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바이살리, 붓다가 사랑한 도시, 천상을 닮은 도시

바이살리(Vaishali, 혹은 Vesāli, 毘舍離) 석가모니 붓다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그러나 붓다의 흔적을 찾아 이곳을 찾는 순례객들을 실은 버스들만 없다면, 지금 우리 일행이 찾아온 이곳은 바깥 세계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을 것만 같은 비하르(Bihar) 벽촌이었다. 이곳이 한때 북인도에서 가장 번영을 누리며 화려했던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다. 붓다 당대에는, 아름다운 예술과 경이로운 건축으로 유명했으며 77 개의 공원과 연못이 있을 정도로 부와 번영이 넘치는 곳이었다.

바이살리는 붓다 당시의 고대인도 16대국 가운데 하나였던 밧지연합(Vajjian Confederacy, 跋祇國) 수도였다. 나라는 밧지(Vajji)족과 릿차비(Licchavi) , 8개의 종족이 연합하여 세운 공화국으로 세계 최초로 민주적 정부 형태를 채택했던 나라들 가운데 하나였다. 바이살리는 가운데 특히 릿차비족의 수도였으며, 바이살리라는 이름은 고대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Mahābhārata) 시대의 왕이었던 비샬(Vishal)에서 나왔다고 한다. 5세기 전반 인도 학승이었던 부다고사(Buddhaghosa, 佛音) 의하면, 광대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고도 한다. 실제 갠지스강 북안에 자리잡고 있는 바이살리는 서쪽으로 간다크강(Gandak River) 맞닿아 있고 북쪽으로는 네팔의 히말라야 산악지대까지 닿아 있었다.

 

바이살리 주변 지역 지도

바이살리는 비하르의 주도인 파트나(Patna)에서 60 가량 떨어져 있어서 시간이면 도착하겠거니 했다. 그러나 시간 정도는 잡아야 거라고 샨텀이 알려준다. 그것도 갠지스강을 연결하고 있는 다리를 문제 없이 건널 있을 이야기란다. 다리는 자주 정체되는데, 일단 정체되면 다리를 건너는데 얼마가 소요될 아무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호텔의 식당이 문을 열자 말자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섰다. 호텔을 출발한 얼마 되지 않아 문제의 다리에 도착했다. 다행히 다리는 막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정상적인 속도를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리는 파트나를 갠지스강 넘어 비하르주 북부의 하지푸르(Hajipur) 연결해 주는 길이 5.75㎞의 마하트마간디橋(Mahatma Gandhi Setu) 현재 인도에서 번째로 다리이다. 가장자리에 인도(人道) 갖춘 왕복 4차선의 다리는 10년의 건설기간을 거쳐 1982 준공되었다. 최근에는 급증하는 차량과 과적 등의 문제로 극심한 정체와 잦은 사고로 불편을 주고 있다. 지금 겪고 있는 급증하는 차량과 하중 문제는 설계 단계에서 예상하지 못한 수준이라고 한다. 다리 건설에 투입된 시멘트와 기타 건설자재들이 네팔과 비하르 북부로 흘러 들어갔다는 보고가 있으며, 정작 다리의 건설 과정에서는 시멘트 건설자재 부족을 심하게 겪었다고 한다.

인도의 고속도로에서 흔히 보게 되는 물류트럭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차선을 끝도 없이 메우고 있는가 하면, 출근길인지 장에 가는 길인지 사람들이 인도를 걷는 모습도 계속 보였다. 지나가면서 보니, 곳곳에 금이 가거나 바닥이 떨어져 나간 구간이 간간이 보였으며 왕복 2차선으로 좁아지기도 하고 때로는 남은 1차선을 왕복 차량들이 번갈아 사용하는 구간도 있었다. 19 고속도로의 일부이기도 다리를 건너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으며, 이방인의 눈에는 이해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는 다리는 인도 전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우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하트마간디橋를 건너며 있는 하지푸르 방면의 갠지즈 강변의 모습. 당나라 유학승들이 것처럼 지금도 대규모 바나나, 망고 농원을 있다.

다행이 마하트마간디橋의 부담을 덜어주고 교통 흐름을 개선하기 위해 다리와 나란히 길이 22.76㎞의 6차선 다리가 새롭게 건설되고 있다고 한다. 아시아개발은행의 차관 제공과 우리나라 대우건설의 시공으로 다리가 태어난다고 하니 반가웠지만, 이번엔 제대로 다리가 만들어지길 바랄 뿐이다.

