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라지기르, 제국의 중심이자 붓다 한평생의 활동 중심지

붓다가 살아 있던 기원전 6세기경 고대인도에 16대국이 있었는데, 가운데 강대했던 왕국, 마가다(Magadha) 코살라(Kosala)에서 붓다의 가장 많은 활동과 후원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가다왕국은 당시 빔비사라(Bimbisara, 頻婆娑羅) 왕이, 코살라왕국은 파세나디(Prasenjit,波斯匿) 왕이 각각 다스리고 있었다. 라지기르(Rajgir, 고대 Rājagaha) 마가다국의 번째 수도였으며, 후에 수도가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 옮겨갈 때까지 비하르(Bihar) 궁벽한 이곳에서 왕은 거대한 제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왕사성(王舍城) 바로 이곳 라지기르이다. 평지를 시간째 달리고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마가다 땅에 도착하자 우리 일행은 모두 감탄사를 연발했다.

인도의 대부분의 시골마을들이 그렇듯 이곳도 사거리 주변에 형성된 시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어 그나마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의 온기를 느낄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버스정류장과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위한 조그마한 호텔과 식당들이 늘어서 있었다. 호텔과 식당들은 주로 내국인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듯했다. 그러나 2600 북인도에서 가장 크고 번성했던 도시가 누렸을 부귀와 영화를 가늠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붓다는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29세에 출가해 사문(沙門, śramana) 길을 걸었다. 기원전 6세기경 사문운동은 갠지스강 중상류 지역에 걸쳐 활발히 번지고 있었으며, 특히 왕사성 지역을 중심으로 가장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붓다 역시 출가 직후 이곳 왕사성으로 왔으며, 빔비사라왕을 만나게 된다. 젊은 탁발 수행자의 범상치 않은 외양에 감탄한 왕은 영토의 일부를 줄테니 이곳 왕사성에 머물기를 요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왕은 이후 깨달음을 얻어 깨우친 이가 되면 이곳을 방문하여 깨달음의 법을 전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이렇게 시작된 붓다의 라지기르와의 인연은 대반열반(大般涅槃, parinirvāa) 향한 생의 마지막 여정을 위해 이곳을 떠날 때까지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진다. 라지기르는 어느 곳을 가든 붓다의 발자취와 숨소리를 느낄 있다.

라지기르 지역 지도

영산회상의 현장, 영축산(기사굴산)

우리는 서둘러 흔히 영축산(靈鷲山)으로 알려진 기사굴산(闍崛, Griddhakuta)으로 향했다. 날개를 접고 앉아 있는 독수리 모양의 바위 때문에 독수리봉(Vulture Peak)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붓다가 자주 찾던 좋아하는 수행처였으며, 많은 설교를 행한 장소이기도 했다. 특히 「반야심경」, 「법화경」, 「능엄경」, 「대반야경」 등의 중요한 대승경전을 이곳에서 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과 같이 「법화경」이 크게 유행한 지역에서 순례객에게는 영산회상(靈山會上) 현장이며, 반야공(般若空, Śūnyatā) 처음 설해져 2전법륜이 이루어진 의미가 있는 장소이다.

기사굴산의 독수리봉. 독수리 모양의 바위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아래 주차장에 도착하자 마치 인도에서 흔히 마주치는 시골의 어느 노후한 테마파크 입구에 당도한 느낌이 들었다. 금방 이유를 있었다. 간단한 식사와 음료수 그리고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을 지나자 영축산으로 오르는 왼편에 다보산(多寶山, Ratnagiri) 정상까지 운행되는 낡은 삭도(ropeway) 출발역이 있었다. 독수리봉이 내려다 보이는 다보산 정상에는 일본불교에서 「법화경」을 소의로 하는 법화계열의 신생종파인 일본산 묘법사에서 세계 도처에 건립한 80개의 세계평화탑(Vishwa Shanti Stupa) 가운데 하나가 있다. 일본정부가 오래 전에 설치해 탓에 낡아서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삭도가 지역주민과 인도 관광객들에게는 하나의 지역명소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보산 꼭대기까지 운행되는 낡은 삭도

