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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二 / 2020. 11. 2. 14:25 / 불교성지 여행/인도

오디샤주의 다이아몬드 삼각지대, (3) 랄리트기리

(3) 붉은 언덕, 랄리트기리

오리사(Orissa) 번성했던 불교 신앙과 교육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가운데에 다이아몬드 삼각지대(Diamond Triangle) 있었는데 인접한 개의 언덕에 위치한 우다야기리(Udayagiri), 라트나기리(Ratnagiri), 랄리트기리(Lalitgiri) 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금강승(金剛乘, Vajrayāna) 시작되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랄리트기리의 상징적인 장면이면서 이 인도 땅에서 처음 뿌리를 내렸지만 가르침이 사라져버린 인도의 불교 상황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장면인 것 같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라트나기리를 떠난 우리는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의 마지막 목적지인 랄리트기리로 향했다. 랄리트기리는 라트나기로부터 남서쪽으로 직선거리 10.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의 유적지 근처에는 식당 등의 편의시설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랄리트기리로 이동하는 중에 고속도로 근처의 낡은 호텔에서 간단한 인도식 식사를 마치고 랄리트기리에 도착했다. 벌써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의 위치와 라트나기리에서 랄리트기리로 오는 길.

우리는 아시아(Assia) 산맥에서 뻗어 나오긴 했지만 외따로 있는 란다(Landa) 언덕과 맞은편의 파라바디(Parabhadi) 언덕 사이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는 마을을 가로질러 랄리트기리의 승원 유적이 위치한 란다언덕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의 비포장 주차장에는 오후 늦은 시간이어서 인지 차가 대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서서 유적 사이를 걷는 동안에도 다른 방문객을 전혀 수가 없었으며 주변은 고요하고 평화로울 뿐이었다.

랄리트기리에서 찬드라디티야 사원(Chandraditya Vihar) 가장 중요한 시설들 하나로 기원전 2~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리사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규모가 시설이었다. 다울리 아소카 바위 담마칙령(Dhauli Ashokan Rock Edict) 랑구디(Langudi) 유적이 시기에 속한다. 란다언덕에 대한 발굴 작업에서 마하스투파(Mahastupa), 반원형 차이트야그리하(Chaityagriha, 사리탑실), 4개의 승원, 밖의 차이트야그리하 인근의 많은 작은 스투파들과 봉헌탑 등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랄리트기리의 발굴

랄리트기리에 대한 가장 이른 현대의 기록은 1870 자지푸르(Jajpur) 부행정관이었던 바부 찬드라세크하라 바누르지(Babu Chandrasekhara Banurji) 남겨 놓은 것이다. 그는 랄리트기리의 다른 이름인 날티기리(Naltigiri) 단지 아랍어 라나트(la’nat), 랄리트기리에 대한 예언자의 저주의 변형일 뿐이라고 언급했다.

바누르지는 낮은 언덕 정상 부분에서 크고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졌던 아주 오래된 개의 구조물이 발견됐으며 이곳의 쇠퇴에는 단순히 세월의 길이와는 다른 어떠한 힘이 작용되었다고 언급했다. 그는 또한 이러한 파괴가 무슬림 침공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구조물의 건축 재료를 사용하여 지어진 모스크가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언덕 사이의 고개길에 개의 구조물과 같은 배치를 가진 하나의 구조물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나은 보존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내부에는 1.5m 높이의 불상이 있었다.

가장 높은 언덕의 정상부에서는 원형 건물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언덕의 서쪽 경사지에는 코끼리 동굴이란 뜻의 하티칼(Hathi-khal)이란 곳이 있다. 바누르지는 이곳에서 줄로 서있는 같은 크기의 불상 여섯 개를 봤다고 기록했다. 불상에는 불교 경전 내용이 새겨져 있었고, 걸음 떨어진 곳에는 여신상이 서있었을 기단이 발견되었다. 지역민들은 바누르지에게 날티기리의 사원과 불상들은 바쇼칼파왕(Raja Bashokalpa) 건립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바누르지의 기록을 읽고 자극을 받은 쿠타크의 행정관이었던 빔스(John Beams) 1875 언덕을 방문했다. 그는 알티(Alti) 강들로 둘러싸여 있고 강들이 교차하는 곳이어서 접근이 매우 어려웠다고 기록했는데 날티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는 또한 바누르지의 무슬림 침공에 의한 파괴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예언자가 아니라 솔로몬왕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1928년에는 당시 캘커타대학(Calcutta University) 교수였던 차칼다르(H. C. Chakaldar) 자신의 현장 방문 보고서를 모던 리뷰지(Modern Review) 발표했다. 차칼다르는 랄리트기리에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Bhumisparsha Mudrā) 자세의 거대한 붓다 좌상이 가장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고 말한다. 랄리트기리의 보살상들은 보살상들과 비교할 근엄함과 장엄함이 특징적인 우다야기리(Udayagiri) 보살상들과는 확연히 차별화되는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랄리트기리의 불상들은 인도 지질학자들이 아트가르(Atgarh) 사암(沙巖)이라 명명하고 있는 지역의 돌로 주로 조각한 것이며, 언덕에 있는 채석장은 차칼다르의 방문 때에도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차칼다르는 또한 우다야기리 다른 곳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많은 불상들이 현장에서 반출되었다고 언급했다.

당시 캘커타 인도박물관(Indian Museum, Calcutta) 책임 고고학 담당자였던 프라사드 찬다(Ram Prasad Chanda) 1927~28 기간동안 박물관에 전시할 유물 수집을 위해 현장을 찾았다. 그는 이곳에 개의 언덕이 있으며 언덕이 함께 날라티기리(Nalatigiri) 알려져 있다고 했다. 언덕에는 유적이 없고, 란다언덕과 파라바디언덕에만 유적이 있다고도 했다.

찬다는 또한 대지주인 람고빈다 자그데브(Ramgovinda Jagdev) 이곳에서 4개의 불상을 케드라파다(Kedrapada) 있는 자신의 집으로 옮겨갔다고 언급했다. 후에 다른 대지주에 의해 개의 불상이 반출되었다고 했다. 찬다는 1870 바누르지가 보고했던 하티칼 인근의 여섯 개의 불상을 봤음도 기록했다.

랄리트기리에 대한 체계적 조사와 발굴 작업은 1977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1977 소규모 발굴 작업을 주도한 것은 우트칼대학의 K. S. 베헤라(K. S. Behera) 박사였다. 베헤라는 굽타 예술 전통이 서려 있는 랄리트기리의 조각품들이야 말로 오디샤 조각의 오랜 발전과정에서 잃어버렸던 연결고리를 제공해 준다고 설명한다. 그는 또한 랄리트기리의 지형적 환경이 현장이 묘사한 푸시파기리(Pushpagiri, 波祇釐) 지형과 여러 가지로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발굴작업에서 주목할 만한 발견은 굽타왕조의 찬드라굽타 2(Chandragupta II) 궁수 양식의 금화였다.

인도고고학위원회(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ASI) 실시한 대규모 발굴은 1985~1992년에 이루어졌다. 발굴 과정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4개의 승원, 반원형 차이트야그리하, 개의 스투파, 다양한 조각품과 많은 수의 봉헌탑 등이었다. 랄리트기리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은 다섯 시기로 분류된다: 1 (기원전 1~3세기마우리아왕조 이후 시기), 2 (기원전 1세기~기원후 3세기 쿠샨왕조 이후 시기), 3 (4세기~6세기굽타왕조), 4 (7세기~9세기 굽타 이후 바우마-까라왕조), 5 (10세기부터 이후까지 소마밤슈왕조 중세).

랄리트기리 박물관

주차장에서 출입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면 금방 오른쪽으로 새로 건립된 랄리트기리 고고학 현장박물관(Archaeological Site Museum, Lalitgiri) 만난다. 2018 1224일에 개장한 박물관은 6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곳 랄리트기리에 대한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다양한 불교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랄리트기리의 배치도.
2018년 신축된 랄리트기리의 현장박물관.
2015년 2월 당시 랄리리트기리의 입구 근처에서 박물관 신축을 위한 철근 기초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

박물관 내부에는 중앙홀에 전시된 항마촉지인 자세의 거대한 붓다 좌상을 비롯하여 문수보살, 다라보살, 5선나불, 반야바라밀다, 지세보살(持世菩薩, Vasudhāra) 5~11세기의 다양한 불상들과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지만 박물관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지는 소장품은 사람들이 붓다의 사리가 들어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황금 사리함일 것이다.

