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마하 보리수 사원,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보리수 나무

우리 일행이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향하는 내내 나의 머리 속에서는 아누라다푸라의 대사원 있다는 보리수 나무가 떠나질 않았다. 2600 고타마 싯다르타는 북인도 가야 인근에 있는 우루벨라(Uruvela, 현대 Bodh Gaya) 마을의 숲이 울창한 팔구(Phalgu, 고대 Nairanjana) 강변에 당도하여 나중에 보리수(菩提樹, Bodhi Tree) 알려지게 피팔라(Pipala) 나무 아래에서 마침내 대각(大覺) 이루고 깨달은 ’, , 붓다(Buddha) 되었다. 보드가야의 원래 보리수 나무는 훼손되었고, 기원전 3세기에 아쇼카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할 당시 그의 누이 비구니 상가미타(Saghamittā) 전달했다는 원래 보드가야의 보리수 나무 가지가 이곳 아누라다푸라의 대사원에 심어졌고, 나무의 가지를 다시 보드가야의 원래 장소에 옮겨 심은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드가야에서 보게 되는 보리수 나무라고 한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아누라다푸라의 보리수 나무를 찾아 보고 싶었다.

 

마하비하라(Mahāvihāra, 大寺) 주변 지역 지도

보리수 나뭇가지의 이운(移運)

아쇼카(Ashoka, BC268~232) 왕의 장녀인 상가미타는 오빠인 마힌다와 함께 불교에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었으며, 데바남피야티사(Devānapiya Tissa, BC247-207) 왕의 요청으로 아눌라(Anulā) 공주와 궁중 여인들에게 수계를 내리기 위해 32세의 나이에 다른 무리의 비구니들과 스리랑카로 향했다. 도사(島史, Dīpavasa)에는 동행한 비구니 숫자가 서로 다르게 언급되어 있으나, 상가미타 자신을 포함하여 대략 11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승가의 규율에 따라 여성에게 계를 내리는 것은 오직 붓다와 비구니 승단에게만 허락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스리마하 보리수 사원의 북쪽 출입구 가림벽에 새겨진 상가미타의 모습.

보드가야 보리수 나무에서 떼어낸 남쪽 가지 하나를 가지고 상가미타는 보드가야에서 파탈리푸트라(Pāaliputra) 거쳐 벵갈의 타말리티(Tāmalittī) 왔다. 이곳에서 황금 항아리에 담은 보리수 나무 가지와 함께 배를 타고 상가미타와 일행은 스리랑카 북쪽에 있는 잠부콜라(Jambukola) 당도했다. 데바남피야티사왕 자신이 깊은 신심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심으로 어린 보리수 나뭇가지를 맞이하고, 성대한 행사와 함께 이를 마하메가바나(Mahāmēghavana) 심었다. 심은 나무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2,300 동안 같은 장소를 지키고 있었으며 성스런 보리수 나무(Jaya Sri Maha Bodhi Tree) 불리며 많은 사람들의 경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스리마하 보리수 사원을 나와 북쪽으로 걷다 보면 바로 로하파사다의 맞은 편에서 구조물을 만난다. 티사왕이 보리수 나뭇가지를 가지고 스리랑카 해안에 당도한 상가미타를 맞이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나, 전승되어 내려오는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있는 같다.

티사왕은 파도가 밀려드는 해안으로 걸어 들어가 속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머리 위로 뻗어 공손히 성스러운 보리수 나뭇가지를 맞이했다고 전한다. 솔리아스 멘디스(Solias Mendis) 켈라니야(Kelaniya) 사원 벽화

상가미타는 또한 도시에 비구니 사원을 만들었다. 아눌라 공주가 상가미타로부터 비구니의 계를 받아 스리랑카의 번째 비구니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명의 여성들이 동시에 수계를 받아 상가미타의 지도 아래 비구니 승단이 창립되었다. 상가미타는 왕족이나 신분이 높은 여인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계를 주었다. 그래서 모든 계층의 여인들이 승단에 입문하게 되었다. 상가미타는 여성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이렇게 형성된 비구니 승단은 크게 번성하였으며, 버마, 중국, 태국 등지로 번져나갔다.