다보산 정상의 평화탑에서 산길을 따라 15분만 걸으면 독수리봉에 닿을 있지만, 우리는 옛날 빔비사라왕이 독수리봉에서 정진 중인 붓다를 방문하기 위해 울창한 숲속으로 처음 냈다는 바로 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지금은 보도블록으로 포장된 빔비사라왕의 길을 따라 독수리봉 근처에 다다르자 붓다가 정진하거나 밤을 보내기 위해 사용했다는 번째 동굴이 나왔다. 그리고 현장의 기록에 따르면, 아난다(阿難陀, Ānanda) 1 결집 직전에 바로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고 아라한(阿羅漢, arahant) 되었다고 한다. 굴의 입구는 바위들로 가려져 있어 길에서 보이지 않으며, 입구의 바위에는 수많은 순례객들이 금박종이로 신심을 남겨놓으려 금칠이 되어 있었다. 동굴 안은 그리 넓지 않았으며 높이도 낮아 고개를 조금 숙여야 했다. 우리는 각자 명상을 하거나 공간의 분위기를 몸으로 느끼며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

빔비사라왕의 길의 현재 모습과 주변 정경

1차결집 직전에 아난다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하는 아난다굴

조금 올라가면 독수리봉 바로 아래에 붓다가 자주 머물던 멧돼지굴(Sūkarakhatalena, 野猪窟) 있으며, 붓다는 이곳에서 사리불(舍利弗, Sāriputta) 조카인 고행자 디가나카에게 디가나카경(Dighanakha Sutta, 長爪經) 설한 것으로 전해진다. 함께 있던 사라불은 경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하얀 옷을 입고 동남아에서 듯한 무리의 여성 순례객들이 굴을 가득 메우고 앉아 동행한 스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우리는 내려오는 길에 살펴보기로 하고 그대로 지나쳐 계속 위로 향했다.

붓다가 자주 머물렀다고 전하는 멧돼지굴

멧돼지굴에서 독수리봉 정상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거대한 바위를 기어 올라가야 하는데, 바위 가운데로 기묘하게 기어 올라갈 있도록 생긴 틈이 원래 길이라고 했다. 붓다도 틈으로 올랐으리라. 지금은 나이 많은 순례객들도 쉽게 오를 있도록 바위의 바깥을 시계 방향으로 돌아 올라갈 있도록 길을 만들어 놓았다. 금방 독수리 머리 모양의 바위를 지나면 전경이 뜨인 정상이 펼쳐진다. 100 명의 사람들이 앉아 설법을 들을 있는 설법대(說法臺) 설법좌(說法座) 벽돌과 콘크리트로 설치되어 있었다. 단체로 방문하는 많은 순례객들을 위한 배려일 듯싶었다.

다보산의 세계평화탑에서 내려다 독수리봉의 모습

하지만 붓다 시대에는 아직 벽돌이 출현하기 이전이므로 독수리봉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5세기에 이곳을 찾았던 법현은 독수리봉이 아무도 찾지 않는 황량한 곳이 되어 있었으며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야생동물이 자주 출몰하는 위험한 곳이었다고 기록했다. 그로부터 2세기 후에 영산회상의 현장을 찾은 현장은 이곳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으며, 특히 주변의 동굴과 중요성에 대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모두 그가 남긴 기록 덕분이다. 우리 일행만 남아 있는 지금의 독수리봉 정상은 너무 고요했다. 이곳에서도 우리는 잠시 동안 각자의 방식으로 공간을 느끼기로 했다. 나는 설법대 난간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눈을 감았다. 정상의 시원한 바람이 얼굴과 목덜미에 느껴졌다. 2600 붓다의 얼굴과 목덜미에도 바람이 닿았을까? 같은 입자의 바람은 아니었을테지만.