(), 동석(凍石), 콘돌라이트(khondolite) 용기에 겹겹이 싸여 가장 안쪽에 황금 사리함에 보존되어 있던 성스러운 뼈와 치아 유물이 랄리트기리의 난다언덕에 대한 ASI 발굴 과정에 발견되었다. 발견된 3개의 사리함 가운데 번째에서는 황금줄이 덮고 있는 또는 치아 유물이 담겨 있었고, 번째에는 금박에 싸여 황금줄에 단단히 매어져 있는 또는 치아 모양의 유물이 담겨 있었다. 번째 사리함에는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사리함에는 아무런 명문도 새겨져 있지 않지만, 전문가들은 금박에 싸여 황금줄로 매여 있는 사리가 붓다의 또는 치아 사리일 것으로 믿고 있다. 그리고 황금줄로만 매여 있는 또는 치아 사리는 아마도 붓다의 뛰어난 제자, 사리자(舍利子, Sāriputta) 또는 목건련(, Moggallāna) 사리일 것이라고 한다. 사리함은 발굴 직후 보안상의 이유로 부바네스와르의 ASI 사무소에 보관되어 오다가 이곳 현장박물관이 신축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랄리트기리의 마하스투파에서 발견된 사리함.
박물관에 전시된 사리함의 모습.

승원1

랄리트기리에서는 4개의 승원이 발견되었다. 모든 승원은 중앙에 개방된 정사각형의 중정(中庭) 또는 안뜰이 있고 중정을 돌기둥이 있는 베란다와 개별 수련실이 둘러싸고 있는 차투-살라(chatuh-sala) 양식으로 지어졌다. 벽의 개별 수련실들 가운데 하나가 주요 신을 모시는 성소 역할을 하고 있다.

승원1의 모습.
승원의 출입구에는 문설주 돌기둥만 양쪽에 서서 자리를 지키고 있고, 연꽃 모양의 돌계단이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박물관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승원1 오른쪽에 나타난다. 승원1 정사각형(36mx36m) 구조이며 동향으로 앉아 있다. 18개의 개별 수련실이 사면의 쪽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신전은 뒤쪽 벽에 위치한다. 다른 입구 하나가 남쪽 끝에 만들어져 있으며 저수지는 뒤쪽에 있다. 출입구, 기둥, 계단, 배수관을 제외한 승원 전체가 벽돌로 지어졌다. 신전 안에는 항마촉지인 자세의 거대한 불상이 있었으나, 현재는 현장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승원3

승원1에서 걸음 나가지 않아 남동향으로 앉아 있는 승원3 나타난다. 승원3 약간 직사각형(28mx27m) 구조를 띠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배치는 승원1 차이가 없는 모습이다. 사면의 승원 벽에 15개의 개별 수련실이 배치되어 있다. 뒤쪽 벽에 있는 신전의 남쪽 벽에 설치된 벽감에서 항마촉지인 자세의 붓다상이 발견되었다. 역시 벽돌로 건립된 승원도 그동안 승원의 벽돌을 사람들이 함부로 가져가버려 1~2m 높이의 벽만 남아 있다. 승원에서 발견된 유물을 승원은 5~6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4개의 승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승원3의 모습.

승원4

승원4 승원3에서 건너편에 서향으로 앉아 있으며, 정사각형(30mx30m) 구조이다. 다른 승원들처럼 차투-살라 양식의 구조이지만 승원4에는 모두 10개의 개별 수련실이 남쪽과 북쪽 벽에만 배치되어 있다. 뒤쪽 벽에 있는 신전에는 원래 있었던 자리에서 노출된 앉아 있는 항마촉지인 자세의 거대한 붓다상이 있으나 현재 머리 부분은 사라지고 없는 상태이다. 붓다상은 여러 개의 조각된 돌로 구성되었던 듯하다.

승원에서 Sri Chandraditya Vihara Samagra Arya Bhikshu Sangha라는 명문이 새겨진 테라코타 명패가 발견되면서 승원이 찬드라디티야 사원이라고 불렸음을 알려준다. 명패에는 위쪽에 바퀴 문양이 새겨져 있고 옆으로 사슴이 새겨져 있다. 새겨진 문자로 9~10세기 것으로 추정되었다. 굽타시대 브라미(Brahmi) 문자로 새겨진 개의 부러진 명패가 추가로 발견되었으며 여기에도 찬드라디티야 사원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승원은 4~5세기까지도 찬드라디티야 사원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승원4의 전경.
승원4의 모습.
뒤쪽 벽 중앙에 있는 신전에는 천장이 사라졌고 머리 부분이 없는 붓다상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반원형 차이트야그리하

반월형 차이트야그리하 1986~87년과 1987~88 발굴 시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구조물 역시 벽돌로 지어졌으며 동쪽을 향하고 있다. 차이트야그리하는 길이가 22m, 너비가 11.4m이며 끝에 있는 반원 부분에는 돌로 만들어진 원형 스투파가 있다. 차이트야그리하의 너비는 3.3m이다. 이러한 형태의 스투파실은 라트나기리나 랑구디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다.

스투파실에는 돌출된 출입문이 있었으며, 바깥 둘레에는 탑돌이를 위한 것인 바닥에 돌로 만들어진 보행로가 있다. 그리고 보행로의 바깥 가장자리를 따라 원래부터 자리에 있었는지 아니면 주변에서 옮겨 놓은 것인 지는 없으나 작은 봉헌탑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다. 스투파실 입구의 왼쪽으로 쿠샨시대와 굽타시대의 브라미 문자로 새겨진 석판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콘돌라이트로 조각된 붓다의 두상이 스투파의 중앙에서 누운 상태로 발견되었다.

반월형 차이트야그리하의 전경.
반월형 차이트야그리하는 동서로 자리 잡고 있으며 동쪽에 입구가, 서쪽 끝 반월 부분에 원형 스투파가 있다.
차이트야그리하의 바깥쪽에는 돌로 포장된 보행로가 있으며 바깥 경계에는 봉헌탑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랄리트기리에서는 반월형 차이트야그리하 주변에 특히 봉헌탑들이 많이 모여 있다.

차이트야그리하 통로 남쪽 측면의 받침대에 새겨진 명문으로 보아 구조물은 랄리트기리에서 가장 오래된 구조물로 보인다. 정사각형(1.42mx1.42m) 받침대에는 기원전 2~3세기 브라미 문자로 새겨진 프라크리트어(Prakrit) 줄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사리함이 나온 마하스투파와 함께 차이트야그리하는 랄리트기리가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불교 유적지임을 증명한다.

랄리트기리의 차이트야그리하 받침대 명문, 기원전 2세기

마하스투파

차이트야그리하에서 다시 조금 앞으로 나가면 기다란 1 건물 1동이 나타난다. 랄리트기리 입구에서 만났던 신축 박물관이 세워지기 전까지 랄리트기리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많은 유물과 조각품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어서 임시 박물관의 역할을 했었다. 때는 칸막이도 없이 뚫린 공간에 유물들을 대충 열을 지어 세워놓았지만 그나마 유물들이 비를 피할 있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었다.

입구의 신축 박물관이 건립될 때까지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던 임시 박물관.

임시 박물관 건물 뒤편에 있는 란다언덕의 가장 높은 지점에 대한 발굴 작업에서 심하게 파손된 원형(원둘레가 대략 36m) 스투파가 발견되었다. 스투파는 진흙 반죽에 돌더미를 아무렇게 쌓아 조성되었으며 겉면에는 얇은 마름돌을 쌓아 올렸다. 스투파 꼭대기에는 하르미카(harmika) 차트라(chattra) 있었으나, 발굴 당시 하르미카의 잔해만 발견되었다. 그리고 반원형 스투파 둘레에는 탑돌이를 위해 돌로 포장된 보행길이 만들어져 있다.

임시 박물관 뒤편 언덕에 마하스투파가 위치한다.
나지막한 계단 끝에 마하스투파가 보인다.
마하스투파의 모습.

스투파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발굴 과정에 스투파의 중심부에서 봉헌탑 모양의 콘돌라이트로 만들어진 개의 사리함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신축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바로 사리함이다. 사리함들은 스투파의 가장 중심부에서 각각 남쪽, 북쪽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산치(Sanchi)에서도 3개의 사리함이 발견되었으며 명문에 따르면 각각 붓다와 붓다의 제자인 사리자와 목건련의 사리함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랄리트기리에서도 같은 숫자의 사리함이 발견되면서 이들 사리함들을 붓다와 제자의 사리함으로 추정하는 듯하다. 제자의 사리함 가운데 하나의 내용물은 분실되었다는 것이다.

승원2

마하스투파에서 내려와 언덕을 내려오다가 입구의 신축 박물관 뒤로 길을 따라 가면 승원2 다다른다. 승원2 랄리트기리에서 발견된 가장 작은 승원이다. 승원은 동향으로 앉아 있으며 5개의 개별 수련실이 있다. 승원 역시 뒤쪽에 신전이 있다. 그러나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승원 전체가 심하게 도굴된 상태였으며 승원의 벽도 기단 부분까지 파손된 상태였다고 한다. 발굴 당시에는 북쪽과 서쪽 벽만이 발견되었으며, 후대 어느 시점엔 힌두사원으로도 사용되었었다.

랄리트기리야 말로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의 유적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아니라 오리사에서 불교의 출발점들 가운데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곳의 일부 유적과 유물은 마우리아(Maurya) 왕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4세기경에 사람들이 이곳을 완전히 버리고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는 줄곧 종교적 활동이 이루어졌다. 이곳이 당시에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붓다의 사리가 붓다가 가장 아끼던 제자의 사리와 함께 이곳에 모셔지게 것이 아니었을까?

