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보드가야, 붓다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2013 77 일요일 이른 아침 파트나(Patna, 고대 Pataliputra) 마우리아호텔을 출발해 붓다의 성도(成道) ’, 보드가야(Bodh Gaya) 향해 길을 나섰다. 당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110km 불과한 파트나-보드가야 여정이 자동차로 4시간이나 소요되던 시절이었다. 전날 델리를 떠나 오후 늦게 비하르주의 주도인 파트나에 도착하기도 했지만, 문제는 해가 지면 노상에 마오이스트 공산주의자들이 출몰해 어떤 험한 꼴을 당할 모른다는 샨텀의 충고를 받고 아침에 출발하던 참이었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이던 농촌과 방문했던 마을들은 가난에 찌든 모습이었다. 아마도 이것이 마오이스트 공산주의자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토양이었을 듯싶었다.

시간쯤 달렸을까, 델리의 사무소에서 급한 전화가 왔다. 오늘 아침에 보드가야의 대보리사(大菩提寺, Mahabodhi Temple)에서 폭발사고가 있었으며 현재 UN 안전담당관과 연락 중이라는 것이다. 차량 안에 있던 우리 모두는 뜻밖의 사고 소식에 어리둥절해 하며 원래 계획대로 보드가야로 , 아니면 차를 돌려야 지를 결정해야 했다. 샨텀이 사원에 있는 지인에게 전화로 확인한 결과, 이른 아침 폭발사고가 있었으나 지금은 일차 수습을 마치고 평온하다고 알려 왔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전담당관의 권고를 받아들여 보드가야 일정은 추후 다시 추진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나의 보드가야와의 인연은 이렇게 범상치 않게 시작됐다.

대보리사의 대탑 주변에서도 폭발이 있었지만 불행 다행스럽게 대탑과 보리수에는 피해가 없었다. 후에 알려진 바로는 미얀마에서 소수민족인 무슬림 로힝야족을 향해 범해진 주류 불교도들의 잔혹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인도의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이 저지른 행위로 밝혀졌다. 일전에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했던 사건이 기억났다. 이번 대보리사 폭발사건은 세상을 구제해야 불교가 타종교 또는 외부 세계와 갈등을 야기하여 구제의 대상이 것은 아닌가 하는 괜한 걱정을 하게 만듦과 동시에 보드가야가 불교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보드가야 대보리사 주변지역 지도

붓다의 성도(成道) 아쇼카왕

전통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2600 세상의 고통을 알게 어린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고통의 원인과 고통을 없앨 있는 방법을 찾아 세상을 헤매던 북인도 가야 인근에 있는 우루벨라(Uruvela, 현대 Bodh Gaya) 마을의 숲이 울창한 팔구(Phalgu, 고대 Nairanjana) 강변에 당도했다. 싯다르타는 그곳에서 나중에 보리수(菩提樹, Bodhi Tree) 알려지게 피팔라(Pipala)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요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정신을 집중하고 이제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깊은 명상에 잠기게 되었다. 선정(禪定) 7일째 되던 새벽, 싯다르타는 마침내 대각(大覺) 이루었다. 이제까지 품어왔던 모든 의혹이 걷히고 최고의 깨달음을 얻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이때부터 그는 스스로를 깨달은 ’, 붓다(Buddha) 불렀다. 그것은 우주의 근원을 통찰했다는 긍지이며, 만유의 존재 당위를 독특한 지견(知見)으로 열어 보였다는 자부이기도 했다.

 

나이란자나강 너머 보이는 대보리사 대탑의 모습. 붓다가 수자타가 건넨 유미죽을 드시고 강에서 목욕을 하고 난 후 보리수나무를 찾아 강을 건너며 바라보았을 건너편의 전경이 이랬을 것이다.

 

나이란자나강은 평소에 바닥을 그대로 드러낼 정도로 건천이지만(왼쪽), 우기가 되면 수량이 제법 많아진다(오른쪽).

붓다의 성도의 땅인 보드가야는 붓다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며, 불교가 시작된 곳이다. 불교의 영적 고향인 이곳에는 전세계에서 매년 수십만 명의 신도들이 찾는다. 짙은 황색, 황토색, 잿빛 출신국에 따라 다양한 색깔의 가사를 걸친 비구와 비구니는 물론이고 사리와 차림의 현지인들과 각국의 관광객들이 뒤섞여 언제나 붐빈다. 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곳이지만 언제나 고요와 평안함이 사원 전체를 감싸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방식대로 붓다를 만난다.

