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리야, 정글 한가운데 있는 고대 하늘도시

오래 전에 TV 다큐멘터리에서 스리랑카의 정글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와 바위 꼭대기에 지어진 신비로운 궁전에 대한 이야기를 적이 있었다. 모습은 오랫동안 머리 속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곳은 시기리야(Sigiriya), 혹은 싱하기리(Sinhagiri) 불리는 일명 사자바위와 위에 지어진 도시이자 요새로 스리랑카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행지이기도 했다.

밀림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하늘도시 , 시기리야

역사적 배경

화산 폭발로 생성된 바위는 주변 평지에서 180m 높이까지 치솟아 있고, 우리가 오늘날 보게 되는 것처럼 1.5 헥타르에 이르는 정상의 평지까지 좁은 계단과 작은 길을 연결하여 궁전, 저수지, 정원 등을 만들고 아래 산기슭에는 정원과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건설했던 사람은 5세기 지역을 지배했던 카샤파 1(Kashyapa I, 473–495 AD)였다.

그는 당시 적자였던 목갈라나(Moggallana) 왕자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을 염려하여 아버지인 다투세나(Dhatusena, 455–473 AD)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 남인도로 피신한 목갈라나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버리고 이곳의 깎아지른 바위산에 궁전과 난공불락의 요새를 건설했다고 전한다.

남쪽에서 바라본 시기리야의 모습
서문을 통과해 서쪽에서 바라본 시기리야의 모습

서문주차장과 박물관

우리 일행이 시기리야 근처에 도착하자 멀리 거대한 몸체의 바위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자바위는 생긴 모습 때문에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모양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서문주차장에서 차에서 내려 먼저 박물관으로 향했다. 외국인들은 보통 서문주차장을 통해 시기리야로 접근하게 된다. 외국인 입장권은 서문주차장 가까이에 있는 박물관에서 판매하기 때문이었다. (외국인 입장료는 1인당 $30이다.) 지점을 지나면 화장실을 사용할 없기 때문에 화장실 사용도 박물관을 찾아야 하는 중요한 과제 하나이다.

시기리야 주변 지도

많은 사람들이 바쁜 마음에 표만 구입해서 서둘러 시기리야로 향한다. 그러나 시간 여유가 있다면,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도 충분히 수고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자바위가 지질학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이곳의 고대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등을 각종 시청각 자료를 통해 쉽게 있고, 현장에서는 사람들에게 밀려 건성으로 보기 쉬운 유명한 시기리야의 프레스코 벽화를 재현된 벽화를 통해 여유롭게 감상할 수도 있다. 또한 동안의 발굴 결과를 집약한 시기리야 고대도시의 모형을 통해 복원된 고대도시를 만날 수도 있다.

서문 입구를 통과하며 볼 수 있는 해자의 모습
견원지간 ( 犬猿之間 ). 박물관 근처에서 개와 원숭이가 죽일 듯이 싸우는 모습에 잠시 갈 길을 멈추었다 .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없지만 스리랑카나 인도 등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잠시 눈길을 끌었다 .

물의 정원과 바위정원

박물관에서 시기리야를 향해 조금 걷다 보면 고대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해자를 만난다.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방어에 치중한 요새의 일면을 실감하며 고대도시로 들어서면 넓게 펼쳐진 정원을 만난다. 거대한 바위로 향하는 가운데 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어느 정도 발굴과 복원이 이루어져 있고 이와 대칭으로 조성된 왼쪽은 미래를 위해 발굴을 미루어 모습이었다. 5세기에 지어졌음에도 붉은 벽돌, 잔디, 연못 등으로 조성된 물의 정원(Water Gardens) 상당히 고풍스런 모습이었을 것임을 짐작할 있었다. 지금 평가해도 뛰어난 수로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하니 최고의 고대 계획도시로 평가받는 이유를 있을 같았다.

물의 정원 모습
해자와 물의 정원 사이에 있는 벽돌 내성벽에서 바라본 물의 정원
고대 분수시설로 지하에 물울 공급하는 수로가 설치되어 있다 . 비가 올 때면 여진히 분수가 작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시기리야 정상에서 내려다 본 물의 정원 모습과 왼쪽 아래 편에는 남문주차장이 보인다 .

