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가야 대보리사의 7선처(七禪處), 대각을 이룬 붓다가 49일간 선정에 들었던

대보리사 경내 7선처 찾아가기

보드가야의 대보리사(大菩提寺, Mahabodhi Temple) 있던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2600 붓다는 깨달음(正覺) 얻어 깨어난 (覺者)’ 되었다. 지금의 대보리사 경내에는 붓다가 성도(成道) 49일동안 7일씩 7 자리를 옮겨가며 선정(禪定) 들었었다는 7선처(七禪處) 있어 특히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다. 순례객들도 이들 7선처를 찾아 붓다를 쫓아 선정에 들려는지 묵상을 하는 이들도 있고 경을 암송하는 이들로 넘쳐난다.

대보리사 경내에 표시된 7선처의 위치

불교 전승에 의하면, 붓다는 보리수 나무 아래에 인근의 농부가 건넨 길상초(吉祥草, Kusa) 묶음으로 자리를 만들고 앉아 정신을 집중하고 대각(大覺) 이루게 된다. 이제까지 품어왔던 모든 의혹이 걷히고 최고의 깨달음을 얻게 붓다는 대각의 기쁨을 누리며 같은 자리에 앉아 번째 7 동안 선정에 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7 동안 선정에 들었던 곳은 보리수 나무 바로 아래에 길상초를 깔고 보리수 나무를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며 앉아 대각을 이룬 자리이다. 대보리사 대탑 서편의 보리수 나무 아래에 있는 금강보좌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순례객들로 붐빈다.

붓다가 최고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강변의 조용한 숲 속에 있는 한 그루의 큰 나무 아래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는 점을 기억하면 전체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역사적인 붓다가 신격화되면서 길상초를 깔고 붓다가 앉았던 자리가 금강보좌(金剛寶座, vajrasana) 표현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붓다가 대각을 이룬 자리를 표시하기 위해 자리에 실제로 석재평판(石材平板) 설치한 사람은 200 이곳을 찾은 것으로 추정되는 아소카(Aśoka, 산스크리트 Ashoka) 왕이었다. 아소카왕이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금강보좌는 19세기 알렉산더 컨닝햄(Alexander Cunningham) 의해 발굴되었다.

보리수 나무와 대탑 사이가 금강보좌가 위치한 자리이다. 현재는 아소카왕의 금강보좌 위에서 발견된 굽타(Gupta) 시대에 설치된 금강보좌의 일부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보리수 나무와 금강보좌의 안전을 위해 높은 울타리가 세워져 있다.
보리수 나무 아래에 앉아 쉬고 있는데 마침 발 아래로 보리수 나뭇잎이 떨어져 내렸다. 나뭇잎을 몇 개 주워 책 속에 넣어 두고 잊어버렸는데 자료를 뒤척이다 바삭 마른 잎을 발견했다.

붓다는 금강보좌에서 북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번째 7일을 보냈다. 이곳에서 붓다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보리수를 응시했다고 전한다. 후에 이곳에 이를 기념하여 스투파가 세워졌으며 정안탑(靜眼塔, Animesa Locana Stupa)이라 불리고 있는데 눈을 깜빡이지 않으며 보리수를 응시하고 있는 붓다상이 안치되어 있다.

붓다가 눈을 깜빡이지 않고 보리수를 응시했음을 기념하여 세워진 정안탑. (왼쪽); 정안탑 아래에는 티벳 출신인 듯한 승려들이 앉아 독경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오른쪽)

그리고 붓다는 번째 7일을 보리수와 정안탑 사이에서 걷기 명상을 하며 보냈다. 붓다의 발이 땅을 디딘 곳마다 연꽃이 솟아올랐다고 전한다. 후에 이곳은 경행처(輕行處, Ratnachankrama) 불리고 있으며, 이곳에 일렬로 설치된 연꽃 조각은 붓다의 발이 디딘 곳을 상징한다.

대탑 북쪽 면에서 만나는 경행처. 이 근처도 조용히 묵상 또는 독경하는 승려와 순례객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보리수 나무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라트나그라하사원(Ratnaghar Chaitya) 자리에서 붓다는 연기법(緣起法) ()으로 그리고 ()으로 ()하며 번째 7 동안 선정에 들었다. 선정에 들어 있던 붓다의 몸에서 파란색, 노랑색, 빨간색, 하얀색, 오렌지색의 다섯 가지 밝은 빛이 나와 하늘을 밝게 비쳤다고 한다. 다섯 가지 색은 현재 불교 깃발을 구성하는 색깔로 사용되고 있다.

