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사르나트,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최초로 전법을

거룩한 스승은 그때 여러 수행자들 앞에서 사자가 숲속에서 포효하듯 법을 설하고 계셨다숫타니파타 1015

낡은 탑과 벽돌 기단만 남아 있는 현재의 사르나트(Sarnath) 모습은 종교적, 역사적 중요성에 잠시 의문이 들게 수도 있다. 바라나시에서 북동쪽으로 10km 떨어진 이곳은 석가모니 붓다가 나이란자나(Nairanjana, 尼連禪河) 강변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 250km 걷고 갠지스강을 건너 당도했던 곳이다. 나이란자나 강변의 우루벨라(Urvella) 마을에서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다섯 도반(道伴) 찾아 길을 걸어 참이었다. 이들 다섯 고행자들은 고행의 이외에는 영혼구원에 이를 있는 길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고타마가 고행을 멈추자 그가 구도의 길을 포기한 것으로 알고 그의 곁을 떠났던 것이다.

이른 아침 비행기로 델리를 떠나 바라나시(Varanasi, 또한 Benares, Banaras, Kashi로도 알려짐) 도착해 호텔에 간단히 여장을 풀었다. 서둘러 다시 길을 나선 우리는 복잡하고 혼잡한 길을 헤치고 30분을 달려 초전법륜지 맞은편에 있는 사르나트고고학박물관(Archaeological Museum Sarnath) 앞에서 내렸다. 입구의 조그만 광장에는 각국에서 찾아온 단체 순례객들과 관광객들이 뒤섞여 있었고, 이들을 상대로 장사꾼들은 호객행위에 열심이었고 무리의 아이들과 아기를 안은 여인들은 구걸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들 사이에서 소들과 개들도 배를 깔고 누워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거나 먹을거리를 찾아 킁킁거리며 헤집고 다닌다. 이런 가운데 관광객을 태우고 대형버스와 소형차량들은 주변에 주차하느라 그리고 검은 배기가스를 내뿜으며 손님을 싣고 오토릭셔들은 연신 경적을 울리느라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사르나트 주변 지역 지도

초전법륜

우리는 먼저 초전법륜지를 살펴보기로 했다. 우리를 안내하던 샨텀이 매표소로 우리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를 설명하자 책임자가 나와 우리를 서둘러 입장시켰다. 부산스러운 입구 광장을 뒤로 하고 안으로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사방이 고요해졌다. 경내에도 많은 순례객들과 관광객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소리를 내거나 소란을 피우는 사람은 없었다. 군데군데 모여서 낮은 소리로 경을 암송하거나 도란도란 설법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또는 홀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명상을 하는 이들도 보였다.

붓다는 도시 외곽에 있던 이곳 녹야원에서 다섯 고행자들은 발견했다. 이곳은 당시 리쉬빠따나(Rishipattana) 또는 이시빠따나(Isipatana) 불리던 곳으로 성인(聖人) 발을 디딘 곳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이곳의 다른 이름은 미가다야(Migadaya 혹은 Mrigadaya) 사슴공원, 녹야원(鹿野苑)이라는 뜻이다. 현재의 지명인 사르나트(Sarnath) 녹야원의 기원과 관련된 붓다의 본생담(本生譚, Jataka)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슴왕 사란가나타(Saranganatha)에서 유래했다. 사슴왕은 새끼를 어미사슴을 대신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려 하며 자비심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우루벨라 마을에서 고행을 함께 했던 콘단냐(Kondanna), 밧디야(Bhaddiya), 왑빠(Vappa), 마하나마(Mahanama), 앗사지(Assaji), 이렇게 다섯 도반에게 보리수나무 아래에서의 깨달음에 대한 최초의 설법을 행하였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개의 치우친 길이 있다. 수행자는 어느 쪽에 기울어져서도 된다.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관능이 이끄는 대로 욕망과 쾌락에 빠지는 일이니, 그것은 천하고 저속하며 어리석고 무익하다.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에 열중하는 고행인데, 또한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성스럽지 못하고 무익하기는 마찬가지다. 비구들이여. 나는 개의 치우친 길을 버리고 올바른 , 중도(中道) 원만히 깨달았노라. 중도에 의해서 통찰과 인식을 얻었고, 평안과 바른 깨달음과 눈뜸과 열반에 이르렀노라.”