붓다가 대각(大覺) 이룬 속의 조용한 선정처는 붓다가 생존했던 당시에는 특별히 제자들이 순례하던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쳐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장소를 찾기 시작하면서 점차 붓다를 참배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현재 보드가야에서 성지순례의 중심점은 대보리사(大菩提寺, Mahabodhi Temple) 또는 대각사(大覺寺) 불리는 사원이다. 대보리사의 기원과 조성시기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여전히 분분하지만, 초기 고고학 조사로 붓다가 대각을 이룬지 200 후인 기원전 250년경에 마우리아(Maurya) 왕조의 아쇼카(Ashoka) 왕이 이곳을 방문하여 처음으로 보리수 나무 둘레에 붓다의 대각을 기념하는 사원과 보호용 돌난간 금강보좌를 설치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최초의 사원은 기둥이 있는 개방형 구조물이었으며, 한가운데에 붓다가 앉아 선정에 들었던 바로 자리에 금강보좌(金剛寶座, vajrasana) 설치되었었다.

 

기원전 250년경 아쇼카왕이 설치한 금강보좌가 발견된 당시의 모습(왼쪽); 쿰라하르 명패에 나타난 대보리사 대탑의 모습, 파트나박물관(오른쪽)

 

보드가야 대보리사 자리에 아쇼카왕이 지은 최초의 사원 모습, 산치대탑 부조, 기원후 1세기 (완쪽); 현재의 대보리사 대탑의 모습 (오른쪽)

그리고 아쇼카왕의 사원은 서기 2~3세기에 오늘날의 모습을 가진 건축물로 증축되었다. 쿰라하르(Kumrahar)에서 발견된 서기 150~200년경의 명판에는, 고대 간다라 지역의 카로슈티어(Kharoshthi) 새겨진 글귀와 쿠샨 왕조 후비슈카(Huvishka) 왕의 동전 등을 참고로 , 이미 끝이 잘린 계단 모양의 피라미드에 상층부 탑이 설치된 오늘날의 대보리사탑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점은 보드가야의 고고학 발굴에서 이미 확인된 바가 있다. 대보리사탑은 다시 서기 5~6세기 굽타왕조(Gupta Dynasty) 시대에 굽타의 예술양식으로 복원되었다. 5세기에는 중국의 법현법사(法賢法師), 7세기에는 현장법사(玄奬法師), 그리고 8세기에는 신라의 혜초(慧超) 이곳의 대보리사를 방문했음을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현장의 기록에 의하면, 대보리사 북쪽 입구 쪽으로 메가바나(Meghavana) 왕이 세운 대보리승가람(Mahabodhi Sangharama)이라는 스리랑카 사원이 있었으며 무려 명이 넘는 승려들이 머물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 지역을 지배한 마지막 불교의 수호자였던 팔라(Pala) 왕조가 몰락하고 이슬람 지배가 시작되면서 불교사원과 순례지들이 파괴되고 불교가 일어났던 땅에서 불교는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대보리사 역시 당시 이슬람 침략자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14세기 버마의 왕들에 의해 잠시 복구되지만, 뒤이은 대규모 홍수로 진흙에 파묻힌 19세기 초까지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러다 인도고고학조사위원회(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위원장이 알렉산더 컨닝햄(Alexander Cunningham) 1861 현장을 방문해 발굴을 건의했다. 그리고 컨닝햄과 그의 조수 조셉 데이비드 베그라(Joseph David Beglar) 의한 실제 복원작업은 1880년부터 1884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1880년대 복원작업이 이루어진 후 얼마 되지 않은 1899년의 대보리사 모습

그리고 1891 스리랑카 승려인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 대각회(大覺會, Mahabodhi Society) 설립하고 대보리사를 힌두교 승려들의 손에서 되찾아와 불교도들의 품으로 되돌려 주려는 운동을 전개했다. 마침내 1953 523, 대보리사는 당시 인도 부통령이었던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Sarvepalli Radhakrishnan) 박사에게 인계되었다.

