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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二 / 2019. 3. 25. 22:29 / 불교성지 여행/스리랑카

이수루무니야 사원, 불심과 예술의 만남

기원전 4세기부터 서기 11세기 초까지 1,400 동안 싱할라왕국의 수도였으며 오랜 기간 상좌부 불교의 중심지였던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도착하여 우리 일행이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이수루무니야(Isurumuniya) 사원이었다. 티사호(Tissa Wewa) 제방 동쪽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는 사원은 푸르게 우거진 , 바위, 연못 등이 어우러진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이수루무니야 사원 전경

일군(一群) 화강암 바위에 지어진 비교적 아담한 모습의 사원은 아주 오래된 조각 장식 등으로 유명하지만, 원래 마힌다(Mahinda) 장로가 아누라다푸라에 도착한 얼마 되지 않아 데바남피야티사(Devānapiya Tissa, BC247-207) 왕이 세운 아주 오래된 사찰이다. 당시 지체가 높은 상위 카스트 집안에서 500명의 젊은이들이 마힌다 장로로부터 계를 받았고, 이들이 머물 있도록 왕이 마련해준 곳이라고 한다. 승가에 들어온 500명의 귀족(issaradārakā) 연관되어 사원은 처음에 이사라마사마나(Issarasamana) 사원으로 불렸었다.

 

아누라다푸라 불교사찰단지 지도

고대 아누라다푸라성에서 남쪽으로 2.5 떨어진 곳에 위치한 현재의 이수루무니야 사원은 500명이 머무르며 수행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좁아 보였다. 현재의 이수루무니야 사원은 적어도 고대의 이수루무니야 사원의 일부이거나 잘못 확인된 곳일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사실 과거에는 이수루무니야 사원의 영역이 남쪽으로 7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베사기리(Vessagiri) 사원 근처까지 뻗어있어 사원이 인접해 있었던 것으로 여겨졌었다. 마하밤사(mahāvasa, 大史)에는 기원전 3세기에 마힌다가 도착할 당시 이사라마사마나와 베사기리가 별도의 사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베사기리 사원 경내에서 이사라마사마나라는 이름의 고대 싱할라어 표현인 이시라마나(Isiramana)라는 명문(銘文) 발견되면서 고대 이사라마사마나 사원의 영역이 현대의 베사기리 사원 경내까지 뻗어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학자들의 연구로 초기 명문에 나타난 이수라메누(Isuramenu) 사원과 현대의 이수루무니야 사원은 이사라마사마나 사원과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고대의 이수라무니야 사원은 현대의 베사기리 사원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베사기리 사원

마하밤사에 의하면, 이사라마사마나 사원과 베사기리 사원이 별도로 티사왕이 건립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고, 마힌다가 이수루무니야에서 고위층 자녀 500명에게 계를 부여하고 베사기리 사원으로 다른 500명의 평민에게 계를 주었다고 했기 때문에 뭔가 명확하게 맞아 떨어지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매끄럽게 설명되기에는 2300 세월의 간극이 너무나 컸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고대의 베사기리 사원도 아직 발견되지 못하고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는 베사기리 사원이 후대에 이수루무니야 사원에 합쳐졌을 가능성도 생각해 있을 같았다.

 

오른쪽 계단을 올라가면 나타나는 조그만 건물이 舊법당이고, 왼쪽에 좀더 건물이 新법당이다.

현대의 이수루무니야 사원에서 오늘날 舊법당이라고 알려진 곳은 바위 동굴 속에 있다. 법당 입구에 정교하게 조각된 돌기둥과 탑은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법당 안에는 붓다의 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불상에 티사왕이 바리 유물을 안치했다는 말이 전한다. 석굴은 입구에 1983 한국의 조계종에서 선물했다는 유리보호막이 막고 있어 접근도 어려울 아니라 관람도 용이하지 않았다. 법당에 이르는 계단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처음과 중간 단계에 정교하게 조각된 수호신석이 좌우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수호신석 앞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반달 모양의 문스톤(Moonstone) 놓여져 있었다. 이곳의 수호신석과 문스톤은 상당히 마모된 상태였다.

 

舊법당은 뒤편 바위에 나있는 속에 조성되어 있고 입구 부분에만 조그만 건물이 만들어져 있다.

 

석굴 안의 舊법당은 유리로 막혀 있었고, 때문인지 안을 들여다 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舊법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수호신석과 문스톤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오랜 세월을 견딘 많이 마모된 모습이었다.

