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란다, 세계 최고최대의 사원대학, 불교학 연구의 중심지

비하르주의 주도인 파트나(Patna, 고대 Pāaliputra)에서 남동쪽으로 90, 왕사성(Rajgir, 고대 Rājagaha)에서는 북쪽으로 11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날란다(Nālandā, 那爛陀) 5세기부터 12세기까지 번성했던 불교학문 연구와 교육의 중심으로 7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높은 명성을 누려왔다. 7세기 이곳에서 공부했던 유학승의 기록에 의하면, 가장 번성했던 당시에 수천 명의 승려를 비롯하여 수행자와 학자 1만여 명이 머물렀으며, 도서관 장서가 500 권에 달하였다고 전한다. 우리 일행은 이른 아침 날란다대승원(Nalanda Mahavihara) 날란다대학교(Nalanda University) 유적지 입구에 도착했다. 주변에는 궁벽한 비하르주의 전형적인 작은 마을들이 흩어져 있었다. 엄청난 규모의 날란다대승원/대학교를 지탱했을 도시의 흔적은 찾아볼 없었다.

후대 번성했던 날란다대학교의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사실 날란다는 붓다가 살아 있을 때에도 거대한 왕국의 중심이었던 왕사성으로 향하는 무역로에 위치해 번영을 누리던 곳이었다. 붓다는 깨달음을 널리 전하기 위해 마가다왕국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는 동안 여러 차례 날란다를 방문하였으며 중요한 경도 여럿 설한 것으로 전한다. 날란다 인근에서 머물게 경우, 붓다는 암발랏티까(Ambalatthikā) 정원에 있는 왕의 객사(客舍)에서 하룻밤을 보내거나 부유한 상인이었던 파바리카가 소유했던 망고동산(Pāvārikambavana)에서 즐겨 머물곤 했다. 현장의 기록에 의하면, 5 명의 상인이 돈을 모아 망고동산을 사들여 붓다에게 보시했고, 붓다는 3 동안 설법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훗날 날란다대승원이 바로 망고동산 자리에 세워졌다.

날란다사원 주변 지역 지도

날란다란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분분하다. 현장의 기록에 의하면, 붓다가 전생에 이곳의 왕이 되어 보시하는 것을 기쁘게 여겼는데 이를 칭송하여 시무염(施無厭, 하염없이 베푼다)이라 했다고 한다. 의정은 가람의 남쪽 망고동산 가운데 못이 있었는데 못에 날란다라는 용이 살고 있었고 옆에 승원을 세웠기에 용의 이름을 따서 승원 이름을 날란다라 지었다고 기록했다. 현장은 이곳에 망고나무가 무성했고 중각의 용마루나 대들보의 용무늬 장식이 있었다고 승원을 묘사했다. ‘ 연꽃 혹은 지혜이고란다 주다라는 뜻으로 보아 날란다는지혜를 주는 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한자로는 지혜의 상징인 연꽃이 있는 이라는 뜻으로 나란타(那爛陀) 음사(音寫)한다.

사리불과 목건련의 고향

또한 조그만 마을과 주변 지역에는 붓다와 제자들과 연관된 이야기들도 많이 전한다. 붓다의 10대제자들 가운데서도 여러 비구들의 모범이 되고 승가의 질서를 유지하는 초기 교단의 버팀목이 되었던 상수제자, 사리불(舍利弗, Sāriputta) 존자와 목건련(, Moggallāna) 존자의 추억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지혜제일(智慧第一)’ 불리는 사리불은 날란다마을 촌장의 아들로, ‘신통제일(神通第一)’ 불리는 목건련은 건넛마을 꼴리따마을(Kolitagāma) 촌장의 아들로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 그들은 함께 붓다에게 귀의했고 수행·정진했으며,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같은 시기에 입적했다. 날란다 대학교 유적에서 남쪽으로 5 떨어진 곳에 있는 싸일로(Sailo) 마을은 두타제일(頭陀第一)’ 칭송 받는 마하가섭(摩訶迦葉) 붓다를 만나 붓다에 귀의한 곳으로 전하는 곳이다. 1900년대 , 이곳에서 마하가섭의 이름이 새겨진 규모의 조각상이 발견되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다.