지난 폭발테러사건의 여파인지 대보리사를 찾을 때마다 안전장치들이 하나씩 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사원 입구에 새로 설치된 모래주머니 방호벽 넘어로 중무장한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모습은 구도자들의 도량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관광객과 순례객이 전혀 가지 않는 사원 서쪽 끝과 남쪽의 울타리가 조금은 엉성한 상태였는지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새로운 담장을 높게 설치하고 있었다. 또한 폭발테러사건은 동안 사원 관리 측면에서 골치거리였던 문제들을 깨끗하게 해결할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사원 북동쪽의 우체국 주변에는 마을에서 가장 시장이 들어서 있다. 시장에는 좌판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인들이 아무 곳이나 자리 잡고 앉아 장사를 하다 보니 사원 입구까지 침범해 관광객 순례객과 뒤섞여 사원 입구는 그야말로 도떼기시장이었다. 상인들의 반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차에 이번 테러사건과 관련하여 안전확보를 빌미로 가림벽을 설치해 상인들의 침범을 막아 사원 입구가 많이 정리된 느낌이었다.

 

사원의 서쪽 끝부분 담장을 높게 보강하고(왼쪽), 남쪽에서는 새롭게 콘크리트 담장을 높게 설치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대보리사 입구와 우체국 사이에 형성된 시장 모습. 보드가야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주로 청과물을 판매한다.

 

대보리사 경내 배치도

대보리사

역시 폭발테러사건의 여파인지 휴대폰을 소지할 없다고 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입구에 보관하는 대신 차에 두고 내리기로 했다. 오래되고 낡아 제대로 검사가 가능할 의심이 들게 하는 X레이 소지품 검사를 마치고 돌아서자 대탑의 장엄한 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높이가 52m 이르는 대탑은 변이 15m 정사각형인 기단부 위에서 올라갈수록 조금씩 가늘어지는 조금 날씬한 형태의 피라미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동양의 사찰 모습에 익숙한 우리 눈에는 조금 낯선 형태였으나 금새 건축적 위엄과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왔다. 대탑과 사원 경내를 감싸고 있는 경건한 분위기는 대탑의 건축적 요소 때문만은 아닐 테지만 대탑의 건축적 위용이 경내 분위기에 어울리는 또한 부인할 없을 듯했다.

 

대보리사 대탑의 모습

 

대보리사 사원 경내의 분위기는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사뭇 달라지지만, 경건한 분위기만은 언제 방문하더라도 변함이 없다.

전체 사원의 면적은 50,000이며, 대탑은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대탑의 입구는 붓다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선정에 향하고 있던 동쪽 방향, 붓다가 보리수를 향해 오기 전에 건넜던 나이란자나강을 향하고 있다. 대탑은 전체가 벽돌로 지어졌으며, 외벽은 꽃과 동물의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외벽에 설치된 많은 감실에는 다양한 자세의 붓다가 모셔져 있다. 대탑의 모퉁이에는 대탑이 축소된 같은 작은 탑들이 설치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붓다의 상이 모셔져 있다.

 

대탑 표면에는 많은 붓다와 보살 상들이 감실에 모셔져 있고, 다양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대탑 안으로 들어서면 사원에서 가장 성스러운 공간인 법당이 있고, 가장 안쪽에 깨달음을 얻는 순간 마라(Māra)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극적인 순간을 묘사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Bhūmisparśa Mudrā 또는 'earth witness' mudra) 자세로 앉아 있는 1.5m 높이의 붓다의 상이 어른 높이의 좌대 위에 모셔져 있다. 붓다 상은 10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붓다가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선정에 들고 곧이어 대각을 이루었던 바로 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폐허더미가 대보리사에서 발견되어 컨닝햄이 현재의 자리로 모셨다고 한다. 그리 넓지 않은 법당 안의 공간은 끊임없이 밀려드는 순례객들로 언제나 붐빈다. 조용히 구석에 앉아 경전을 나지막이 암송하는 , 쉬지 않고 백팔배를 올리는 , 그냥 조용히 명상에 잠긴 . 여기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붓다를 만나고 있다. 좁은 공간이라 불편할 만도 텐데 아무런 불만의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있는 대탑의 위층에는 붓다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 Mahamaya) 상이 모셔져 있다.