동남아 순례객들이 많이 찾는 듯 입구에 금박이 입혀져 있는 라트나그라하사원.

이어서 붓다는 보리수 나무의 동쪽으로 대보리사 대탑을 향해 계단을 내려오면 만나는 지점에 있던 아자팔라니그로다(Ajapala Nigrodha, 반얀) 나무 아래에서 다섯 번째 7 동안 선정에 들었다. 붓다는 이곳에서 오만한 바라문을 만나 어떻게 해야 바라문이 됩니까?”라는 질문에 출생(出生) 아니라 선업(善業)으로 바라문이 되는 것이라고 설했다. 지금은 나무는 없어졌지만 기둥이 세워져 자리를 표시하고 있다.

오랜 세월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아자팔라니그로다 나무는 자리를 지키지 못했고 대신 이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섯 번째 7 동안에는 보리수 나무로부터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호수가에서 붓다는 다시 선정에 들었다. 이때 비바람이 몰려왔으며, 이에 뱀의 (naga, 한역경전에서는 용왕으로 번역됨) 무찰린다(Mucalinda) 붓다를 일곱 감고 머리를 펴서 보호했다고 전한다. 장면이 호수 중앙에 조형물로 조성되어 있다.

무찰린다 연못 한가운데에는 이곳과 관련하여 전설처럼 내려오는 뱀의 왕 무찰린다가 붓다를 보호하고 있는 모습의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무찰린다 연못은 마치 인공호수인양 직사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붓다는 마지막 일곱 번째 7 동안 보리수 나무에서 남동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던 라자야타나(Rajayatana) 나무 아래에서 선정에 들었다. 그때 따뿟사(Tapussa, 提謂) 발리까(Bhallika, 波利)라는 상인이 붓다에게 떡과 꿀로 공양을 올리고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귀의했다. 이때는 아직 다섯 도반에게 법을 설하기 전이었고 상가가 형성되기 전으로 상인은 () () 이보(二寶) 귀의한 최초의 재가신자가 되었다.

마지막 7일간 선정에 들었던 라자야타나 나무가 있었던 자리임을 알리는 안내판.

대보리사를 찾는 순례객들은 7선처를 차례로 참배하며 원하는 곳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명상을 하거나 경을 읽으며 오래 머무르는 모습을 있다. 그렇지만 대보리사에서 순례객들에게 1 참배 대상은 언제나 보리수 나무와 아래에 있는 금강보좌이다.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순례객들이 참배를 하거나 보리수 나무와 대탑의 그늘에서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중요한 행사들도 이곳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7선처의 유래

이러한 7선처는 언제부터 유래한 것일까? 7선처는 정말 붓다가 대각을 이룬 선정에 들었던 장소들일까? 역사적 붓다의 발자취를 쫓아가는 입장에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붓다는 실제로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실존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붓다에 관한 기록에는 사실에 근거하지만 기술에는 다소 상상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가미되곤 한다. 이것은 아마도 위대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의 깊이가 더해 갈수록 그에 따라 사실적인 내용을 인상적이고 풍부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이것은 또한 유구한 세월동안 불교라는 종교적 체험의 일부를 구성하는 요소로 작용해왔다.

초기 팔리어 경전에서 붓다의 출가 수행과 깨달음의 성취와 관련하여 자전적인 설명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가운데에서 학자들이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성구경(聖求經, Ariyapariyesana Sutta)에서 그려지고 있는 붓다의 대각 순간은 소박하기 그지없다. 49일간의 선정 또는 7선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비구들이여! 이곳에서 나는 스스로 태어나는 존재이면서 태어남의 허물을 알아, 태어나지 않는 더없이 완전한 안락함(열반) 얻었고, 스스로 늙는 존재이면서 늙음의 허물을 알아, 늙지 않는 위없는 완전한 안락함을 얻었고, 스스로 병든 존재이면서 병듦의 허물을 알아, 병들지 않는 더없는 완전한 안락함을 얻었느니라. 스스로 죽는 존재이면서 죽음의 허물을 알아, 죽지 않는 더없는 완전한 안락함을 얻었고, 스스로 더러운 존재이면서 더러움의 허물을 알아, 더럽지 않는 더없는 완전한 안락함을 얻었느니라.

