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쿠시나가르, 붓다의 반열반지

그러니, 아난다여,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된다(自燈明法燈明).”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우리 일행이 석가모니 붓다가 열반에 땅에 도착한 것은 늦은 밤이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잠시 작은 가게들이 줄지어 불을 밝히고 있는가 싶더니 차창 밖은 금새 칠흑 같이 어두워졌다. 호텔에 닿을 때까지 어두움은 계속되었다. 어두움은 뭔가 도시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듯했다. 대충 정리하고 침대에 누워서야 내가 지금 붓다의 열반의 , 붓다 당시에는 쿠시나라(Kusinārā) 불렸던 쿠시나가르(Kuśinagar, 拘尸那伽羅)에서 몸을 누이고 있다는 생각에 잔잔한 감동이 밀려 왔다. 이곳에 당도하여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 가죽끈으로 묶어 겨우 끌고 가는 수레처럼 노쇠하고 병든 몸을 모로 뉘였을 붓다를 생각하면 이렇게 침대에 편히 누워 있다는 사실이 송구스러워졌다. 그러나 시간을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피곤해진 몸은 금새 잠에 빠져들었다.

이른 아침 눈을 떴으나 아직 피곤이 가시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서둘러 붓다의 열반지로 향하고 싶은 마음에 재빨리 준비를 마치고 식당으로 갔다. 이른 아침시간이었으나 벌써 무리의 순례객들이 아침식사를 마쳤고, 마지막 남은 명도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 중이었다. 베트남에서 순례객들로 이곳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룸비니(Lumbini) 향해 출발할 거라고 했다. 식사 전에 이미 체그아웃을 오면서 보니 로비에 짐을 모두 모아놓고 있는 걸로 보아 오늘도 길을 가기 위해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는 걸로 보였다. 우리 일행도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호텔을 나섰다.

 

쿠시나가르 주변 지역 지도

붓다의 반열반과 사리 분배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길은 한산했다. 걸어서 그랬나 싶을 정도로 금방 열반당(涅槃堂, Nibbāna Temple)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사원을 관리하는 직원과 총을 경찰들이 함께 지키고 있었다. 전해에 있었던 보드가야 폭발사고의 여파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며 사원에 들어섰다. 깨끗하게 관리된 경내엔 나무들과 벽돌 유적들 너머로 특이한 모습의 열반당이 눈에 들어왔다. 파바(Pava, 波婆)에서 춘다(Cunda, 純陀) 대접한 음식을 드시고 병을 얻은 붓다는 심한 설사 증세를 보이며 땀과 피가 엉겨 흥건히 적신 맨발로 멈추지 않고 걸어 이곳에 당도하였다.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걸어왔을 길은 고되고 고된 길이었으리라. 붓다가 이곳에 당도하였을 때에는 사라나무(shorea robusta, 보통 śāl tree, 沙羅樹) 숲이었다고 했는데, 지금 이곳은 숲이라기 보다는 정돈된 정원이나 공원에 가까웠다.

 

열반당 경내 지도

지금은 사라나무 숲이 사라지고 열반당 앞에 그루만 덩그러니 있다. 이곳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붓다를 기념해 심어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7세기에 이곳을 찾은 현장은 쿠시나가르 서북쪽 강을 건너면 사라나무 속에 열반상이 있는 집이 있다고 보면 당시만 해도 사라나무 숲이 건재했던 모양이다. 열반당은 어른 키보다 훨씬 높은 2.74m 벽돌로 만든 () 위에 남북으로 길게 앉아 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직사각형의 단층 건물 위에 눕힌 원통을 올려 놓은 모양이어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원통에는 앞면과 옆으로 커다란 둥근 유리창이 있어서 실제로는 단층인 열반당의 내부에 충분한 채광을 제공한다.

 

중앙에 잎이 거의 없는 쌍의 나무가 사라나무들이다. 지금은 주변에 사라나무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오른쪽에 열반당이 있고 왼쪽이 열반탑이다. 한창 보수작업이 진행중이다.