최초의 설법에서는 중도(中道) 이외에도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 삼법인(三法印) 연기법(緣起法) 설한 것으로 전법륜경(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 전해 오고 있다.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을 행한 것을 가리켜 흔히 비유적으로 최초로 (가르침) 바퀴를 돌렸다는 뜻으로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말한다. 바퀴는 인도의 고대 전투에서 사용되던 무기인 전차를 상징하며, 인도신화에서 윤보(輪寶) 가지고 전세계를 지배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처럼 석가모니 붓다도 진리의 가르침으로 일체중생 사이에서 미혹을 깨뜨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설법을 들은 다섯 수행자들은 붓다의 제자들이 되었다.

다섯 도반이 녹야원에서 부처의 최초 설교를 듣고 있는 모습. 쌍의 사슴이 이곳이 사르나트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위에는 법륜(法輪) 부처를 대신하고 있다.

그리스 문화에 영향을 받은 간다라 풍의 초전법륜 조각상.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은 붓다가 오른손으로 법륜을 돌리고 있으며 삭발한 다섯 비구가 옆에서 붓다의 설교를 듣고 있다. 뭄바이 역사박물관(Chhatrapati Shivaji Maharaj Vastu Sangrahalaya) 전시 , 위키피디아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당시에는 카시(Kashi) 불리던 도시 부유한 상인의 아들인 야사(耶舍, Yasa) 그의 친구들 54명이 붓다에게 귀의해 비구가 되었다. 방황하던 아들의 행복한 모습에 야사의 아버지는 최초의 재가신도가 되었고, 어머니는 최초의 여성 재가신도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사르나트는 ()·()·() 삼보(三寶) 형성되었고 비구, 우바새 우바이 비구니를 제외한 최초의 승가가 꾸려지면서 전도의 기틀이 마련된 뜻깊은 장소가 되었다. 붓다는 깨달음 이후 우기(雨期) 안거(安居 ) 이곳에서 보내게 되었으며, 기간에 전법륜경 비롯해 10 개의 경을 설한 것으로 전해진다. 60명의 제자들은 붓다와 함께 우기를 보내며 모두 아라한과를 얻었다. 안거가 끝나자 붓다는 영축산이 있는 마가다(Magadha, 摩揭陀) 수도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 향했다.

녹야원 경내 지도

바나라스(Banāras) 왕들과 부유한 상인들의 후원 아래에 이곳의 불교상가는 12세기 투르크계 무슬림의 침공이 있을 때까지 1,500 동안 번창했다. 초기 18부파 가운데 독자부(犢子部, Vātsīputrīya)에서 분파한 정량부(正量部, Sammitīya) 본산(本山) 사르나트에서 강한 교세를 펼쳤으며, 나중에는 금강승(밀교) 수행이 퍼지기도 했다. 7세기에 이곳을 방문한 현장은 바나라스 주위를 둘러 지역에는 모두 30 개의 승원과 3 명의 비구들이 수행하고 있으며, 사르나트에는 1,500명의 소승(上座部, Theravāda) 비구들이 수행공동체를 형성하고 있고 승원은 상당히 규모가 크고 지붕은 금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법당 중앙에는 법륜을 굴리는 붓다의 소상이 있었음을 그의 여행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기록하고 있다.

대법안탑(다메크스투파)

대법안탑((Dhamekh Stupa) 모습

우리는 자연스럽게 샨텀을 따라 붓다가 설교를 행하였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리에는 독특한 모습의 거대한 붉은 탑이 자리잡고 있었다. 각국에서 순례객들이 대법안탑(大法眼塔, Dhamekh Stupa) 삼삼오오 시계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머리를 숙이고 합장한 숙연한 모습으로 탑돌이를 하는 순례객들은 한결같이 2600 같은 공간에 있었던 붓다를 마음 속으로 맞이하려는 듯했다. 탑돌이를 마친 순례객들은 주변의 풀밭이나 그늘을 찾아 자리를 잡고 전법륜경을 나지막이 암송하거나 초전법륜에 대한 설교를 듣는다. 그리고 가끔 붉은색의 승려복은 입은 티벳 승려들이 종교의례를 벌이고 있기도 하고 붓다를 추모하여 108배를 올리거나 기름램프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수도 있다.