오디샤주의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에 대한 발굴은 최근에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랄리트기리에 대한 체계적인 대규모 발굴만 보더라도 1992년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따라서 아직 그리 널리 알려지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오디샤주에서도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에 대한 자부심이 높으며 보드가야 사르나트와 같이 순례객과 관광객이 찾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매년 부바네스와르에서 국제불교회의(International Buddhist Conclave) 개최하고 있으며 붓다와 관련된 성지를 운행하는 특별관광열차 대열반특급(Mahanirvana Express) 많은 노력 끝에, 손님 부족으로 중단되긴 했지만, 오디샤에까지 연장 운행하도록 하기도 했었다. 언젠가는 지금 우다야기리, 라트나기리, 랄리트기리에 흩어져 있는 유적들 사이를 거닐며 만끽할 있는 고적함을 누릴 있는 시간도 다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랄라리트기리를 떠났다.

不二 / 2020. 10. 21. 01:26 / 불교성지 여행/인도

오디샤주의 다이아몬드 삼각지대, (2) 라트나기리

(2) 보석의 언덕, 라트나기리

오리사(Orissa) 번성했던 불교 신앙과 교육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가운데에 다이아몬드 삼각지대(Diamond Triangle) 있었는데 인접한 개의 언덕에 위치한 우다야기리(Udayagiri), 라트나기리(Ratnagiri), 랄리트기리(Lalitgiri) 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금강승(金剛乘, Vajrayāna) 시작되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라트나기리 승원1의 상징적인 푸른 빛을 띠고 있는 주 출입구 문틀.

우리는 번째 목적지 우다야기리를 떠나 다음 목적지인 라트나기리로 향했다. 라트나기리는 우다야기리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 7km 떨어져 있는데, 켈루오(Keluo) 강과 비루파(Birupa) 강의 합류 지점에서 가까운 켈루오 강변에 위치한다.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 도착한 라트나기리 승원 단지는 아시아(Assia) 산맥에서 뻗어 나오긴 했지만 외톨이로 있는 언덕의 평평한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라트나기리 언덕 아래에 당도해서도 도로 가의 작은 언덕 위에 이렇게 넓고 평평한 땅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렇게 대규모의 승원 단지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기 힘들었다. 잠깐 언덕을 오르면 언덕 정상부에 고요한 별세계의 평지가 나타난다. 아마 승려들의 수행생활에 필요한 이러한 호젓함과 고요함에 이끌려 라트나기리 승원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언덕 정상부에 도착했다.

오디샤주의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와 라트나기리의 위치

라트나기리의 발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지푸르(Jajpur) 지방행정 공무원이었던 라이 몬모한 차크라바르티(Rai Monmohan Chakravarti) 이곳을 처음으로 방문했으며, 그의 방문 보고서가 1906 쿠타크 디스트릭트 가제티어(Cuttack District Gazetteer) 게재되었다. 뒤에는 1927 오리사 역사학회(Orissa Historical Society) 간사였던 비렌드라 나트 레이(Birendra Nath Ray) 방문했으며, 그의 요청에 따라 1928년에는 당시 캘커타대학(Calcutta University) 교수였던 차칼다르(Haran Chandra Chakaldar) 현장을 방문했으며 자신의 보고서를 모던 리뷰지(Modern Review) 발표했다.

또한 당시 캘커타 인도박물관(Indian Museum, Calcutta) 책임 고고학 담당자였던 프라사드 찬다(Ram Prasad Chanda) 1927~28 기간동안 오리사의 여러 유적지를 방문하고 1930년에 발표한 자신의 조사보고서에서 라트나기리에서 발견된 조각품들이 언급되었다. 데바프라사드 고쉬(Devaprasad Ghosh) 모던 리뷰지에 발표한 글에서 라트나기리에서 발견된 거대한 붓다 두상(頭像)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Bhumisparsha Mudrā) 자세의 붓다像이 자바섬 보로부두르(Borobudur) 5선나불(Dbyani-Buddha) 像과 서로 연관성이 있음을 주장했다.

라트나기리가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면서 인도고고학위원회(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관리 대상이 되었으며, 마침내 최초의 체계적 발굴 작업이 1958~1961 기간동안 위원회의 동부분원(Eastern Circle) 의해 이루어졌다. 발굴 책임자는 분원장이었던 데발라 미트라(Debala Mitra)였다. 발굴 작업으로 라트나기리 마하비하라(Ratnagiri Mahavihara) 확인된 중요한 불교 시설 유적이 확인되었다.

라트나기리가 발굴되기 전의 모습.
라트나기리 발굴이 진행되던 당시의 모습.

라트나기리에서는 거대한 스투파(스투파1), 개의 거대한 사각형 승원(승원1 2), 하나의 부속棟이 있는 승원, 많은 수의 소규모 스투파들, 여덟 개의 사원, 주로 돌로 또는 일부 청동으로 제작된 많은 조각품들이 발굴되었다. 미트라는 라트나기리의 핵심적인 시설들의 건립 연대를 5세기로 추정했으며, 추가적인 건축은 12세기까지 지속되었다 했다. 13세기 무슬림 침공과 함께 라트나기리도 쇠퇴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라트나기리에서의 종교적 활동은 16세기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라트나기리와 관련된 권위있는 연구는 1987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낸시 호크(Nancy Hock) 버클리대(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호크는 소작(所作) 탄트라(kriyā-tantra) 문구들, 특히 문수보살진언이 조각품들과 관련하여 라트나기리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많은 불공견색관음(不空索觀音, Amoghapāśa) 像이 발견되었는데 라트나기리에서 보살이 숭배되었을 보여준다. 호크에 의하면, 탄트라란 용어가 라트나기리에서 숭배되었던 불교의 모습을 가장 설명해준다.

탄트라불교 학문 중심지

인도의 탄트라불교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대부분 티베트, 중국, 일본 등지의 불경 기록에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지역의 불경과 기록은 인도의 이전 시대 산스크리트어 불경과 기록을 번역한 것이다. 티베트 기록에 의하면, 라트나기리는 요가와 탄트라의 학문 중심지로 높은 명성을 얻었던 것으로 보이며 많은 저명한 탄트라 스승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고 다른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었다.

라트나기리의 발굴 과정에서는 수많은 불교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으로는 입상 또는 좌상의 다양한 붓다像, 결발보관(Jata-mukuta) 로케슈바라(Lokeśvara), 미륵(Maitreya, 彌勒), 문수(文殊, Manjušri) 보살, 관음보살(觀音菩薩, Avalokitesvara), 잠발라(Jambhala), 야마리(Yamari), 삼바라(Sambara), 대흑천(大黑天, Mahakala), 다라보살(多羅菩薩, Tara), 귀자모신(鬼子母神, Hārītī), 아파라지타(Aparājita), 바슈다라(Vasudhârâ), 아리아사라스와띠(Aryasaraswati) 등이 있는데 8~9세기경부터 꽃피우고 있던 금강승의 시륜승(時輪乘, Kālacakrayāna) 절정기에 있던 시대의 것들이다.

라트나기리에서 수많은 희귀 불교 유적 유물이 발견되었지만 모든 것이 탄트라 또는 금강승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라트나기리는 처음에 대승불교를 받아들인 승가람이었으나 나중에 금강승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라트나기리 언덕 위의 배치도

승원1

도로가에서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울타리 안에 줄을 맞추어 있는 많은 수의 봉헌탑이다. 사실 라트나기리에는 곳곳에 수백 개의 작은 봉헌탑들이 산재해 있다는 점에서 다른 많은 불교 유적지와 차이가 난다. 봉헌탑은 신자들과 순례객의 신심의 표현이라고 , 라트나기리는 많은 신자들과 순례객이 찾던 믿음의 중심이었음을 증명한다고 있을 같다. 많은 수의 봉헌탑이 라트나기리를 찾는 사람들이 있도록 이곳으로 옮겨져 철조망 울타리 안에 일렬로 전시되고 있다.

언덕을 오르다 보면 한 무리의 봉헌탑이 철조망 울타리 안에 일렬로 정렬하고 있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신자들과 순례객들이 자신들이 믿는 신에 대한 신심을 나타내려 했던 듯 봉헌탑 표면에는 다양한 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울타리로 보호되고 있는 봉헌탑 무리에서 왼쪽으로 계속 발걸음을 옮기면 금방 넓은 공지가 나타난다. 공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이곳을 찾는 순례객과 관광객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으며 인도 불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불교 유적인 개의 사각형 벽돌 승원이 나타난다. 전통적인 차투-살라(chatuh-sala) 양식으로 건립된 승원1 승원2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이웃해 나란히 있다.

승원1 라트나기리에서 가장 규모의 승원이며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승원은 정사각형(55mx55m) 구조이며, 중앙에 바닥이 돌로 포장된 중정(中庭) 또는 안뜰이 있고 이를 기둥이 있는 베란다가 둘러싸고 있으며 이를 다시 24개의 개별 수련실이 둘러싸고 있다. 승원의 서남쪽 구석에 있는 개의 계단은 승원이 최소한 이층 구조의 건물이었음을 보여준다.