계단을 내려와 왼쪽으로 돌아서면 작은 수영장 같은 사각형의 연못이 있다. 연못의 서쪽 면에는 바위의 아래 부분이 물을 막고 있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연못의 수면에는 바위에 조각된 코끼리들이 물장구를 치고 있는 모습이 비춰지고 있어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바위 위에 조각된 코끼리는 정면으로 머리 부분만 표현된 것도 있고 비스듬히 몸체의 일부까지 표현된 것도 있었다. 표현된 기법으로 보아 왼쪽과 오른쪽 바위의 코끼리들은 서로 다른 시기에 다른 조각가들의 작품으로 보였다.

 

연못 서쪽의 검은색 화강암 바위 표면에는 물을 찾은 코끼리들이 조각되어 있다.

왼쪽 바위 표면에서 조금 위쪽으로 올라가면 舊법당 옆에 남자와 말이 조각되어 있다. 남자는 위대한 왕의 자세로 앉아 있는데, 왼팔은 수직으로 늘어져서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있으며 오른팔은 무릎을 접어 곧추세운 다리 위에 올려져 있다. 곳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은 강한 인상을 남긴다. 장식이 귀에서 아래로 내려뜨려져 팔을 덮고 있다. 상체는 맨몸인 체로 간단한 하의만 입고 있다. 몸과 자세에서 전체적으로 품위가 느껴졌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부조상의 인물은 또는 장군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인물상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들도 있다. 고고학국 국장이었던 세나라트 파라나비타나(Senarath Paranavitana) 교수는 인물이 비의 , 빠르잔니야(Parjanya) 혹은 바루나(Varuna)이며 말은 불의 , 아그니(Agni)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의 해석에 의미하면, 앉아 있는 인물, 빠르잔니야와 고삐에 매어져 있는 말은 장마비의 전령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기우제가 거행됐을 거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부처님의 치아사리(佛齒, the Tooth Relic) 최초에는 이곳에 보관되었었다고 주장했다.

 

남자와 (Man and the Horse)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에는 믿음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부처님의 치아사리는 처음에 메가기리(Meghagiri) 사원에 보관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메가기리 시원이 현재의 이수루무니야 사원이라는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듯하다. 또한 이곳에서 기우제가 거행되었다는 증거 또한 없는 것으로 보인다.

舊법당 계단에서 남쪽으로 가까운 거리에 돌로 지은 新법당이 자리하고 있다. 법당 안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쪽에 길게 누워있는 상당히 규모의 와불상이다. 지역의 스님들이 입는 붉은 가사(袈裟) 입고 있어서인지 더욱 눈길을 끌었다. 와불상 앞에 설치된 제단에는 신자들이 바쳤는지 꽃만 송이 쓸쓸히 놓여져 있었다.

 

新법당의 모습

 

新법당 안의 와불상

그러나 이곳에서 정작 나의 발길을 잡은 것은 법당 제일 안쪽에 설치된 무리의 인물상이었다. 우리 일행을 안내하던 싱이 마힌다의 상이라고 알려줬다. 각종 벽화와 장식으로 처리된 와불상이 있는 공간은 돌로 지어진 법당 건물 부분인데 반해, 마힌다의 상이 있는 안쪽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천연 동굴 부분이었다. 주변에는 보수작업을 하는 중이었는지 작업대가 어지러이 설치되어 있었다. 스리랑카로 건너올 동행했다고 알려진 4명의 비구와 2명의 사미를 동행하고 수행중인 마힌다와 신하를 거느린 티사왕이 처음 만나는 장면일 수도 있고, 동굴에서 수행 중인 마힌다에게 설법을 청하기 위해 티사왕이 찾아온 장면을 연출한 같기도 했다.

 

新법당의 안쪽 구석에서 발견한 마힌다 장로의 모습. 깨끗하게 단청된 와불상과는 달리 페인트가 많이 벗겨져 있어 그리 대접을 받지 못하고 계신 듯하여 마음이 아팠다.

 

마힌다 장로가 그와 동행한 4명의 비구 그리고 2명의 사미와 함께 수행하고 있는 모습.