열반당은 칸으로 이루어진 사원이다. 그리고 중앙에는 북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붙이고 잠자는 사자처럼 발을 포개고 누우셨다고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āparinibbāa Sutta) 기록된 그대로의 열반상(涅槃像) 있었다. 발을 들여놓는 순간 경건하고 무거운 공기가 느껴졌다. 나는 한동안 그냥 여기에 있고 싶다고 했더니 샨텀이 원하는 만큼 있다가 가자고 했다. 들어가서 왼쪽에 벽을 등지고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그리고는 노란 가사를 입고 비스듬히 누워있는 붓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가끔은 다양한 방식으로 경배를 드리는 순례객들을 관찰하며 한동안 움직이지도 않고 그대로 있었다.

 

쿠시나가르를 지나가는 28 고속도로의 모습

쿠시나가르는 도시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보잘것없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붓다가 이곳에서 열반에 들겠다고 하자 아난다(Ānanda, 阿難陀) 참파, 라자가하, 사와티, 사케다, 코삼비 그리고 베나레스 같은 도시에서 열반하시라고 붓다에게 청했던 걸로 봐서 붓다가 살았던 시대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같다. 붓다 시대에 쿠시나가르는 고대 북인도 16대국 가운데 하나였던 말라(Malla, 末羅) 공화국의 수도였으나 정글 지역에 있던 조그마한 마을에 불과했다. 지금도 이곳을 지나는 28 고속도로만 아니었으면 접근이 쉽지 않은 오지로 남았을 것이 틀림없다.

 

쿠시나가르의 인근에서 쉽게 있는 길상초(Kusa). 쿠시나가르의 고대 이름인 쿠사와티(Kushawati) 지역에 길상초가 많이 자라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붓다는 45년간의 설법을 끝내고 고향인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迦毘羅衛)에서 입적하기 위해 왕사성(王舍城, Rājagaha) 독수리봉에서 출발하여 고향으로 가던 길에 이곳 쿠시나가르의 사리쌍수 아래서 반열반(般涅槃, parinibbāna) 드셨다. 열반(涅槃)이란 산스크리트어 nirvāa(빨리어 nibbāna) 음역인데, 본뜻은 불어서 끄는 또는 불어서 꺼진 상태 뜻한다. 마치 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버리듯이 타오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와 고뇌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부파불교(部派佛敎) 이르러 석가모니 붓다에 대한 이상화·신격화가 진행되면서 열반에 대한 생각도 변하여 수행자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완전한 열반을 체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세상에 생존하는 동안 도달한 열반은 불완전한 유여열반(有餘涅槃), 뭔가 찌꺼기가 남은 꺼짐이며, 사후에 비로서 완전한 상태의 무여열반(無餘涅槃), 찌꺼기가 남지 않은 완벽한 꺼짐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 pari) 완벽하다는 의미로 반열반은 무여열반을 가리킨다. 이것은 윤회(輪廻, Sasāra), (, karma), 환생(還生)에서 자유로워지며 (, skandhas) 해체를 통해 해탈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붓다의 반열반은 보통 기원전 487~483년에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으나, 남방불교권에서는 기원전 544~543년으로 보고 있다. 열반 직후, 붓다의 사리(舍利, śarīra) 차지하려고 주변 여덟 나라 사이에 무력 충돌의 징후가 보이자,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사리는 8등분하여 각기 배분되었다(舍利八分 또는 八王分骨). 이렇게 배분된 사리는 여덟 지역에서 사리탑으로 조성되어 근본팔탑(根本八塔) 형성했으며, 후에 아쇼카왕에 의해 많은 지역으로 나뉘어 전파되면서 지속적인 불탑 건립의 시초가 되었다. 근본팔탑 이외에도, 붓다 사리의 균등 분배를 중재하여 충돌을 예방하는데 기여했던 바라문 도나(Dona) 처음 사리를 담았던 항아리를 받아 병탑을 조성하였고 늦게 도착하여 사리를 받지 못한 삡팔리숲(Pipphalivana) 모리야족(Moriyas) 다비(茶毘, jhāpeti)하고 남은 재를 얻어 회탑을 조성하여 모두 10개의 불탑이 만들어졌다고 전한다.

 

말라족이 수습한 붓다의 사리를 두고 전운이 감도는 장면, 산치대탑의 스투파1 남문.

