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루무니야 사원, 불심과 예술의 만남
기원전 4세기부터 서기 11세기 초까지 1,400년 동안 싱할라왕국의 수도였으며 오랜 기간 상좌부 불교의 중심지였던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도착하여 우리 일행이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이수루무니야(Isurumuniya) 사원이었다. 티사호(Tissa Wewa) 제방 동쪽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는 이 사원은 푸르게 우거진 숲, 바위, 연못 등이 어우러진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이수루무니야 사원 전경
일군(一群)의 화강암 바위에 지어진 비교적 아담한 모습의 이 사원은 아주 오래된 조각 장식 등으로 유명하지만, 원래 마힌다(Mahinda) 장로가 아누라다푸라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데바남피야티사(Devānaṃpiya Tissa, BC247-207) 왕이 세운 아주 오래된 사찰이다. 당시 지체가 높은 상위 카스트 집안에서 500명의 젊은이들이 마힌다 장로로부터 계를 받았고, 이들이 머물 수 있도록 왕이 마련해준 곳이라고 한다. 승가에 들어온 500명의 귀족(issaradārakā)과 연관되어 이 사원은 처음에 이사라마사마나(Issarasamana) 사원으로 불렸었다.
아누라다푸라 불교사찰단지 지도
고대 아누라다푸라성에서 남쪽으로 약 2.5㎞ 떨어진 곳에 위치한 현재의 이수루무니야 사원은 500명이 머무르며 수행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좁아 보였다. 현재의 이수루무니야 사원은 적어도 고대의 이수루무니야 사원의 일부이거나 잘못 확인된 곳일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사실 과거에는 이수루무니야 사원의 영역이 남쪽으로 7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베사기리(Vessagiri) 사원 근처까지 뻗어있어 두 사원이 인접해 있었던 것으로 여겨졌었다. 마하밤사(mahāvaṃsa, 大史)에는 기원전 3세기에 마힌다가 도착할 당시 이사라마사마나와 베사기리가 별도의 사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베사기리 사원 경내에서 이사라마사마나라는 이름의 고대 싱할라어 표현인 이시라마나(Isiramana)라는 명문(銘文)이 발견되면서 고대 이사라마사마나 사원의 영역이 현대의 베사기리 사원 경내까지 뻗어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학자들의 연구로 초기 명문에 나타난 이수라메누(Isuramenu) 사원과 현대의 이수루무니야 사원은 이사라마사마나 사원과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고대의 이수라무니야 사원은 현대의 베사기리 사원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베사기리 사원
마하밤사에 의하면, 이사라마사마나 사원과 베사기리 사원이 별도로 티사왕이 건립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고, 마힌다가 이수루무니야에서 고위층 자녀 500명에게 계를 부여하고 베사기리 사원으로 와 또 다른 500명의 평민에게 계를 주었다고 했기 때문에 뭔가 명확하게 맞아 떨어지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매끄럽게 설명되기에는 2300년 세월의 간극이 너무나 컸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고대의 베사기리 사원도 아직 발견되지 못하고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는 베사기리 사원이 후대에 이수루무니야 사원에 합쳐졌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른쪽 계단을 올라가면 나타나는 조그만 건물이 舊법당이고, 왼쪽에 좀더 큰 건물이 新법당이다.
현대의 이수루무니야 사원에서 오늘날 舊법당이라고 알려진 곳은 바위 동굴 속에 있다. 법당 입구에 정교하게 조각된 돌기둥과 탑은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법당 안에는 붓다의 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 불상에 티사왕이 바리 유물을 안치했다는 말이 전한다. 석굴은 입구에 1983년 한국의 조계종에서 선물했다는 유리보호막이 막고 있어 접근도 어려울 뿐 아니라 관람도 용이하지 않았다. 이 법당에 이르는 계단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처음과 중간 단계에 정교하게 조각된 수호신석이 좌우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수호신석 앞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반달 모양의 문스톤(Moonstone)이 놓여져 있었다. 이곳의 수호신석과 문스톤은 상당히 마모된 상태였다.
舊법당은 뒤편 바위에 나있는 굴 속에 조성되어 있고 입구 부분에만 조그만 건물이 만들어져 있다.
석굴 안의 舊법당은 유리로 막혀 있었고, 빛 때문인지 안을 들여다 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舊법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수호신석과 문스톤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오랜 세월을 견딘 듯 많이 마모된 모습이었다.