무리의 스리랑카 순레객들이 동행한 스님의 설교를 듣고 있다.

우리 일행도 대법안탑이 바라보이는 곳에 모여 앉아 샨텀으로부터 이곳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의 인도에 따라 명상을 했다.

대법안탑에서 중인도서 왔다는 인도인 불교도 가족을 만났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대법안탑 둘레를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곳곳에 검은 그을음이 눈에 들어왔다. 순례객들 가운데 종교적 활동의 하나로 촛불 등을 탑에서 너무 가까이에 밝히면서 발생한 것으로 보였다. 개인적 종교활동으로 인류에게 중요한 역사 유적에 손상이 되는 행동이 이루어지고, 허용되고 있다는 점이 얼른 이해되지 않았다. 이후에 보드가야 사원구역 관리위원회(Bodhgaya Temple Management Committee) 총무를 만났을 , 붓다의 유적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문제를 제기해 봤다. 그는 이곳들이 역사 유적지이기도 하지만 현재 세계의 불교도들의 종교적 활동이 진행되고 있는 살아있는 사원들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된다는 입장이었다. 종교적 활동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인도인들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대법안탑을 다시 찾았을 때에는 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초와 향을 피울 있는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법안탑 앞으로 좌우에 많은 승원들의 유적들이 보인다. 그리고 대법안탑 뒤로 멀리 배경에 뽀족탑처럼 보이는 것이 대각회에서 세운 물라간다꾸띠비하라이다.

녹야원 입구에 들어서면 멀리서부터 눈에 들어오는 대법안탑의 명칭은 대법륜탑(大法輪塔, Dharma Chakra Stupa)이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서기 1026년에 팔라(Pala) 왕조의 마히팔라 1(Mahipala I) 의해 진흙으로 구워 제작된 봉헌명판에는 탑이 Dhamaka(산스크리스트어 Dharmacakra) 새겨져 있었다. 붓다가 설교를 행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이름 다메크(Dhamekh) 원래 명칭인 Dharma Chakra 왜곡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사르나트 발굴작업을 주도했던 영국인 알렉산더 컨닝햄(Alexander Cunningham) 붓다의 사리함을 찾기 위해 탑의 중심부를 기단부까지 수직갱도로 파내려 갔으며 정상에서 91.4cm 지점에서 제법(諸法) ()에서 생긴다.…”라는법신게(法身偈)’ 6~7세기 브라미어(Brāhmī) 새겨진 석판을 발견했다. 그리고 아랫부분에서는 마우리아(Maurya) 시대 벽돌로 만들어진 탑의 윤곽을 확인한 것으로 전하다.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Ashoka) 왕은 기원전 268년부터 232년까지 인도의 거의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249 녹야원을 찾아 최초의 설법이 이루어진 바로 이곳에 탑을 조성했다. 굽타(Gupta) 왕조 시대인 서기 500년에 이르러 대규모의 증축이 이루졌고, 이후로도 추가적인 증축이 수차례 있어 왔으나 상층부는 여전히 미완인 상태로 남아 있다. 아마도 탑의 기저부는 아쇼카 시대까지 거슬러올라 같다. 탑의 직경은 기단부에서 28.5m이고 높이가 33.35m 이른다. 기단부를 포함한 탑의 총높이는 42.6m이다. 탑의 구조는 지상 11.2m 높이까지 원통형으로 돌을 쌓았고 위에 다시 원통 모양으로 붉은 벽돌을 쌓아 올렸다. 지상에서 6m 높이의 외벽에는 8정도를 의미하려 했었던 8개의 감실(龕室) 있어 붓다가 모셔져 있었을 터지만 지금은 공간만 덩그렇게 매달려있다. 감실 주변과 아래에는 , 인간, 기하학적 무늬, 만자(卍字), 굽타시대의 화려한 문양들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대법안탑의 외벽 표면에 조각되어 있는 화려한 문양들

