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라다카가람, 텔하라에서 발견된 고대 불교대학 유적

7세기에 옛 마가다왕국 땅을 밟은 당나라의 현장(玄奘) 법사는 그의 여행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텔라다카(Telāḍhaka, 鞮羅擇伽) 가람(伽藍)에 대해 길게 언급하고 있다. 사람들은 현장법사가 방문했었다는 이 가람에 대해 궁금했지만 정확한 위치 등은 수수께끼였었다. 지금은 유명해진 날란다(Nālandā, 那爛陀) 대학 유적에서 서쪽으로 28.7㎞ 떨어진 궁벽한 인도 비하르(Bihar) 주의 조그만 시골마을 텔하라(Telhara)의 작은 언덕에 대한 발굴 작업으로 마을 전체가 바로 현장이 방문했던 고대 불교대학이자 배움의 요람이었던 텔라다카가람(혹은 틸라스아키야(Tilas-akiya) 또는 틸라다크(Tiladhak)로도 알려짐)의 거대한 유적 위에 정착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텔하라 마을의 텔라다카가람 발굴 현장

알렉산더 컨닝햄(Alexander Cunningham, 1862), A.M. 브로들리(A.M. Broadley, 1872), 조셉 데이비드 베그라(Joseph David Beglar) 등이 19세기 후반에 이 현장을 찾았으며, 그들은 모두 마을 서쪽 어귀에 있는 언덕에 대해 언급했었다. 날란다(Nalanda)의 지역행정관이었던 브로들리는 주민들이 부근의 무덤을 파는 과정에서 금속 또는 돌로 만든 상들이 끊임없이 발견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보고한 바가 있었다. 마을의 동쪽 어귀에는 아직도 폐허가 된 이슬람 사원이 서 있는데, 주변의 옛날 불교사원 건물에서 기둥과 벽돌을 가져다 지었으며 ‘텔라다카’란 이름이 새겨져 있는 곳도 있었다.

텔하라 유적지 위치도
불란디 언덕 표면 바로 아래에서부터 유적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을 서쪽 어귀에 있는 10m 높이의 불란디(Bulandi)란 이름의 이 언덕에 대한 발굴은 비하르 주정부의 고고학팀에 의해 2009년 12월 26일부터 시작되었으며, 30여 개의 구덩이에서 지금까지 1,000 점이 넘는 귀중한 유물들이 발견되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많은 유물들이 굽타(Gupta) 왕조(320~550 AD)와 팔라(Pala) 왕조(8세기 중엽~12세기 후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굴 현장의 모습
발굴 현장의 모습
발굴 현장의 모습

텔하라 발굴작업 책임자인 비하르주 고고학 국장 아툴 쿠마르 베르마(Atul Kumar Verma) 박사는 먼 길을 달려온 우리 일행을 발굴 현장 사무소로 먼저 안내해 차이(Chai)를 대접하며 잠시 한숨을 돌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사무소 안쪽 바닥에는 현장에서 발굴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우리 일행은 잠시 휴식을 취하려던 것도 잊어버리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유물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베르마 박사가 유물들과 발굴 장소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곳 유물들은 추후에 현장 박물관이 지어지면 모두 옮겨질 것이라고 했다.

발굴 유물들
발굴 유물들
녹슨 청동보살상들의 보존처리도 시급해 보였다.
사무소 한쪽 바닥에 보관 중인 발굴 유물들.
부서진 유물들도 조각조각 모아놓았다.
발굴 책임자인 아툴 베르마 박사가 그 동안 발굴된 유물들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왼쪽); 보관 장소가 부족하여 현장 직원들의 숙소 침대 밑과 뒤쪽에도 발굴된 유물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텔하라에서는 발굴 과정에 다양한 크기의 많은 조각 작품들이 서로 다른 시대 층에서 발굴되었다. 컨닝햄, 베그라 등이 수집한 작품들은 콜카타 인도박물관(Indian Museum Kolkata)과 파트나박물관(Patna Museum)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조각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현재 유럽과 미국에서 개인 소장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텔하라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10세기 관음보살상. 현재 스위스 취리히의 리트베르그박물관(Museum of Rietberg) 소장.
텔하라에서 발굴된 특이한 유물로 이 유물의 기부자는 사원을 보호할 것을 촉구하며 사원에 해를 입히려는 사람은 누구에게라도 심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현장은 자신의 여행기에서 텔라다카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히 묘사했다. 가람은 마가다왕국 빔비사라(Bimbisara, 頻婆娑羅) 왕의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뜰과 건물은 사원(四院)으로 이루어지고 관각(觀閣)은 3층으로 되어” 있으며 “높은 대(臺)는 여러 길이고 겹겹으로 된 문은 크게 열려” 있다고 기록했다. 길의 끝자락에는 중문을 바라보며 세 개의 정자가 있었는데 지붕 위에 윤상(輪相)을 설치하고 방울을 달아 놓았다고 했다. “아래에는 여러 층의 기단을 쌓고 난순(欄楯)을 삥 둘러” 놓았고 문, 창, 기둥, 외벽과 계단에는 금과 동으로 양각장식이 되어 있었다고 했다. 이곳에는 대승불교를 공부하는 1,000여 명의 비구들이 머물렀다고 하니, 상당히 큰 규모의 화려한 사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10,000㎡ 규모의 언덕에 대한 발굴에서 가장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것은 현장이 묘사했던 3층 건물의 흔적이었다. 이 외에도 기도실과 사원에 거주하는 비구들을 위한 승방 등이 최근 발굴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언덕 전체를 가로질러 팔라왕조 시대의 바닥이 펼쳐져 있음이 여러 구덩이에서 확인되었으며, 팔라 시대의 바닥 아래 층에는 굽타왕조 시대의 바닥이 펼쳐져 있다.