 

티사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수행중인 마힌다를 찾아와 예를 올리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新법당을 나와 남쪽으로 발자국 움직이면 자그마한 건물의 이수루무니야 고고학박물관이 나타난다. 이곳에서는 5~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뛰어난 석제조각들을 만날 있다. 사람들의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작품은 6세기 굽타 양식의 이수루무니야의 연인들(the Lovers of Isurumuniya)’이다. 석판에는 앉아 있는 남자의 왼쪽 무릎에 앉아 있는 풍만한 육체의 여성이 부끄러운 듯이 다른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 부조(浮彫) 조각되어 있다. 원래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원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베사기리 사원이 마하비하라에 기부되면서 원래 장소에서 위치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이수루무니야의 연인들.

부조 속의 인물은 두투가무누(Dutugamunu, BC 161~BC 137) 왕의 아들 살리야(Saliya) 왕자와 왕자가 사랑했고 왕위를 포기하고 결혼까지 했던 불가촉천민 출신의 아쇼카말라(Ashokamala)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해석들도 있다. 라마야나(Ramayana)에서 마왕 라와나(Ravana)이전에 스리랑카를 지배했고 베사기리 사원에 살았다고 전하는 비사문천(毘沙門天, Vaisrawana)-쿠베라(Kuvera, 俱吠羅) 그의 왕비 쿠니(Kuni) 묘사한 부조라는 주장도 있다. 또는 사랑하는 이를 안고 있는 장군이라거나, 제불(諸佛)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 Man̄juśrī) 시자(侍者)의 모습이라는 설까지 실로 다양하다.

연인들에서 반대편 벽에는 또 하나 관심을 끄는 부조상이 하나 있었다. ‘왕의 가족(King’s Family)’이란 작품이 화강암 석판에 부조로 조각되어 있었다. 석판에는 모두 다섯 명의 인물이 조각되어 있는데, 중앙에서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가슴에 푸나눌라를 두르고 있는 인물이 두투가무누왕이라고 한다. 마하밤사에는 왕과 살리야왕자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왕이 이들 왕자부부를 마침내 받아들인 것으로 전한다. 왕실가족 부조상에는 두투가무누왕과 왕비, 살리야왕자와 부인 아쇼카말라가 조각되어 있는데, 천한 신분의 아쇼카말라는 여기서조차도 살리야와 멀찍이 떨어져 한쪽 구석에 초라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어 안쓰러움을 불러 일으켰다.

 

왕과 가족들.

물론 이 부조상에 대한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 중앙의 인물은 신들만이 쓰는 관을 쓰고 있고, 신이나 보살들의 조각상에서나 볼 수 있는 성스런 실을 걸치고 있기 때문에 왕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왕비로 보이는 인물 역시 중앙의 남성과 유사한 관을 쓰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모두 고려할 때, 이 부조상은 도솔천(兜率天, Tusita)에 있는 미륵보살(彌勒菩薩, Maitreya)을 묘사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왕이나 지체 높은 인물이 사용했을 법한 돌의자가 눈길을 끌었다.

박물관을 나와 新법당을 돌아가면 바위 옆으로 길을 따라 바위 위로 올라갈 있었다. 정상에 오르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자그마한 와불상과 불족적이다. 개의 거대한 바위가 몸을 맞대고 있는데 정상에서 축대와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좁은 계단을 따라 좀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아누라다푸라의 전경을 조망할 있는 망루가 나타난다. 이곳은 시원하게 펼쳐진 사원 풍경을 선사했다. 가까이로는 바로 사원 바깥 연못에 연꽃이, 멀리로는 푸른 숲과 사이사이에 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경내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하얀탑도 보이는데 조용한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바위의 정상으로 오르기 전에 만나는 계단 입구.

 

바위의 정상에서 만나는 와불상과 불족적.

 

바위 위에서 바라다 보는 아누라다푸라의 전경

바위에서 내려와 新법당과는 반대쪽으로 돌아나오면 평지보다 조금 높은 축대 위에 상당히 보리수 나무가 그루 서있다. 기원전 3세기에 아쇼카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할 당시 그의 누이 비구니 상가미타(Saghamittā) 전달했다는 원래 보드가야의 보리수 나무 가지가 이곳 아누라다푸라의 대사원에 심어졌고 열매와 씨앗으로부터 여덟 개의 묘목이 자라났다고 한다. 묘목들은 스리랑카 각지의 성스러운 여덟 곳에 옮겨 심어졌는데, 이사라마사마나 사원도 여덟 가운데 곳이었다. 이곳의 보리수 나무가 최초의 여덟 묘목 가운데 하나였다면 수령이 적어도 2000년이 넘었을 텐데, 나무의 상태는 최초로 스리랑카 땅에 옮겨 심어진 스리마하 보리수 나무와 비교하면 상당히 좋아 보였다.