붓다의 진신사리가 발견된 릿차비스투파

다리를 건너서도 도로 상태는 몹시 좋지 않았다. 간간이 나타나는 마을의 모습과 시장이랄 것도 없이 가게 정도 모여있는 노선 상점가의 모습에서 갠지스강의 남부보다 더한 궁벽함이 느껴졌다. 한참을 달려 우리는 바자르(Basarh)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이 바로 알렉산더 컨닝햄(Alexander Cunningham) 고대 바이살리로 확인했던 곳이다. 붓다가 각별히 아꼈던 도시에 발을 디디니 감개가 무량했다. 이곳에서 수행자 싯다르타는 스승인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 만났고 성도(成道) 다섯 번째와 마지막 우기(雨期) 안거(安居) 보냈다. 여성의 출가를 처음으로 허락한 곳도, 가뭄을 퇴치하는 이적을 보인 곳도 이곳 바이살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붓다는 3개월 열반에 것임을 바이살리에서 처음으로 공표했다.

우리는 먼저 붓다스투파1(Buddha Stupa 1) 또는 불사리스투파(Buddha Relic Stupa)로도 불리는 릿차비스투파(Licchavi Stupa) 향했다. 붓다의 열반 수습된 진신사리는 여덟 종족이 나누어 받아 각각 봉안했는데, 근본8 가운데 릿차비족이 자신들의 몫으로 받은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조성한 사리탑이다. 스투파는 둥그렇고 커다란 양철지붕을 쓰고 있었고, 무리의 순례객들이 주위를 탑돌이 하고 있었다.

 

릿차비스투파 유적

 

릿차비스투파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양철 지붕이 씌워져 있다.

스투파에 대한 발굴작업은 1958년부터 1962년까지 파트나 소재의 K.P.자야스왈연구소(K.P. Jayaswal Research Institute) 지원 아래에 비하르주 정부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발굴작업으로 릿차비족이 최초로 조성한 스투파는 진흙으로 만들어졌고 지름이 8m였으며, 서기 2세기까지 차례에 걸쳐 증축 보수가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불교설화를 집대성한 디비야아바다나(Divyāvadāna) 현장법사의 기록에 의하면, 스투파의 번째 증축은 마우리아왕조(Maurya Dynasty) 시대에 아쇼카(Ashoka) 왕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것은 발굴과정에도 확인되었다. 번째 증축에서는 화려하게 꾸며졌으며 구운 벽돌이 사용되었다. 결과 스투파의 지름이 11.6m 커졌다.

발굴 과정에 스투파의 가장 깊은 중심부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으며, 발견된 사리함에는 1/4 차있었다. 기원전 3세기에 사리함이 최초의 장소에서 조금 위쪽으로 옮겨져 안치되었음도 확인되었다. 이것은 아쇼카왕이 진신사리의 3/4 꺼내고 사라함을 스투파에 다시 넣어 것을 보여주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발굴로 디비야아바다나의 이에 대한 묘사가 확인된 것이다. 사리함 안에는 흙이 섞인 진신사리, 조개껍질, 구슬, 얇은 황금잎새 구리동전이 들어 있었다. 사리함은 안전과 보전을 위해 1972 파트나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릿차비스투파에서 발견된 붓다의 진신사리는 파트나박물관의 특별전시실에 전시 중이다.

 

릿차비스투파의 붓다 진신사리 사리함의 내용물 사진, 파트나박물관.

 

릿차비스투파 발굴 당시의 모습, 파트나박물관. 발굴 원래 모습으로 복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투파를 떠나려 입구 쪽으로 나오는데 열서너 명의 초등학생이 수업 중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식 학교가 아니라 순례객들로부터 기부금을 얻어낼 목적으로 연출된 장면이라고 샨텀이 귀뜸을 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수상한 점이 가지 눈에 들어왔다. 순간 화가 치밀었다. 어른들의 사기행각을 위해 아이들의 미래까지 봉쇄하고 아이들을 이용하는 모습에 역겨움이 느껴졌다. 그저 그들도 살려는 몸부림일 뿐이런가?