말라국의 말라족도 자신들의 8등분을 받아 이곳에 사리탑을 건립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에 아쇼카왕이 이곳을 찾아 붓다의 반열반지를 기념하는 탑을 쌓고 석주를 세워 활기를 불어넣었다. 굽타(Gupta) 시대(4~7세기) 왕들이 열반탑과 반열반지를 크게 확장했으며, 시기에 사원이 건립되고 열반상이 모셔졌다. 현재의 열반상 기단에는 열반상이대승원(Mahavihara) 비구 하리발라(Haribala) 기부이며 디나(Dinna) 조각했다 기록한 5세기 명문이 새겨져 있다. 1500 전에 만들어진 열반상은 길이가 6.1m이며 마투라(Mathura) 지역에서 가져온 붉은 사암 덩어리를 이용해 만들어졌다.

현장에서 발견된 10~11세기의 명판에 의하면, 이때까지도 붓다좌상이 안치된 승원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쿠시나가르는 전반적으로 명성과 중요도에 있어 크게 부각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637년에 이곳을 방문했던 현장은 벽돌로 만든 정사 안에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누워 있는 붓다의 열반상을 보았다. 옆에 기단은 허물어져 기울고 있는 200 ( 65m) 높이의 아쇼카왕이 세운 스투파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옆에 돌기둥이 있고 붓다가 적멸한 사적이 적혀 있으나 적멸한 날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라고 걸로 봐서 현장의 방문 당시엔 아쇼카 석주가 여전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8세기에 혜초가 쿠시나가르에 당도했을 때에는 성이 이미 황폐해져서 사람 사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비구들이 아쇼카왕이 세운 탑만을 근근이 관리하는 정도였으며, 주위 사방으로 사람이 가지 않는 곳에 거칠게 우거진 숲이 있어 탑으로 예배를 하러 가는 자들이 무소나 호랑이에게 해를 입기도 한다고 기록했다. 또한 인도의 다른 불교성지들과 마찬가지로 12세기 이슬람교도들의 침입 크게 훼손되었으며 남아있던 비구들마저 도망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쿠시나가르의 발굴

쿠시나가르가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것은 19세기가 되어서였다. 지역을 조사한 프란시스 부캐넌 해밀턴(Francis Buchanan Hamilton) 고고학 유적에 대해 처음 언급한 것은 1854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곳이 붓다의 열반지인 쿠시나가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당시 지역은 카시아(Kasia) 불리고 있었고 쿠시나가르와는 언어학적으로 관련이 적었기 때문에 둘을 연결해서 생각하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둘의 연계 가능성을 제기한 사람은 호러스 헤이먼 윌슨(Horace Hayman Wilson)이었다.

이러한 정보를 가지고, 1861~1862 이곳을 조사한 알렉산더 컨닝햄(Alexander Cunningham) 현장과 법현 등의 중국 승려들이 기록한 다른 성지에서 쿠시나가르까지의 거리와 방향이 카시아까지의 거리 방향과 일치한다는 것을 근거로 쿠시나가르와 카시아가 동일한 장소라고 보고했다. 컨닝햄은 또한 죽은 왕자의 요새(Mathá-kuär-ka-kot)라고 불리는 스투파가 바로 붓다가 반열반에 들었던 장소일 있으며, 붓다의 법체를 다비했던 장소가 바로 데비스탄(Devisthán)이라 불리는 스투파와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다. 죽은 왕자의 요새는 마타쿠아르사원(Matha Kuar Shrine)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안에는 서기 90~10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붓다좌상이 있다. 데비스탄스투파는 람바르스투파(Rambhar Stupa)라고 불리고 있는데, 이곳은 붓다의 다비장(茶毘場)으로 여겨지고 있다.