미트라는 승원의 건립이 시기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한다. 1 구조물은 기둥, 붙임기둥, 문틀, 탑문의 외장을 제외하고는 주로 벽돌로 지어졌다. 시기의 연대를 특정할 있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부바네스와르(Bhubaneswar) 바이탈(Vaital) 사원과 시시레슈바라(Sisireshvara) 사원의 조각품 장식과의 유사성으로 1기는 8세기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일부 돌에 새겨진 명문(銘文)으로 2기는 11세기 이전이 수는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3기에는 갑작스러운 추가 또는 변경이 경솔하게 이루어진 부분이 있었다. 3기는 13세기보다는 훨씬 이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승원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쇠퇴와 마모를 겪었으며 대규모의 복원 작업이 뒤따랐다. 복원 작업으로 승원은 좀더 인상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다. 깎아 다듬은 돌을 사용해 전면부 벽에 외장으로 둘렀다. 아래층의 개별 수련실은 버려졌고 잔해더미로 메워졌다. 그리고 이층에는 개별 수련실이 만들어졌다. 북쪽 뒷벽에 있는 신전 공간을 넓혀서 입구의 현관이 마련되었다.

승원1과 2의 전경. 오른쪽의 승원1과 왼쪽의 조금 작은 규모의 승원2가 중간에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이웃해 서 있다.
발굴 당시 작성된 승원1과 승원2의 내부 배치도.

승원은 전면부를 제외하고 삼면이 3 양식을 띄고 있다. 남향을 하고 있는 전면부는 5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운데에 입구 현관이 위치한다. 남쪽에서 계단을 올라 승원1 입구로 접근하면 가장 먼저 방문객의 눈길을 붙잡는 주목할 것이 정교하게 조각된 푸른 빛의 녹니석(綠泥石, Chlorite) 문틀이다. 푸른 빛깔로 인해 녹니석 문틀은 표면을 가지고 있는 전체적 승원 구조에서 도드라져 보인다.

푸른 빛의 녹니석 문틀 부분 상인방 중앙에는 코끼리로부터 목욕을 받고 있는 힌두 여신 락슈미(Gajalaxmi)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문틀 양쪽의 문설주 아래 부분에는 다른 수행인들과 함께 수호신 드바라팔라(Dvārapāla) 멋진 모습로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양쪽의 드바라팔라 바로 옆에 있는 인물은 시종이 양산을 받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왕족인 것으로 추정된다. 미트라는 인물이 왕족일 경우 승원이 왕가의 후원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승원1의 전경. 정면에서 계단을 올라서면 출입구 현관에 들어서게 된다.
승원1의 5단 양식 전면부 출입구 주변의 모습.
푸른 빛의 녹니석 문틀 위 상인방 중앙에는 코끼리로부터 목욕을 받고 있는 힌두 여신 락슈미(Gajalaxmi)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어 힌두교의 영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엘로라석굴(Ellora Caves)의 16번 동굴인 힌두교사원 카일라사사원(Kailasa Temple)에서 만날 수 있는 락슈미(Lakshmi)의 모습. 연꽃 연못의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략슈미를 코끼리들이 목욕을 시켜주고 있다 (Gajalaxmi).
문틀 양쪽의 문설주 아래 부분에는 여러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다. 수호신 드바라팔라가 멋진 모습을 취하고 서 있고 그 옆에는 시종이 받치고 있는 양산을 쓰고 있는 왕족이 서 있다.

입구 현관의 안쪽에는 푸른 빛의 문틀 양측으로 7 돌출부가 있다. 중에서 서쪽 돌출부에는 거북을 딛고 있는 야무나(Yamuna) 여신의 조각이 있으나, 동측 돌출부에는 아무 것도 없이 비어 있는 상태이다. 앞쪽 현관에는 다른 개의 조각이 있다. 미트라는 앞쪽 전면부 입구 현관과 같은 곳이 있는 유적은 날란다 여러 곳이 있지만 뒷벽 표면까지 이렇게 다양한 조각으로 생동감 있게 처리되어 있는 곳은 드물다고 했다.

입구 현관 안쪽 서측 7단 돌출부에 조각되어 있는 거북 등을 딛고 서 있는 야무나 여신상 (왼쪽); 거북의 등을 발로 딛고 서서 물병을 들고 시동을 거느린 테라코타 야무나 여신상. 5세기 굽타시대. 뉴델리 국립박물관 (오른쪽)

입구 현관의 바깥쪽 측면에는 벽감(壁龕) 설치되어 있는데, 서측 벽감은 비어 있는 반면에 동측 벽감에는 여신상이 모셔져 있다 미트라는 여신상이 강의 여신이라고 추정한 있다. 입구에는 앞쪽과 뒤쪽으로 개의 현관이 있는데 뒤쪽 현관은 승원의 내부 베란다로 이어진다. 앞쪽 현관의 안쪽의 양측 벽돌 벽면에도 각각 하나씩 개의 벽감이 설치되어 있다.

개의 벽감 서쪽 벽면의 벽감 내에는 연화수보살(蓮花手菩薩, Bodhisattva Padmapani), 동쪽 벽면의 벽감 내에는 금강수보살(金剛手菩薩, Vajrapāi) 모셔져 있다. 금강수보살의 후광 양측면에서는 5선나불이 자리잡고 있는데, 오른쪽에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Bhumisparsha Mudrā) 자세의 아축(, Akshobhya)여래가 그리고 왼쪽에는 보생(寶生, Ratnasambhava)여래가 위치하고 있다.

승원 전면부 입구 현관 동측 벽의 벽감에 모셔진 여신상(강의 여신) (왼쪽); 연화수보살 (중앙); 금강수보살 (오른쪽)

앞쪽과 뒤쪽의 입구 현관 사이에는 좁은 통로가 있다. 뒤쪽 입구 현관에도 동쪽과 서쪽 벽에 벽감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는 귀자모신(鬼子母神, Hārītī) 그녀의 배우자인 판치카(Pañcika, )가 각각 모셔져 있다. 이 당시 인도의 승원에 왜 팔로 아이를 안고 있거나 무릎 주변에 여러 명의 아이를 데리고 있는 모습의 귀자모신像이 모든 인도 승원의 현관이나 식당 구석에서 발견되는지에 대한 당나라의 유학승 의정(義淨) 설명은 앞서 ‘(1) 떠오르는 태양의 언덕, 우다야기리에서 했었다.

귀자모신(왼쪽)과 판치카(오른쪽)

승원의 북쪽 끝에는 뒷벽의 중앙에 신전이 있다. 신전 앞에는 베란다로 연결되는 좁은 입구가 있다. 신전의 문틀이 사라진 자리에는 문설주만 있으며, 양측 문설주 아래 부분에는 각각 개의 벽감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는 드바라팔라, 보살, 카마라다라니(Chamara-dharani), 뱀신 나가(Naga) 모습이 각각 새겨져 있다. 드바라팔라 부분에 남아 있는 문설주 부분에는 오리사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다양한 곡예 자세의 인물상 조각을 지금도 있다.

승원1의 신전. 뒤쪽(북쪽) 벽 중앙에 있으며 입구에는 문틀도 사라지고 없으며 문설주만 남이 있다.
문설주에 남아 있는 조각에서는 여전히 정교함을 느낄 수 있다.
문설주 아래 부분에는 오른쪽부터 수호신인 드바라팔라, 보살, 카마라다라니, 뱀신 나가의 모습이 각각 조각되어 있다.

신전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삼단 기단 중앙에 항마촉지인 자세의 붓다 좌상을 마주한다. 붓다 좌상은 여섯 개의 서로 다른 돌로 만들어져 있으며 죔쇠와 장부촉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불상의 모든 부위들은 신전 안에서 해체된 발견되었지만 원래 상태로 복원된 것이다. 붓다의 뒤편 서쪽에는 연화수보살이, 동쪽에는 금강수보살이 붓다를 보좌하고 있다. 보살은 오른 손에 벌레를 쫓는 채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붓다 길에 벌레가 밟혀 죽는 일이 없도록 쫓으려는 모양이다.

신전 안에는 중앙에 여섯 개의 돌로 이루어진 항마촉지인 자세의 붓다상이 있고, 붓다의 뒤편 서쪽에는 연화수보살이, 동쪽에는 금강수보살이 붓다를 보좌하고 있다.

승원 건립 2기에 신전에 대한 다양한 변경이 이루어졌다. 가장 안쪽 성소에는 아무런 변경도 없었지만, 입구가 넓혀지면서 남쪽으로 돌출되어 나왔다. 성소와 입구를 연결하는 좁은 통로도 1기의 문틀만 원래 상태로 남겨두고 측면 벽을 포함하게 되면서 길게 늘어나게 되었다. 신전의 전면부가 확장되면서 입구 현관 또는 대기실도 역시 같은 비율로 늘어났다. 입구 현관의 확장은 뒤쪽 개별 수련실을 벽돌로 막아 가능해진 것이다.

동서의 측면 벽에는 벽감이 설치되어 있다. 서쪽 벽에는 6개의 벽감이 있는데 3개는 비어 있고 3개에만 신상들이 남아 있다. 미트라의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발굴 당시에는 벽감들 가운데 5개에 신상들이 남아 있었다. 위에 있는 개의 벽감에는 각각 항마촉지인 자세와 전법륜인(轉法輪印, Dharmachakra Pravartana Mudrā) 자세로 앉아 있던 붓다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지금은 비어 있다.