바이살리박물관

스투파에서 나오니 바로 앞에 인공 연못인 연못(Abhishek Pushkarini) 있었다. 연못의 성스런 물은 선출된 고대 바이살리의 대표들에게 뿌려지는 성수로 사용되었었다고 한다. 릿차비스투파에서 연못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건너편에 라지기르의 다보산 정상에 세워진 법화계열의 신생종파인 일본산 묘법사의 세계평화탑(Vishwa Shanti Stupa) 동일한 모양의 세계평화탑이 있다.

릿차비스투파에서 연못 앞길을 따라 서쪽으로 200m 가면, 세계평화탑 맞은편에 바이살리박물관(Archaeological Museum, Vaishali) 있다. 1971년에 건립된 박물관에는 고대 바이살리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유물을 보관 전시 중이다. 박물관은 2 점의 유물을 보유하고 있으며, 가운데 650 가량이 전시 중이다. 박물관의 특이한 전시물 가운데 하나는 콜후아 마을에 있는 만자(卍字) 형태의 승원터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수세식 변기통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자그마한 박물관에는 흥미로운 전시물도 있었지만, 건물은 매우 낡았고 유지보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느낌은 받았다. 많은 불교성지의 발굴현장 박물관이 그런 것처럼 유물 전시에도 많은 개선이 필요해 보였다.

 

바이살리박물관의 모습

박물관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연못의 북서쪽 모퉁이에 바이살리관광객방갈로(Vaishali Tourist Bungalow) 만나게 된다. 비하르주의 관광청 역할을 하는 비하르관광개발공사(Bihar State Tourism Development Corporation) 주요 관광지에 직접 소유·운영하고 있는 시설이지만, 모두 좋은 위치에 입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영관리 수준이 관광객이 원하는 수준을 만족시키지 못해 대부분 외면 받고 있기도 하다. 이곳은 민간사업자에게 임대해 대신 운영하게 하고 있었으나, 불교성지들의 비수기 영업기간이 길어서인지 아직은 민간투자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위해 진입로의 베트남사원 근처에 있는 레지던시호텔(Residency Hotel) 향했다. 호텔 식당에는 방금 주차장에서 버스를 타고 일행 듯한 무리의 한국인 순례객들이 이미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호텔의 부페식 식사에 더해 본인들이 싸온 김치 한국 음식들을 같이 풀어 놓고 식사하는 폼이 꽤나 시끌벅적거렸다. 우리 일행은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식사를 했다. 후로도 바이살리를 때면 호텔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곤 하는데 시간과 서비스를 고려한 선택이다. 바이살리에서는 그나마 괜찮은 호텔이라는데, 객실을 살펴보진 했지만 식당과 로비를 보면 두개 정도의 등급이 어울리는 호텔이었다.

붓다가 자주 머물던 , 쿠타가라살라비하라(대림정사 중각강당)

붓다는 바이살리에 오면 주로 쿠타가라살라비하라(Kutagarasala Vihara, 大林精舍 重閣講堂)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붓다 당시, 천상을 닮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시 바이살리를 덮친 전대미문의 재앙으로 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계속된 가뭄으로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이 하나 죽어나가자 악귀가 바이살리를 점령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에 완전한 지혜를 성취한 성자를 초청해 그의 위신력으로 재앙을 물리치려는 릿차비족의 요청에 응하여 붓다가 바이살리에 도착하자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시원한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붓다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다섯 번째 해의 일이었다. 사흘 동안이나 계속된 단비로 길고 길었던 가뭄이 끝나고 바이살리의 백성들은 붓다의 위신력에 감복했다고 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붓다는 아난다(Ānanda, 阿難陀)에게 보배경(Ratana Sutta) 설한 도시를 돌며 경을 암송하라고 했다. 아난다는 붓다의 발우(鉢盂) 담긴 성스런 물을 뿌리면서 보배경 암송하자 모든 악귀가 물러가고 사람들은 점차 질병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대림정사(大林精舍, Mahāvana Vihāra) 붓다와 그를 동행한 500명의 비구들을 위해 바이살리 주민들이 도시의 외곽에서 시작해서 히말라야 기슭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속에 마련한 거처였다고 한다. 붓다의 위신력으로 놀라운 기적이 만들어졌던 사건을 계기로 바이살리의 많은 사람들이 붓다의 가르침에 감화되었으며 교단에 귀의하게 되었다. 중에는 자이나교의 충실한 신도였던 바이살리의 총사령관 시하(Siha) 장군도 있었다.