나에게는 " 마음의 해탈은 부동(不動)하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라. 이제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리라" 것을 있는 해탈지견을 얻었느니라. 성구경

성구경과 함께 마지히마 니카야(Majjhima Nikaya, 中部) 등장하는 보리왕자경(菩提王子經 Bodhirajakumara Sutta) 팔리어 경전에서 붓다가 최고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과정을 가장 풍부하게 묘사하고 있는 경에 속한다. 붓다가 보리수 나무에 당도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단계별로 훨씬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경에도 49일간의 선정과 7선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초기 경전의 기술은 불전(佛傳) 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붓다의 중요한 설법과 교단 규칙의 제정 등이 주목적이었다. 이에 따라 붓다의 행적에 관하여서는 단편적으로 그리고 매우 드물게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 붓다의 생애를 모두 그대로 되살려내는 것은 어려울 있으나, 여기에도 신화적(神話的전설적(傳說的)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초기 경전에서 보여주는 붓다의 모습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 있다는 점은 짐작할 있다.

그러나 후대에 쓰여진 붓다의 전기들은 붓다 입멸 수백 년이 지난 뒤부터 성립된 것이고, 더구나 붓다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입장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여러가지 창작과 가탁이 첨가되고 신화적ž전설적인 요소가 대단히 많아진다. 붓다를 직접 친견하고 붓다로부터 설법을 직접 들었던 성문(聲聞)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서 종교적인 목적 또는 필요에 의해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붓다가 신격화되고 덕을 크게 찬양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붓다의 육체적 탄생과 영적 탄생은 중요한 찬양의 대상이 되었다.

중요한 산스크리트어 불전에서는 붓다의 대각 순간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부파불교의 대중부(大衆部, Mahāsaghika) 가운데 설출세부(說出世部, Lokottaravādin) 율장(律藏) 자료를 집대성한 마하바스투(Mahavastu, 大事), 불교시인 아슈바고샤(Aśvaghoa, 馬鳴) 의해 카비야(Kāvya) 체라는 아름다운 미문(美文)으로 쓰여진 붓다짜리따(Buddhacharita, 佛所行讚), 붓다의 생애를 서사시적으로 묘사한 일련의 대승 원시경전인 랄리타비스타라경(Lalitavistara Sūtra, 普曜經), 자타카(Jātaka, 本生譚) 서문에 해당되는 니다나카타(Nidānakathā, 因緣品) 등에서 묘사된 붓다의 대각 직후 49일간의 선정과 7선처를 아래의 표에 정리해보았다.

49 선정

마하바스투(Mahāvastu) 기원전 2세기-기원후 4세기

붓다짜리따(Buddhacharita, 佛所行讚) 2세기

랄리타비스타라경(Lalitavistara Sūtra, 方廣大莊嚴經) 3세기

니다나카타(Nidāna Kathā, 因緣品)

5세기

1-7

보리수 아래

보리수 아래 (漢譯 동일)

보리수 아래 (漢譯 동일)

금강보좌

2-7

보리수 응시 (장소/방향 미언급)

미언급

삼천대천세계를 돌며 끝까지 거닐음. (漢譯 동일)

금강보좌에서 북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리도량을 응시. 장소는 나중에 정안탑으로 알려짐.

3-7

먼거리를 위아래로 걷기 (장소/방향 미언급)

미언급

보리도량을 응시 (漢譯 동일)

동서로 펼쳐진 보석장식의 회랑을 위아래로 거닐음. 장소는 나중에 보석장식 회랑으로 알려짐.

4-7

뱀의 칼라(Kāla) (장소/방향 미언급)

미언급

멀지 않은 동쪽 바다에서 서쪽 바다까지 거닐음 (漢譯 근처의 바다 끝까지를 거닐음)

보리수 나무의 북서쪽에 지어진 보석의 .

5-7

뱀의 무칠린다(Mucilinda) , 비바람이 몰려와 붓다를 일곱 감고 머리를 펴서 보호, 뱀의 비니파타(Vinipāta) 붓다의 몸을 감고 보호. (장소/방향 미언급)

미언급

뱀의 무칠린다(Mucilinda) 사는 , 찬바람이 일어 붓다를 일곱 감고 머리를 펴서 보호. 동쪽에서 다른 뱀의 왕들이 도착해 붓다를 보호. (漢譯 목진린다[目眞隣陀]용왕이 살고 있는 )

목동의 니그로다 나무 아래.

6-7

염소지기의 반얀나무 아래

미언급

염소지기의 반얀나무 (漢譯 니구타[尼俱陀樹] 나무)

무찰린다(Mucalinda) 나무 아래. 비바람이 몰려오자, 뱀의 무찰린다가 붓다를 일곱 감고 머리를 펴서 보호함.