서쪽 아래에 있는 개의 벽감에는 불상이 모두 채워져 있는데, 가운데 개가 아축(, Akshobhya)여래 상이다. 서쪽 벽에서 남쪽과 북쪽으로 이어지는 벽에도 개의 벽감이 있다. 남쪽 벽의 벽감에는 지세보살(持世菩薩, Vasudhāra), 북쪽 벽에는 항마촉지인 자세의 붓다가 각기 모셔져 있다. 미트라는 지세보살 벽감 근처에 홀로 있는 붓다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현재 자리에는 이상 수가 없다.

확장된 입구 현관의 서쪽 벽.

2기에 추가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전면부를 구성했던 조각된 많은 돌들이 잔해더미 여기저기에서 발견되었다. 조각들이 모두 조립되어 앞쪽 입구 한쪽에 놓이게 되었다. 2 전면부는 중앙 출입구 틀이었으며 한쪽에 3개씩 모두 6개의 깊은 벽감이 설치되어 있다. 중앙 출입구 틀은 1기에 설치되었던 문틀과 일렬로 세워졌었다.

중앙 출입구 틀의 가운데 문틀 부분 상인방 중앙에는 항마촉지인 자세의 붓다像이 있다. 그리고 양측에 깊게 파인 벽감의 상인방 중앙에는 각기 다라보살을 있다. 또한 출입구 틀의 동서 측면에도 인물상을 조각해 놓은 벽감이 보인다. 동쪽 측면에는 무릎을 끓고 있는 여인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여인은 남자에게 그러지 말라고 사정하고 있는 듯하다.

서쪽 측면의 벽감에는 서로 사랑하는 남녀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것을 , 동쪽 측면의 남녀의 모습도 성교행위의 주제와 관련이 있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데방가나 데사이(Devangana Desai) 그런 주장을 하고 있으며 성교 중에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는 유사한 개의 사례를 들고 있다: 마이소르 바갈리 소재 사원의 조각, 부바네스와르 소재 링가라자(Lingaraja) 사원의 조각, 그리고 코나라크(Konark) 태양신사원(Sun Temple) 조각.

제2기에 추가되었던 전면부로 제1기에 설치되었던 출입구 문틀과 일렬로 세워졌었다.

승원의 중정을 둘러싼 베란다는 현재 거의 대부분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에 마치 회랑과 같은 느낌을 준다. 중정에 들어서면 여기저기에 많은 불상들이 벽에 기대어 서있는 모습에 감탄사가 나온다. 특히 이곳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다양한 크기의 붓다 두상(頭像)인데, 중에도 거대한 크기의 두상은 원래 두상으로 제작되었는지 아니면 몸체 부분이 사라진 것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라트나기리의 조각은 자바, 수마트라, 발리 등의 조각에도 영향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승원1의 내부 모습.
승원1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불상 및 조각품들이 승원 내부 벽에 기대어 전시되고 있다.

승원2

라트나기리의 승원2 승원1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작은 규모의 사원이다. 승원2 정사각형(28.95mx28.95m) 1 구조이며, 베란다를 둘러싸고 반원형 아치 지붕을 가진 18개의 개별 수련실이 배치되어 있다. 남향의 승원2 문틀, 창문, 베란다, 경계석 바닥포장 등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벽돌로 지어졌다.

승원2의 출입구에서 뒤쪽 벽에 있는 신전을 바라본 모습.
승원1의 이층에서 내려다 본 승원2의 내부 모습. 신전, 중정, 개별 수련실 등이 눈에 들어온다.

북측 벽에 위치하여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신전에는 여원인(與願印, Varada Mudrā) 자세로 있는 붓다像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붓다의 측면에는 각각 아주 작은 형상의 브라흐마와 인드라가 호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산카샤의 기적 또는 도솔천으로부터 붓다의 강림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팔의 인드라는 왕관을 쓰고 연꽃 위에 서서 양산을 들고 있다. 반면에 개의 머리를 가지고 턱수염을 기른 팔의 인물은 브라흐마인 듯하다.

미트라는 승원이 3단계에 걸쳐 건립되었다고 주장한다. 1기는 늦어도 굽타시대까지는 건립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1기에 건립되었던 부분은 퇴락을 겪었고 위에 2기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2기에 건립된 것들 가운데에서는 부서진 벽과 벽돌 기반만이 발견되었다. 부바네스와르에 있는 파라수라메슈바라 사원과 비교하면 2기는 7세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승원의 현재 구조물은 3기에 해당하며 늦어도 11세기까지는 건립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마하스투파

승원2 출입구에서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마자 많은 봉헌탑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곳을 지난다. 계속 발걸음을 이어가면 승원2 출입구에서 100m 되는 곳에 마하스투파(Mahastupa) 매우 규모의 벽돌 스투파 유적이 나타난다. 스투파의 기초는 정교하고 대칭적인 배치를 보여준다. 스투파는 정사각형(14.3mx14.3m)이며 변이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다.

승원1의 이층에서 저 멀리 마하스투파를 바라본 모습. 승원2의 앞쪽에는 작은 봉헌탑들을 볼 수 있다.

스투파의 기초 위에는 둥그런 벽돌 원통형 층만이 겨우 남아 있다. 스투파의 기초는 이전 스투파의 기초 위에 건립된 것이다. 근처의 작은 스투파에서 발견된 여러 개의 석판으로 이전 스투파는 굽타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판에는 5~6세기 문자로 연기경(緣起經)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이전 스투파에서 남아 있는 것은 주추석뿐이다. 위에 다음 스투파가 건립될 때에는 원래의 다각형에서 원형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스투파의 기초는 3 양식인데 단은 2개의 부분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면에는 여섯 개의 둘출부를 위아래로 있다. 돌출부는 우묵 들어간 부분으로 분리되어 있다. 스투파 기초 위의 원통형 벽돌 층은 바퀴 모양을 하고 있다. 바퀴에는 가장자리 테두리가 있고 12개의 바퀴살이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이다. 마하스투파와 둘레에는 겹으로 원형의 벽이 건립되었으며, 사이의 공간은 주변을 있는 보행로 역할을 했다.

마하스투파.

마하스투파의 주변 지역에는 크고 작은 다양한 형태의 봉헌탑들이 산재해 있다. 봉헌탑들이 그야말로 총총히 박혀 있는 모습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봉헌탑에는 벽돌 또는 돌로 쌓아 올린 것과 돌을 조각해 만든 것으로 나뉜다. 돌을 조각해 만든 봉헌탑이 훨씬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벽돌 또는 돌로 쌓아 올린 봉헌탑의 수도 상당하다. 형태도 다양하며, 내부에 사리나 경전을 새겨 넣은 경우도 있고, 또는 아무 것도 넣지 않은 경우도 있다.

라트나기리에는 수많은 봉헌탑을 만날 수 있으며, 이 봉헌탑의 대부분이 마하스투파 주변에 몰려 있다.

마하스투파의 동쪽으로 바로 이웃하여 전통적인 3 양식의 웅장한 벽돌 스투파2 있던 곳이 있으나 지금은 기단만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스투파의 높이는 2.3m이다. 마하스투파와 스투파2 있는 구역은 주변에 작은 봉헌탑들이 총총히 박혀 있어 하늘에서 보면 마치 벌집처럼 보일 같다.

마하스투파에서 서쪽으로 60m 거리에는 대흑천(大黑天, Mahakala) 주신으로 모시는 오래된 마하칼라사원이 있다. 처음에는 불교신으로 모시기 시작했던 배가 불룩한 팔의 인물이 이제는 힌두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사원의 현관에 있는 벽감에는 항마촉지인 자세의 붓다, 연꽃을 들고 있는 다라보살, 금강살타보살(金剛薩菩薩, Vajrasattva) 모셔져 있다.

하나의 부속棟이 있는 승원

언덕을 내려오면서 봉헌탑이 줄을 맞추어 울타리 안에 있는 곳에 도달하면 우측으로 돌아 계속 언덕을 내려오는 대신 북서쪽으로 박물관까지 계속 걸어가면 작은 승원 유적이 나타난다. 승원은 하나의 부속동이 있는 승원이라 불린다. 승원은 베란다를 전면에 두고 개의 개별 수련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가운데 방은 예배실로 사용되었고, 다른 개의 방은 거주용이었다. 승원도 동일한 배열의 이전 구조물 위에 건립되었다.

현장에서는 소마밤슈(Somavamshi) 왕조의 마하시바굽타 5(Mahasivagupta V, 1100-1110) 동판 선포문이 발견되었다. 선포문에는 아마도 라트나기리에서 은퇴 삶을 살았던 라니 카르푸라스리(Rani Karpurasri) 사람에게 우타라 토살리(Uttara-Tosali) 코나마을을 하사한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라트나기리 박물관

라트나기리에는 라트나기리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유물을 현장에 전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현장박물관이 있다. 언덕의 경사를 활용해 3단으로 세워진 박물관에는 4개의 전시실이 있다. 3개의 전시실에는 주로 조각품이 전시되고 있으며, 번째 전시실에는 () 상아(象牙) 조각품, 테라코타, 진흙 인장, 동명판(銅銘板) 등이 전시되고 있는 중이다.