붓다가 대림정사 중각강당에 머물 , 이곳에서 일어났던 가운데 불교역사에서 특기할만한 일이 있었으니 바로 최초의 비구니 승가가 이곳에서 결성된 일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인 마야왕비를 잃고 마야왕비의 동생이자 이모인 마하파자파티 고타미(Mahāpajāpatī Gotamī) 의해 양육되었다. 붓다의 아버지인 숫도다나(Suddhōdana, 淨飯王) 왕이 죽고 왕실의 많은 사람들이 승가에 귀의한 , 마하파자파티 고타미는 5 명의 왕실여인들과 함께 붓다의 승가에 귀의하고자 했으나 처음에는 붓다가 엄격한 계율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아난다의 도움으로 붓다의 허락을 받으면서 출가하게 된다.

 

콜후아 유적지 경내 지도

릿차비스투파에서 북쪽으로 3 거리에 있는 대림정사 중각강당은 붓다 당시에는 매우 번성했던 승원이었지만, 지금은 기단 부분만 남아 있는 유적이다. 그리고 북쪽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다. 이곳은 원숭이가 붓다에게 공양을 올렸다는 곳이다. 상업이 발달한 매우 진보적인 도시였던 바이살리에서는 걸식할 집집마다 다니지 않고 발우를 줄로 늘어놓아 두면 신도들이 주걱씩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어느 붓다가 제자들과 걸식을 나가 자신의 발우를 제자들의 속에 섞어 늘어놓았는데, 원숭이가 많은 발우 가운데 붓다 것을 골라내어 꿀을 가득히 채워 붓다에게 공양하였다고 한다(猿候蜂蜜).

 

콜후아 유적지 정경.

연못은 지금은 복원이 되어 말끔하게 보이지만, 발굴 전에는 마치 배수로나 도랑처럼 보였다고 한다. 컨닝햄은 이곳을 원숭이연못(Markata-hrida)으로 확인했다. 전설에 따르면, 수천 마리의 원숭이들이 흙을 파서 붓다가 목욕을 있도록 연못은 만들었다고도 하는데, 지금은 현지에서 Ramkund 불리고 있다. 후로는 부조물 가운데 원숭이가 꿀을 담는 모습이나 발우를 안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 것은 바이살리를 상징하게 되었다.

 

원숭이가 벌꿀을 가득 담은 발우를 붓다께 바치고 있는 장면. 붓다는 보리수와 금강보좌로 표현되어 있다. 산치대탑. 

연못에서 북쪽으로 20m 거리에는 비구니 승가 결성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아난다의 사리탑(Ananda Relic Stupa) 있다. 발굴 당시 기록에 의하면, 높이는 7.72m, 기단부에서의 직경은 15.14m이었다. 세월이 흘러 아난다가 자신의 열반을 예고하자, 마가다 백성과 바이살리 백성들은 서로 아난다에게 자신들의 지역으로 와서 열반에 들라고 요청했다. 아난다는 자신이 어느 지역에서 열반에 경우 서로 자신의 사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게 것을 염려해 갠지스강 가운데에서 열반에 들며 자신의 사리를 반씩 나누어 가지도록 했다. 바이살리 측은 자신들의 가운데 절반은 갠지스강 옆의 탑에 모시고, 나머지 절반은 이곳 대림정사 중각강당 옆에 모셨다고 한다.

 

아난다스투파와 아쇼카 석주의 모습

1970년대 후반에 진행되었던 발굴 당시, 현장에서는 아난다의 사리가 담겨진 사리함과 함께 작은 금판들과 준보석들이 발견되었다. 붓다의 사촌동생이자 25년간 충실한 시자(侍者) 붓다의 열반 순간까지 붓다와 함께 했던 아난다는 () 편찬, 결집(結集) 참가하여 후대에 전해지도록 하는 지대한 업적을 남긴 후에도 40 년을 붓다의 법을 부지런히 전파하다 이곳에 고단했던 몸을 뉘인 것이다. 붓다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죽은 후에 부족들간의 전쟁을 막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육신까지 나누어 주려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 구석이 아려왔다.