독수리봉 정상의 설법대와 설법좌의 모습

독수리봉에서 내려오는 길에 우리는 당시 명의였던 지바카(Jivaka) 붓다에게 기증했다는 망고승원(Jivakamravana Vihara) 들렀다. 앙심을 품은 사촌 데바닷타(Devadatta, 提婆達多) 붓다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해 굴린 바위에 부상을 입었을 때에도 이곳에서 치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건물 기초만 남아 있지만, 1954~55년에 이루어진 인도고고학조사위원회(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발굴작업에서 개의 타원형 회관 터가 발견되어 지바카의 망고승원이 있던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기단부만 남아 있는 지바카의 망고승원

도로를 따라 1 서쪽으로 가면 태자의 왕위 찬탈 빔비사라왕이 갇혀 있던 감옥터가 있다. 2m 두께의 석벽과 둥근 형태의 보루를 갖춘 아주 굳건한 구조물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발굴 과정에서 칸에서는 족쇄가 발견돼 이곳이 감옥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라지기르 도시를 건설했고 고대인도의 16대국 하나였던 동쪽의 앙가(Anga) 국을 병합하여 후에 마우리아 왕조 확장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 받는 위대한 마가다국의 황제였으며, 붓다의 친구이자 굳건한 후원자였던 빕비사라왕은 결국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감방의 창문을 통해 붓다가 정진하고 있는 독수리봉을 바라보는 것으로 마지막 통한의 시간을 견뎌야 했을 빔비사라왕과 말년에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의 비참한 말로를 지켜봐야 했던 붓다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이곳에서 바라본 독수리봉은 직선거리로 1.9 달해 육안으론 명확한 구분이 어려워 보였다. 어디쯤에 가까운 벗이자 정신적 의지처가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마음의 위안이 되었길 바랄 뿐이다.

빔비사라왕의 한이 서려 있을 빔비사라감옥

라지기르는 인도의 어느 곳보다 많은 말이 끄는 마차, 통가(tonga) 자랑한다.

아자타삿투 스투파

다음 아침 우리는 죽림정사(Venuvana Vihara, 竹林精舍)에서 일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호텔에서 길을 나선 우리는 동선의 편의상 죽림정사 입구에서 북동쪽으로 4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아자타삿투 스투파에 먼저 들렀다. 돌무더기와 돌기둥들만 남아 있는 구릉은 아자타삿투(Ajātasattu) 왕이 자신의 몫으로 받은 붓다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축조한 스투파로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가까운 교외의 평야지대에 아자타삿투가 지은 新왕사성이 있다. 지금은 돌로 만든 성벽만이 일부 남아 있다. 그의 아버지인 빔비사라왕이 건설한 舊왕사성은 다섯 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요새로, 산의 능선을 따라 돌로 쌓은 40 외성벽과 흙으로 쌓은 7 내성벽으로 둘러싸인 일종의 산성이었다. 마가다왕국은 아자타삿투의 치세에 북인도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으로 부상하게 되며, 그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산성에서 나와 평야에 자신의 요새를 구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돌로 만든 성벽만이 일부 남아 있는 아자타삿투의 新왕사성은 도로변 가까이에서 있다.

많이 훼손된 도로변에 노출되어 있는 아자타삿투 스투파

아자타삿투 스투파 주변의 무슬림 무덤들은 스투파 훼손의 이유를 짐작할 있는 일면을 제공한다.