 

붓다를 향한 유혹. 왼쪽에는 기뻐하는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인 붓다(보좌로 상징적으로 표현됨), 중앙에는 마라와 딸들의 모습, 그리고 오른쪽에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있는 마라의 악귀들, 산치대탑 부조

초기 경전에 붓다에게 옷을 바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러한 전통을 따르는 것인지 남방불교 순례객들은 옷감을 바치는 듯하다. 좌대 위의 붓다도 매일 새로운 옷으로 갈아 입는다. 보드가야 사원구역 관리위원회(Bodhgaya Temple Management Committee) 총무를 만나고 헤어지려는데 우리 일행 부탄에서 친구가 총무에게 붓다께서 입으셨던 옷을 구할 없을까 부탁하자 총무는 우리 모두에게 벌씩 선물했다. 호텔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는 중에 부탄 친구는 자신의 어머니가 나중에 붓다가 몸에 걸치셨던 옷감과 함께 관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가슴 속에 뭉클함이 몰려왔다. 나는 내가 받은 옷감도 친구에게 줬다. 나보다는 친구에게 의미 있는 물건인 듯싶었다.

 

대보리사 대탑의 법당 안에 모셔져 있는 붓다. 아쇼카왕이 설치한 원래의 금강보좌 위치에 앉아 있다.

보리수 나무

대탑을 돌아 뒤쪽으로 돌아가면, 대탑의 서쪽에 거대한 보리수 나무가 있다. 오랜 세월 같은 자리를 지켜온 듯한 피팔라 나무는 그늘 아래에서 붓다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위대한 순간에 그늘을 제공한 공덕이 컸던지 아니면 함께 깨달음을 얻어서인지 깨달음의 나무, 보리수라는 이름을 얻었다. 불교 4대성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보드가야를 찾아오는 많은 순례객들의 가장 방문 목적도 바로 보리수를 직접 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재의 보리수 나무는 원래 붓다의 성도 당시의 바로 나무는 아니다. 원래의 보리수는 훼손되었고, 최소한 다섯 차례에 걸쳐 같은 장소에 이식되었다. 기원전 3세기에 아쇼카왕의 아들이었던 마힌다(Mahinda)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할 당시 그의 누이 비구니 상가미타(Sangamitta) 전달한 원래 보리수 나무의 나무가지가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대사원에 심어졌는데, 나무의 가지를 다시 보드가야의 원래 장소에 옮겨 심은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게 되는 보리수 나무라고 한다. 석가모니의 행적을 기술한 『불소행찬』(佛所行讚, Buddhacarita) 저술한 인도의 학승 아슈바고샤(Aśvaghoa, 馬鳴) 보리수 나무를 가리켜 세상의 배꼽이라 불렀다.

 

대탑의 서편 정면에서(서쪽에서) 바라본 보리수나무. 앞의 넓은 공터에서 각종 대규모 행사들이 진행된다.

 

북쪽에서 바라본 보리수나무의 모습(왼쪽)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오른쪽).

붓다의 성도가 있었던 원래 보리수 나무의 훼손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불교진흥에 힘쓰던 아쇼카왕은 붓다와 연관된 곳을 찾아 참배하고 석주를 비롯한 여러 기념물을 설치했다. 그는 특히 보리수를 참배하기 위해 여러 행차했는데, 왕의 이런 보리수 나무에 대한 애착을 질투한 왕비가 식물의 독을 이용하여 보리수 나무를 죽였다거나, 나무를 잘라버렸다고 전해온다. 보리수 나무 아래에는 붓다가 성도할 앉았던 자리를 표시한 금강보좌(金剛寶座, vajrasana) 깨달음을 얻은 내디딘 첫발을 상징하는 불족적(佛足跡, Buddhapada) 있다. 가까이에서 붓다를 만나고 싶어하는 세계 각국에서 불자들의 손길에 돌도 견디기 힘들었는지 불족적에서 붓다의 발바닥을 나타내는 표식들이 닳아 희미해져 있었다.