계단을 내려와 왼쪽으로 돌아서면 작은 수영장 같은 사각형의 연못이 있다. 연못의 서쪽 면에는 바위의 아래 부분이 물을 막고 있는 벽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연못의 수면에는 바위에 조각된 코끼리들이 물장구를 치고 있는 모습이 비춰지고 있어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바위 위에 조각된 코끼리는 정면으로 머리 부분만 표현된 것도 있고 비스듬히 몸체의 일부까지 표현된 것도 있었다. 표현된 기법으로 보아 왼쪽과 오른쪽 바위의 코끼리들은 서로 다른 시기에 다른 조각가들의 작품으로 보였다.
연못 서쪽의 검은색 화강암 바위 표면에는 물을 찾은 코끼리들이 조각되어 있다.
왼쪽 바위 표면에서 조금 위쪽으로 올라가면 舊법당 옆에 한 남자와 말이 조각되어 있다. 이 남자는 위대한 왕의 자세로 앉아 있는데, 왼팔은 수직으로 늘어져서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있으며 오른팔은 무릎을 접어 곧추세운 다리 위에 올려져 있다. 먼 곳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은 강한 인상을 남긴다. 장식이 귀에서 아래로 내려뜨려져 팔을 덮고 있다. 상체는 맨몸인 체로 간단한 하의만 입고 있다. 몸과 자세에서 전체적으로 품위가 느껴졌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이 부조상의 인물은 왕 또는 장군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 인물상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들도 있다. 前 고고학국 국장이었던 세나라트 파라나비타나(Senarath Paranavitana) 교수는 이 인물이 비의 신, 빠르잔니야(Parjanya) 혹은 바루나(Varuna)이며 말은 불의 신, 아그니(Agni)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의 해석에 의미하면, 앉아 있는 인물, 빠르잔니야와 고삐에 매어져 있는 말은 장마비의 전령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기우제가 거행됐을 거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부처님의 치아사리(佛齒, the Tooth Relic)가 최초에는 이곳에 보관되었었다고 주장했다.
남자와 말(Man and the Horse)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에는 믿음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부처님의 치아사리는 처음에 메가기리(Meghagiri) 사원에 보관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메가기리 시원이 현재의 이수루무니야 사원이라는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듯하다. 또한 이곳에서 기우제가 거행되었다는 증거 또한 없는 것으로 보인다.
舊법당 계단에서 남쪽으로 가까운 거리에 돌로 지은 新법당이 자리하고 있다. 법당 안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한 쪽에 길게 누워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와불상이다. 이 지역의 스님들이 입는 붉은 가사(袈裟)를 입고 있어서인지 더욱 더 눈길을 끌었다. 와불상 앞에 설치된 제단에는 신자들이 바쳤는지 꽃만 몇 송이 쓸쓸히 놓여져 있었다.
新법당의 모습
新법당 안의 와불상
그러나 이곳에서 정작 나의 발길을 잡은 것은 법당 제일 안쪽에 설치된 한 무리의 인물상이었다. 우리 일행을 안내하던 싱이 마힌다의 상이라고 알려줬다. 각종 벽화와 장식으로 처리된 와불상이 있는 공간은 돌로 지어진 법당 건물 부분인데 반해, 마힌다의 상이 있는 안쪽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천연 동굴 부분이었다. 주변에는 보수작업을 하는 중이었는지 작업대가 어지러이 설치되어 있었다. 스리랑카로 건너올 때 동행했다고 알려진 4명의 비구와 2명의 사미를 동행하고 수행중인 마힌다와 신하를 거느린 티사왕이 처음 만나는 장면일 수도 있고, 동굴에서 수행 중인 마힌다에게 설법을 청하기 위해 티사왕이 찾아온 장면을 연출한 것 같기도 했다.
新법당의 안쪽 구석에서 발견한 마힌다 장로의 모습. 깨끗하게 단청된 와불상과는 달리 페인트가 많이 벗겨져 있어 그리 대접을 받지 못하고 계신 듯하여 마음이 아팠다.
마힌다 장로가 그와 동행한 4명의 비구 그리고 2명의 사미와 함께 수행하고 있는 모습.
티사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수행중인 마힌다를 찾아와 예를 올리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新법당을 나와 남쪽으로 몇 발자국 움직이면 자그마한 건물의 이수루무니야 고고학박물관이 나타난다. 이곳에서는 5~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뛰어난 석제조각들을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의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작품은 6세기 굽타 양식의 ‘이수루무니야의 연인들(the Lovers of Isurumuniya)’이다. 석판에는 앉아 있는 남자의 왼쪽 무릎에 앉아 있는 풍만한 육체의 여성이 부끄러운 듯이 다른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 부조(浮彫)로 조각되어 있다. 원래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원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베사기리 사원이 마하비하라에 기부되면서 원래 장소에서 현 위치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이수루무니야의 연인들.