고개를 드니 바로 앞에 거대한 사자바위 성채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정원이 끝나는 지점에서 성채가 시작되고 여기서부터는 1,200개의 계단을 통해 정상에 이르게 된다. 성채를 이루는 바위 곳곳에 홈이 파져 있었다. 이들 홈에 붉은 벽돌이 얹혀져 벽돌 벽과 바위가 이어져 하나의 성채를 이루었던 했다. 벽돌담 안쪽으로 바위와 바위 사이에는 돌들이 쌓아져 빈틈을 견고하게 메우고 있었다.

벽돌이 바위와 맞물리도록 바위에 홈이 파져 있다 .
바위 , 벽돌 , 큰 돌이 서로의 빈 공간을 메우고 맞물려 견고한 성벽을 이루고 있다 .

계단 층을 올라가면 바로 아치형 바위입구가 성채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고 있다. 지형지물을 이용한 훌륭한 군사용 방어사설이었다. 이러한 아치형 바위입구는 이곳 말고도 여러 곳에서 성채의 입구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은 성채의 입구이기도 하지만 바위정원(Boulder Gardens) 입구이기도 했다.

바위정원 입구의 아치형 바위입구

테라스 정원과 사자문

바위정원을 지나자 계단은 좀더 가팔라지면서 벽돌과 석회석으로 만든 여러 층의 테라스정원(Terrace Gardens) 지났다. 그리고 얼마간을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거울의 (Mirror Wall) 사자문(Lion Gate) 있는 사자바위의 중간 부분에 도달했다. 부분은 테라스정원의 가장 부분에 속한다. 여기서는 먼저 바위 표면에 고정된 19세기 철제 나선형 계단을 통해 흔히 시기리아의 미인들(Sigiriya Damsels)이라고 불리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유명한 프레스코 벽화가 있는 절벽에 움푹 파인 공간으로 올랐다. (벽화가 있는 공간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프레스코 벽화와 거울의 벽이 있는 시기리야의 허리 부분의 모습
거울의 벽은 거대한 바위의 허리를 휘감은 채 기나긴 세월을 견뎠다 . ( 왼쪽 ); 프레스코 벽화와 거울의 벽으로 가는 통로의 모습 . ( 중간 ); 프레스코 벽화를 보기 위해서는 좁은 나선형 철제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 ( 오른쪽 )

미인도는 5세기에 그려졌다고 하니 1500년이 지났음에도 빼어난 고대 벽화기술 덕에 지금도 섬세하고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스리랑카에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비종교적 벽화이면서 가장 많이 복제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벽화가 그려진 프레스코 벽은 한때 세상에서 가장 갤러리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사자바위의 서쪽 표면에 가로로 140m, 세로로 40m 폭으로 바위의 북동쪽 가장자리까지 펼쳐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500 명이 그려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22명의 여인들만이 남아있다.

시기리야를 상징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인 시기리야 미인도 벽화 .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
시기리야 서쪽 면의 북동쪽 가장자리로 이곳까지 시기리야의 미인도가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

미인도 벽화가 있는 곳까지 오르내리는 나선형 철제 계단은 쌍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데 매우 좁아서 병목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종종 한낮에는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성채 입구까지 줄이 길게 늘어져 있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지체하게 된다. 이를 피하고 싶은 사람들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은 이른 아침 또는 늦은 오후에 방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낮이면 거울의 벽과 프레스코 벽화가 있는 바위 허리 부분으로 올라가기 위해 테라스정원 아래까지 긴 줄이 이어진다 .
긴 줄은 생각보다 더디게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예상보다 긴 시간이 걸린다 .