박물관의 외관.
박물관에 전시된 거대한 붓다 두상.
박물관에 전시된 작은 봉헌탑.

 

不二 / 2020. 8. 31. 14:46 / 불교성지 여행/인도

오디샤주의 다이아몬드 삼각지대, (1) 우다야기리

(1) 떠오르는 태양의 언덕, 우다야기리

오리사(Orissa) 번성했던 불교 신앙과 교육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가운데에 다이아몬드 삼각지대(Diamond Triangle) 있었는데 인접한 개의 언덕에 위치한 우다야기리(Udayagiri), 라트나기리(Ratnagiri), 랄리트기리(Lalitgiri) 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금강승(金剛乘, Vajrayāna) 시작되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우다야기리의 상징적인 불전(佛殿)의 모습. 승원2의 천장이 없는 신전 안에 노출된 불상이 보인다.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를 포함해 대부분의 오디샤주 관광지와 유적지를 찾을 경우 오디샤주의 주도인 부바네스와르(Bhubaneswar) 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는 하루 내에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를 모두 둘러보기 위해 아침 일찍 부바네스와르의 호텔을 나섰다. 자지푸르(Jajpur) 지구에 속하는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는 부바네스와르에서 북동쪽으로 직선거리 60km가량 떨어져 있다. 부바네스와르를 벗어나 1958년까지 주도였던 쿠타크(Cuttack) 지나면서 교통량이 많이 늘어났지만 한적해졌다. 16 고속도로에서 파라딥(Paradip) 방향으로 53 고속도로로 바꿔 탔다가 왼쪽으로 벗어나 우리의 번째 목적지인 우다야기리에 도착했다.

부바네스와르에서 다이아몬드 삼각지대에 이르는 길.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를 구성하는 우다야기리, 라트나기리, 랄리트기리의 위치.

오리사의 불교

오리사는 불교와 오랜 관계를 맺어왔다. 불교 전승에 의하면,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대각을 이룬 49일동안 7일씩 7 자리를 옮겨가며 선정(禪定) 들었다고 하는데 선정을 마칠 때쯤 길을 찾아와 붓다에게 떡과 꿀을 올리고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귀의하여 () () 이보(二寶) 귀의한 최초의 재가신도가 되었다는 따뿟사(Tapussa, 提謂) 발리까(Bhallika, 波利)라는 상인이 바로 이곳 오리사 출신이었다.

또한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Maurya) 왕조 3 왕인 아소카(Aśoka, 산스크리트 Ashoka) 왕이 칼링가(Kalinga) 정복하면서 참혹한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정법(正法, Dharma)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轉輪聖王, chakravarti-rāja) 되면서 불교의 흥성과 전파에 크게 기여하게 계기가 되었던 칼링가가 바로 이곳 오리사였다.

붓다가 살아 있을 오리사 땅에 발을 디딘 적은 없지만 불교는 시작과 함께 이곳 오리사에서 뿌리를 내리고 번성하여 15~16세기까지는 명백을 유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7세기 초에 북인도를 지배했고 날란다(Nalanda) 승원을 중건ž확장하며 날란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바르다나(Vardhana) 왕조의 하르샤(Harsha, 戒日王, 606~647) 왕이 오르사의 일부 지역을 정복하고 우트칼라(Utkala) 캉고다(Kangoda)지역에 대한 통치를 위해 소마다타(Somadatta) 총독으로 파견했을 당시에 오리사의 불교는 상당히 번영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의 유학승 현장() 639년경 오리사 땅을 밟았던 것도 바로 때쯤이었다. 현장은 이곳을 오차국(烏茶國)이라 불렀는데 오리사의 이름 가운데 하나였던 Odra 한자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현장에 의하면, 오차국 사람들의 용모는 우람하고 얼굴색은 누렇고 가무잡잡한데 언어와 억양은 중인도와는 달랐다. 게으름이 없고 학예를 즐겨하여 대부분 불교를 믿고 있었다. 가람은 1백여 군데로, 승도는 1만여 명인데 모두 대승의 가르침을 학습하고 있었다. 천사는 50군데이며, 이도인들이 잡거하고 있었다. 스투파는 10 군데로 모두 여래가 설법했던 곳이며 아소카왕이 세웠던 것들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리사에서 불교는 8~10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시기에 현재의 오디샤 일부를 포함하여 인도 동부를 지배했던 바우마-까라(Bhauma-Kara) 왕조(736~910 AD) 통치 아래에서 불교는 국교가 되었다. 그들의 비호 하에 많은 가람들이 번영을 누렸다. 시기에는 또한 밀교(密敎, Tantricism) 많은 발전을 보였다. 랄리트기리, 라트나기리, 우다야기리에서 발굴된 다양한 대승불교의 신들도 바우마-까라 시대의 것들이다.

11~12세기 이후 인도 각지에 무슬림 침략이 증가하고 오리사에도 힌두 왕국들이 연이어 들어서면서 오리사의 여러 곳에서도 불교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이후로는 오리사에서 이상 불교가 존속하지 못하게 된다. 잦은 무슬림의 공격으로 승려들과 불교도들은 티벳과 히말라야 지역으로 탈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명맥이 끊긴 오리사 땅의 불교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갔다.

우다야기리의 발굴

그리고 세기가 흐른 , 우다야기리가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것은 1870 당시 자지푸르의 부행정관이었던 바부 찬드라세크하라 바누르지(Babu Chandrasekhara Banurji) 야생동물들이 출몰하는 깊은 정글 속에 위치한 언덕을 찾아 이에 대한 짧은 보고서를 캘커타 벵갈 아시아학회지(Journal of the Asiatic Society of Bengal)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언덕 밑에서 불상을 만났으며, 곳에서부터 계단식 우물이 있는 사이에 많은 유물들이 널려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우물에서 15m 위쪽으로 많은 유물이 산재해 있는 하나의 유적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으로 문설주와 경내에 안치되어 있던 불상을 꼽았다. 불상은 서로 다른 덩어리의 돌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명상을 하고 있는 듯한 좌상이었다고 기록했다. 그에 의하면, 상처를 받지 않은 온전한 불상은 거의 찾아볼 없었다고 했다.

바누르지의 보고서를 읽고 여기에 자극을 받은 당시 쿠타크의 행정관이었던 빔스(John Beams) 1875 현장을 방문하고 자신의 방문 보고서를 벵갈 아시아학회지 발표했다. 강들로 둘러싸여 있고 강들이 교차하는 곳이어서 접근이 매우 어려웠다고 그는 기록했다. 그는 또한 승인을 받아 쿠타크시의 공공정원에 설치하기 위해 바누르지가 언급했던 문설주를 반출했음도 언급했다.

1928년에는 당시 캘커타대학(Calcutta University) 교수였던 차칼다르(H. C. Chakaldar) 자신의 현장 방문 보고서를 모던 리뷰지(Modern Review) 발표했다. 그는 언덕 밑에 있던 연화수보살(蓮花手菩薩, Bodhisattva Padmapani) () 언급하며 불교교리 문구와 케사바 굽타(Kesava Gupta) 기부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고 했다. 바누르지가 방문했을 당시 많은 고대 유물들이 널리 산재해 있었다고 했던 보살상과 계단식 우물 사이의 공간은 다른 종파 사람들이 그들의 성전을 조성하기 위해 유물들을 무단 반출하면서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우물 위쪽에서 거대한 붓다 좌상을 발견했으며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을 시켜 땅에서 파내도록 했다. 빔스가 문설주를 반출한 남겨져 있던 구덩이를 여전히 있었다고도 기록했다.

1930년에는 당시 캘커타 인도박물관(Indian Museum, Calcutta) 책임 고고학 담당자였던 프라사드 찬다(Ram Prasad Chanda) 1927~28 기간동안 현장 방문 자신의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찬다는 박물관에 전시할 유물 수집을 위해 현장을 찾았던 것이다. 그는 지역 주민들을 통해 빔스가 문설주만 반출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조각품도 여러 점을 함께 반출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운데 점의 조각품이 쿠타크 소재 사원으로 옮겨졌으며, 가운데 열두 팔의 프라쥬나파라미타像과 강가여신像 이렇게 점은 함께 반출됐던 문설주와 함께 현재 파트나박물관(Patna Museum) 있다.