물라간다꾸띠비하라 유적

대법안탑에서 발길은 자연스럽게 많은 사원터와 봉헌탑들을 지나 물라간다꾸띠비하라(Mulgandhakuti Vihara, 근본정사) 이어진다. 지금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사원의 앞뜰을 지나면 사원의 본당에 이른다. 앞에는 열주가 받치고 있었을 직사각형의 현관 입구인 만다파(mandapa) 있었을 것이고 본당의 입구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본당은 붓다가 하안거(夏安居) 기간 동안 녹야원에 머물 명상을 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본당은 주변보다 높이 올려진 정사각형의 기틀 위에 조성되었으며, 변의 길이가 18.29m이다. 그리고 2m 두께의 벽이 5m 높이로 있다. 벽의 두께와 현장법사의 기록으로 , 본당의 높이는 60m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내부 면적은 변이 13m 정사각형이며, 7세기에 이곳을 방문했던 현장법사가 금속 붓다상이 모셔져 있었다고 묘사했던 내실(內室) 바닥이다. 본당은 서기 2~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528 붓다가 우기(雨期) 안거(安居) 보낼 있도록 다섯 비구들이 나뭇잎으로 조그만 오두막을 세웠던 자리 위에 세워졌다. 발굴과정에서 서기 1세기의 보살상과 사원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이 발견되었다.

주변보다 조금 높이 올려져 조성된 물라간다꾸띠비하라의 본당

물라간다꾸띠비하라의 본당 내실 바닥

아쇼카 석주

물라간다꾸띠비하라 본당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부러진 아쇼카 석주(石柱) 철책 속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 춘나(Chunar) 지역의 사암(沙巖)으로 만들어진 석주는 기원전 3세기에 아쇼카왕이 세웠을 당시에는 15.25m 높이였으며, 석주의 꼭대기에는 마리의 사자상과 법륜(法輪) 조각상이 얹혀져 있었다. 원통형의 석주는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가늘어지는데, 기단부에서는 직경이 71.1cm, 정상부는 55.9cm이다. 돌기둥은 델리에 인도 최초로 이슬람국가를 세웠던 쿠투브 우딘 아이바크(Qutb-ud-din Aibak) 1194 바라나시와 사르나트를 파괴하면서 여러 조각으로 부러지고 말았다. 마우리아왕조 시대의 뛰어난 예술 수준을 보여주는 기둥머리 사자상은 마리의 사자가 등을 맞대고 앉아 사방으로 포효하고 있는 모습으로 이곳에서 부처가 베푼 최초의 가르침이 사방으로 널리 울려 퍼져나감을 상징한다. 사자 기둥머리는 현재 사르나트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인도정부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기둥머리 기저부에 4 나타나는 24개의 바퀴살을 가진 법륜은 인도의 국기에 등장한다. 기둥머리에도 마리의 사자 머리를 덮고 있는 법륜이 있었으나 현재는 유실된 상태이다.

철책의 보호를 받고 있는 부러진 아쇼카 석주

아쇼카 석주에 새겨진 글귀(왼쪽); 기둥머리 사자상(오른쪽)

석주에는 별개의 가지 글귀가 새겨져 있다. 가장 오랜 것은 마우리아 시대 브라미어로 새겨진 아쇼카왕의 칙령으로 승가(僧伽) 내의 분열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번째 글귀는 쿠산왕조에서 코삼비 바라나시를 통치했던 코삼비의 아슈바고사(King Ashvagosha) 40 번째 겨울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초기 굽타시대 브라미어로 새겨진 번째 글귀는 소승 독자부(犢子部, Vātsīputrīya) 정량부(正量部, Sammitīya) 스승들을 언급하고 있다. 여전히 자리에 서있는 석주의 기단부에 새겨져 있는 아쇼카왕의 칙령은 장소의 숭고한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아쇼카왕은 승가 내의 분열을 경계하며 분파주의자는 승가에서 착용하는 노란색 승복 대신 하얀색 옷을 입고 승가를 떠나도록 명령한다. 또한 재가신도들이 포살(布薩, Uposatha) 대한 계율을 지키도록 촉구하고 있다. 칙령이 녹야원에서의 구체적인 사건을 언급하지 않고 있어 석주가 다른 곳에서 옮겨져 것으로 추정된다. 칙령의 내용은 당시 코삼비에서 일어난 일들과 관련이 있어 그곳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다.