벽화를 보고 나면, 길은 바깥 쪽이 거울의 벽으로 막힌 사자바위 표면에 홈을 따라 나있다. 거울의 표면은 원래 석회, 계란흰자, 밀랍, 야생 꿀을 섞어 만들어 광택이 많이 나는 석고반죽이 입혀져 있었으며, 원래의 석고반죽이 입혀진 일부 구간이 아직도 남아 있어 놀라운 광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표면은 이곳을 방문했던 사람들이 남긴 낙서들로 뒤덮혀 있었으며, 주로 6세기부터 14세기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거울의 벽 통로의 모습 . ( 왼쪽 );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원래의 광택을 볼 수 있으며 배수구멍도 볼 수 있었다 . ( 중간 ); 벽 표면에 남겨진 낙서들 . ( 오른쪽 )
우리나라 전방에서 볼 수 있는 적 탱크의 전진을 저지시키기 위한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과 같이 그 옛날 돌 조각으로 지탱시켜 놓은 거대한 바위덩이를 볼 수 있다 . 적이 쳐들어오면 저 바위를 아래로 굴려 아래의 적을 공격했을 것이다 .

거울의 벽을 지나자 사자바위의 북쪽으로 갑자기 너른 평지가 앞에 펼쳐졌다. 사자문 테라스였다. 사자문은 바위산 정상의 궁전으로 올라갈 있는 유일한 계단을 지키는 정문이었다. 시기리야의 상징적인 존재들 가운데 하나인 사자문은 지금은 개의 거대한 발과 사이에 설치된 고대 석회암 계단 주변의 벽돌 구조물만 남아 있었다. 사자문 앞에 펼쳐진 테라스는 사자문을 통과해 정상으로 향하기 대기실과 같은 역할을 했을 같았다. 테라스 한쪽에는 사자바위에서 유일하게 물을 구입할 있는 곳이 있고, 옆쪽에서는 현지인들이 수도에서 물을 바로 마시고 있었다.

원래는 방문객들이 크게 벌어진 사자의 입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옛날 이곳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입구에 버티고 거대한 사자상에 압도당했을 것이다. 사자는 싱할라 왕족의 상징이었으며, 사자상의 크기는 아마도 카샤파 1세가 나타내고 싶었던 자신의 위엄, 권력, 그리고 왕위 찬탈로 손상 받은 왕권 정당성의 크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모든 것이 결국 일장춘몽이었던 듯하다.

사자문 테라스에서 볼 수 있는 사자바위 북면의 모습 . 정상까지 오르는 전체 계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위키피디아
사자문의 현재 모습 . 사자의 발만 남이 있다 .
위에서 바라본 사자문과 사자문 테라스의 모습 .
정상으로 오르면서 시기리야의 북쪽으로 피두랑갈라를 볼 수 있다 .

사자바위 정상의 궁전

사자의 사이로 돌계단을 올라가자 지그재그로 이어진 철제계단으로 연결되었다. 사자바위 북쪽 표면에 고정된 좁은 철제계단은 조금 가파른 부분도 있었지만 그리 어려운 코스는 아니었다. 철제계단이 없었던 고대에는 거울의 벽처럼 바깥 쪽에 벽돌 벽이 있고 기와로 연결된 지붕이 갖춰진 석회석 계단이 정상까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상의 북서쪽에는 궁전 건물의 기단부들이 남아 있다 .
정상의 남서쪽 모습

그리고 철제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갑자기 넓은 평지가 나타났다. 시기리야 정상의 왕의 궁전, 하늘도시였다. 정상의 궁전은 고대도시의 중심이기도 했다. 주변 평지에서는 180m, 해수면에서는 360m 높이에 있는 정상은 1.5 헥타르 규모의 계단 모양의 평지로 동쪽이 낮고 서쪽은 조금 높은 형태였으며, 특히 남동쪽에 정상의 빗물을 모을 있는 저수시설이 여럿 설치되어 있었다.

정상의 남동쪽 모습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 여유롭게 앉아 있고 싶어졌다. 정상에 오른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편한 곳에 앉아 주변을 몸으로 느끼려는 듯했다. 사방이 트여 있어 밀림 멀리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불현듯 궁전의 주인은 이러듯 난공불락의 요새를 지어놓고 막상 적이 침공하자 적을 맞으러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싸우다 참패를 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자신이 걱정했던 것처럼 남인도로 피신했던 동생 목갈라나 왕자가 마침내 타밀 용병들을 규합해 복수를 위해 쳐들어왔다고 한다. 카샤파왕은 침략군을 맞이하기 위해 요새에서 내려와 앞에서 코끼리를 타고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평지로 진군했다. 그러던 코끼리가 놀라 대오를 이탈하자 뒤따르던 군사들은 왕이 도망치는 것으로 오인해 왕만 혼자 남겨둔 모두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혼자 생포될 것을 두려워한 왕은 자신의 칼로 자결했다고 전한다. 허망한 결말이 아닐 없다.