우다야기리의 불교 유적은 1870년부터 알려져 있었고 1937년부터는 인도고고학위원회(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로부터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실제 대규모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985년이 되어서였다. 대규모 발굴조사는 2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1 발굴은 1985~1989 기간에 진행되었으며 계곡의 북쪽 절반 지역에 국한되어 이루어졌다. 2 발굴은 1997~2003 기간에 진행되었으며 계곡의 남쪽 절반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차례에 걸친 대규모 발굴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낸 유물들은 우다야기리 불교 유적에 강한 금강승 전통의 영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라보살(多羅菩薩, Tara), 지세보살(持世菩薩, Vasudhāra), 아파라지타(Aparājitā), 귀자모신(鬼子母神, Hārītī), 준제보살(準提菩薩), 프라쥬나파라미타, 작명불모(作明佛母, Kurukullā), 양우리동녀(梨童女, Janguli) 이곳에서 발견된 다양한 여신상들은 금강승불교의 다양한 가르침을 나타내며 금강승이 숭배되고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우다야기리뿐만 아니라 라트나기리와 랄리트기리의 발굴로 수많은 조각품, 불상, 파편들, 석판, 도기류, 동전, 진흙판, 스투파 엄청난 양의 유물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발굴로 사람들은 현장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묘사했으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없었던 푸시파기리(Pushpagiri, 波祇釐) 승가람이 발견된 것으로 생각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다이아몬드 삼각지대를 이루는 곳의 유적군이 바로 푸시파기리라는 가설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1996~2006년의 기간 동안 진행된 랑구디(Langudi) 언덕에 대한 고고학 발굴 과정에서 pupa sabhar giriya라는 명문(銘文) 발견되면서 날란다, 탁사실라(Takshashila), 비크람실라(Vikramshila) 등과 비견되는 고대 불교대학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우다야기리의 입구

우리의 번째 목적지 우다야기리가 위치한 아시아(Assia) 산맥의 가장 동쪽 끝자락에 도착한 우리 일행의 앞에는 푸른 초원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초원을 나지막한 언덕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었는데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언덕은 U 모양으로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동쪽을 향해 열려 있어 해가 때면 U 계곡 곳곳에 따스한 햇살이 비친다. 그래서인지 언덕의 이름이 떠오르는 태양의 언덕, 우다야기리가 되었나 보다.

U자형 우다야기리 계곡 내에 펼쳐져 있는 승원1과 승원2 구역.

U자형 계곡은 남과 북으로 이등분된다. 부분 가운데 북쪽에는 우다야기리 승원1(Udayagiri Monastery No. 1) 마하스투파(Mahastupa) 위치한다. 그리고 남쪽 부분에는 우다야기리 승원2(Udayagiri Monastery No. 2) 차이트야그리하(Chaityagrha, 사리탑실) 있다. 우다야기리의 대부분의 봉헌탑들은 차이트야그리하 주변에 산재해 있다.

나무가 늘어선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금방 이곳의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불상들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곳에 도달한다. 라트나기리와 랄리트기리와는 달리 이곳에는 현장 박물관이 없다. 아직 추가로 발굴이 필요한 지역이 많아 남아서인지 아니면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조각품들은 작품성이 떨어져서 인지는 수가 없었다. 전시되어 있는 조각들을 하나씩 둘러보던 가운데 하나가 발길을 붙잡았다.

이 관음보살상의 양손은 모두 떨어져 나가고 없지만, 남아 있는 부분과 우다야기리의 다른 구역에서 발견된 유사한 관음보살상을 봤을 때 여원인(與願印, Varada mudra)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오른팔을 길게 아래로 늘어뜨리고 손가락을 펴서 바깥으로 향하도록 하고 있으며 왼손은 어깨 높이로 올리고 연꽃 줄기를 잡고 있는 모습으로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고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주겠다는 표시이다.

이 구역의 입구에 세워져 있던 관음보살(觀音菩薩, Avalokiteśvara) 상이다. 밀교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왼손에 들고 있는 연꽃은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불성(佛性) 갖추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어, 像을 지나 승원으로 들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번뇌망상에 물들지 않고 장차 피어날 불성을 갖추고 있음을 상기시키려는 듯했다. 발견 당시 가슴 부위에서 동강이 상태였으나 지금은 흔적은 남아있으나 하나로 이어져 있다.

야외에 불상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뒤에 현장 관리사무소 같은 건물이 있고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상주하고 있다.
우다야기리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불상들이 이곳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

계곡의 북쪽 지역, 승원1 구역

이곳에서 서쪽 방향으로 나무가 늘어선 길을 계속 따라가면 1 발굴 작업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우다야기리 승원1 구역이 나타난다. 승원1 구역에 도착하여 반달 또는 연꽃 문양의 계단을 올라서면 제일 먼저 우뚝 솟은 마하스투파를 마주한다. 스투파는 바닥이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변이 10m 된다. 바닥은 기초에서 연장되어 사람들이 탑돌이를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스투파의 높이는 원래 9m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뒤에 우다야기리 정상을 배경으로 서있는 현재 4.8m 높이의 벽돌 스투파는 방향으로 깊게 감실(龕室) 만들어져 있으며 인도 밀교의 5선나불(Dbyani-Buddha) 상들이 모셔져 있어 만다라(Mandala) 위에 구현된 듯했다: 중앙에 대일여래, 동쪽에 아축(, Akshobhya)여래, 남쪽에 보생(寶生, Ratnasambhava)여래, 서쪽에 아미타(Amitabha)여래, 북쪽에 불공성취(不空成就, Amoghasidhi)여래. 스투파의 부분은 훼손되어 있었으며 수미산 정상의 천계(천계) 상징하는 하르미카(harmika) 차트라(chhatri) 발견되지 않았다.

연꽃 또는 반달 문양의 계단 위로 우다야기리 언덕을 배경으로 마하스투파가 서 있다.
마하스투파의 네 방향으로 감실이 깊게 설치되어 있고 주변에는 탑돌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마하스투파를 지나치면 우다야기리 정상을 항해 느리게 오르막으로 공지가 나타난다. 공지 여기저기에는 아직도 유물들이 널브러져 있다. 아마도 발굴 당시 가치를 크게 인정받지 못한 것들인가 보다. 그리고 공지를 지나 가장 자리로 올라가면 정사각형(35mx35m) 벽돌 승원1 동향으로 앉아 있다. 승원의 실제 이름이 새겨진 문장(紋章) 발굴 과정에서 여러 차례 발견되었다. 승원의 이름은 마드하바푸라 마하비하라(Madhavapura Mahavihara)였다.

마하스투파와 승원1 사이의 공지에는 여전히 유물들이 널려 있었다. 훼손이 심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아마도 가치가 많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된 모양이었다.
공지 가장자리에 서 있는 네 팔의 관음보살상의 모습. 아래로 떨어뜨린 오른손 하나는 활짝 펴서 앞으로 향하고 있고 다른 오른손 하나는 염주를 쥐고 있다. 떨어져 나간 왼손에는 활짝 핀 연꽃이 쥐어져 있었을테고 다른 왼손 하나는 물병을 쥐고 있다.

승원1 중앙에 개방된 정사각형의 중정(中庭) 또는 안뜰이 있고 이를 21개의 개별 수련실이 둘러싸고 있는 차투-살라(chatuh-sala) 양식으로 지어졌다. 그리고 승원의 출입구는 동쪽으로 있으나 출입문과 문틀은 빔스가 다른 문설주를 반출했던 것처럼 누군가가 가져간 것인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훼손된 것인지 수는 없으나 사라지고 없었다. 승원은 1 일부가 아직도 남아 있다.

우다야기리 승원1의 전경.
승원의 가장자리에는 개별 수련실이 배치되어 있다. 개별 수련실을 배정 받은 승려들은 각 방에서 기거를 하며 득도를 향한 정진에 매진했을 것이다.

승원의 안쪽 벽에는 미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출입구가 설치된 신전이 있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문설주의 쪽에 9개의 미려한 불상과 불교 신상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었다고 했으나 현재는 자리에 이들 불상과 신상들이 없었다. 문설주 위부분에는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고, 좌우로는 칼을 들고 날아 다니는 지명행자(持明行者, Vidhyadhara)들이 보위하고 있다. 그리고 문설주의 아래 부분에는 수호신 드바라팔라(Dvārapāla) 뱀신 나가(Naga) 신전을 지키고 있다.

승원의 서쪽 벽에는 신전(불전)이 위치하고 있으며,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문설주가 눈길을 끌었다.
문설주 위부분의 조각 모습. 아래 부분 중앙에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고, 그 좌우로는 칼을 들고 날아 다니는 지명행자들이 보위하고 있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신전 내부에서 붓다, 지세보살 8개의 신상들이 발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신전 내부에는 다섯 개의 신상만이 남아 있다. 신전의 중심 불상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Bhumisparsha Mudrā) 자세로 금강보좌에 앉아 있는 붓다像으로 개의 서로 다른 석재로 만들어져 있다. 붓다의 뒤편 왼쪽에는 보관(寶冠) 지권인(智拳印, Bodhyangi Mudrā) 자세의 대일여래(大日如來, Mahāvairocanna Tathāgata)像이 있고 오른쪽에는 잠발라(Jambhala)像이 있다.

신전 내부의 모습. 중앙에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는 순간 붓다의 모습이 있고, 그 뒤 좌우에는 각각 대일여래와 잠발라가 배치되어 있다. 중앙의 붓다像은 세 개의 서로 다른 돌로 만들어진 모습이 선명히 보인다.