부러진 아쇼카 석주와 기둥머리 사자상 발견 당시의 모습, 1905. 기둥머리 사자상 오른쪽에 초전법륜상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다르마라지카탑

아쇼카 석주에서 남쪽으로 30m 가량 내려오면 대법안탑보다 크고 화려했다고 전하는 다르마라지카탑(Dharmarajika Stupa) 붉은 벽돌로 쌓아 만든 기단부만 남아 있다. 아쇼카왕은 최초에 여덟 곳으로 분배되어 조성된 부처 사리탑 가운데 일곱 곳을 개봉해 다시 84,000 곳으로 재분배하여 탑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르마라지카탑도 그들 가운데 하나로 재분배된 부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아쇼카왕에 의해 세워졌다. 발굴 과정에서 과거에 높이를 올리거나, 정상까지 오를 있도록 방향으로 계단과 함께 길을 만드는 여섯 차례에 걸쳐 증축이 이루어져 왔으며 최초에 직경이 13.49m 조그만 탑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다르마라지카탑은 기단만 남아있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불행하게도 탑은 1794 건축자재를 구하려던 바나라스의 , 라자 체트싱의 재상이었던 자가트 (Jagat Singh) 의해 파괴되고 만다. 비극적인 사건의 과정에서 정상으로부터 9m 지점에서 돌상자에 들어있던 녹색의 대리석 사리함이 발견되지만, 사리함은 갠지스강에 버려졌다. 돌상자는 현재 콜카타 인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다르마라지카탑이 파괴되고 불과 40 후인 1835 1 커닝행이 대법안탑 발굴 착수를 위해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 금할 없다.

이후에 진행된 고고학 발굴 과정에서 탑의 주변 지역에서 뛰어난 개의 조각상이 발견되었다. 하나는 1904~05 발굴 과정에서 독일인 고고학자 외르텔(Friedrich O. Oertel) 의해 발견된 것으로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쿠산왕조(Kushan Dynasty) 시대의 거대한 보살상이다. 발라보살(Bala Bodhisattva)이라 이름 붙여진 보살상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카니시카(Kanishika) 3년에 발라(Bala)라는 이름의 비구가 보시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굽타(Gupta)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법륜인(轉法輪印, Dharmachakra Mudra) 자세의 붓다 좌상이다. 석가모니 붓다상 가운데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언급되기도 하는 뛰어난 조각상임엔 틀립없다. 흔히 사르나트 붓다(Sarnath Buddha)라고도 불린다.

발견 당시 발라보살의 앞과 모습, 위키피디아 ( 번째, 번째); 초전법륜상, 사르나트박물관 ( 번쨰), 조각상 모두 사르나트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대각회에서 새로 건립한 물라간다꾸띠비하라

원래 아쇼카 석주 부근에 있던 물라간다꾸띠비하라의 이름을 그대로 빌린 새로운 물라간다꾸띠비하라(Mulagandha Kuty Vihara) 외국 불교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1931 대법안탑의 동쪽에 건립되었다. 좁고 층고가 높은 건물 위로 뽀족한 첨탑이 하늘을 찌를 모습은 언뜻 보면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멀리서 전체 모습을 들여다 보니, 1층의 사원 건물 지붕에 단순화된 보드가야의 마하보디사원(Mahabodhi Temple, 大菩提寺) 대탑이 올려져 있는 모습이었다. 사원은 대각회(大覺會, Mahabodhi Society) 설립자인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 주도로 설립되었다. 경내에는 그의 동상과 생애를 설명해주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 당시 영국 총독이 안드라프라데시(Andhra Pradesh) 주의 나가르주나콘다(Nāgārjunakonda) 펀잡(Punjab) 탁실라(Taxila)에서 인도고고학조사위원회(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의해 발견된 붓다의 사리를 대각회에 제공했으며, 사리가 현재 물라간다꾸띠비하라에 보관되어 있다.