정상의 남동쪽 끝에 은밀한 목욕탕이었을 것 같은 조그만 물탱크 안에는 연꽃만 가득 피어나고 있었다 . 주인은 오래 전에 가고 없는 허망함에 바쳐진 연꽃 같아 가슴에 짠한 감동이 밀려왔다 .

알현실과 물탱크 바위

내려오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는 좀더 빠르게 내려올 있었다. 사자바위 아래까지 내려와 남쪽 기단부의 바위정원에 이르면, 고대 스리랑카의 독특한 바위 건축물을 만나게 된다. 고대 바위 건축에서는 바위 위에 건물이나 정자를 짓고, 바위 아래 부분에는 벽화가 그려진 바위동굴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바위 건축의 대표적인 예가 알현실(Audience Hall) 물탱크(Cistern) 바위이다.

왼쪽 물탱크 바위와 오른쪽 알현실 바위 사이에는 대리석 바닥의 통로가 나 있었다 .
오른쪽의 알현실 바위는 왼쪽의 물탱크 바위의 일부분이었으나 인위적으로 분리되었다 . ( 왼쪽 ); 물탱크 바위에서 가운데 통로가 물을 흘려 보내는 홈이 파져 있었다 . ( 중앙 , 오른쪽 )

알현실 바위 정상은 평평한데 한쪽 끝에 5m 길이의 옥좌가 있고 주위에 알현실 건물이 있었던 듯한 흔적이 있다. 바로 맞은편의 물탱크 바위 정상에는 한가운데에 물을 저장할 있는 물탱크가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바위의 아래 부분에는 여러 겹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 조그만 동굴 같은 공간이 있다. 특히 물탱크 바위 아래에 있는 동굴에는 돌로 만든 옥좌 또는 제단이 있고 거울의 벽에서처럼 낙서들이 어지러이 벽과 천장을 장식하고 있었다. 특히 천장에는 훼손된 미인도의 일부가 희미하게 남아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알현실 바위는 원래 물탱크 바위의 일부였으나 인위적으로 잘라내 지금의 모습이 것이다.

알현실 바위 위 먼 쪽으로는 돌로 만든 옥좌가 보이고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 바위 아래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던 공간이 있다 .
물탱크 바위 아래에 있는 동굴 모습 .
물탱크 바위 아래 동굴의 천장에는 훼손된 미인도의 일부를 아직도 볼 수 있었다 .

물탱크 동굴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나오면 개의 아치형 바위입구를 지나 마치 코브라가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듯하여 코브라 머리 바위(Cobra Hood Boulder) 불리는 바위를 지나자 금방 남문주차장에 당도했다. 외국인들도 보통 이곳으로 하산하기 때문인지 기념품 가게들도 모두 이곳에 모여 있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카샤파 1세의 재위 기간은 18년이었다고 한다. 가운데 시기리야의 고대도시를 건설하는데 8년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이곳을 왕궁으로 온전히 사용했던 기간은 10 남짓이었을 것이다. 짧은 기간에 엄청난 규모의 도시를 건설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희생도 많이 따랐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있다. 그래도 후세에 전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보면 헛된 일을 것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시기리야를 떠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코브라 머리 바위의 모습

 

참고 사항

시기리아 세계문화유산 운영 시간: 오전 7 오후 5

시기리아 박물관 운영 시간: 오전 7:30 – 오후 5:30

입장료: 외국인 미화 30

주변에 갈만한

  • 피두랑갈라(Pidurangala) 바위: 시기리야에서 북쪽으로 직선으로 830m 거리에 있는 바위산이다. 시기리야의 전체 모습을 조망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고대에 불교사원이 있던 곳이므로 거대한 와불상 등 문화재가 있으며, 입장료는 500루피로 저렴했다. 일출이나 석양을 보기에도 좋은 장소이다.