그리고 붓다상의 앞쪽으로 양편에는 각각 금강저(金剛杵, vajra) 오른손으로 잡고 가슴에 대고 있는 금강살타보살(金剛薩菩薩, Vajrasattva) 머리 부분이 훼손되고 전법륜인(轉法輪印, Dharmachakra Pravartana Mudrā) 자세를 하고 있는 다른 대일여래像이 배치되어 있다. 대일여래像이 앉아 있는 기단에는 전법륜인과 어울리게 초전법륜이 있었던 사르나트의 녹야원을 상징하는 법륜과 사슴이 조각되어 있다.

마하스투파와 승원1 7세기경에 건립되었으며, 승원은 7~12세기에 4차례에 걸쳐 건립ž증축이 진행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승원1 구역이 버려진 뒤에는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인도의 많은 고대 건축물들이 겪었던 운명처럼 지역민들이 건축물로부터 벽돌과 돌을 가져갔으며, 결과로 남아 있는 건축물의 높이도 각각이다. 군데군데 전체가 사라진 곳들도 있다.

승원 너머 북서쪽으로 정상 부근의 언덕이 돌출된 곳에 관음불, 작명불모(作明佛母, Kurukullā) 등의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고 근처에는 동굴도 하나 있다고 하는데 현재 그곳에 접근할 있는 길이 여의치 않아 눈앞에 두고 보질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계곡의 남쪽 지역, 승원2 구역

승원1 구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2 발굴로 모습을 드러낸 우다야기리 승원2 구역이 있다. 남동쪽 방향으로 직선거리 250m 떨어져 있다. 여기에는 심하프라스타 마하비하라(Simhaprastha Mahavihara)라는 이름을 가진 승원2 있다. 불상들이 야외에 전시된 곳까지 가지 않고 바로 승원2 있도록 중간에 다른 오솔길이 나무들 사이로 있다.

승원1과 승원2 사이의 오솔길.

심하프라스타 마하비하라는 원래 2 구조의 벽돌 건물이었으며 개별 수련실로 둘러싸인 중앙의 정사각형 중정(中庭) 또는 안뜰이 있는 차투-살라 양식으로 지어졌다. 13개의 개별 수련실이 4면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남쪽에 4 그리고 나머지 3 면에는 각각 3개의 수련실이 있었다. 수련실에는 개의 벽감(壁龕) 있었는데, 하나는 램프를 놓는 곳이었고 다른 곳은 개인이 숭배하는 신상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벽감의 크기에 맞는 신상들이 발견되어 같은 견해를 뒷받침한다.

승원2 출입구는 북쪽으로 있으며, 거대한 출입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출입구의 측면 벽에는 수호신들을 모시는 벽감이 설치되어 있었다. 동측 벽감 안에는 원래 자리에서 발견된 귀자모신이 여전히 모셔져 있다. 서측 벽감은 상당 부분 파괴되었으며 신상도 없는 상태이다. 찬다가 캘커타 인도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수집해 유물 가운데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 Vaiśravaa) 벽감의 주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 그는 신상이 비사문천왕이 아니라 잠발라라고 확인하고 있다.

위 부분에 검게 그을린 듯한 유적이 아래의 차이트야그리하 구역에서 바라본 승원2의 모습이다.
승원2의 내부 모습.

유아보호를 상징하는 귀자모신이 승원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당나라의 유학승 의정(義淨)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원래 사악한 야차녀(夜叉女) 왕사성(王舍城) 와서 아이를 잡아먹곤 하였다. 붓다가 그를 제도하기 위하여 그의 500명의 자식들 가운데 아들을 숨겨 놓자, 야차녀는 비탄에 빠져 슬피 울었다. 이때 다른 부모의 슬픔을 상기시켜 주는 붓다의 설법을 듣고 불교 귀의하여 안산(安産) 유아보호의 서원(誓願) 하였다고 한다. 앞으로 자신의 아이들을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하느냐는 질문에 붓다는 비구들이 머무는 모든 승원에서 그의 자식들은 충분한 음식을 제공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이유로 팔로 아이를 안고 있거나 무릎 주변에 여러 명의 아이를 데리고 있는 모습의 귀자모신像이 모든 인도 승원의 현관이나 식당 구석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승원2의 신전은 특이하게도 벽에서 돌출되어 있고 신전 주변을 돌 수 있도록 보행로가 설치되어 있다.

승원의 중심 신전은 남쪽 중앙에 위치한다. 신전 둘레에는 신전 둘레를 있는 보행로가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은 오리사의 다른 승원에서는 없는 것으로 이곳에서만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신전의 문설주는 빔스가 반출했으며 현재 파트나박물관에 설치되어 있다. 신전 내부에는 항마촉지인 자세로 2.6m 높이의 붓다像이 앉아 있다. 불상은 여러 개의 석재 덩어리로 만들어졌다.

신전의 천장이 훼손되고 남아 있지 않아 고요한 산속에서 문설주 틀을 통해 만나는 붓다의 모습은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신전 너머로 보이는 2층도 신전(불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전 뒤의 남쪽 위에는 2층에 하나의 방이 있다. 방에는 돌로 만든 받침대가 하나 있으나 위에 모셔져 있던 신상은 사라지고 없다. 승원2 황금기는 대부분 바우마-까라 왕조의 지배하에 있던 8~10세기였다. 바우마-까라 왕조가 지나고 10세기의 마지막 2~30년동안 승원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12세기 초가 되면 모두 떠나고 승원은 완전히 버려진 곳이 되었다. 승원의 남쪽 담장에서 가까운 곳에서 넓은 저수지가 발굴되기도 했다.

승원2 북서쪽에는 신전단지(Shrine Complex) 위치한다. 한가운데에서 땅에 서있는 상당히 규모의 관음보살像이 눈에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신전단지의 출입구는 동쪽으로 있으며, 동쪽을 제외한 방향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단지 내에는 신상을 모시기 위한 여러 개의 돌출된 방들이 발견되었다. 남쪽과 북쪽 구석에 방이 각각 하나씩 있고, 북쪽 벽에 다른 개의 방이 위치한다.

신전단지 한 가운데 서서 한 몸에 주목을 끌고 있는 네 팔의 관음보상像.

머리에 보관은 팔의 관음보살은 또한 로케슈바라(Lokeśvara) 확인되었는데 무릎, 허리, 어깨에서 세번 굽히기(tri-bhanga)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른손 하나는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으며, 하나의 오른손은 염주를 쥐고 있다. 왼손은 각각 활짝 연꽃과 물병을 잡고 있다. 머리 보관에는 작은 아미타불이 새겨져 있다. 뒤의 석판 가장 부분에는 과거칠불이 차례로 앉아 있고, 관음보살 머리 부분 양쪽의 동굴에는 각각 선재동자(善財童子, Sudhana Kumāra) 브리쿠티(Bhkuī)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석판의 아래 부분에는 좌우에 다라보살과 마두관음(馬頭觀音, Hayagrīva) 자리하고 있다.

관음보살像 뒷면에는 사리가 들어있는 스투파 건립을 언급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스투파는 아마도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 蓮花生) 사리가 들어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신전단지의 서측에서 발굴된 바로 스투파인 것으로 보인다.

승원2 구역. 왼쪽으로 차이트야그리하가 위치하고 똑바로 앞으로 나아가면 승원2가 있다.

승원2 북동쪽에는 차이트야그리하가 있다. 차이트야그리하가 있는 구역으로 들어서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많은 사리탑과 봉헙탑들이다. 우다야기리에서는 어느 곳보다 많은 다양한 돌과 벽돌 스투파들이 차이트야그리하 근처에 몰려 있다. 차이트야그리하는 동쪽을 향하여 자리 잡고 있으며, 차이트야그리하 자체보다 오래된 석대(石臺) 위에 건립되었다. 석대는 명문이 새겨진 사리함을 보면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차이트야그리하는 3세기경에 건립되었다.

차이트야그리하 근처에는 다양한 사리탑과 봉헌탑들이 몰려 있다.
승원2 구역 여기저기에도 유물들이 발굴된 곳에서 방치되고 있었다.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유물들이 박물관 등지로 옮겨 보관되든지 아니면 원래 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체계적인 복개수로가 사용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아마도 하수가 처리된 수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차이트야그리하 인근의 봉헌탑. (왼쪽); 계단식 우물. 계단을 내려가면 지금도 물이 있지만 현재는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물은 더러웠다. (오른쪽)

승원2에서 일정을 마치고 우다야기리의 출입구를 향해 언덕을 내려오다 보면 불상들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곳에 도달하기 조금 전에 돌을 깎아 만든 계단형 우물을 만난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암반에 이르게 된다. 이곳 승원에 머물던 승려들이 이곳에서 물을 길어다 사용했을 것이다. 우물 주변으로는 축대가 둘러져 있고, 입구 앞에는 기둥 개가 있다. 입구의 오른쪽 벽과 가장 아래 계단에 있는 아치에 우물이 라나카 바즈라나가(Ranaka Vajranaga) 봉헌물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은 아니어서 고요한 분위기에서 차분하게 살펴볼 있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과 순례객이 아직 그리 많지 않고, 부바네스와르에서 당일 여행이 가능해서인지 관광시설 등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라트나기리를 향해서 다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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