대각회에서 세운 현대의 물라간다꾸띠비하라

사원 건물의 입구에는 일본에서 기증했다는 커다란 종이 눈길을 끌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자 정면으로 대리석 좌대 위에 앉아 설법하는 모습의 황금 붓다상이 보였다. 사원에서 유명한 것이 입구 부근의 프레스코 벽에 하나 있다. 일본의 미술가 코세츠 노스(Kosetsu Nosu) 붓다의 일생에서 주요 장면들을 그렸다는 벽화는 1936 완성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프레스코 벽화의 색감과 필치가 아주 뛰어났으며, 사원 내부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관광객과 순례객들의 시선이 모두 벽화로 향하고 있었다. 사원 정원에 있는 보리수는 아쇼카왕 치세에 보드가야의 보리수 가지를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대사원에 옮겨 심어 키운 보리수나무에서 다시 옮겨 심은 것이다.

사르나트고고학박물관

사원을 나서 초전법륜지 입구 맞은편에 있는 사르나트고고학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붓다상 가운데 하나인 초전법륜상과 아쇼카 석주의 기둥머리 사자상 사르나트의 초전법륜지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많은 유물들이 전시 보관되어 있다. 박물관 안으로 일체의 촬영장비 반입이 금지되어 있어 카메라는 들고 들어갈 없다. 우리 일행에게는 특별히 카메라 휴대가 허용되었지만 박물관 내부의 조명이 어둡고 유리의 어른거림 등으로 특별한 장비들이 없는 나에게는 어차피 좋은 사진을 찍기는 어려웠다. 박물관 내부에서는 유물들이 별다른 보호장치 없이 사람들의 손길이 닿을 있을 정도로 엉성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기둥머리 사자상마저 유리벽 하나 없이 입구 로비 가운데 덩그러니 전시되어 있는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관람객들 가운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불상을 만지는 모습을 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박물관을 나섰다.

차우칸디대탑(불영탑)

사라나트고고학박물관 입구에서 남쪽으로 600m 내려오면 다섯 도반이 처음 붓다를 만난 자리에 차우칸디대탑(Chaukhandi Stupa), 일명 불영탑(佛迎塔) 있다. 현장법사도 언급하고 있는 탑은 원래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기념해 굽타시대에 테라스식 사원으로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35년과 1904~05년에 걸쳐 실시된 차례의 고고학 발굴에서 진흙더미에 파묻혀 있던 28.35m 높이의 탑이 빛을 보게 됐다. 변의 길이가 3.66m 정사각형의 테라스가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드는 형태의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테라스는 구조를 강화하기 위해 많은 십자형 벽과 함께 내외부의 벽으로 지탱되고 있다. 또한 테라스의 외부 벽은 벽기둥으로 구분되고 있는 일련의 감실로 장식되어 있다. 현장에서 발견된 전법륜인(轉法輪印, Dharmachakra Pravarian mudra) 자세의 붓다상과 사자상은 뛰어난 고전적 굽타 예술의 수준을 보여준다.

차우칸디대탑의 모습

불영탑의 거대한 벽돌탑 꼭대기에는 팔각탑이 설치되어 있는데, 북쪽 출입구 위에 아랍어로 새겨진 석판명판에 의하면, 1588 무굴제국(Mughal Empire) 위대한 황제 악바르(Akbar) 아버지인 후마윤(Humayun) 사르나트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무굴제국의 재무장관이었던 토다르 (Todar Mal) 아들이 건립한 것이다.

사르나트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바라나시의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차량에 올랐다. 우리를 실은 차는 다시 혼잡한 도로를 헤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차창 밖의 풍경을 물끄러미 내다보는데 머리 속에 불현듯이 사르나트에서 목격했던 장면들이 스쳐갔다. 대법안탑의 벽돌 사이에 향을 꽂고 불을 붙이는 사람들, 대법안탑의 외벽에 금박지로 금을 입히는 사람들, 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불상의 발가락을 쓰다듬는 사람들. 바로 근처에는 유물과 유적들에 이러한 행위를 삼가 달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