부조 속의 인물은 두투가무누(Dutugamunu, BC 161~BC 137) 왕의 아들 살리야(Saliya) 왕자와 왕자가 사랑했고 왕위를 포기하고 결혼까지 했던 불가촉천민 출신의 아쇼카말라(Ashokamala)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해석들도 있다. 라마야나(Ramayana)에서 마왕 라와나(Ravana)이전에 스리랑카를 지배했고 베사기리 사원에 살았다고 전하는 비사문천(毘沙門天, Vaisrawana)-쿠베라(Kuvera, 俱吠羅)와 그의 왕비 쿠니(Kuni)를 묘사한 부조라는 주장도 있다. 또는 사랑하는 이를 안고 있는 장군이라거나, 제불(諸佛)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 Man̄juśrī)과 시자(侍者)의 모습이라는 설까지 실로 다양하다.
연인들에서 반대편 벽에는 또 하나 관심을 끄는 부조상이 하나 있었다. ‘왕의 가족(King’s Family)’이란 작품이 화강암 석판에 부조로 조각되어 있었다. 석판에는 모두 다섯 명의 인물이 조각되어 있는데, 중앙에서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가슴에 푸나눌라를 두르고 있는 인물이 두투가무누왕이라고 한다. 마하밤사에는 왕과 살리야왕자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왕이 이들 왕자부부를 마침내 받아들인 것으로 전한다. 이 왕실가족 부조상에는 두투가무누왕과 왕비, 살리야왕자와 부인 아쇼카말라가 조각되어 있는데, 천한 신분의 아쇼카말라는 여기서조차도 살리야와 멀찍이 떨어져 한쪽 구석에 초라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어 안쓰러움을 불러 일으켰다.
왕과 가족들.
물론 이 부조상에 대한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 중앙의 인물은 신들만이 쓰는 관을 쓰고 있고, 신이나 보살들의 조각상에서나 볼 수 있는 성스런 실을 걸치고 있기 때문에 왕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왕비로 보이는 인물 역시 중앙의 남성과 유사한 관을 쓰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모두 고려할 때, 이 부조상은 도솔천(兜率天, Tusita)에 있는 미륵보살(彌勒菩薩, Maitreya)을 묘사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왕이나 지체 높은 인물이 사용했을 법한 돌의자가 눈길을 끌었다.
박물관을 나와 新법당을 돌아가면 바위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바위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정상에 오르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자그마한 와불상과 불족적이다. 두 개의 거대한 바위가 몸을 맞대고 있는데 정상에서 축대와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좁은 계단을 따라 좀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아누라다푸라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망루가 나타난다. 이곳은 시원하게 펼쳐진 사원 밖 풍경을 선사했다. 가까이로는 바로 사원 바깥 연못에 핀 연꽃이, 멀리로는 푸른 숲과 숲 사이사이에 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경내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하얀탑도 보이는데 조용한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바위의 정상으로 오르기 전에 만나는 계단 입구.
바위의 정상에서 만나는 와불상과 불족적.
바위 위에서 바라다 보는 아누라다푸라의 전경
바위에서 내려와 新법당과는 반대쪽으로 돌아나오면 평지보다 조금 높은 축대 위에 상당히 큰 보리수 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 기원전 3세기에 아쇼카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가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할 당시 그의 누이 비구니 상가미타(Saṅghamittā)가 전달했다는 원래 보드가야의 보리수 나무 가지가 이곳 아누라다푸라의 대사원에 심어졌고 첫 열매와 씨앗으로부터 여덟 개의 묘목이 자라났다고 한다. 이 묘목들은 스리랑카 각지의 성스러운 여덟 곳에 옮겨 심어졌는데, 이사라마사마나 사원도 그 여덟 곳 가운데 한 곳이었다. 이곳의 보리수 나무가 최초의 여덟 개 묘목 가운데 하나였다면 수령이 적어도 2000년이 넘었을 텐데, 나무의 상태는 최초로 스리랑카 땅에 옮겨 심어진 스리마하 보리수 나무와 비교하면 상당히 좋아 보였다.
이수루무니야의 보리수 나무.
아누라다푸라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 이수루무니야 사원을 찾는다. 이곳에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만한 것들도 여럿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원을 둘러보고 이곳을 떠나며 출구를 나서는 발걸음이 개운치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여전히 많은 의문점들이 풀리지 않는 체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사원을 나서면서 만나는 연꽃 연못을 바라보면서야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으로 느꼈다.
이수루무니야 입구 바깥쪽에 있는 연꽃 연못.
'불교성지 여행 > 스리랑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누라다푸라의 스리마하 보리수 사원 (0) | 2019.03.1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