날란다사원 경내 배치도

 

날란다사원의 구조와 기원

이른 아침 신선한 공기를 가르며 짙은 녹음이 우거진 진입로를 걸었다. 거대한 벽돌 건물의 담벼락이 만들어 좁은 통로에 들어섰다. 통로의 끝이 상당히 멀게 느껴져 유적의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있었다. 우리는 통로 중간에서 담벼락을 타고 건물 위로 올라갔다.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유적의 규모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웅장한 규모가 압도감을 주었다. 건물의 두께도 상당히 두꺼워 1m 족히 되어 보였다. 건물이 상당히 높았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승원1과 승원4 사이 통로의 모습

기록에 의하면, 모든 승방이 4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건물들은 대부분 윗부분이 소실되고 2층까지 남아 있었다. 샨텀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올라간 곳은 학생들이 기숙하던 방들이 배치된 곳이었다. 직사각형의 건물 벽을 따라 방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방에는 통로로 출입구가 나있었다. 그리고 앞에는 건물의 중앙에 있는 사각형의 중정을 향해 베란다가 있다. 건물의 입구를 향하고 있는 중정의 감실에는 붓다가 모셔져 있었던 듯하며, 주변에는 설법 또는 강의가 가능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날란다의 승가람은 거의 이와 유사한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아직 순례객과 관광객이 많이 보이지 않아 우리는 사람들에 의해 떠밀려 다니지 않고 느긋하게 장소를 음미할 있었다.

2층에서 바라본 전경. 승방들이 보인다.
승원의 1층 모습
승원의 1층 모습

붓다의 시대 이후 날란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날란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많은 부분이 7세기에 이곳을 방문했던 현장(玄奬)이나 의정(義淨) 같은 동양에서 유학승들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날란다의 연대를 있는 것은 5세기 굽타시대부터이다. 현장과 쁘라즈냐바르만(Prajnyavarman)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신라 유학승은 날란다사원이 샤크라디티아(Śakrāditya, 帝日王) 의해 창건되었다고 기록했다. 후에 샤크라디티아왕을 창건자로 새긴 문장(紋章) 발견되었다. 샤크라디티아왕은 5세기 굽타왕조의 황제였던 쿠마라굽타 1(Kumaragupta I, 415~455) 확인되었으며, 그의 동전이 날란다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건물 벽면에 많은 감실들이 있으며, 그 중에는 훼손된 붓다상이 있는 경우도 있고 비어 있는 경우도 있다.

굽타의 후기 제왕들과 바르다나(Vardhana) 왕조의 하르샤(Harsha, 戒日王, 606~647) 왕이 차례차례 승원을 중건 또는 확장하며, 날란다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하르샤왕은 스스로나는 날란다승원 비구들의 자처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고 한다. 왕은 100 마을의 세금을 날란다승가람에 공양물로 보냈으며, 200세대가 , 버터 우유를 공급하도록 했다고 한다. 따라서 스님들은 탁발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할 있었다.

당나라의 현장이 구법의 목적지인 날란다사원에 도착한 것은 장안을 떠난 3년이 지난 631년이었으며 바로 하르샤왕의 치세 중이었다. 현장의 방문 당시에는 많은 승원과 , 예불당이 하나의 외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사원으로 변해 있었다. 이곳에서는 대승과 소승을 두루 배웠으며 베다와 우파니샤드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뿐만 아니라 철학, 논리학, 수학, 과학, 천문학, 지리, 의학, 약학 다양한 학문이 다뤄졌다. 굽타시대부터 내려온 자유로운 문화적 전통 속에서 날란다사원은 9세기까지 성장과 번영을 이어나갔다.