컨닝햄의 지시에 따라, 그의 조수였던 칼라일(A.C.L. Carlleyle) 1876 본격적인 발굴에 착수했다. 그는 열반탑, 열반당, 열반상을 발견했고 연대를 추정함으로써 쿠시나가르의 발굴에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열반당의 벽돌이 아쇼카왕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것을 밝혀냈고, 폐허 상태 속에 남겨진 형태를 바탕으로 열반탑과 열반당을 복원해냈다. 칼라일의 뒤를 이어, 1904~1907년에는 필립 보겔(Jean Philippe Vogel) 추가적인 발굴을 진행했고, 1910~1912년에는 히라난다 사스트리(Hirananda Sastri) 추가적인 발굴을 진행했다. 발굴작업이 끝날 때마다 증거들이 수집, 분석, 비교되면서, 마침내 1912 쿠시나가르는 붓다의 반열반지로 확인되었다.

열반당

1903 찬드라 스와미(Chandra Swami)라는 미얀마 승려가 인도로 건너와 열반당을 종교활동을 영위하는 사원으로 되살렸다. 지금의 열반당은 불멸 2500 주년을 기념해 1956 인도 정부에서 순례객들이 모이고 열반상 주변을 있도록 열반당과 열반탑이 앉아 있는 단을 개축하면서 함께 넓게 건립한 것이다. 그렇지만 순례객들이 몰리는 성수기를 감당하기에는 여전히 좁아 보였다. 발굴 과정에서 원래의 열반당은 길쭉한 형태의 참배관과 대기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입구는 서쪽을 향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폐허더미 속에서 표면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는 벽돌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지금의 열반당 지붕 부분과 그리 다르지 않은 원통의 아치형 지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열반당의 정면 모습

열반당에 앉아 있는 동안 조금 특이한 점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동남아 출신인 듯한 스님 분이 마치 관리인인 입구 근처에서 서성였다. 순례객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조용히 샨텀에게 물어봤다. 그는 미얀마 스님으로 열반상 앞에 놓인 시주함을 관리하고 시주돈을 챙겨가기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고고학조사위원회(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에서 관리하고 있는 역사유적지 내에서 외국 사찰이 시주함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 처음에는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이곳에 미얀마인들이 열반당을 되살려 오랜 기간 동안 종교활동을 영위해 점을 들어 대법원이 그들의 종교적 권리를 인정해 줬다고 한다. 담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미얀마사원에서 바로 열반당으로 있는 옆문도 폐쇄할 없도록 했다. 순례객들이 이러한 사정도 모르고 시주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조금 불편하기도 하지만, 시주돈이 어느 주머니로 들어가든 상관없이 어차피 순례객들은 붓다에게 시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반당 측면의 모습

 

열반당과 열반탑의 모습

지금 열반당에 모셔져 있는 열반상은 칼라일이 1876년에 열반당에서 1.5 동쪽에 있는 히란냐바티(Hiranyavati, 熙連禪河) 강바닥에서 심하게 훼손된 상태로 찾아냈던 열반상을 복원한 것이다. 발견 당시에는 열반상이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파손되어 있는 상태였으나, 조각들을 주워 모아 열반상과 기단은 거의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며, 1956 불멸 2500 주년을 기념해 미얀마 불자들이 다시 금칠을 했다.

 

머리 위에서 바라본 열반상의 모습에는 병들고 노쇠한 몸을 이제 겨우 뉘인 고단함이 묻어나는 듯했다.

 

발치에서 바라본 붓다의 모습에서 모든 것을 뒤로한 평온함이 느껴진다.

 

열반상은 자체로 가사를 입고 있는데 순례객들은 매일 벌의 가사를 입히고 있다.

6.1m 열반상은 돌로 만든 7.3m 길이의 침상 위에 누워있다. 침상의 옆면에는 3명의 인물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열반상의 무릎 부분에 조각되어 있는 인물은 누가 봐도 아난다 존자임을 있다. 붓다의 열반이 다가오자 슬픔에 이겨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대반열반경에 묘사된 그대로였다. 붓다의 머리 근처에는 쿠시나라 출신의 붓다의 제자로 비구들의 숙소 배정을 담당했던 다바 말라(Daba Malla), 중앙에는 붓다가 쿠시나라에서 열반에 들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로 받아들였던 유행승(遊行) 수밧다(Subhadda, 須跋) 조각되어 있다.

 

정면에서 바라본 열반상, 위키피디아.