연못과 아난다스투파 사이에는 인도 전역에서 가장 완전한 원형의 모습으로 보존돼 있다는 아쇼카 석주가 있다. 1861 1880 이곳을 탐사한 컨닝햄은 아쇼카 석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당시 위로 보이는 석주는 표면이 매끄롭게 처리된 거대한 사암 기둥으로 둥근 기둥 위에 모양의 기둥머리가 있고 다시 위에 북쪽을 바라보며 실물 크기의 사자상이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발굴 당시에는 석주의 중간 부분까지 속에 묻혀 있었지만, 발굴을 통해 드러난 석주의 높이는 13m, 석주 직경은 상부에서 0.98m, 하단에서 1.27m 추정된다. 상단에는 완벽한 모습의 마리 사자상이 북쪽을 향하고 있다. 석주의 곳곳에 새겨진 많은 글씨들은 대부분이 낙서이며, 룸비니의 아쇼카 석주에서 있던 명문은 이미 마모되어 확인하기 힘들었다. 사자상은 붓다가 이곳 바이살리를 떠나 대반열반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던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듯했다.

 

지금 아쇼카 석주의 부분은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지만 땅속에 묻혀 있던 아래 부분은 상당히 마모되어 있다 (왼쪽); 19세기 발견 당시의 바이살리 아쇼카 석주의 최초 모습(오른쪽)

 

아쇼카 석주의 부분에는 모양의 기둥머리 위에 사자 마리가 이곳을 떠나 붓다가 향한 북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콜후아에서 발굴이 한창 진행되던 당시의 모습

연못에서 남쪽으로 가까운 거리에 대림정사 중각강당이 있었다고 전한다. 여든의 노구를 이끌고 붓다는 생의 마지막 우기 안거를 바이살리에서 보내면서 심한 병을 얻고 말았다. “아난다야, 나이 여든, 삶도 거의 끝나가고 있구나. 여기저기 부서진 낡은 수레를 가죽 끈으로 동여매 억지로 사용하듯 여기저기 금이 상다리를 가죽 끈으로 동여매 억지로 지탱하듯 몸도 그와 같구나.” 붓다는 아난다에게 자신의 열반을 알린 , 제자들을 이곳 중각강당에 불러 모으게 했다. 만들어진 것은 결국 모두 사라지니 끊임없이 정진하라고 설한 , 자신은 3개월 열반에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공표하고 이어 게송(偈頌) 읊었다.

몸에도 늙음은 닥쳐오고

생명의 불꽃 가냘퍼지니,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을 귀의처로 하여, 끝없이.

비구들이여! 게으름 피우지 말고

바르게 사념(思念) 선계(善戒) 지키고

사유를 다스리며

자신이 마음을 지켜라.

내가 설시(設施) () ()

결코 게을리 말고 정진하면,

세세생생 윤회를 끝내고

괴로움의 끝을 다하리.

연못에서 남쪽으로 중각강당 유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가죽끈으로 묶어 겨우 끌고 가는 수레처럼 노쇠한 붓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애잔하고 서글펐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에게 정진할 것을 독려하는 모습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러나 걸음 옮기지 않아 중각강당에 도달하면서 생각은 현실로 돌아왔다. 무리의 순례객들이 중각강당 유적을 점령하고 동행한 스님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순례객들이 중각강당 유적에 올라 앉아 설명을 듣고 있다.

 

방문객이 없을 찾았던 중각강당 유적의 모습

컨닝햄은 연못 남쪽에 있던 이곳의 작은 구릉을 발굴하면서 두꺼운 벽돌담을 가진 상당히 건물 흔적을 발견했다. 유적의 서쪽 면을 따라 직경이 18~20 가량의 작은 벽돌 스투파가 폐허더미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개의 벽돌은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작은 스투파는 원숭이가 붓다에게 발우에 가득 벌꿀을 담아 바쳤다는 지점에 세웠다는 스투파가 있었다고 현장이 기록한 바로 지점에 위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컨닝햄은 작은 스투파가 현장이 것과 동일한 스투파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그는 건물 유적은 현장이 묘사한 중각강당으로 인정했다.