 

이수루무니야의 보리수 나무.

아누라다푸라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 이수루무니야 사원을 찾는다. 이곳에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만한 것들도 여럿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원을 둘러보고 이곳을 떠나며 출구를 나서는 발걸음이 개운치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여전히 많은 의문점들이 풀리지 않는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사원을 나서면서 만나는 연꽃 연못을 바라보면서야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으로 느꼈다.

 

이수루무니야 입구 바깥쪽에 있는 연꽃 연못.

 

不二 / 2019. 3. 17. 16:26 / 불교성지 여행/스리랑카

스리마하 보리수 사원,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보리수 나무

우리 일행이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향하는 내내 나의 머리 속에서는 아누라다푸라의 대사원 있다는 보리수 나무가 떠나질 않았다. 2600 고타마 싯다르타는 북인도 가야 인근에 있는 우루벨라(Uruvela, 현대 Bodh Gaya) 마을의 숲이 울창한 팔구(Phalgu, 고대 Nairanjana) 강변에 당도하여 나중에 보리수(菩提樹, Bodhi Tree) 알려지게 피팔라(Pipala) 나무 아래에서 마침내 대각(大覺) 이루고 깨달은 ’, , 붓다(Buddha) 되었다. 보드가야의 원래 보리수 나무는 훼손되었고, 기원전 3세기에 아쇼카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할 당시 그의 누이 비구니 상가미타(Saghamittā) 전달했다는 원래 보드가야의 보리수 나무 가지가 이곳 아누라다푸라의 대사원에 심어졌고, 나무의 가지를 다시 보드가야의 원래 장소에 옮겨 심은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드가야에서 보게 되는 보리수 나무라고 한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아누라다푸라의 보리수 나무를 찾아 보고 싶었다.

 

마하비하라(Mahāvihāra, 大寺) 주변 지역 지도

보리수 나뭇가지의 이운(移運)

아쇼카(Ashoka, BC268~232) 왕의 장녀인 상가미타는 오빠인 마힌다와 함께 불교에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었으며, 데바남피야티사(Devānapiya Tissa, BC247-207) 왕의 요청으로 아눌라(Anulā) 공주와 궁중 여인들에게 수계를 내리기 위해 32세의 나이에 다른 무리의 비구니들과 스리랑카로 향했다. 도사(島史, Dīpavasa)에는 동행한 비구니 숫자가 서로 다르게 언급되어 있으나, 상가미타 자신을 포함하여 대략 11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승가의 규율에 따라 여성에게 계를 내리는 것은 오직 붓다와 비구니 승단에게만 허락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스리마하 보리수 사원의 북쪽 출입구 가림벽에 새겨진 상가미타의 모습.

보드가야 보리수 나무에서 떼어낸 남쪽 가지 하나를 가지고 상가미타는 보드가야에서 파탈리푸트라(Pāaliputra) 거쳐 벵갈의 타말리티(Tāmalittī) 왔다. 이곳에서 황금 항아리에 담은 보리수 나무 가지와 함께 배를 타고 상가미타와 일행은 스리랑카 북쪽에 있는 잠부콜라(Jambukola) 당도했다. 데바남피야티사왕 자신이 깊은 신심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심으로 어린 보리수 나뭇가지를 맞이하고, 성대한 행사와 함께 이를 마하메가바나(Mahāmēghavana) 심었다. 심은 나무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2,300 동안 같은 장소를 지키고 있었으며 성스런 보리수 나무(Jaya Sri Maha Bodhi Tree) 불리며 많은 사람들의 경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스리마하 보리수 사원을 나와 북쪽으로 걷다 보면 바로 로하파사다의 맞은 편에서 구조물을 만난다. 티사왕이 보리수 나뭇가지를 가지고 스리랑카 해안에 당도한 상가미타를 맞이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나, 전승되어 내려오는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있는 같다.