7-7

크시리카나무 숲의 여러 신의 사당 (장소/방향 미언급)

미언급

보리수 나무의 몸통 (漢譯 다연림[多演林] 안의 나무 아래)

라자야타나(Rājāyatana) 나무 아래

현재 보드가야의 대보리사 7선처에 표시된 안내판과 보드가야가 속한 비하르(Bihar) 관광부의 자료는 니다나카타에 기록된 49일간의 선정 7선처 관련 내용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니다나카타는 5세기 전반에 활약한 부다고사(Buddhaghosa, 佛音) 의해 성립된 문헌이며, 팔리어 불교 문헌 중에서 가장 체계적인 불전의 시초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때까지 여기저기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단편적인 붓다와 관련된 행적을 시기별로 일관되게 정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초의 체계적 불전으로 수도 있을 같다. 7선처 관련 내용도 그때까지 다양한 출처의 내용들을 일관되고 구체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붓다짜리따에서는 번째 7일동안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선정에 들었다는 점은 기술되고 있지만 나머지 여섯 번의 7일간 선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붓다짜리따가 성립된 2세기 초만 해도 49일간의 선정 7선처에 대한 생각이 아직 전혀 정립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하바스투와 랄리타비스타라경을 보면, 세월이 흐르면서 붓다의 영적 탄생의 순간을 신격화하고 찬양하려는 경향이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7선처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논란

위치에 대한 언급이 없거나 추상적이던 대부분의 7선처들이 많은 세월이 흘러 구체적인 위치나 방향 등에 대한 기술이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은 점차 7선처의 구체적 장소에 대해 기대감과 확신을 갖게 듯하다. 5세기 초에 보드가야를 찾았던 동진(東晋) 유학승 법현(法顯) 7선처의 위치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없이 열거하고 있는데 그친 반면, 7세기에 이곳을 찾았던 () 유학승 현장() 7선처뿐만 아니라 기타 많은 장소들에 대한 구체적 위치를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대보리사 경내에 표시되어 있는 7선처 가운데 일부는 현재의 위치가 잘못된 것으로 사람들의 공감을 받고 있는 것들이 있다. 가운데 대보리사 대탑 남쪽에 있는 무찰린다 연못은 붓다가 대각을 이룬 여섯 번째 7일동안 선정에 들었던 장소가 아니며, 대탑 남쪽의 연못에서 남쪽 방향으로 직선거리 1.5km 떨어져 있는 모짜림(Mocharim) 마을에 있는 연못이 실재의 무찰린다 연못이라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분홍색은 7선처와 관련하여 컨닝햄이 주장한 곳들이며, 파란색은 기타의 주장들이다.

모짜림 연못이 실재의 무찰린다 연못이란 제안은 新날란다대승원(Nava Nalanda Mahavihara) 출신의 팀이 많은 자료와 유적을 조사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그들이 이용했던 자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료는 역시 현장이 무찰린다 연못과 주변 지역에 대해 남긴 기록이었다.

보리수 남문 밖에 커다란 연못이 있다. 둘레는 7백여 된다. 맑은 물은 거울과 같은데 용과 고기가 살고 있다. 바라문 형제가 대자대천의 말을 듣고서 것이다. 이어 남쪽에 있는 연못은 옛날 여래가 처음 깨달음을 얻고 세탁하려 했을 제석천이 부처님을 위해 만든 것이다. 연못 서쪽에 돌이 있다. 부처님이 옷을 세탁하고 말리려 했을 제석천이 대설산에서 가져온 것이다. 수토파는 여래가 그곳에서 낡은 옷을 입었던 곳이다. 이어 남쪽 속에 있는 수토파는 여래가 가난한 노파의 낡은 옷을 보시받았던 곳이다.