 

보리수 훼손을 알게 아쇼카왕이 왕비의 부축을 받으며 슬퍼하고 있다. 산치(Sanchi) 대탑 부조

보리수 나무와 대탑 둘레에는 각각 직사각형으로 울타리가 둘러져 있다. 대탑 둘레의 울타리는 2m 높이이며, 40cm 높이의 석판 개로 이루어져 있다. 울타리는 시기에 걸쳐 설치된 것으로 재질과 디자인에서 차이가 난다. 앞선 시대 것은 기원전 150 숭가왕조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사암으로 만들어졌다. 사위성(舍衛城, Sravsasti)에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Jetavana) 구입 장면, 코끼리의 목욕을 받는 길상천녀(吉祥天女, Lakshimi) 모습, 마리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달리고 있는 태양신(Surya) 모습, 사랑을 나누는 커플의 모습, 반인반수의 모습뿐만 아니라 동물과 연꽃 문양 등이 조각되어 있다. 후대의 것은 7세기경 굽타왕조 후기에 증축된 것으로 거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정교한 문양, 아주 작게 새겨진 인물과 등이 특징적이다.

 

대보리사의 돌 울타리, 1880 H.B.W. Garrick 촬영, 영국국립도서관(왼쪽); 1930년 촬영, 위키피디아 (오른쪽)

다양한 순례객들

단체 순례객들은 대탑 주위에서 탑돌이를 하기도 하고, 울타리 안쪽 보리수 나무 주변에서 설교를 듣기도 하고, 또는 대탑의 남쪽 넓은 공간에 모여 앉아 잠시 단체 명상을 하는 모습을 있다. 반면에 개별수행자들은 대탑 북쪽 난간에 있는 경행처(經行處, Ratnachankrama 또는 Jewel Walk) 조성된 연꽃대좌 주변에서 대탑에 면벽한 시간씩 꼼짝도 않고 독경을 하거나 묵언수행을 한다. 보리수 나무 근처에는 많은 봉헌탑들이 산재해 있다. 주변에도 많은 개별수행자들이 사이사이에 저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수행 중이다. 개중에는 특히 오체투지를 수행하는 티벳 수행자들이 많이 보인다.

 

 

 

 

 

다양한 출신의 순레객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붓다를 만나고 있다

무찰린다 연못

대탑 입구에서 남쪽으로 100m 걸어가자 무찰린다(Muchalinda) 연못이 나왔다. 연꽃 연못에서 붓다는 깨달음을 이룬 여섯 번째 일주일간 선정에 들었다고 한다. 마침 사나운 폭풍우가 휘몰아치자, 연못에 살던 뱀의 무찰린다가 나와 머리를 펼쳐 붓다를 지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를 기념해 연못 한가운데에는 왕의 보호를 받고 있는 붓다 상이 조성되어 있다. 이때 붓다는 사람들에게 법을 설한다면 그들이 반드시 미혹하여 믿고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차라리 조용히 열반에 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붓다의 마음을 알아차린 제석천과 범천왕 등이 생사의 바다에 빠져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법을 설해 것을 번이나 간청하였다고 한다. 무찰린다와 제석천 등의 이야기는 붓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으로 여겨졌다.

 

무찰린다연못 가운데 조성된 붓다상

 

연못가에서 힌두교 점을 봐주는 힌두교 사제의 모습. 당황스러움은 이방인의 몫일 정작 그들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다.

다음 나이란자나강 건너편에 있는 수자타탑 전정각산과 상두산(像頭山) 보드가야의 주변지역에 있는 유적들을 찾기 위해 대보리사를 어둠 속에 남겨두고 호텔로 향했다. 이후에도 차례 사원을 찾게 되었지만 그때마다 가슴 속에 휘몰아치는 감동은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커짐을 느꼈다. 8세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300 , 이곳을 방문했던 신라 출신의 혜초(慧超) 스님은 대보리사에 도착한 감동을 그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오언시로 남겼다.

보리수가 멀다고 걱정 않는데                 不盧菩提遠

어찌 녹야원이 그리 멀다고 하리오.           焉將鹿苑遙

가파른 험하다고만 근심할                只愁懸路險

업연(業緣) 바람 몰아쳐도 개의찮네.       非意業風飄

여덟 탑을 친견하기란 실로 어려운데,        八塔誠難見

오랜 세월을 겪어 어지러이 타버렸으니      ()差經劫燒

어찌 뵈려는 소원 이루어지겠는가.            何其人願滿

하지만 바로 아침 눈으로 보았노라.” 目覩在今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