티사왕은 파도가 밀려드는 해안으로 걸어 들어가 속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머리 위로 뻗어 공손히 성스러운 보리수 나뭇가지를 맞이했다고 전한다. 솔리아스 멘디스(Solias Mendis) 켈라니야(Kelaniya) 사원 벽화

상가미타는 또한 도시에 비구니 사원을 만들었다. 아눌라 공주가 상가미타로부터 비구니의 계를 받아 스리랑카의 번째 비구니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명의 여성들이 동시에 수계를 받아 상가미타의 지도 아래 비구니 승단이 창립되었다. 상가미타는 왕족이나 신분이 높은 여인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계를 주었다. 그래서 모든 계층의 여인들이 승단에 입문하게 되었다. 상가미타는 여성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이렇게 형성된 비구니 승단은 크게 번성하였으며, 버마, 중국, 태국 등지로 번져나갔다.

 

현재 북쪽 출입구의 모습

북쪽 출입구

스리마하 보리수 사원은 북쪽 출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갈 있다. 남녀 출입구가 좌우로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지만 별다른 절차 없이 들어갈 있었다. 특별히 경계를 강화해야 때가 되면 몸이나 소지품 검사 등을 하기 위해 별로도 마련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사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스리랑카의 여느 사원에서나처럼 예를 갖추기 위해 바깥에서 신발을 벗어야 했다. 경내 곳곳을 돌아다니는 내내 발바닥에 모래가 느껴졌으나, 스리랑카 북부 해안에 도착한 성스러운 보리수 나뭇가지와 상가미타 일행을 하얀 모래가 뿌려진 길을 따라 아누다라푸라로 모셔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최고의 예를 표하는 방법일 것이란 짐작만 뿐이다. 사실 경내는 개의 테라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높은 테라스에 성스런 보리수 나무가 심어져 있고 가장 낮은 곳은 모래 테라스(Sand Terrace)라고 불린다고 한다.

 

북쪽 출입구의 가림벽 지나면 바로 원래의 북쪽 출입구를 만난다 (왼쪽); 원래 북쪽 출입구의 안쪽 문스톤, 수호신석, 난간석의 모습 (오른쪽).

 

북쪽 출입구 바깥쪽 문스톤(moonstone). 북쪽 출입구에는 안쪽과 바깥쪽에 각각 문스톤이 있는데 바깥쪽 문스톤은 아누라다푸라 시대의 3 문스톤 가운데 하나이다.

 

북쪽 출입구의 바깥쪽 문스톤, 수호신석 그리고 난간석은 8세기의 뛰어난 기술 수준을 보여준다.

입구에 설치된 하얀색의 가림벽에는 성스러운 어린 보리수 가지를 땅에 가져온 상가미타가 조각되어 있었으나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가림벽을 지나면 바로 원래 북쪽 출입구로 사용되어 왔던 석재 문틀과 철재 문이 낮은 계단 위에 나타난다.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점까지 출입구는 북쪽, 남쪽, 그리고 서쪽에 각각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곳 북쪽 출입구를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다. 출입구를 통과해 정면을 바라보면 지금 서있는 바닥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사방이 순백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스리마하 보리수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성스러운 나무는 안전을 위해, 특히 야생 코끼리 위협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지상에서 6.4m 높이에 조성된 19m x 17m 넓이의 장방형 축대 위에 심어져 있다.

 

1891 스리마하 보리수 나무와 북쪽 계단의 모습.

 

북쪽 출입구를 통과하면 정면으로 공양물을 바치는 제단이 있는 번째 테라스로 올라가는 북쪽 출입구 계단과 위로 스리마하 보리수 나무가 보인다.

 

번째 테라스로 올라가는 북쪽 출입구의 문수톤과 수호신석도 정교한 기술 수준을 보여준다.

스리마하 보리수 나무

상가미타가 가져온 보리수는 사원의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데 주변에도 많은 보리수 나무들이 울창하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같은 종류의 보리수 나무 그루가 폭풍우와 원숭이나 박쥐 같은 동물로부터 스리마하 보리수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구역에 심어졌다고 한다. 티사왕의 재위 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벽돌로 만들어진 붓다상이 스리마하 보리수 나무의 위치를 확인해 뿐이다.

 

성스런 보리수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흰색의 높은 담장이 설치되었고 이후에 위로 황금색 담장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성스런 보리수 나뭇가지들은 여러 개의 황금 받침대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

축대 둘레에는 높은 흰색 담장이 둘러져 있어 성스러운 나무에 가까이 다가가거나 직접 만져볼 없었다. 축대 위에는 언뜻 보아 보리수 나무 그루가 있는 듯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옆으로 크게 뻗어있는 가지가 황금 받침대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 2,300 상가미타가 땅에 가져온 성스러운 보리수 나무이고 위로 곧게 뻗은 나무는 후대에 것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지탱해온 몸체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받침대에 의지하게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붓다로 여겨지는 성스러운 보리수 나무가 끝없는 자비심으로 민중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이 축대 밖으로 뻗어 나온 나뭇가지에 나타난 것인지 궁금했다.