최초의 불교사원, 죽림정사

죽림정사에 도착하자 입구 근처의 길가엔 기념품을 판매하는 노점상들이 도로를 점유하고 교통 흐름을 방해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의 주차장에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려고 일찍 호텔을 나섰을 단체 순례객의 버스들이 쪽에 주차되어 있고, 매표소 부근에는 여인네들이 물건을 바닥에 펼치고 말도 통하지 않을 순례객들에게 애처로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소란스러움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서자 나무들, 연꽃연못, 산책로, 화단 등으로 구성된 조용하고 쾌적한 공원이었다. 대나무숲을 예상했었지만 생각보다 대나무는 적고 나무들과 화단이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붓다가 깨달음을 이루고 왕사성을 찾았을 , 그의 불법에 감명을 받은 가란타(迦蘭陀, Kalanda) 장자(長者) 자신이 소유한 대나무숲을 헌상하고 빔비사라왕이 여기에 승원을 건립하여 붓다와 제자들이 머물 있도록 기증했다고 전해지는 최초의 불교 정사, 사찰이다.

가란타연못의 정경

성에서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 있고, 오가는 것이 자유로우며, 사람들이 언제나 쉽게 접근할 있고, 낮에는 인적이 드물고 밤에는 고요한 곳으로 수행자들이 머물기에 안성맞춤인 죽림정사는 이후 나타나게 불교승원을 위한 전형을 보여 주게 된다. 붓다가 3개월의 우기(雨期) 동안 모든 비구들이 안거(安居, vassā) 지키도록 제도화한 것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이로서 비구들은 기간 동안 좀더 진지하게 정진하고 우기에 작물에 피해를 주거나 자기도 모르게 곤충을 죽이는 일을 피하도록 곳에 머물게 되었다. 붓다는 성도 번째, 번째, 번째, 열일곱 번째 그리고 스무 번째 해의 안거를 왕사성, 특히 이곳 죽림정사에서 보냈다. 또한 이곳 죽림정사에 머물 불교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사리불과 목건련(, Moggallā) 같은 많은 제자들이 귀의해 왔으며, 많은 중요한 경을 설한 것으로 전해진다.

빨리어 경전에는 다람쥐에게 먹이 주던 , 공작새에게 먹이 주던 , 연꽃연못 여러 장소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대나무숲을 바쳤던 장자의 이름을 따서 가란타연못(Kalanda Tank)이라 불리는 연꽃연못만을 확인할 있을 뿐이다. “죽림정사에서 북으로 200 가면 가란타연못에 이른다. 물은 맑고 팔공덕을 갖추고 있었으나, 붓다의 열반 말라버렸다.”라고 현장법사는 기록했다. 7세기에 이곳을 찾은 현장이 붓다가 목욕을 했다고 알려진 말라버린 연못의 흔적까지 확인할 있었는지는 없으나, 지금의 연못은 1956 불멸(佛滅) 2500 기념사업으로 인도고고학조사위원회에서 현장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근거로 발굴하여 복원해 놓은 것이다.

연못을 발굴하는 과정에 5세기 굽타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이 하나 발굴되어 현재 파트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왔을 승원의 흔적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현재의 죽림정사 남쪽 나지막한 언덕에 무슬림 무덤들만이 여기저기 들어서 있어 오랜 세월 땅이 겪었을 굴곡을 짐작케 뿐이었다.

죽림정사 남쪽에 있는 무슬림 무덤들

1 결집의 현장, 칠엽굴

죽림정사를 나온 우리는 붓다의 입멸 직후 있었던 1 결집(結集) 현장으로 전해지고 있는 칠엽굴(七葉窟, Sattapani) 향했다. 비바라(Vibhara, 고대 Vebbara) 꼭대기에 위치한 칠엽굴을 향해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산의 동쪽 기슭에 바로 온천이 나타났다. 붓다도 이곳에서 온천욕을 즐겼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락시미나라얀사원(Lakshminarayan Temple) 속해 있는 유명한 온천이다. 7개의 온천에서 솟아나는 물은 효험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많은 힌두교도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위층의 탕에서는 높은 카스트의 사람이 깨끗한 온천수에 목욕을 하고, 물이 아래층으로 보내지면 다음 카스트에 속한 사람들이 목욕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제일 아래층에서는 비눗물에 더러워진 물에서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몸을 씻고 있었다. 외국인은 카스트제도 바깥에 위치하여 모든 카스트 계층보다 천한 신분이라고 들은 것이 기억났다. 제일 아래층에서 사용하고 나면 물을 사용해야 같아 발걸음을 서두르기로 했다.