승워 내부 통로의 모습

유식학파의 다르마팔라(Dharmapāla, 護法) 실라바드라(Śilabhadra, 戒賢) 등의 저명한 학승까지 배출하면서 날란다대학의 명성은 왕국의 경계를 넘어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인도뿐 아니라 아시아 각지에서 유학승들이 모여들었다. 현장 외에도, 밀교를 중국에 전한 중국 밀교의 개조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 선무외(善無畏, Śubhakarasiha) 모두 이곳에서 수학했고, 동진(東晋) 시대 최초의 인도 순례승(巡禮僧)으로 불국기(佛國記: 高僧法顯傳) 여행기를 남겼으며 많은 경전을 번역한 법현(法賢) 이곳 날란다대학의 동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라 출신의 혜업(慧業) 아리야발마(Aryavarma, 阿離耶跋摩) 이곳에서 공부하다 입적했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고구려 승려 9명도 이곳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혜초(慧超) 천축으로 길을 떠난 목적 역시 스승이었던 금장지의 권유로 바로 이곳 날라다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입학이 호락호락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당시 날란다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7세기 티벳 라마승 타라나타(Taranatha)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3세기에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Ashoka) 왕이 날란다에 있는 사리뿌따의 사리탑이 있는 장소에 거대한 사원을 건립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새롭게 발흥하던 대승불교의 교리를 체계화하는데 크게 기여한 3세기 중관파(中觀派, Mādhyamika) 시조 용수(龍樹, Nāgārjuna) 그의 제자 아리야데바(Āryadeva, 提婆) 날란다사원과 연관시키고 있으며, 특히 용수는 날란다사원의 수장이었다고 했다. 그는 또한 용수와 동시대인인 수비슈누(Suvishnu) 이곳에 108개의 사원을 건립했다고도 했다. 이것은 이미 3세기 이전에 날란다에 불교승원이 번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를 뒷받침할 있는 고고학적 발견은 없었다. 5세기에 사리뿌따의 입적지를 찾아 이곳을 방문했던 법현도 스투파만을 언급하고 있다.

사리뿌따스투파를 정면에서(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사리뿌따스투파를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사원3을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스투파로 접근하는 계단이 보인다.
사원3과 승원1B의 전경

날란다사원의 쇠퇴와 발굴

불교학 연구의 중심지로서 세계 최고최대의 사원대학이었던 날란다가 황폐화된 것은 무슬림 침공이 결정적이었다. 델리에 인도 최초로 이슬람국가를 세웠던 쿠투브 우딘 아이바크(Qutb-ud-din Aibak) 휘하의 장군 바크티야르 킬지(Bakhtiyar Khilji) 의해서 1199 날란다대학의 승가람들이 철저하게 파괴됐던 것이다. 미처 피신하지 못한 승도들은 무슬림 군사들의 칼에 죽고, 승가람의 모든 시설들과 대학의 장서들이 3개월 동안 연기를 내며 불탔다고 한다. 슬프고 안타까운 역사다. 도서관으로 이용되었던 방으로 알려진 곳으로 들어가 보니 까맣게 그을린 벽돌 벽이 보인다. 그때의 상흔이 크고 깊었음을 말해 주는 듯하다.

12 세기 무슬림 군대의 침공으로 불탄 자국
곳곳에 불에 그을린 자국이 보인다

이후 1861~1862 영국령 인도제국의 인도고고학조사위원회(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위원장이 알렉산더 컨닝햄(Alexander Cunningham)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던 날란다 유적을 공식적으로 조사했다. 1915년이 되어서야 위원회는 체계적인 발굴작업을 시작할 있었으며 1937 발굴작업을 종료했다. 1974~1982년에는 위원회의 번째 발굴작업과 복원이 진행됐다. 그리고 2016 날란다사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진흙으로 만들어진 날란다 문장(紋章), 날란다박물관 전시 중. 1860년대 컨닝햄의 현장조사에서 발견되었으며 날란다대승원 승가 공동체(Śrī-Nālandā-Mahāvihārīya-Ārya-Bhik ṣ usa ḿ ghasya)라고 새겨져 있다. (왼쪽); 9~10세기경의 또 다른 날란다 사원 문장. 보스턴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 소장 (오른쪽)

날란다 유적지에 대한 현재까지의 발굴은 동서로 244m, 남북으로 488m 이르는 12헥타르의 지역에 대해서만 이루어졌다. 실제 중세시대 날란다대학은 훨씬 넓은 지역에 걸쳐 펼쳐져 있었다. 10% 밖에는 발굴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많은 마을들이 여전히 중세시대 날란다대학 위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주변 들판에 봉곳이 솟은 언덕들이 모두 날란다대학 유적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사람들이 여전히 삶을 영위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에 발굴에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발굴작업으로 11개의 승원과 6개의 벽돌 사원이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30m 폭의 통로가 남북으로 있고, 통로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사원이, 오른쪽에는 승원들이 배치되어 있다. 승원의 규모와 승방들의 배치는 거의 동일한 모습을 보인다.