 

열반상의 돌로 만든 침상 면에 새겨진 인물

그러나 다바 말라와 수밧다에 대해서는 그들이 이곳에 조각되어 있는지 수긍이 쉽지 않았다. 붓다의 머리맡에 조각된 인물은 붓다에게 마지막 공양을 올렸던 춘다라거나 코살라(Kosala, 拘薩羅) 파세나디(Pasenadi, 波斯匿) 왕의 왕비 말리카(Mallika, 末利)라는 설도 있고, 중앙에 조각된 인물은 열반상을 기증한 하리발라라는 추정도 있다. 머리맡에 조각된 인물은 붓다가 마지막 여정에서 갑자기 병을 얻어 입적하는데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던 춘다가 붓다의 법체 앞에 무릎을 끓고 송구함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모습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과연 자리에 어울릴까에 대해서는 역시 머리가 갸우뚱해졌다.

열반탑

열반당을 나와 2.74m 높이의 위에서 뒤로 돌아가면, 열반당 바로 뒤쪽에 붓다가 사라쌍수 가운데에서 반열반에 들었던 바로 자리에 건립되었다는 열반탑(涅槃塔, Nibbāna Stupa) 우뚝 있다. 거대한 벽돌탑은 현재 높이가 땅에서 19.81m이다. 7세기에 이곳을 방문해 현장이 봤다고 기록했던 기단은 이미 허물어져 기울고 있는 200 ( 65m) 높이의 아쇼카왕이 세운 스투파가 바로 탑이었는지는 수가 없다. 1876 칼라일이 발굴했을 당시에는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으나, 1927년에 미얀마 스님들의 도움으로 복원되었다.

 

열반탑은 현장이 보았을 때보다 많이 낮아 있었다.

1910 추가발굴 당시, 탑의 정상 중심부에서 수직으로 갱도를 들어갔으며, 부분에서 표면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는 벽돌들과 자야 굽타(Jaya Gupta) 왕의 구리동전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아래에는 작고 둥근 벽돌 방이 있었는데, 안에서는 붓다의 사리가 이곳에 안치되었다는 고대 브라미어(Brahmi) 명문이 새겨진 동판과 함께 구리로 만들어진 용기가 발견되었다. 또한 5세기 굽타왕조의 황제였던 쿠마라굽타 1(Kumaragupta I, 415~455) 구리동전들이 담겨진 다른 용기 하나가 함께 발견되었다.

열반탑 뒤에는 벽돌 기단부만 남아 있는 아난다스투파가 있다. 내가 이곳을 찾을 때마다 우연이겠지만 인부들이 보수작업을 하고 있었다. 아난다스투파라고 불리는지, 아난다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을 아직은 만나지 못했다. 붓다의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지켰던 아난다가 스투파가 되어서라도 자리를 지키는 것이 당연해 보이기도 하면서 가슴 한끝이 찡해 왔다.

 

열반탑 뒤쪽에 있는 아난다스투파

마타쿠아르사원

열반탑에서 남서쪽으로 300m 거리에 마타쿠아르사원(Matha Kuar Shrine) 있다. 사원은 컨닝햄이 이곳이 붓다의 반열반지인 쿠시나가르임을 확인하면서 붓다가 반열반에 들었던 바로 장소일 있다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조그마한 사원 건물 안에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 마라(Māra)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극적인 순간을 묘사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Bhūmisparśa Mudrā 또는 'earth witness' mudra) 자세로 앉아 있는 3.05m 높이의 청회색 사암으로 만들어진 붓다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곳은 원래 열반당의 부속 승원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붓다상은 1876 칼라일이 발견했으며, 1927 미얀마 신자들이 붓다가 마지막 설법을 곳에서 행하였다는 믿음으로 1000 전에 만들어진 붓다상을 보호할 있도록 사원 건물을 건립했다.