제석천이 만든 연못 동쪽 속에 무칠란다 용왕 못이 있다. 물은 검은 기가 도는 아름다운 빛깔인데 맛이 좋다. 서쪽 기슭에 자그마한 정사가 있는데 안에 불상이 만들어져 있다. 옛날 여래가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었을 이곳에서 좌선하여 7 동안 선정에 들었다. 그때 용왕은 여래를 경호하여 몸으로 부처님을 둘러싸서 일곱 바퀴를 돌고 여러 머리를 내밀어 엎드려서는 우산을 만들었다. 연못 동쪽 기슭에 여래가 좌선했던 집이 있다. –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현장이 말하는 보리수 남문 밖에 있는 둘레 7백여 보의 연못은 현재 대보리사 경내에 있는 무찰린다 연못이다. ‘이어 남쪽에 있는 연못으로 제석천이 붓다를 위해 만들었다는 연못은, 팀의 주장에 의하면, 현재 꼬또라와(Kotorawa) 마을에 있는 연못이라고 한다. 그리고 현장이 제석천이 만든 연못 동쪽 속에있다고 실재의 무찰린다 연못이 현재 모짜림 마을의 연못이라는 것이다. 빠른 태국의 불교도들은 벌써 연못가에 뱀의 무찰린다가 붓다를 일곱 감고 머리를 펴서 보호하고 있는 모습의 조각상을 설치해 놓았다.

현재 점점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실재 무찰린다 연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모짜림 마을의 연못. 현장은 검은 기가 도는 아름다운 빛깔이었으며 그 물 맛도 좋다고 했는데, 자금의 모습은 전혀 그렇게 보이질 않았다.
모짜림 연못 건너편 물가에는 붓다와 붓다를 보호하고 있는 뱀의 왕 무찰린다 모습의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태국 불교도들이 설치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이전에 현장의 기록을 활용하여 실재의 무찰린다 연못을 확인했던 사람이 있었다. 19세기에 보드가야 대보리사의 발굴과 복원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컨닝햄이 장본인이다. 1892년에 발간된 그의 보드가야 대보리사 발굴 기록에 의하면, 보리수 남문 밖에 있는 둘레 7백여 보의 †연못은 바라문 형제가 연못이며 붓다연못(Buddhokar 또는 Buddha Pokhar)”이라고 불린다고 했다. 연못은 현장이 방문했을 때의 크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도 했다.

연못에서 남쪽으로 붓다가 대각을 이룬 목욕하려 했을 제석천이 붓다를 위해 만들었다는 연못이 있으며, “목욕연못(Ghosal Chak)”이라 불린다고 했다. 컨닝햄은 붓다연못에서 남서쪽으로 300피트(91m) 떨어진 곳에 있다고 했는데, 연못의 크기가 줄어서인지 아니면 당시에는 지금처럼 쉽고 정확하게 거리 측정을 없어서였는지 수는 없으나 현재의 거리는 160m 되었다. 그리고 제석천 연못에서 동쪽으로 속에 뱀의 무찰린다 †연못이 있다고 했다. 또한 연못의 동쪽 방향으로 우렐(Urel) 또는 우루빌와(Uruvilwa) 마을이 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컨닝햄이 목격했던 †무찰린다 연못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진 상태이다.