사원과 승원들 사이에 난 통로
봉헌탑들

경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남서쪽 끝에 있는 사원3이라고 이름 붙여진 사원 유적이다. 높이가 30m 이르는 스투파는 북쪽에서 계단을 통해서 접근할 있다. 최근에 다시 찾았을 때에는 보존을 위해서인지 접근금지 표지판이 가로막고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는 작은 스투파들이 산재해 있으며, 최초의 회반죽 작업은 북동쪽과 남동쪽 구석에 보존되어 있다. 사원이 중요한 하나의 이유는 최초의 사리뿌따 스투파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사원3 기원전 3세기부터 12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7차례에 걸쳐 증축 보수가 이루어졌다. 굽타(Gupta) 시대에 대규모의 스투파로 조성되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가장 많이 있는 층이 바로 이때의 이루어진 (다섯 번째) 증축이다.

경내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입구 방향으로 이동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인지 입구로 나오자 어느덧 많은 순례객들과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양편으로는 기념품 판매대가 줄지어 있어서 버스가 지나가려 치면 서로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맞은편에 있는 날란다고고학박물관(Archaeological Museum Nalanda) 둘러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날란다사원 입구가 순례객과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다 .
입구의 길 양편으로 기념품 판매대가 줄지어 있다.
붐비는 입구에서는 대형 차량이라도 지나치게 되면 혼잡이 매우 심해진다.

날란다박물관과 新날란다대승원

박물관까지 챙겨 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박물관으로 가는 길은 한산했다. 입구에는 사원 입구의 경쟁을 피해 이곳을 택했는지 구걸을 하기 위해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는 명의 노파와 아이들이 보였다. 이런 상황은 언제나 어렵다. 구걸에 맛을 들인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구걸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알게 되면서 개인적으로 돈을 주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왔다. 그래도 노파들에게는 무슨 밝은 미래가 있겠는가 싶어 몰래 노파에게 100루피를 주고 말았다. 조금 놀란 표정으로 연신 고맙다는 표시를 한다. 이래도, 저래도 마음이 편치 못하다.

1917년에 건립된 날란다박물관에는 날란다대승원/대학교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유물 350 가량이 전시 중이며, 13,000 이상의 유물이 추가로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날란다사원의 유적을 둘러보다 보면 비어 있는 감실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날란다사원이 한창 번성했을 이들 감실에 어떤 유물들이 채우고 있었을까 궁금했는데,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궁금증을 조금은 해소할 있었다.

중세의 날란다대학을 현대에 되살리려는 시도로 1951 날란다사원 유적지 인근에 新날란다대승원(Nava Nalanda Mahavihara) 설립되었다. 빨리어 불교 연구센터는 인도 초대 대통령 라젠드라 프라사드 박사(Dr. Ragendra Prasad) 제안으로 비하르주 정부에서 건립했다. 그리고 2006년에는 정식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날란다를 현대적인 국제 대학으로 되살리려는 제안은, 처음에 인도에서 시작되긴 했지만, 처음부터 범아시아적인 노력이었다. 계획은 2007 1 필리핀 세부에서 개최된 동아시아 정상회담에 참석한 16개국 정부에 의해 승인되었다.

新날란다대학 건물 전경

새로운 날란다대학 건립자들의 꿈은 단순히 일류 대학을 세우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이 꿈꾸었던 것은 중세 날란다대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국경을 넘어선 협력과 생각의 교환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2014 91 마침내 15명의 학생으로 학기가 소박하게 시작되었다. 중세 날란다대학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날란다대학이 세계 사상 흐름의 중심에 우뚝 서는 날을 소망하며 날란다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