제일 카스트가 목욕하는 장면(왼쪽); 아래층의 목욕 장면(오른쪽)

힌두교 사원에서부터는 정상까지 돌계단이 깔려 있었다. 칠엽굴까지 아무런 안내판이 없었으며, 돌계단도 정상부에 있는 자이나교 사원에 가는 사람들을 위해 깔려 있는 같았다. 사원에서 100m 올라가다 보면 피팔리돌집(Pipphali Stone House) 있다. 1895년까지만 해도 구조물 뒤쪽에 지붕 부분이 무너진 자연동굴이 있었다고 한다. 빨리어 경전에서 붓다의 십대제자 으뜸이었으며 붓다의 열반 20년간 승가를 이끌었던 마하가섭(摩訶迦葉, Mahākassapa) 머물던 곳으로 묘사된 피팔라굴(毘鉢羅窟, Pippala Cave) 바로 이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40 정도 돌계단을 올라가면 정상부에 자이나교 사원이 나오는데, 사원을 조금 미쳐 오른 쪽으로 모퉁이를 돌면 칠엽굴에 이르게 된다.

칠엽굴 가는 길가에 있는 피팔리돌집의 모습

칠엽굴 정경

붓다의 가르침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차츰 소멸되어 간다든지, 잘못 전해진다든지, 혹은 해석상의 이론(異論) 제기되는 경우 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500명의 제자들이 한곳에 모여서 각기 기억하고 있던 교법을 함께 합창하여 서로 확인을 거친 정리하는 모임, 결집을 이곳에서 단행했다. 결집 모임을 이끌었던 상좌는 마하가섭이었으며, 아난다가 교리 부분을 암송한 반면 우바리(優婆離, Upāli) 계율 부분을 암송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하여 1 결집에서 경장과 율장이 편찬되었으며, 이것은 근본경전으로서 후대 불교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붓다의 입멸로 구심점을 잃을 있었던 승가는 결집을 통해 붓다가 열반 직전에 유훈처럼 남겼던 오로지 진리만을 의지처로 삼아 정진 있는 교단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바위산 정상에 개의 동굴이 있고 동굴 앞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번째 들었던 생각은 여기서 500명이 모여 결집을 행할 있었을까 라는 점이었다. 그러기엔 장소가 협소해 보였다. 동굴로 들어가자 처음에는 넓더니 점점 좁아졌다. 조금 들어가자 동굴이 둘로 갈라지고 어두컴컴해서 이상 들어가기는 어려웠다. 번째 동굴도 번째 동굴처럼 중간에 둘로 갈라졌다. 동굴 안을 모두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넓어 보이지는 않았다. 일곱 개의 동굴 입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부에 일곱 가지의 동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칠엽굴이라 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런데 후에 동굴이 뒤편 힌두교 사원까지 뚫려 있어 옛날에는 동굴을 통해 그곳까지 있었으나 지진이 뒤로 굴이 막혀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동굴 내부에 일곱 가지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지인들을 위한 피크닉 장소로 이용되고 있는 고라카토라호수의 한가운데에 좀더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보드가야의 대불상보다 불상을 설치하려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땅에서 오래 꿈을 펼쳤던 제국의 영예도 붓다의 활동도 이곳을 찾는 방문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도 현지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했다. 그들은 단지 뛰어난 치유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성스러운 온천을 찾아서 또는 라지기르 도처에 산재한 자이나교 사원들을 참배하기 위해 이곳을 찾고 있다. 라지기르는 땅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아직 충분히 펼치지 하고 있는 같아서일까 떠나는 발길이 못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