 

현재 북쪽 출입구의 모습

북쪽 출입구

스리마하 보리수 사원은 북쪽 출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갈 있다. 남녀 출입구가 좌우로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지만 별다른 절차 없이 들어갈 있었다. 특별히 경계를 강화해야 때가 되면 몸이나 소지품 검사 등을 하기 위해 별로도 마련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사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스리랑카의 여느 사원에서나처럼 예를 갖추기 위해 바깥에서 신발을 벗어야 했다. 경내 곳곳을 돌아다니는 내내 발바닥에 모래가 느껴졌으나, 스리랑카 북부 해안에 도착한 성스러운 보리수 나뭇가지와 상가미타 일행을 하얀 모래가 뿌려진 길을 따라 아누다라푸라로 모셔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최고의 예를 표하는 방법일 것이란 짐작만 뿐이다. 사실 경내는 개의 테라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높은 테라스에 성스런 보리수 나무가 심어져 있고 가장 낮은 곳은 모래 테라스(Sand Terrace)라고 불린다고 한다.

 

북쪽 출입구의 가림벽 지나면 바로 원래의 북쪽 출입구를 만난다 (왼쪽); 원래 북쪽 출입구의 안쪽 문스톤, 수호신석, 난간석의 모습 (오른쪽).

 

북쪽 출입구 바깥쪽 문스톤(moonstone). 북쪽 출입구에는 안쪽과 바깥쪽에 각각 문스톤이 있는데 바깥쪽 문스톤은 아누라다푸라 시대의 3 문스톤 가운데 하나이다.

 

북쪽 출입구의 바깥쪽 문스톤, 수호신석 그리고 난간석은 8세기의 뛰어난 기술 수준을 보여준다.

입구에 설치된 하얀색의 가림벽에는 성스러운 어린 보리수 가지를 땅에 가져온 상가미타가 조각되어 있었으나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가림벽을 지나면 바로 원래 북쪽 출입구로 사용되어 왔던 석재 문틀과 철재 문이 낮은 계단 위에 나타난다.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점까지 출입구는 북쪽, 남쪽, 그리고 서쪽에 각각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곳 북쪽 출입구를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다. 출입구를 통과해 정면을 바라보면 지금 서있는 바닥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사방이 순백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스리마하 보리수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성스러운 나무는 안전을 위해, 특히 야생 코끼리 위협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지상에서 6.4m 높이에 조성된 19m x 17m 넓이의 장방형 축대 위에 심어져 있다.

 

1891 스리마하 보리수 나무와 북쪽 계단의 모습.

 

북쪽 출입구를 통과하면 정면으로 공양물을 바치는 제단이 있는 번째 테라스로 올라가는 북쪽 출입구 계단과 위로 스리마하 보리수 나무가 보인다.

 

번째 테라스로 올라가는 북쪽 출입구의 문수톤과 수호신석도 정교한 기술 수준을 보여준다.

스리마하 보리수 나무

상가미타가 가져온 보리수는 사원의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데 주변에도 많은 보리수 나무들이 울창하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같은 종류의 보리수 나무 그루가 폭풍우와 원숭이나 박쥐 같은 동물로부터 스리마하 보리수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구역에 심어졌다고 한다. 티사왕의 재위 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벽돌로 만들어진 붓다상이 스리마하 보리수 나무의 위치를 확인해 뿐이다.

 

성스런 보리수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흰색의 높은 담장이 설치되었고 이후에 위로 황금색 담장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성스런 보리수 나뭇가지들은 여러 개의 황금 받침대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

축대 둘레에는 높은 흰색 담장이 둘러져 있어 성스러운 나무에 가까이 다가가거나 직접 만져볼 없었다. 축대 위에는 언뜻 보아 보리수 나무 그루가 있는 듯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옆으로 크게 뻗어있는 가지가 황금 받침대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 2,300 상가미타가 땅에 가져온 성스러운 보리수 나무이고 위로 곧게 뻗은 나무는 후대에 것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지탱해온 몸체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받침대에 의지하게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붓다로 여겨지는 성스러운 보리수 나무가 끝없는 자비심으로 민중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이 축대 밖으로 뻗어 나온 나뭇가지에 나타난 것인지 궁금했다.