발굴 현장의 여러 구덩이에서 서로 다른 시대의 건축이 겹겹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텔하라 현장에서 발굴된 진흙으로 만들어진 사원 문장(紋章)은 이곳이 굽타 및 팔라왕조 시대에 날란다 및 오단타푸리(Odantapuri) 이외의 또 다른 위대한 배움의 요람이었음을 보여주었다. 문장은 가운데 법륜(法輪)을 중심으로 양쪽에 사슴이 한 마리씩 새겨져 있는 모양이 날란다사원에서 발견된 문장과 유사하다. 날란다대학 발굴 당시 그곳이 중세시대 날란다임을 증명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사원 문장의 발굴이었다.

텔하라에서 발굴된 6세기 마우카리(Maukhari) 왕조의 진흙 문장. 텔하라 발굴 현장에서는 사원 문장 이외에도 소나 사자가 새겨진 문장들이 발견되었다.

아툴 베르마 박사는 텔하라가 날란다와 동시대에 번성했던 것으로 보이며, 특화된 교육을 위한 독립된 대학이었거나 날란다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특화된 교육을 받기 위해 오는 곳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19세기에 이곳을 방문했던 이들도 언급했던 것처럼, 텔하라는 현재 비하르주의 아주 자그마한 마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마을은 이 지역의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곳은 무굴(Mughal) 제국 시대에는 가장 컸던 파르가나(Pargana) 가운데 하나의 수도였으며, 현장의 기록을 보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델리에 인도 최초로 이슬람국가를 세웠던 쿠투브 우딘 아이바크(Qutb-ud-din Aibak) 휘하의 장군 바크티야르 킬지(Bakhtiyar Khilji)가 오단타푸리를 정벌하러 갈 때 마네르(Maner)에서 틸라다(Tiladah)로 향했다고 기록된 것으로 봐서 오단타푸리를 공격하기 전에 텔하라에서 야영을 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당시 텔라다카도 무사하지는 못했을 거란 짐작을 할 수 있다. 이후 투르크족 지배하에서 이곳은 중요한 무슬림 정착지 중 하나가 되었다.

항아리 유물 등이 발굴되던 당시의 모습으로 현장에 남아 있다.
발굴 현장에 남아 있는 또 다른 항아리 유물들.

텔라다카가람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텔하라 마을 전체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마을에는 6개의 언덕이 더 있으며, 그 중 5개의 언덕에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고 마을 주민들은 종종 흙을 파다가 조각상을 발견했다는 신고를 해 온다고 한다. 이렇게 저렇게 노출된 마을의 여기저기 현장에 대한 보존도 큰 문제점으로 보인다. 이웃한 날란다에서만도 이렇게 사라져버린 굽타시대와 팔라시대 벽화들이 여럿 있었다.

비하르주와 주민들은 어서 관광객들에게 현장을 공개해서 제2의 날란다로 키워갔으면 하는 마음이 큰 모양이다. 그러나 둘러 본 현장의 모습은 관광객을 맞기에는 아직 준비가 많이 부족해 보였다. 현장을 떠나기 위해 차에 오르는 마음 한구석에는 어설픈 관광지로의 개방으로 귀중한 역사의 현장이 파괴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 편안하지만은 않은 발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