  • 코끼리 사파리: 하바라나 주변에 있는 국립공원이나 야생보호지역에서 코끼리 사파리를 즐길 수 있다. 가까이에서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후룰루 에코파크(Hurulu Eco Park) 또는 미네리야국립공원(Mineriya National Park)인데 코끼리들이 물을 찾아 이동하기 때문에 시즌에 따라 코끼리들이 몰리는 곳이 있으며 사파리 지프 운전사들이 그때그때 코끼리들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 입장료와 사파리 지프를 패키지로 구매하게 되는데 이를 판매하는 곳이 하바라나 시내에 10여 곳이 있으나, 하바라나 빌리지 바이 시나몬 입구에 가장 큰 판매소가 있다.

  • 오크레이 목각장식품점(Oak Ray Woodcarving): 시기리야의 서문주차장과 남문주차장 진입로 중간에 있으며, 비교적 품질이 좋은 목각 기념품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직접 제작한 것들도 있고 가져다 파는 것들도 있다. 입구의 작업장에서는 시기리야 벽화 등에 사용된 천연물감을 만드는 시범을 볼 수 있다.

 

문화삼가지 지도

위치: 아누라다푸라-폴론나루와-담불라로 연결되는 문화삼각지 내에 위치하며 접근로는 양호한 편이다.

도로: 담불라 또는 하바라나를 통해 접근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콜롬보에서 하바라나까지 5시간 가량 소요된다. 관건은 중간의 쿠루네갈라(Kurunegala)까지 차량 통행이 많은 편이며, 이에 따라 소요될 수도 있다. 콜롬보에서 차량으로 이동할 경우 차량의 통행이 적은 새벽에 출발하는 것이 좋다. 버스로 이동할 경우, 담불라 또는 하바라나까지 이동해서 시내버스 또는 툭툭을 이용해 시기리야까지 이동할 있다.

철도: 하바라나까지 기차로 이동할 있고, 다시 툭툭을 이용하면 편하게 이동할 있다.

항공: 시기리야에 작은 공항이 있어서 콜롬보에서 국내선 항공(시나몬항공)으로 직접 이동이 가능하다

숙소: 시기리야 근처에도 호텔과 게스트하우스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보통은 지역의 다른 관광 일정을 고려할 담불라 또는 하바라나에 숙소를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담불라

  • 기만할라호텔(Gimanhala Hotel): 담불라 시내 중심거리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편리하고, 시설이 오래됐지만 운치가 있다.

  • 호텔 골든레이(Hotel Golden Ray): 새로 지은 호텔로 깨끗하지만, 중심거리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야 해서 특히 밤에는 불편한 점이 있다. 식당이 조금 불편한데 마치 야전식당을 이용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바라나

  • 하바라나 빌리지 바이 시나몬(Habarana Village by Cinnamon): 시설은 다소 오래됐지만 서비스나 경치는 훌륭하다. 4성급으로 하바라나 사거리에서 담불라 방향으로 800m 거리에 있다.

  • 다나와 리조트(Danawwa Resort): 하바라나 사거리에서 아누라다푸라 방향으로 400m 거리에 위치하여 이용하기 편리하다. 시설이 다소 오래되었지만, 방이 넓고 아침과 저녁은 뷔페식으로 제공되어 단체객들이 많이 이용한다.

 

식당 식료품

  • 망고망고(Mango Mango): 담불라 시내 중심거리에 있어서 찾기는 싶지만 항상 차들로 붐벼서 주차가 번거로운 면이 있다. 1층에서 이미 준비되어 진열된 음식을 먹는 사람들도 있지만, 2층으로 올라가면 주문해서 시켜 먹을 수도 있다. 음식도 괜찮은 편이고 가격은 저렴해서 그리 부담이 되지 않는다.

  • 카길 푸드시티(Cargill Food City): 식료품 체인점으로 담불라와 하바라나에 있는 것은 소규모의 카길 푸드시티 익스프레스이다. 담불라에는 망고망고 식당과 바로 붙어 있고, 하바라나에서는 하바라나 사거리와 하바라나 빌리지 바이 시나몬 사이에 있다.

  • 뉴 시기리 식당(New Sigiri Restaurant): 시기리야 서문주차장 입구에서 담불라 방향으로 430m쯤 떨어져 있으며, 점심식사를 뷔페식으로 할 수 있다. 시기리야에 온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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