성스러운 보리수 나무는 심어진 이력이 알려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일컬어진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을 등지고 앉았던 바로 보리수 나무의 남쪽 가지를 옮겨다 심은 것이므로 성도(成道) 순간에 붓다의 손길이 닿았을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일주일 동안 아래에서 선정(禪定) 들었으므로 일주일을 지켜본 유일한 존재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세월 동안 스리랑카 불자들의 경배를 받으며 오랜 역사를 함께 해오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신앙 중심에 자리해왔다. 사원을 찾은 날도 하얀 옷을 차려 입은 많은 스리랑카 불자들이 꽃과 음식을 축대 아래 마련된 제단 위에 바친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는 모습을 있었다. 또한 역대 왕가에서도 물심양면으로 최선을 다해 보살펴왔다.

 

아쇼카왕이 보리수 나뭇가지와 함께 보냈다는 보리수 보호를 소임으로 하는 카스트에 속하는 이들은 24시간 성스런 보리수 나무 곁을 지킨다.

 

남인도 왕국의 잦은 침입으로 수도는 폴론나루와(Poonnāruwa) 이전되고 국왕과 신하들은 모두 몸을 피신했지만 이들은 이곳에 남아 목숨을 걸고 성스런 보리수 나무를 지켜냈다고 한다.

성스러운 보리수 나무를 지금까지 지켜올 있었던 이면에는 숨은 공로자들이 있었다. 아쇼카왕은 상가미타와 어린 보리수 나뭇가지를 스리랑카로 보내면서 다양한 직업의 카스트 사람들을 함께 보냈는데 중에는 보리수 나무를 보호하고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들은 당시부터 대대손손 같은 카스트를 유지하면서 24시간 자리를 비우지 않고 곁을 지키며 성스런 보리수 나무를 보살펴왔다고 한다. 지금도 축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성스러운 보리수 나무 곁을 지키며 공양물을 보리수 나무에 바치려는 신도들을 위해 이를 날라다 주는 이들의 모습을 있었다.

성대한 의식 속에서 이곳에 심어진 성스런 보리수 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성공적으로 열매와 씨앗을 맺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여덟 개의 묘목이 자라났고 묘목들은 스리랑카 각지의 성스러운 여덟 곳에 옮겨 심어졌다. 불교가 스리랑카 국민의 가슴 속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며 전국으로 퍼져나갔듯 이후 스리랑카 전국의 수많은 사원으로 성스러운 보리수 나무가 옮겨 심어졌다. 지금은 스리랑카의 어느 사원을 가도 제대로 사원이라면 불상 탑과 함께 보리수 나무를 있다.

 

이수루무니야(Isurumuniya) 사원의 보리수 나무.

 

담불라 석굴 사원(Dambulla Cave Temple) 보리수 나무.

이러한 전국민의 보호와 관심에도 불구하고 성스러운 보리수 나무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07년과 1911 폭풍우에 각각 하나의 가지가 부러지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리고 1929 정신병 환자가 성스러운 보리수 나무를 잘라버리려 시도가 있었으나 나뭇가지 하나를 자르고 제지 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후 내전 중이던 1985, 타밀반군의 공격으로 경내 가장 높은 축대 위에서 100 이상의 신자들이 사살당하는 불상사가 있었으나 성스런 보리수 나무는 해를 입지 않았다.

 

투파라마 스투파의 동쪽에 있는 불족적 스투파에서 다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최근에 복원된 작은 스투파로 비구니 상가미타의 다비식 재가 모셔진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상가미타는 티사왕이 죽고 뒤를 이어 즉위한 우티야(Uttiya) 9년에 59세의 나이로 그녀가 머물던 아누라다푸라의 하타로카 우파시카라마야(Hatthaloka Upasikaramaya) 사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자신이 생전에 원하던 투파라마(Thūpārāma) 사원 동쪽의 시타살라(Cittasālā) 근처에서 다비되었으며 그녀의 위에 탑이 세워졌다고 한다.

스리마하 보리수 나무는 루반벨리세야(Ruwanveli Seya) 대탑과 더불어 마하비하라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며, 여전히 많은 불자와 관광객의 발길을 끄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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