 

마타쿠아르사원의 모습

람바르스투파와 붓다가트

마타쿠아르사원에서 동쪽으로 1.7㎞쯤 가면 붓다의 법체가 다비된 장소인 람바르스투파(Rambhar Stupa) 나온다.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붓다의 법체는 마지막 가시는 길에 많은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이곳까지 옮겨졌다. 이곳은 원래 말라족이 선조의 영혼을 모신 사당인 영묘(靈廟) 있던 곳으로 말라족 왕의 즉위식이 열리던 마꾸따-반다나(Makua-Bandhana)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다비탑은 붓다의 다비식이 있고 얼마 후에 말라족이 조성했으며, 기원전 3세기에 아쇼카왕이 그리고 서기 5세기에는 쿠마라굽타 1세가 위에 다시 크게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컨닝햄이 1861~1862년에 지역을 조사하러 왔을 , 이곳은 구릉이었다. 이후 이어진 발굴에서 커다란 언덕 아래에 숨겨져 있던 다비탑과 함께 불교 게송(偈頌) 새겨진 많은 수의 진흙 문장(紋章)들이 함께 발견되었다.

2600 붓다의 법체를 화장하기 위해 높이 쌓아 올려졌을 장작더미 대신 지금은 벽돌로 쌓아 올린 15m 높이의 커다랗고 둥근 스투파가 순례객들을 맞이한다. 기단부에서의 직경은 47.24m이다. 마하가섭(摩訶迦葉, Mahākassapa) 화장용 장작더미를 오른쪽으로 돌아 스승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린 것처럼 순례객들도 스투파를 오른쪽으로 돌며 붓다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많은 순례객들이 남긴 , 사람의 손길이 닿을 만한 높이까지는 스투파의 벽돌 여기저기에 금박이 입혀져 반짝거리고 있었다.

 

붓다의 다비장에 만들어진 람바르스투파

 

사람들의 손길이 닿을만한 벽돌 여기저기에 금박이 입혀져 있다.

람바르스투파는 울타리를 치고 관리가 되고 있는 공원 같았다. 한쪽 구석에 설치되어 있는 벤치에는 동네 노인들이 한가롭게 잡담을 즐기며 방문객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마침 열반당에서처럼 이곳에도 무리의 지역 학생들이 단체로 방문 중이었다. 학생들은 이곳이 어떤 의미가 있는 장소인지 알고 왔는지 궁금했다. 학생들이 지역에 있는 유적지나 사원을 단체로 방문하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 정부에서 차량을 지원해 주고 있다고 샨텀이 설명해줬다. 학생들은 이곳이 어떤 성인과 관련된 유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아주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는 못한 같아 아쉬웠다. 샨텀이 무리의 호기심 어린 학생들에게 이곳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줬다.

 

학생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샨텀의 설명을 들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나와 울타리를 오른쪽으로 돌아 히란냐바티강으로 향했다. 강가 가까이에 다다르자 울타리 곁에 아름드리나무가 보이고, 나무 밑에는 아주 작은 힌두사원이 있었다. 발자국 발걸음을 옮겨 강에 도착하니 강은 생각보다 많이 좁았다. 폭이 넓어야 20m 될까 싶었다. 강가 이쪽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작은 가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붓다의 다비장이 있는 곳이어서일까, 붓다가트(Buddha Ghat)라고 불리고 있었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붓다가트는 동네 소년들에게 워터파크가 되고 있었다. 근처에는 동네의 물소들도 강물에 몸을 담그고 한여름의 열기를 식히고 있다.

2600 파바에서 춘다가 대접한 음식을 드시고 심한 설사 증세를 보이며 땀과 피가 엉겨 흥건히 적신 맨발로 멈추지 않고 걸어 이곳에 당도한 붓다도 바로 강물을 건너며 늙고 병든 몸을 씻으며 잠시 고단함을 내려놓았을 것임을 강물에 몸을 담그고 물장난을 치고 있는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 어드메쯤에서 강을 건넌 붓다는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아난다에게 사라나무 그루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누울 곳을 마련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전한다.

 

붓다가트 주변의 히란냐바티강의 모습

무더운 날씨에 아이들처럼 강물에 몸을 담그고 열기를 식히지 못한 우리는 모두 땀에 젖은 몸으로 차에 올랐다. 차가 호텔을 향해 출발하자 나는 긴장이 풀리며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몸은 무거워지는데 정신은 또렷해지며 붓다가 유언처럼 남긴 마지막 말씀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머리 속에 여운을 남긴다.

"비구들이여! 이제 너희들과 작별을 해야겠구나!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방일치 말고 정진하여라."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