서 당일 여행이 가능해서인지 관광시설 등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라트나기리를 향해서 다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