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바와 춘다, 붓다에게 바쳐진 마지막 공양

우안거(雨安居) 끝나자 붓다는 바이살리를 뒤돌아보고 여래가 바이살리를 보는 마지막이 것임을 예견하며 북쪽으로 길을 재촉했다. 마을을 군데 지나 파바(Pava, 波婆)에서는 춘다(Cunda, 純陀) 망고숲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파바는 지금의 파질나가르(Fazilnagar)인데, 붓다 당시에 말라(Malla, 末羅) 공화국에 속해 있던 도시로 쿠시나가르(Kuśinagar, 拘尸那伽羅) 붓다 열반지로부터 동쪽으로 17.5 떨어져 있다.

파질나가르에 춘다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 장소에 세워진 스투파
파바 ( 現 파질나가르 ) 의 춘다 집터 스투파 위치도

우타르프라데시(Uttar Pradesh) 주의 파질나가르에는 춘다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 곳에 오래된 스투파가 있었다. 우리를 안내하던 샨텀에 의하면, 자신의 경험으로는 지난 년의 기간에만 보더라도 스투파가 많이 손상되어 많이 낮아졌다고 했다. 얼핏 보면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는 듯이 보였지만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지 못함이 분명했다.

빠른 속도로 훼손되고 있는 춘다의 집터에 세워졌다는 스투파
춘다 집터 스투파 경내에 불법점유 중인 무슬림사원의 모습.

관리가 제대로 안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는 경내의 무슬림 사원의 존재였다. 이곳을 자주 오는 샨텀에 의하면, 무슬림사원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잠시 있으니 갑자기 무슬림사원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여자의 우는 소리인 같기도 하고, 비명 같기도 한데 도통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인 것은 틀림없었다. 사원은 특히 집안에서 억눌린 생활로 인해 정신적인 이상을 겪는 여성들이 와서 한을 푸는 곳으로 유명하다는 설명이었다.

파질나가르 스투파의 안내판 . 이상하게도 춘다 집터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고고학적으로 확증이 안 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춘다 집터 수투파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조금 걸어가자 순박함이 묻어나는 시골장터가 나왔다. 주로 야채와 과일들을 파는 시장으로 매장을 갖추고 있는 가게들도 있지만 바닥에 줄을 맞추어 펼쳐 놓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직은 크기별로 선별된 상품을 판매대에 전시해서 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앞마당에서 재배하던 것을 캐어 파는 인심이 후할 같은 시골장터 분위기였다.

파질나가르 스투파 근처의 야채과일 시장의 모습

그의 이름은 춘다 캄마라푸타(Cunda Kammāraputta)였으며, 캄마라푸타란 금세공업자 또는 대장장이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붓다가 마침 자기 근처를 지난다는 소식을 듣자 매우 기뻐하며 붓다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정성껏 만든 음식으로 공양을 드리고, 붓다에게는 특별히 진귀한 수까라 맛다바(sūkaramaddava) 요리를 대접하였다.

요리는 종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곤 한다. 수까라(sūkara) 돼지라는 뜻이며, 맛다바(maddava) 부드럽다 또는 맛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음식 이름은 부드러운 돼지고기 또는 돼지가 좋아하는 음식이란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한다. 번째 경우로는 버섯, 송로(松露),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붓다의 마지막 공양이 돼지고기였다는 해석은 주로 상좌부 전통에서 받아들여졌고, 채소 음식이었을 것이란 해석은 대승불교에서 받아들였다.

지역의 재야사학자는 이 채소가 춘다가 붓다에게 마지막 공양으로 올린 음식이라고 했다 . 자신의 집안에서 바로 꺼내 온 것으로 보아 일상적으로 요리해 먹는 채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 다만 독이 들어있어 잘못 요리하면 큰일 난다는 설명을 했다 .

그러나 춘다가 대접한 음식을 드시고 병을 얻은 붓다는 심한 설사 증세를 보이게 되지만,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나머지 여정을 계속 이어갔다. 제자들이 화를 내며 춘다의 공양이 복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자, 붓다는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를 말렸다. ‘춘다는 공양으로 공덕의 과보를 받을 것이다. 내가 도를 이루었을 처음 공양한 사람이나 내가 열반에 들려 마지막으로 공양한 사람이나 공덕이 서로 다를 없다.

그러나 쿠시나가르(Kuśinagar, 拘尸那伽羅) 근교의 강변에 도착할 때까지 무려 25번이나 휴식을 취했다고 불전은 전하고 있어 붓다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는지를 있다. 쿠시나가르에 도착한 붓다는 결국 병이 원인이 되어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서 열반에 들었다.

그러나 사실 춘다가 붓다에게 마지막 공양을 바친 , 춘다의 집터라고 주장하는 곳은 파질나가르의 고대 스투파 이외에도 있다. 중에 곳이 쿠시나가르의 이전 행정관(District Magistrate 또는 흔히 DM이라 ) 춘다의 마지막 공양터라고 표시해 놓은 유적지가 있었다. 파질나가르의 스투파에서 동남쪽으로 1.8 거리에 있었다.

前 DM 이 마지막 공양처로 지목한 장소는 지금은 논 한가운데에 있으며 조그만 시설을 설치해 놓았으나 찾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듯했다 .
경내에는 춘다의 후회라는 제목의 석판이 보인다 .

파바는 원래 자이나교가 강한 교세를 펼치던 곳이기도 했는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곳에서 마하비라가 열반에 들었다. 28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비포장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마하비라의 열반지에서 좁은 길을 따라 가면 조그만 마을이 나왔다. 그곳부터는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데 논두렁을 가로질러 가다보니 DM 표시한 춘다의 마지막 공양터가 나타났다.

마하비라의 열반지
前 DM 의 마지막 공양처로 가는 길에 있는 조그만 마을에서 소여물을 썰고 있는 듯한 가족을 만났다 .
마을이 끝나면 주변은 논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 마을의 한 할머니가 염소가 다른 이웃의 논에 들어가 벼를 먹지 않도록 지키고 있다고 했다 . 그러나 염소가 저 멀리서 어떤 논으로 들러가든 할머니는 별로 말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

DM 이곳 말고도 쿠시나가르의 미륵보살 프로젝트(Maitreya Project) 붓다의 카쿠타(Kakutha) 도강 지점 표시 비슷한 일을 여럿 전력이 있었다. 전문적인 고증의 뒷받침이나 미래를 위한 전략적인 생각에 의문이 들어 그에 대해서는 협잡꾼 같은 정치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쿠시나가르에서의 임기를 마친 , 러크나우(Lucknow)에서 주지사의 비서관으로 일하고 있는 그를 만나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는 다람살라(Dharamshala) 출신의 티베트계 불교신자였다. 마치 경건한 스님과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역시 그의 여러 가지 조처에는 고증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밀려드는 개발 압력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개발되는 것이 걱정되어 취한 조처라고 했다. 그의 걱정에 공감을 하면서도 동의는 쉽게 되지 않아 복잡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