성스러운 보리수 나무는 심어진 이력이 알려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일컬어진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을 등지고 앉았던 바로 보리수 나무의 남쪽 가지를 옮겨다 심은 것이므로 성도(成道) 순간에 붓다의 손길이 닿았을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일주일 동안 아래에서 선정(禪定) 들었으므로 일주일을 지켜본 유일한 존재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세월 동안 스리랑카 불자들의 경배를 받으며 오랜 역사를 함께 해오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신앙 중심에 자리해왔다. 사원을 찾은 날도 하얀 옷을 차려 입은 많은 스리랑카 불자들이 꽃과 음식을 축대 아래 마련된 제단 위에 바친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는 모습을 있었다. 또한 역대 왕가에서도 물심양면으로 최선을 다해 보살펴왔다.

 

아쇼카왕이 보리수 나뭇가지와 함께 보냈다는 보리수 보호를 소임으로 하는 카스트에 속하는 이들은 24시간 성스런 보리수 나무 곁을 지킨다.

 

남인도 왕국의 잦은 침입으로 수도는 폴론나루와(Poonnāruwa) 이전되고 국왕과 신하들은 모두 몸을 피신했지만 이들은 이곳에 남아 목숨을 걸고 성스런 보리수 나무를 지켜냈다고 한다.

성스러운 보리수 나무를 지금까지 지켜올 있었던 이면에는 숨은 공로자들이 있었다. 아쇼카왕은 상가미타와 어린 보리수 나뭇가지를 스리랑카로 보내면서 다양한 직업의 카스트 사람들을 함께 보냈는데 중에는 보리수 나무를 보호하고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들은 당시부터 대대손손 같은 카스트를 유지하면서 24시간 자리를 비우지 않고 곁을 지키며 성스런 보리수 나무를 보살펴왔다고 한다. 지금도 축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성스러운 보리수 나무 곁을 지키며 공양물을 보리수 나무에 바치려는 신도들을 위해 이를 날라다 주는 이들의 모습을 있었다.

성대한 의식 속에서 이곳에 심어진 성스런 보리수 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성공적으로 열매와 씨앗을 맺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여덟 개의 묘목이 자라났고 묘목들은 스리랑카 각지의 성스러운 여덟 곳에 옮겨 심어졌다. 불교가 스리랑카 국민의 가슴 속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며 전국으로 퍼져나갔듯 이후 스리랑카 전국의 수많은 사원으로 성스러운 보리수 나무가 옮겨 심어졌다. 지금은 스리랑카의 어느 사원을 가도 제대로 사원이라면 불상 탑과 함께 보리수 나무를 있다.

 

이수루무니야(Isurumuniya) 사원의 보리수 나무.

 

담불라 석굴 사원(Dambulla Cave Temple) 보리수 나무.

이러한 전국민의 보호와 관심에도 불구하고 성스러운 보리수 나무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07년과 1911 폭풍우에 각각 하나의 가지가 부러지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리고 1929 정신병 환자가 성스러운 보리수 나무를 잘라버리려 시도가 있었으나 나뭇가지 하나를 자르고 제지 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후 내전 중이던 1985, 타밀반군의 공격으로 경내 가장 높은 축대 위에서 100 이상의 신자들이 사살당하는 불상사가 있었으나 성스런 보리수 나무는 해를 입지 않았다.

 

투파라마 스투파의 동쪽에 있는 불족적 스투파에서 다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최근에 복원된 작은 스투파로 비구니 상가미타의 다비식 재가 모셔진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상가미타는 티사왕이 죽고 뒤를 이어 즉위한 우티야(Uttiya) 9년에 59세의 나이로 그녀가 머물던 아누라다푸라의 하타로카 우파시카라마야(Hatthaloka Upasikaramaya) 사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자신이 생전에 원하던 투파라마(Thūpārāma) 사원 동쪽의 시타살라(Cittasālā) 근처에서 다비되었으며 그녀의 위에 탑이 세워졌다고 한다.

스리마하 보리수 나무는 루반벨리세야(Ruwanveli Seya) 대탑과 더불어 마하비하라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며, 여전히 많은 불자와 관광객의 발길을 끄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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