컨닝햄이 주장한 7선처 관련 장소들. 컨닝햄이 실재 무찰린다 연못이라고 주장한 우렐 마을의 †연못은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新날란다대승원 팀은 컨닝햄이 확인한 곳이 기본적으로 추측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고고학적 또는 명문의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장이 자주 사용하는 근처에’, ‘~ 곁에’, ‘~에서 멀지 않은 곳에등의 표현으로 컨닝햄이 모든 장소들이 대보리사 근처의 매우 좁은 지역 내에 위치한 것으로 믿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7선처의 일부는 넓은 지역으로 흩어져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의견을 개진하며 바라문이 팠다는 연못에서 2.2km 떨어진 꼬또라와 마을 연못과 1.5km 떨어진 모짜림 마을 연못을 각각 제석천 연못과 실재의 무찰린다 연못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팀이 주장하는 꼬또라와 마을 연못과 모짜림 마을 연못 역시 팀이 비판적 견해를 보이는 컨닝햄의 목욕연못과 무찰린다 연못만큼이나 근거가 매우 약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자연스러움으로 말한다면 오히려 컨닝행의 제안이 그럴 듯하다는 느낌을 준다. 여기서 중요한 고려 사항이 하나 있다. 경우 모두 당시의 지형지물을 기준으로 사건 현장을 추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컨닝햄이 실재의 무찰린다 연못으로 특정했던 우렐 마을 연못은 컨닝햄이 방문했던 때로부터 불과 140년이 흐른 현재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없다. 잦은 홍수 등으로 강물 길이 순식간에 킬로미터씩 이동하는 일이 드물지 않은 현지의 상황을 고려하면 2,500~600년의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연못들이 사라지거나 새로 생겨났을 짐작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붓다가 대각을 이룬 다섯 번째 7 동안 선정에 들었던 아자팔라니그로다(반얀) 나무의 위치에 대해서 니다나카타에서는 목동의 니그로다 나무라고 칭한 이외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나 마하바스투에서는 나이란자나(Nairanjana, 尼連禪河) 강변에서 고행 생활을 하고 있던 붓다와 마주치곤 하던 염소지기가 붓다를 위해 강변에 반얀나무를 심었다고 기록했다. 선견지명이 있었던지 염소지기는 반얀나무가 완전히 자랄 때가 되면 붓다가 목표로 바를 성취할 것이라고 믿었다. 염소지기는 후에 삼십삼천왕 가운데 하나로 다시 태어났으며 니그로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랄리타비스타라경에서도 붓다는 대각 여섯 번째 주에 나이란자나강 변에 있는 염소지기의 반얀나무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현재 대탑의 동쪽 30m 앞에 표시되어 있는 아자팔라니그로다 나무의 위치는 훨씬 동쪽의 나이란자나 강가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붓다가 대각 후 다섯 번째 7일간 선정에 들었다고 전해지는 아자팔라니그로다 나무는 나이란자나 강변일 가능성이 높으나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현재 경내에 표시된 위치에서 동쪽으로 연장해 강변으로 오면 담벼락 넘어 시끌벅적한 시장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밭이 있는 곳에 도착한다. 이곳은 현재 지역의 힌두 마한트(Mahant) 소유의 땅이다.
마한트 소유의 밭 가장자리에 대보리사 대탑과 일직선 상에 있는 지점에 미얀마 왕이 세운 오래된 스투파가 있었다. 19세기에 미얀마 측에서 대보리사 발굴 등의 작업을 했으므로 그 당시의 작업을 기념하는 스투파인지, 아니면 아자팔라니그로다 나무와 관련된 스투파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붓다가 대각을 이룬 마지막 일곱 번째 7 동안 선정에 들었던 라자야타나 나무 아래에서 마지막 지금의 오리사주 출신의 따뿟사(Tapussa, 提謂) 발리까(Bhallika, 波利)라는 상인이 붓다에게 떡과 꿀로 공양을 올리고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귀의했다. 니다나카타에서는 나무의 위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지만, 커닝햄은 그의 기록에서 상인이 붓다에게 공양을 올린 ‡장소를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장소를 특정한 근거에 대해서는 명확한 증거가 제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붓다가 보리수 나무 바로 아래에 길상초를 깔고 보리수 나무를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며 앉아 대각을 이룬 자리는 현재 대보리사 대탑 서편에 있는 보리수 나무 밑이 아니라 대탑의 법당 안에 모셔져 있는 붓다상이 앉아 있는 자리가 2,500~600 붓다가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하면서 앉았던 바로 자리이며 아소카왕이 금강보좌를 설치했던 자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붓다상의 바로 , 금강보좌의 바로 서편에 원래 보리수가 서있던 자리가 있다.

컨닝햄의 대보리사 발굴 기록 가운데 대탑 주변을 도면으로 기록한 자료이다. 파란색의 내용은 아소카왕이 조성했던 보리수 사원의 유적에 대해 컨닝햄이 별도로 기록한 도면으로 이를 겹쳐보면 아소카왕의 금강보좌는 현재 대보리사 대탑의 법당 내에 붓다상의 좌대와 일치한다. 즉 현재 붓다상은 정확히 붓다가 대각을 위해 보리수 나무 아래 앉았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금강보좌의 바로 서편에 원래 보리수 나무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기원전 250년경 아소카왕이 보드가야의 보리수 나무를 배경으로 설치한 대보리사 사원과 금강보좌의 모습. 코끼리 기둥머리가 얹혀진 아소카왕의 석주가 세워졌었음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이 석주가 사라지고 없다. 바르후트(Bhārhut), 기원전 100년 (왼쪽); 1892년 컨닝햄의 기록에 나타난 발굴 당시의 아소카왕의 금강보좌, 대보리사 대탑 내부 불상 좌대로 사용되고 있다. (오른쪽)

붓다가 대각을 이룬 실재 49일간 자리를 옮기며 선정에 들었는지 확인하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붓다의 영적 탄생의 순간을 찬양하고 축복하는 종교적 장치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어쩌면 대보리사 주변의 물리적 장소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보다는 붓다의 영적 탄생의 의미와 뜻을 되새기며 이를 축복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지 않을까? 7선처의 장소를 찾아 나이란자나 강변을 헤매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