중각강당에서 다시 서쪽으로 20m 걸어가자 만자형 형태의 승원터가 나타났다. 순례객과 관광객으로 붐비던 중각강당과는 달리 이곳은 찾는 사람이 없어서 호젓했다. 승원에는 만자(卍字) 형태로 4개의 부속건물에 각각 3개의 방이 있어 모두 12개의 방이 있었다. 부속건물은 동쪽으로 출입구가 나있는 개방형 중앙 정원 주변으로 공동의 베란다에 연결되어 있는 형태였다. 그리고 남쪽 벽에 화장실이 붙어 있다. 승원은 굽타(Gupta) 시대에 비구니들을 위해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만자(卍字) 승원 유적

콜후아 유적지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출구를 나서자 들어갈 때에는 급한 마음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기념품 판매대들이 입구 좌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앞서 가는 순례객들도 같은 마음인지 판매대를 기웃거리며 걷고 있는 그들의 발걸음이 느릿느릿했다. 매대 위의 기념품들은 다른 어느 성지 방문지에서도 있는 것들로 별반 특색이 없어 보였다. 가지는 들어서 살펴봤지만 품질도 조잡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인지 앞에 가는 순례객들 가운데에도 기념품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였다.

 

콜후아 유적지 입구의 양쪽을 채우고 있는 기념품 판매대의 모습

암바팔리 생가터

우리 일행은 암바팔리(Amrapālī, 菴摩羅女) 생가터를 찾아보기로 했다. 콜후아에서 남서쪽으로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시골의 사거리 시장 모퉁이에 있는 작은 학교였다. 암바팔리의 생가터란 표지판이 학교 출입구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표지판 이외에는 학교 어디에도 고고학적 유물이나 유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는 내내 가지 의심이 마음을 떠나지 않았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왔지만 결국 실망하고 말았다. 왕실 소유의 망고나무 숲에서 정원사가 태어난 하루도 암바팔리를 발견해 키웠는데 어떻게 이곳을 생가터라고 확인했을까? 아기를 발견했던 망고나무 아래를 확인했다는 말인가? 표지판은 인도고고학조사위원회(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에서 세웠던 것이 아니었다. 어느 기관에서 표지판을 세웠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비하르주라고만 되어 있어 확인하지는 못했다.

 

지역에서는 암바팔리 생가터라고 알려진 곳으로 현재는 초등학교로 사용되고 있다. 학교의 보수공사로 암바팔리 생가터를 알리는 입간판이 쓰러져 있다고 했다.

 

학교 출입문 위쪽에 붙은 암바팔리 생가터 표식

경전에 등장하는 암바팔리는 릿차비족 왕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빼어난 미모의 유명한 기녀(妓女)였다. 붓다의 설법에 감동하여 붓다에 귀의했으며, 후에 소유하고 있던 암라수원(菴羅樹園, Ambapalivana) 기부하여 설법의 장으로 만들었다. 붓다는 바이살리를 방문할 때면 자주 망고동산에서 머물곤 했던 것으로 전한다. 승만경(鬘經) 함께 대승불교의 재가주의를 천명하고 있는 유마경(維摩經) 이곳 암바팔리의 암라수원에서 설해졌다. 발달한 상업도시로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사상적으로도 매우 진보적이었던 바이살리가 파격적인 유마경」의 배경이 되고 있음은 흥미로운 점이다.

 

암바팔리가 붓다를 맞이하며 인사하는 모습의 상아 조각, 델리국립박물관.

붓다가 열반하고 100 후인 기원전 383년경 바이살리에서는 칼라소카(Kālāsoka) 왕의 후원 하에 2 경전결집(經典結集) 열렸다. 2 결집은 계율 문제가 직접적인 이유였는데, 그것은 상업으로 번성했던 대도시에서 진보파 비구들이 승가에 들어오면서 계율상의 변화를 가져오자 붓다가 확립한 계율을 확실히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아난다의 제자였던 야사(Yasa, 耶舍) 존자가 바이살리를 방문 중에 바이살리의 비구들이 신도들에게 금전·은전을 요구하는 10가지 계율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게 되었고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자, 그들은 바이살리 남쪽에 있는 발리까라마(Vālikārāma) 모여 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0가지 계율을 지키지 않는 일들은 모두 비법(非法)이라고 결정하였다(十事非法). 2 결집에는 700명이 참석하였다고 하여 칠백결집이라고도 불린다.

동안 2차결집이 있었던 장소가 확인되지 않았었는데, 최근 발리까라마의 위치가 확인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우리는 발리까라마를 살펴보고 케사리아대탑(Kesariya Stupa)으로 향하기 위해 다시 서둘러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